죽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죄(4) |
분노(忿怒, Anger) |
1999년 4월의 어느 날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시의 교외에서 총기 사건이 있었다.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두 학생이 총을 난사하여 12명의 학생과 교사 1명이 죽고 26명의 학생이 다친 것이다. 이 두 학생은 평소 흑인들을 싫어한데다가 으스대던 운동부 친구들에 대한 분노를 참지 못해 마구잡이로 총을 난사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많은 무고한 생명을 앗아갔다. 분노의 처참한 잔해인 셈이다. 솔로문 쉽멜은 ‘분노는 폭력, 아동학대, 살인, 강간, 그리고 인종간 국가간 폭력과 갈등에 있어 핵심 역할을 한다’고 했다. 분노가 이처럼 끔직한 죄의 주원인이 되기 때문에 기독교회는 이것을 일곱 대죄의 하나로 취급해 왔다.
분노는 끔찍한 결과를 낳지만 일곱 대죄 가운데 가장 일상적인 죄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어디서나 분노를 접하며 살고 분을 내면서 산다. 거리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신문과 방송에서 늘 분노의 함성과 불끈 쥔 주먹을 듣고 본다. 분노를 통제하지 못하고 밖으로 분출하면, 그 결과는 심각하다. 거의 대부분 이것은 파괴적이고 처참한 결과로 귀결된다. 반대로 분노가 생길 때 이것을 제대로 해소하지 못한 채 너무 억압하면 오히려 다른 병의 원인으로 작용하여 건강을 해치게 된다. 한국인의 독특한 병인 ‘화병’은 분노가 해소되지 못하고 내면에 쌓이므로 생기는 것이다. 최근 현대인에게 마음 다스리는 방법으로 참선이 각광을 받고 있다. 그 궁극적인 목표는 내면에 자리 잡은 독의 뿌리인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정관하고 제거함으로 자기 자신을 바꾸는 것이다. 성경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권고한다.(엡 4:26) 미움과 싸움의 쓴 뿌리인 분노를 이해하고 성격과 결과를 살피는 것이 독소를 제거하기 위해 필요하다.
감정인가 죄인가?
분노가 화병이나 인간관계 파괴와 같이 파괴적 속성이 크지만, 분노 그 자체는 악이라 할 수 없다. 분노는 자신의 의지나 감정을 거스르고 상하게 하는 것들에 대응하여 일어나는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분노는 감정에 그치지 않고 미움으로 나아간다. 그 원인을 제공한 자에게 해를 입히는 것으로 발전한다.
철학자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에는 동물적 부분과 이성적 부분이 있는데, 분노는 동물적 부문에 속하는 것으로 육체적 욕구에 지배되기에 철저히 이성의 컨트롤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노는 기본적으로 심판하려는 정서와 관련된 것으로 얼마든지 이성과 맞춰갈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분노를 ‘고통을 야기하는 상황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런 반응’으로 보면서 이것은 육체와 이성의 부분에 동시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분노는 중용을 지키면 일종의 덕이 된다 했다. 그래서 덕스러운 사람이란 어떤 상황에서는 마땅히 분노의 감정을 품을 수 있는 자라고 주장했다. 물론 그 대상과 동기는 올바른 것이라야 한다.1) 이러한 생각은 아퀴나스에게로 연결되어져서 신학사상으로 발전된다.
현대 사회에서 심리학자들은 분노를 지극히 자연스런 인간적 정서로 이해한다. 그러면서 점점 이성과의 관계에서 그것을 이해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들은 분노가 주로 자아가 손상되었을 때 일어나는 것으로 보고, 때로는 통제되고 때로는 치유되어야 할 대상으로 분노를 취급한다. 그러면 기독교회는 어떠한가?
기독교회는 분노를 주로 죄로 이해해 왔지만, 분노 그 자체를 악한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 어거스틴(354-430)은 분노를 ‘잘못된 것에 형벌을 가하려는 심판(judgement)’과 관련시켜 이해했다. 아퀴나스도 분노를 ‘정당한 보복을 통해 대상을 벌하려는 욕구’라고 정의했다. 이처럼 심판이라는 개념에는 정의와 아울러 징계, 보응, 앙갚음 같은 가치들이 깔려있다. 그런데 이성적 활동에 따른 합리적이고 정당한 보복의 차원에서 심판이 이루어지는 것은 사회의 질서와 정의를 세우기 위해 불가피한 것이나, 개인적인 차원에서 사사로이 남을 재판하고 복수하는 것은 늘 위험한 것이다.
