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죄(마지막 회) |
정욕(Lust) |
정욕은 일곱 대죄 가운데 비교적 잘 알려진 죄이다. 전통적으로 ‘부도덕’이라 하면 맨 처음 정욕을 떠올릴 만큼, 정욕은 모든 죄악들 중 대표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오늘날 정욕은 한층 더 대중적인 것이 되었다. 현대인들은 아침에 눈뜨면서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성과 관련된 정보를 접하며 산다. 성은 이제 은밀하고 사적인 영역에서 소통하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대중적 오락이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은 경제, 예술, 문화 등 사회 전 영역에 침투해 있다. 성적 어필이 빠진 상업광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이다. 만약 성이 제거된다면 현대 사회는 ‘경제적 대 공황 상태’에 빠질지도 모른다. 그만큼 성과 정욕은 현 사회를 구성하고 지탱해주는 일종의 미덕이 되어버렸다.
“너 자신을 알라”(know yourself)는 식의 스토익 사상은 오늘날 인기가 없다. 그 대신 “자신을 즐겨라”(Enjoy Yourself)는 에피큐리아니즘은 점점 더 세력을 얻고 있다. 인간의 몸은 도덕과 규범에서 상당 부분 자유롭게 되면서 바야흐로 ‘감각의 해방’을 누리고 있고, 적극적으로는 다른 사람의 몸을 욕망의 대상으로 삼아가고 있다. 그리스 사람들이 여신 ‘비너스’를 숭배한 것과 같이 이 시대는 특히 아름다운 외모와 성적인 몸매를 숭배하고 있다. 발트라우트 포슈(Waltraud Posch)는 『몸 숭배와 광기』라는 책에서 “현대인의 몸 집착 현상은 거의 종교적 광기와 같다”고 말한다. 날씬함과 성적 어필은 곧 능력과 경쟁력, 즉 소위 ‘스펙’으로 등치되는 최근의 문화적 분위기에서, 성적 매력이 없다는 것은 무능하고 태만한 것으로 간주되기까지 한다. 뚱뚱해서 성적 매력이 떨어지는 것은 열등감과 수치감을 넘어 죄책감까지 안겨주는 현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처지를 피하고자 성형과 다이어트, 즉 소위 ‘몸만들기’에 내몰리게 된다. 시대가 만든 미의 기준에서 낙오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 혹은 그 기준에 근접했다는 안도감, 그것을 유지하고 있다는 자신감, 그리고 이런 것들을 통해 얻는 심리적 보상감 등은 현대인의 중요한 지향점들이다. 그리고 그것을 얻는 대가로 엄청난 희생을 치른다. 이것 때문에 많은 여성들이 벌이곤 하는 몸과의 사투는 처절한 지경이다. 이런 분위기는 정욕 앞에 더 관용적인 사회와 문화로의 악순환을 부추길 뿐이다.
이런 문화 가운데 사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자신을 돌아보고, 정욕에서 자신을 보호하며, 건강한 성의 의미와 목적을 바르게 알고 누리면서 살아가야 할 책임이 그들에게 있는 것이다.
육체, 성, 성욕, 그리고 정욕
성적 욕구를 갖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남성이 아름다운 여성을 보고 끌리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성욕은 결혼과 가정을 이루고 자신을 보존하고자 하는 본성임과 동시에, 사회를 존속 유지시키는 장치이기도 하다. 기독교회도 성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요 ‘경건한 후손과 공동체를 위한 것’이라고 가르쳐왔다. 물론 성경에 기록된 성에 대한 무수한 경고, 어거스틴과 같은 교부들의 부정적인 가르침, 사제들이 독신 생활 등은, 기독교가 대체로 성이나 육체적 쾌락을 부정적으로 바라본다고 이해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실상 기독교는 몸의 중요성을 어느 종교보다도 강조해 왔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신 성육신(incarnation), 예수님의 부활, 그리고 천국에서 거룩한 몸으로 부활하게 될 것 등과 같은 교리와 믿음들은 이 사실을 더 확고하게 한다. 육체적 욕망과 그로 말미암는 쾌락은 모두 하나님이 설계하시고 허락하신 선한 것이다. 그러나 비록 음식에 대한 욕구가 생존을 위해 필요하지만 지나치면 문제가 되듯이, 성욕과 성적 쾌락도 마찬가지이다.
정욕(lust)은 지나치게 되기 쉽고 통제되기 힘든 성욕이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한 성적 쾌락에 대한 바람보다 자기 육체의 쾌락을 위해 상대의 육체를 탐하는 것이다. 정욕은 인간의 타락과 죄로 말미암은 현상이다. 윤리학자 라인홀드 니버(Rdinhold Niebuhr)는 일찍이 ‘죄는 본질적으로 자기중심성(self-centeredness)을 지닌다’고 했는데, 정욕도 다른 사람의 몸을 자기 쾌락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죄이다. 구약성경에는 정욕과 관련된 대표적인 두 사람이 소개된다. 보디발의 아내와 압살롬이다. 그들은 준수하게 생긴 요셉과, 빼어난 용모를 지닌 이복누이 다말에 대한 욕정을 억제할 수 없었고, 끊임없이 매달리고 갖은 방법을 다하여 이들을 차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육정을 채우는 것 이상의 어떠한 것도 없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정욕은 무절제한 성적 욕망”이라고 칭했는데, 이것은 정욕이 지닌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 성격은 보디발의 아내와, 압살롬의 경우를 통해서도 유추할 수 있다. 사람의 감정은 의지와 이성의 통제와 안내를 받게 마련인데, 정욕은 성적 욕구가 제대로 통제되지 않는 것이다.
정욕은 인간의 육체가 약하기 때문에, 즉 육체적 욕망을 통제하는 것이 어려워 발생하는 것이기에, 교만, 시기, 탐욕 등과는 달리 죄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이 있어왔다. 어느 정도 동정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욕은 결코 의지와 무관하게 발생하는 것만은 아니다. 간음의 경우는 적극적인 의지에 의해 동의되고 결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도 이를 뒷받침해준다. 예수님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마음에 간음한 것이라고 했다.(마 5:28) 호색과 정욕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 자신의 욕망을 자극하려는 의도로 여자를 바라보는 자를 정죄한 것이다. 이 때 이미 의지가 개입되어 있는 것이기에, 행동을 했든 아니든 이미 악이라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육체의 약함으로 일어났다 하더라도, 혹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가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는 행동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과 상대방 및 그와 관계된 사람들에게 미칠 수 있는 악한 결과를 생각해 볼 때 결코 죄와 무관한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정욕과 사랑: ‘동반자만‘과 ‘동반자 의식도’
정욕은 그 성격상 동반자를 원하지만 그 이상은 원하지 않는다. 짜릿함과 때론 애틋함이 범벅이 된 욕정을 만족시키는 것 이상의 헌신, 사랑, 전인적 나눔과 같은 것에는 별로 가치를 두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정욕으로 인해 맺은 관계는 깨어지고 상대는 바뀌기 마련이다. 나아가 정욕을 잘 다스리지 않으면 욕구 충족을 위해 변태 도착증, 혼음, 동성애 그리고 스와핑과 같은 비정상적 형태의 성으로까지 문을 열고 나아갈 수 있다.
정욕은 사랑으로 포장되지만 사랑과는 너무나 다르다. 사랑은 지속성(continuance)과 헌신을 동반하는 반면 정욕은 순간의 만족(momentary gratification)을 추구한다. 헨리 페어리(Henry Fairly)는 정욕의 성격을 사랑과 대조하여 탁월하게 묘사한다. “사랑은 잠자리를 함께 들었던 그 사람과 또 다른 방식으로 함께 있고 싶어 한다. 가령 아침 식사를 같이 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정욕은 아침이 되면 늘 남의 눈을 피한다. …그리고 그 자신의 고독으로 되돌아온다.” 이처럼 정욕은 처음부터 성숙이 아닌, 자기쾌락(pleasure)과 자아 만족에만 관심을 갖는다. 이것은 금방 색이 바래고 말라버리는 잎과 같다. 사랑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현재 서로를 절제하고 서로를 세워 가지만, 정욕은 오직 현재 자신의 감정과 자기만족에만 골몰한다. 정욕은 이처럼 지극히 비인격적이고 일방적이기에, 결국은 안정된 만족을 얻을 수 없다.
정욕은 때로 육체보다 정서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동기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특히 기혼자의 경우, 부부관계가 피폐해져 있을 때, 종종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정서적 보상을 얻고자 한다. 그러나 이것도 결국은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 성격은 별로 다르지 않다. 이 경우도 상대에 대한 헌신과 상대를 풍요롭게 하는 것에 본질적인 관심이 없다. 그것은 “내게 다오 그러면 나도 너에게 줄게”라는 교환적 성격이 더 짙다. 이처럼 정욕은 육체적 쾌락, 정서적 애틋함, 짜릿함을 얻으려하고 이것을 서로 교환하는 것이다. 결국 자기를 위한 것이지 상대를 위한 것 아니다.