사막 교부 에바그리우스(345-399)는 분노를 ‘영혼을 어둡게 만드는 가장 극렬한 감정’으로 보면서, 분노는 특히 사탄이 촉발하는 악한 사상으로 보았다. 그는 특별히 분노에 대해 ‘기도를 방해하기 위해 사탄이 촉발하는 가장 강력한 적’이라고도 했다.2) 그는 “분노는 우리의 영혼의 눈을 어둡게 하고 기도하는 상태를 망가뜨린다”고 했다. 한편 카시안(360-435)도 ‘수도사들은 감정을 잘 통제함을 익혀야 하는데 그중 마음의 요동을 일으키는 으뜸 되는 분노는 철저히 제거해 버려야 할 것’이라고 가르쳤다.3) 카시안은 그러나 ‘수도사는 스스로의 악한 욕망에 대해서는 분노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기도 했다.
그레고리 대종(540-604)은 성경을 누구보다 깊이 있게 강해했던 수도사답게, 사람이 분노하면 성령이 떠나고, 의가 사라진다고 설명하면서 결국 ‘화를 내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게 된다’고 보았다. 분노란 그 성격상 분쟁(strifes), 과장(swelling of mind), 비난(insults), 야유(clamour), 분개(indignation), 모독(blasphemy)과 같은 악을 주렁주렁 열매로 낳기에, 하나님의 의와는 거리가 먼 감정이라고 했다.4) 그러나 그레고리도 ‘신자가 불의와 악에 대해 분노하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악’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점에서 그는 분노 그 자체를 결코 죄로 본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 역시, ‘때로는 분노가 불의에 대해 일어나는 강력한 정서’라고 말하며, ‘분노에 의해 불의를 바로잡고자 하는 욕구가 일어난다’고 했다. 분노가 이성의 통제만 따른다면 정의를 세우는데 필요한 정서라는 것이다.
분노는 그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잘못된 대상을 향하거나, 혹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과하게 퍼부어질 때 악이 되는 것이라고 본 많은 신학자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5) 교회는 분노를 아주 무거운 죄악으로 취급해 왔다. 쉽게 노하는 자를 “어리석은 자(잠 14:17, 29, 29:11, 전 7:9)”로, 또 분노를 싸움과 다툼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묘사한다.(잠 15:18; 30:33) 무엇보다도 분노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는 것(약 1:19-21)으로 성경은 가르친다. 그래서 어느 사막 교부는 “분노하는 사람은 그가 비록 죽은 자를 살려 낸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고까지 말했다. 그만큼 분노는 철저히 없애야 할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보복하고자 의지
분노는 감정으로 그치지 않고 곧장 미움의 표출과 보복, 구체적으로 해를 가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발전된다. 즉 이 과정에서 인간의 의지가 개입하게 된다. 인간은 화를 낼 때 상대방에게 고통을 주고 해를 가하려는 의도를 갖는다. 어거스틴은 그래서 분노란 ‘보복하고자 하는 욕구’로, 아퀴나스는 ‘대상이 벌을 받기를 원하는 욕구’로 정의한 것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분노에는 대상에 대한 징벌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게 나타나 있다.
아퀴나스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것이 불의한 대상과 제도와 사회를 향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분노는 결코 악이라 할 수 없다. 어거스틴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산상수훈의 “형제에 대해 노하는 자마다” 라는 구절을 해석하면서, 예수님의 그 말씀은 내용적으로 “정당한 이유 없이”(without couse)라는 말이 빠져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즉 이 구절은 형제가 죄가 없는데도 형제에게 분노하는 것을 정죄하는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바는 사람의 죄에 대해서 무조건 화를 내는 것이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이러한 해석에 토마스 아퀴나스도 동일한 입장을 취하였다. 그는 ‘죄와 불의한 제도에 대하여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해서 벌하고자 하는 의지로서의 분노는 결코 죄가 아니라’고 보았다. 반면에, ‘인간을 향해 분노하고, 그 인간에게 고통을 가하려는 의지로서의 분노는 죄가 된다’고 보았다.