4세기 사막수도사 에바그리우스(Evagrius of Pontus, 345-399)는 정욕은 “잔인한 죄”라고 했다. 자신의 만족을 위해 다른 사람을 탐하는 것이기에 상대방을 인격체가 아닌 물체로 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언제든지 깨뜨려지고 또 다른 대상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정욕은 성폭력과는 형태가 엄연히 다르지만, 자신의 성적 만족을 위해 상대의 인격을 무시하고 유린한다는 점에서 그 성격이 유사하게 잔인하다고 할 수 있다.
‘정상 정욕’과 ‘바닥 정욕’
수도사 카시안(John Cassian, ca. 360-435)도 정욕은 탐식과 아울러 육체에 속한 죄로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욕망이기에 시기, 교만과 같은 영적인 악들이 극복되고 난 뒤에도 사라지기 힘든 것이라고 했다. 식탐이 죽는 순간까지 존재하듯이 정욕도 끝까지 남기 쉽다는 것이다. 이들은 마귀들이 이러한 욕망과 생각을 부추긴다고 주장했는데, “마귀는 사람에 따라서, 또 때와 경우에 따라서, 교묘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정욕으로 유인한다”고 했다.
영국의 극작가요 평신도 신학자인 도로디 세이어즈(Dorothy Sayers)는, 사람들은 보통 건강이 절정을 이루고 삶이 비교적 윤택하고 정상기에 있게 될 때 어느 때보다 정욕에 빠져들기 쉽다고 했다. 수도사들의 표현을 빌면, 마귀는 이런 상태에 있을 때 교묘하게 유혹하여 정욕으로 다가가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는 그것을 억제하는 에너지와 정신적인 에너지도 강하게 작용을 하기 때문에, 육체의 욕구를 이성으로 적절하게 설득하고 통제만 한다면 절제도 그만큼 잘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루이스(C.S. Lewis)도 이에 관련하여 유사한 주장을 마귀 스크류테이프(Screwtape)의 입을 빌어 조카에게 조언하는 형식을 통해 전개했다. 그는, 인생을 파도치는 물결로 볼 때, 삶이 파도의 고점에 있는 것처럼 잘되고 활기찬 시기에, 사람들은 주로 정욕에 빠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때는 동시에 사고하고, 노동하고, 생산하는 데로 에너지와 정신의 물꼬를 쉽게 돌릴 수 있는 기간이기 때문에, 정욕에 대한 저항력도 함께 최고조에 달하게 마련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스크루테이프는 조카 마귀에게는 사람을 정욕에 빠뜨리기에는 이 때가 ‘최적의 때’는 아님을 명심하라고 충고한다.
한편으로 세이어즈는 사람들은 삶에 즐거움이 없고 별다른 의욕과 목표가 없어 활력이 없을 때, 즉 삶이 파도의 최저점의 바닥에 있는 듯한 때에 정욕에 깊이 빠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마귀는 이런 때를 맹렬히 이용한다는 것이다. 인생에 대한 철학이 고갈되고, 삶이 재미가 없고, 그날그날을 그럭저럭 생활하게 될 때, 사람들은 짜릿한 자극에 부딪히면 동요되기 쉬운데 정욕은 그에 적절한 대체물이 된다. 이때에는 정상기와 달리 돌이키고 벗어날 수 있는 기운마저도 고갈된 상태가 일반적이다. 그래서 이 기간에 정욕에 빠지면 아주 치명적이 된다는 것이다. C. S. 루이스도 인간이 내적 세계가 황량하고 삶이 냉랭하고 허전할 때가 성의 유혹은 훨씬 강격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이때는 정상기에 비해 ‘사랑에 빠지는 듯한 감정’은 줄어들지만, 정욕과 같은 짜릿하고 애틋한 길로 빠지기는 훨씬 쉽다고 했다. 기쁘고 일이 잘 풀려서 술을 마실 때 보다, 삶이 무료하고 낙이 없어 술을 찾게 될 때 훨씬 더 깊이 취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할 수 있다. 술이 주는 낙으로 현실을 잊고자 하는 심리처럼, 사람들이 정욕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다윗의 음행사건도 어떤 의미에서 후자의 경우와 무관하다 할 수 없다. 다윗은 전장에 나가지 않고 궁에서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목욕하는 밧세바를 보게 되면서 정욕에 빠진다. 특별히 할 일이 없고, 삶에 목표가 없고 기쁨이 없을 때, 정욕은 더 치명적으로 작용한다는 분석은 귀 기울일 가치가 있다. 에바그리우스도, 수도사가 약간 해이해져서 규율대로 행하지 않고 그저 시간을 보내게 될 경우 마귀는 즉시 정욕을 일으키려 한다고 했다.
쾌락, 우정, 그리고 결혼
이 사회가 점점 성을 결혼과 관계없이 취급하지만 기독교회는 그렇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친구관계를 세유형으로 분류하면서 이것 부부관계에 비유하여 설명한 바 있는데 그의 우정에 관한 윤리학은 쾌락이나 부부 관계에 관련해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첫째 유형은 주로 즐기기 위한 목적으로 맺는 친구관계이다. 소년일 때는 주로 즐기고 재미있게 지내기 위해 친구관계를 맺는다. 그런데 지내보니 별로 재미가 없으면 더 이상 친구하고 놀고 싶은 생각이 사라진다. 이런 단순한 재미를 목적으로 맺어지는 친구관계는 시간에 따라 변하고 언제든지 끝날 수 있다. 청년기가 된 남녀가 서로 성적으로 끌려 친구사이로 발전할 수 있다. 그런데 막상 사귀어보니 별로 매력적이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다고 느끼게 되면 그 두 사람은 헤어지게 마련이다. 쾌락과 즐거움을 위한 목적으로 형성되는 우정과 친구관계는 바로 이런 것이다.
두 번째의 유형은 상호 도움이 되는 실용적인 목적으로 친구를 사귀는 것이다. 이런 친구간의 우정이라는 것은 그 유용성이 사라진다면 언제나 또 사라지게 마련이다. 주로 나이든 사람들이 맺는 친구관계 유형에 해당한다. 세 번째 유형은 선한 덕목을 지닌 사람들이 맺는 우정인데, 자신이 얻을 유익과 즐거움이 아니라 친구의 유익을 위해 친구를 위해 친구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친구를 사귄다. 이것이 온전한 우정이고 최선의 친구관계이다. 이런 관계는 어려움이 와도 여건이 바뀌어도 사람이 악해지지 않는 한 쉽게 깨지지 않는다. 우정은 이런 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부부관계에도 이런 우정의 유형이 적용될 수 있다고 말한다. 성적인 즐거움에 이끌려 부부가 된 사람은 그것이 사라지고 열정이 식으면 쉽게 와해될 가능성이 있다. 자기 앞에 다른 매력적인 사람이 나타나 어슬렁거릴 경우는 그럴 위험이 더 커진다. 또 서로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으로 결혼한 관계는 결혼생활에서 어려움이 생기고, 이제 서로 더 이상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을 내리면 그 관계는 깨지게 마련이다. 결혼생활에서 상호 유익과 성적 쾌락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지만 그것이 본질이 아니다. 결혼생활은 우정의 세 번째 유형처럼 상대방을 채워주고 사랑하고 온전하게 해주기 위해서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혼생활에서 어려움이 와도 성적 쾌락이 부족해도 결코 그 관계는 약해지거나 깨뜨려지지 않는 것이다.
신학자 스탠리 하우어우스(Stanley Hauerwas)는, 결혼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요소는 현재 사랑하느냐도 아니고 현재 만족하느냐도 아니라고 한다. 결혼 서약을 하면서 주례자는 배우자를 단순히 배우자를 ‘사랑하느냐’라고 묻지 않고, 남편이나 아내를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힘들 때나 어려울 때나 한결같이 사랑할 것을 약속하느냐’고 묻는다. 그 이유가 바로 ‘헌신하려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결혼생활의 핵심요소이고 원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적 욕망과 쾌락은 결혼생활에서 한 부분일 뿐 그것이 결코 핵심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시대정신과 문화는 이것을 결혼관계에 있어서 중심적 가치인 것처럼 점점 자리매김하고 있다.
결과: 오래가지 않는 쾌락과 불안한 행복
정욕의 결과는 늘 생각을 배신하게 마련이다. 잠언기자가 음녀의 입술은 꿀처럼 달콤하고 상대의 말은 부드러우나 오래가지 않아 곧 쑥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같이 날카로워지게 된다(잠 5:4)고 한 것은 결코 과장된 비유가 아니다. 인간의 연애감정과 이로부터 오는 행복감과 만족감은 결코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설레고 달콤한 감정이야 서서히 식게 마련이지만, 그것보다 상대에 대한 헌신이 없는 상태의 관계는 애초에 안정감이 결여되어 불안하기 마련이기에 더 그러하다.