자기 중심성, 가상적 피해의식 그리고 교만
분노의 원인에는 외부에서 가해진 고통으로 자신이 상처를 받았다는 피해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존중받지 못하며 무시당하면서 자라난 아이는 자아가 손상을 입게 되고, 커가면서도 그 피해의식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자신이 무시당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피해의식이 내재화되면, 곪은 상처가 되어 분노로 나타나는 것이다. 즉 분노는 자아 손상감이 그 원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피해의식은 때로는 사실이 아닌, 가상적 생각이나 잘못된 판단에서 말미암기도 하다. 정작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았는데도 본인은 그렇게 간주하고, 자기의 권리가 묵살되고 억압되었다고 생각해버리는 것이다. 화를 낼만한 일도 아닌 것에 화를 내는 사람들이 이런 경우이다. 혁명을 부르짖는 소위 해방 운동, 사회 운동 그룹의 사람들에게서 이런 식의 분노를 간혹 볼 수 있다고 한다.6) 이런 의식에 사로잡히면, 상대방의 말과 행동을 지레 짐작하여 엉뚱하게 화를 내게 된다. 이렇게 되면 상호 관계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큰 상처를 주게 된다. 성경에 나오는 가인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가인은 그가 믿음으로 드리지 않아서(히 11:4) 하나님이 그의 제사를 열납하지 않으셨음에도, 아벨의 제사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아벨에게 분노했다. 이처럼 자기 자아가 손상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한편으로는 교만과도 연관될 수 있다.
일찍이 사막 수도사들은 분노하기 잘하는 자들에게는 교만이 자리 잡고 있음을 지적했다. 헨리 나우웬은 분노에는 교만과 자기 의라는 것이 깔려있다고 보았다. 겸손한 자는 자아를 낮추어 생각하기 때문에 자아가 크게 손상되었다고 생각하지도 그래서 쉽게 상처받지도 않는다. 상처받기 잘하고 쉽게 분노하는 것은 그만큼 자기를 높이는 교만과 헛된 영광의 자리에 자아가 앉아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런 자들은 상처를 더 부풀려 생각한다. 자신의 권위, 품위, 견해가 어떻게든 존중되어야 마땅한 것으로 생각하기에, 이것이 방해 받고, 손상 되었을 때 더욱 예민하게 반응하고 싫어하고 그래서 보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생각, 말, 그리고 행동
분노를 느끼게 되면 몸이 벌써 다르게 반응한다. 어거스틴은 분노는 세 단계로 나아간다고 했다. 첫째, 마음에 품는 것, 둘째, 말로 표현하는 것, 그리고 셋째, 가혹한 비판과 비난을 퍼붓는 것이라 했다. 아퀴나스도 분노는 마음에서, 말로, 그리고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고 했다.7)
아퀴나스는 분노는 그 첫 단계로 ‘욕구’로 나타난다고 했다. 사람들은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하면 그 상처를 더 확대하여 마음에 담아놓고 앙갚음을 하려는 생각을 갖기 마련이다.8) 그런데 이 단계에서 그 욕구를 이성으로 잘 통제하고 합리적으로 다스리면 그것은 감정으로 끝날 뿐 죄로 연결되지는 않는다.9) 그런데 이것이 실패하게 되면, 말이나 행동으로 표출하게 된다. 두 번째 단계인 ‘말’은 행동에 비하면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 생각할 수 있으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때로는 말이 행동보다 더 큰 피해와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화가 나면 목소리 톤, 피치, 그리고 빠르기가 달라진다. 상대방은 달라진 말에서 분노를 느끼기 마련이다. 화가 난 상태를 전하는 용어나 때로는 노골적으로 공격하는 단어를 사용하여 상대방에게 분노를 표출하기도 한다. 몸 외부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아물어 가지만 내면에 패인 상처는 시간이 가도 잘 아물지 못한다. 화가 나서 부주의하게 내 뱉은 쓴 말 한마디가 상대방에게는 비수처럼 마음에 박혀 일생동안 따라 다닐 수 있다.
한 수녀가 다음의 일화를 소개했다. 1990년대 초반, 경찰의 감시와 추적을 따돌리고 오랫동안 탈옥수로서 그 이름을 떨쳤던 신창원을 면회 갔을 때, 그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너무 가난해서 육성회비를 제대로 내기 힘들었던 신창원은 초등학교 5학년 어느 날 선생님이 회비를 내지 못한 자신에게 “너 같은 놈은 학교 다닐 필요 없어!” 라는 꾸중을 들었다. 선생님의 이 부주의하게 내뱉은 멸시의 말이 어린아이에게는 세상에 대한 분노의 씨앗이 되어 심겨졌다. 신창원은 “그때 선생님이 단 한 번이라도 칭찬과 격려의 말을 해 주었더라면, 오늘 나 같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화가 나서 한 말은 이미 악의가 담겨있게 마련이라 듣는 이들은 그 예리함에 베이게 된다. 미련한 자는 쉽게 분노하고 그 분노는 미련한 자를 죽이지만(욥 5:2) 그러나 미련한 자가 화가 나서 부주의하게 뱉은 분노는 다른 사람을 죽일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예수님은 형제에게 “라가”라고 욕하는 것은 그 사람을 살인하는 것과 같다고 가르치셨다.
분노의 세 번째 단계는 ‘행동’으로 나타난다.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그에 빠지게 되면, 분노는 종종 그 사람을 불로 삼키고 연기로 질식시킨다. 그는 판단력을 잃고 눈에 보이는 것이 없게 되어, 전후를 따지지 않고 공격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단테의 신곡에서는 지상에서 분노의 죄를 지은 자들이 연옥에서 받고 있는 형벌을 묘사하는데, 그들은 모두 검뿌연 연기가 자욱한 곳에서 살고 있다. 분노의 화염에 휩싸여 제대로 보지 못하고 판단력이 흐려진 채, 이웃에게 분노하여 상처를 준 죄를 범한 자들이 짙은 연기 속에서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숨쉬기도 힘든 상태에서 살아가는 고통을 받는 것이다.
분노,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지 못한다.
광야생활이 38년이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헤매다가 다시 가데스바네아 지역에 머물게 되었다. 그들이 물을 구할 수 없게 되자,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그들과 다투었다.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께 간구하였고 하나님은 물을 반석에서 쏟아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모세는 온 백성을 그 반석 앞에 모아놓고, 끊임없이 불평하고 반역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참고 있던 노를 폭발시켰다. 반석에게 명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반석을 지팡이로 두 번 내리쳤다. 물은 솟았고 백성들은 마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모세의 행동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지 않고(민 20:12) 하나님을 거역한 것(민 20:24)으로 간주했다. 모세는 자기 노를 드러내기 바빠서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지 못했다.
인간의 분노를 통해 때때로 역사는 진전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과 인도하심보다 앞서면 안 되었던 것이다. 자신의 분노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 더 중요한 지도자의 덕목이다.(잠 29:22) “네가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고로” 이 총회를 이끌지 못하리라고 했다.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자보다 뛰어난 자라고 했던 그 모세는 중요한 순간에 자기의 분을 참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거룩을 나타내지 못한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였고, 단 한 번의 실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일을 후계자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하나님의 사람들, 특히 중직을 맡은 자들은, 분을 품더라도 죄를 범해서는 안 된다. 특히 하나님의 일을 섬길 때 더욱 조심해야 할 노릇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분노가 마음 속 내면의 감정으로 억제되도록 해야 한다. 미움의 말과 행동으로 발전되지 않도록 철저히 분노의 감정을 조절해야 한다. 분노의 불이 활활 일어날 때, 그것을 제 때 끌 줄 알아야 한다. 구약성경에서 분노를 의미하는 단어 “하라”는 ‘불’에서 온 말이다. 예수님은 분노하여 형제에게 “라가”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도 “게헨나” 즉 불과 화염 구덩이인 지옥에 떨어지는 것으로 묘사했다.(마 5:22) 야고보도 분노에 차 형제를 저주하는 혀도 불로 묘사하면서 이러한 자도 지옥불에 떨어질 것이라 했다.(약 3:6, 9) 불이 모든 것을 태워 삼켜버리고 그 연기로 질식시켜 버리듯이, 분노도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그를 질식시켜 앞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에바그리우스는 수도사들이 분노에서 비록 자유로울 수는 없더라도, 그것이 자신 안에 계속해서 머무르게 할 것인지 아닌지는 스스로에게 달렸다고 했다. 분노의 발생을 원천적으로 막을 수는 없으나 그것에 사로잡혀 악을 행하지 않도록 싸워야 한다고 했다. 사탄이 분노의 생각을 통해 죄를 짓도록 유혹할 때, 수도사들은 오히려 사탄에게 분노하고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씨름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카시안도 분노는 마음의 요동을 일으키는 으뜸 되는 감정이기에, 이것을 제거하기 위한 씨름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수 갚음은 하나님 몫