성경은 이 관계는 마치 숯불을 밟고 다니면서 검게 그을리지 않고 데지 않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고 비유했다.(잠 6:28) 정욕을 좇아가면 결국 그것으로 인해 화상을 입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압살롬은 다말을 범하고 욕정을 채운 후 다말을 버렸다. 압살롬은 다말의 인생을 추락시켜 버렸고, 다말의 오라비 왕자들과 원수가 되어 다윗 왕국의 분열의 씨로 작용하게 되었다.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에 대한 분노로 돌변하여 그를 모함하고 파괴하려 했다. 켄트 휴(Kent Hugh) 목사는 다윗과 밧세바의 사건을 해석하면서, 이것은 단순히 간음행위로 7계명을 범함에 그친 것이 아니고 밧세바의 남편을 살해하여 6계명을 범한 결과도 낳았다고 했다. 그리고 이웃의 아내를 탐한 것을 금지한 10계명도 어긴 것이고, 결국 밧세바를 자기의 것으로 삼아 도둑질한 것이 되어 8계명 또한 범한 것이라고 했다. 다윗은 이 사건의 결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나단 선지자의 예언대로 왕자들 간의 칼부림이 끊이지 않았고, 다윗의 후궁들은 백주에 다른 이와 동침하게 되었다. 다윗의 왕국은 이 사건 이후로 내리막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잠언기자는 음행하는 자는 마치 새가 생명을 잃어버릴 줄도 모르고 그물로 들어가는 것(잠7:23)과 같고, 소가 푸주로 가는 것과 같다고 비유했다. 비참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마치 불나방처럼 불을 향해 달려가는 것과 방불하기 때문이다. 정욕에 빠진 자는 결국 한 조각 떡만 남게 된다는 말은 아주 현실적인 표현이다.(잠6:26) 실제로 패가망신하고 가산도 탕진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알고 인정하는 데는 특별한 통계와 검증된 이론이 필요하지 않다.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일어나는 상식적 사실이요 경험적 현실로 목도되곤 하기 때문이다. 바람을 피우고 호색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 시작과는 달리 비참한 종말을 보기가 다반사이다. 본인과 가족에게 큰 상처를 남기고 결국 가정과 공동체에 무시하지 못할 해를 미치게 된다. 그렇다면 이제 이 치명적인 해악을 초래하는 정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피하고 끊어라
정욕에 대항하는 우선적인 길은 욕정을 일으킬 수 있는 상황과 분위기, 대상을 피하는 것이다. 욥은 젊은 여인을 아예 보지 않기로 언약을 세웠다고 했다,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욥31:1) 아주 정직한 표현이다. 사람은 아름다운 여인을 보면 정욕이 일어나기 마련이기에 그 원인을 아예 제거하려고 하는 것이다. 잠언기자는 무릇 남의 아내를 만지는 것조차 피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켄트 휴 목사는, 자신은 매력적인 여자를 보면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여자에게 두 번째의 눈길을 주지 않고 외면한다고 했다. 수도사 에바그리우스는 자꾸 눈길이 가는 매력적인 사람이 보이면 그 자리를 피하라고 권고했다. 처음에는 눈을 밑으로 깔고 말도 안하다가 조금 지나면 가끔씩 눈을 마주치고 말을 붙이게 되고,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면 눈을 정면으로 대하면서 말을 하게 되고, 나중에 마음도 열게 되면서 정욕에 넘어가게 된다고 경고하였다.
에바그리우스는 정욕으로 인생의 결정적인 위기를 맞이할 뻔 했던 수도사였다. 4세기 콘스탄티노플에서 이단과의 신학논쟁으로 명성을 얻어 교회에서 신망과 입지를 굳혀가고 있을 즈음, 그는 교회의 중직자의 아내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는 빠져나오지 못하는 자신이 두려웠다. 걷잡을 수 없이 끌리는 마음과 아울러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자신의 위치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에바그리우스는 그 여자의 남편이 군인들과 함께 집에 들이닥쳐 그를 끌어내어 감옥으로 집어넣는 꿈을 꾸었다. 꿈을 깬 에바그리우스는 결단을 내린다. 정욕의 수렁에 빠져 죽는 것보다는 지위, 명성을 잃더라도 그 수렁에서 벗어나는 길을 택한다. 그곳에서 그녀를 보고 만나는 한 그 수렁을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고 그는 콘스탄티노플을 박차고 예루살렘으로 피할 것을 결행했다. 더 이상 머물러 있다가는 더 빠져들고 결국 그의 인생이 파멸에 처할 수 있겠다는 정직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에바그리우스는 정확하게 판단한 셈이다. 그가 택한 것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피한 것이었다. 물속에 있으면서 햇볕이 쬐이는 곳을 찾아 옷을 말린다고 해서 말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진흙 밭에 있으면서 바짓가랑이에 흙을 묻히지 않는다는 것은 진흙 밭에서 걸어보지 못한 사람이나 하는 비현실적인 생각일 뿐이다. 그곳을 벗어나는 길밖에 없다.