그러면 어떻게 이런 분노와 씨름하며 그것을 해소해 나갈 수 있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원수 갚음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다. 억울하고 무고하게 고통을 당하여, 분해서 견딜 수 없는 상태라 하더라도, 고통을 안겨준 자에게 직접 복수하는 일은 내가 해야 할 일이 아니다. 로마서 12장 19절에서 바울은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음을 역설했다. 하나님이 왜 직접 원수를 갚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일까? 그레고리 대종(Gregory the Great)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자’라는 교리에서 그 답을 찾았다.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에게 사람이 직접 응징을 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하나님을 공격하는 것과 방불한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직접 다른 사람에게 복수해 버린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을 인간이 채어 버리는 월권행위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주무시지도 않으며 다스리고 계시는데, 마치 자기가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온 땅에 불의가 활개 칠 것으로 생각하여 직접 해치우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다윗은 그런 점에서 결코 자신을 앞세우지 않았다. 그는 사울에게 원수를 갚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지만 스스로 보복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께 맡겼다.10) 원수를 직접 갚게 되면 당장에는 개운할지 모르나 그것이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창세기에 나오는 라멕은 그의 노래에서 보복의 두려움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찐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창 4:23b-24) 복수는 복수를 부르고 그에 따른 두려움만 더 가중시킬 뿐, 결코 분노의 원인을 해소하지는 못한다.
다윗과 시편기자들은 한결 같이 하나님께 자신의 원수를 처리하여 주실 것을 구하고, 맡기며 살아갔다. “주께 피하는 자를 그 일어나 치는 자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인자를 나타내소서”(시 17:7), “여호와여 일어나 저를 대항하여 넘어뜨리시고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시 17:13) 하나님은 원수를 능히 갚아주시는 분이시다. 그것을 믿는 것이 성경적이다. 그러한 믿음을 재확인하는 것이, 분노와 싸우는 첫걸음이다.
용서하기 그리고 잊어버리기
분노를 극복하는 더 강력한 무기는 ‘용서’이다. 이것은 하나님께 원수 갚는 일을 맡기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든 일이다. 용서를 한다는 것은 분노의 뿌리를 흔들어 빼버리는 근본적이고 혁명적인 일이다. 자고로 사람들은 이웃을 사랑하고 자기 원수들은 미워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3-46)고 가르치셨다. 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라고 기도하라 명하셨다. 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바울은 신자들에게 이렇게 권고한 바 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1-32)
분을 품고 미워하면 증오에 얽매인다. 그러나 용서를 하면, 그것으로부터 자유하게 된다. 용서를 의미하는 헬라어 “아페시스”(aphesis)는 체포상태에서 풀어주는 것(release from captivity)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용서는 그 원 의미처럼 가해자를 자신의 미움에서 풀어줄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미움과 분노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그렇게 되면 모두 다 새 세상과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성경의 인물 요셉의 사건은 대표적인 예이다. 요셉은 쌀을 구하러 애굽에 와서 자신 앞에 머리를 숙이고 있는, 자신을 죽이려 했던 바로 그 형들을 보고 마침내 그들을 용서하면서 그 앞에서 오열했다. 형들에 대한 분노와 원한이 용서의 눈물로 터져 나왔을 때 요셉은 과거의 고통과 분노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형들과 화해하며 미래를 열 수가 있었다. 루이스 스미즈(L. Smedes)는 용서하는 것이 비록 과거에 있었던 사실을 없애주거나 변화시켜주지는 못하지만, 미래는 더 공평하게 바꿔준다고 말했다.11)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성공회 주교이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데스몬드 투투(Desmond Tutu)는 흑인 정권이 들어서고 흑백 차별정책이 폐지된 이후, “용서 없이는 결코 남아공화국의 미래가 없다”고 역설하면서 압박받은 흑인들이 이제는 자기들을 지배하고 때로는 착취해온 백인들을 용서하고, 함께 앞으로 나아갈 것을 주문했다.12) 그가 이것을 주문했을 때, 반대자들도 물론 있었다. 가해자인 백인들이 진정으로 용서를 구하지 않으면 결코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피해자는 기다리지 말고 용서에 적극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가르치는 것이라고 했다. 물론 그 용서의 빛이 상호 모두에게 가득하게 하기 위해서는 가해자가 자기의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으로 화답해야 한다.
용서가 더욱 깊은 곳으로 나아가기 위해, 그가 잊어버려야 할 것을 칼빈은 주문했다. 진정한 용서는 “마음에서 분노와 증오와 복수하고픈 생각을 기꺼이 지워버리며, 우리에게 행해진 악행에 대한 기억조차도 기꺼이 생각 속에 사라지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13) 투투도 이에 화답하면서, ‘용서를 위해서는 역사적 사실을 잊는 것이 아니라, 기억에 박혀 우리에게 해를 가할 위험한 독침들을 빼어 버리는 작업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연 그 정도로 용서가 쉬울까? 어렵지만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십자가의 용서’를 깊이 체험하고 그 용서의 사랑에 깊이 젖어들고 묵상한다면, 이러한 용서에의 길로 자연스레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그 길을 걸어야 할 자이다.
실천적 조언: 한발 비켜나기, 그리고 이유찾기
이제 마지막으로 분노를 극복하기 위한 실제적 방안을 몇 가지 생각해 보고 매듭짓겠다. 틱낫한은 그의 스테디셀러 책 『화』에서, 분노가 솟구쳐 오를 때 분노의 머리를 응시하면서 분노를 다독거리라고 제시한다. 다소 추상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그렇게 황당한 것은 아니다. 이 말의 핵심은 ‘의지적으로 분노에 맞서라’는 말이다. 아무리 분노가 정당하다 하더라도 분노는 분노이기 때문에, 그것이 통제되지 않은 상태로 밖에 표출되면 당사자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피해의 파편이 튈 수 있다. 어리석은 자는 분을 급히 드러낸다.(잠 29:11)는 가르침을 새기면서, 어리석은 자리에 앉지 않도록 분노의 순간에서 한발자국 물러나도록 연습해가야 한다.
둘째로, 분노의 원인을 한번 찬찬히 살펴보는 일이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자주 또 쉽게 화를 낸다. 이런 사람은 자기가 화를 낸 뒤, 분노한 이유가 무엇인지 기록해 놓고 분석하는 작업을 해 나가는 게 좋다. 분석해 보면 비교적 그 이유가 정확하게 정리될 터이니, 원인이 밝혀지면 처방은 바로 내려질 수 있다. 때론 자기중심적인 태도, 잘못된 판단, 또는 과거의 상처 때문에 화를 내기도 한 경험 등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분석된다면 이후에는 화내는 일이 더 줄어들 수 있다. 이것은 화병을 치료하는 의사들이 치료과정에서 환자에게 반드시 요구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끝으로, 화가 났을 경우 이것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대화’를 하면서 상호 노력해야 한다. 분노는 억눌러 놓으면 결국은 곪아 터지게 마련이다. 터지기 전에 기회를 마련하여 그 이유를 소통함으로 답답함을 해소하고 합의점을 찾아 가는 것이다. 그 작업이 편하거나 쉽지는 않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 누구와도 화평을 도모하며 지내야 할 자들이라는 생각을 할 때, 이 작업은 충분히 대가를 치를 가치가 있는 일이라 하겠다.
신원하 l 교수는 연세대 사회학과와 고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칼빈신학교에서 기독교윤리학으로 석사(Th. M.)와 보스톤 대학에서 사회윤리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Ph. D.) 저서로는 『전쟁과 정치』, 『교회가 꼭 대답해야 할 윤리 문제들』, 『가난과 부요의 저편』, 『시대의 분별과 윤리적 선택』 등이 있으며, 지금은 천안에 있는 고신대 신대원 교수이면서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신학위원으로 봉사하고 있다.
글쓴이 / 신원하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