요셉의 예는 이것을 너무나 잘 보여준다. 집요하게 그를 유혹하던 주인의 아내가 아무도 없는 공간을 만들어 몸으로 달려드는 상황에서, 요셉은 겉옷을 벗어던지면서까지 그 자리를 박차고 도망쳐 나왔다. 에바그리우스도 지혜로운 길을 택했다. 이 사건은 그의 인생을 전화위복의 길로 인도하는 계기가 되었다. 에바그리우스는, 마귀가 집요하게 수도사에게 성적 상상과 환상을 일으켜 육체적 욕정을 부추기면서 속이는 전략을 쓰되, “오늘 그 유혹을 피하지 못하면 내일 회개할 기회가 있다”며 교묘하게 유혹한다고 설명했다. 많은 위대한 수도사들이 이 속삭임에 넘어가 정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회개할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정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느끼고 깨닫는 순간 과감하게 끊어버리고 피하는 것이 그 방법이다.
말씀을 새기라
이 시대의 철학은 ‘나는 내가 원하는 사람과 함께 서로를 나눌 권리가 있다’, ‘성적 즐거움은 그 어떤 것보다도 더욱 즐기고 향유할 가치가 있다’고 가르친다. 때로는 남의 남편이라도 그 사람이 원하고 나도 원하면 사랑을 나눌 수 있다고 설득한다. 그것으로 두 사람의 삶에 기쁨과 활력이 생긴다면 그것으로 좋은 것이라고 한다. 사탄은 이렇게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추구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신자들은 성욕을 즐기되,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를 깨뜨려서는 안 된다. 7계명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10계명을 마음 판에 새겨야 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남의 아내를 자신의 욕정을 위한 소유물로 삼아서는 안된다. 다윗은 청년의 정욕을 피하기 위해 주의 말씀과 율법을 늘 묵상하고 새긴다고 고백했다.(시 119:9, 11) 잠언기자는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이것이 너를 지켜서 악한 계집에서, 이방 계집의 혀로 호리는 말에 빠지지 않게 하리라.”(잠 6:23, 24)고 권고한다. 말씀을 무겁게 듣고 그것으로 철저히 무장하여야만 자신을 지켜나갈 수 있다.
누구보다 성직자들은 ‘나는 주의 거룩한 일을 할 사람이다’는 의식 가운데서, ‘내가 이것에 빠지면 결코 주의 사역을 섬길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지내야 한다. 더러는 목회자들 가운데 이런 실수를 하고도 회복되어 이전보타 더 능력 있게 쓰임 받는 자가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이다. 이 유혹에 빠져서 실수하면 다윗처럼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음을 인식하고 사역은 그야말로 끝이 날 수밖에 없다. 유혹을 받는 순간 늘 이 생각을 해야 한다. 무엇을 택할 것인가? 이에 대한 성경의 경고와 말씀으로 의식을 날카롭게 해야 한다.
배우자와의 친밀감과 공동체적 삶의 만족을 높이라
성경이 가르치는 성욕은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배타적으로 충족되고 만족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인간의 타락이후 이것이 깨어진 것도 원인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결혼관계 안에서 이것이 온전히 충족되지 않기 때문에 정욕적으로 되기도 한다. 낙원에서 두 사람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움이 없었고 서로의 한 몸 됨을 온전히 즐겼다. 사람이 노출을 부끄러워하게 된 것도 죄의 결과이다. 타락이후 성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일조차도 점점 부끄러워하게 되고 자연히 은밀하게 행하게 되었고, 그 즐거움도 그와 못지않게 되었다. 성적 욕구와 쾌락도 본질을 벗어나 정욕으로 발전되기 일쑤였다. 어거스틴이 성을 부정적으로 보게 되고 가르치게 된 것도 이런 본질을 벗어난 것에 대한 고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피조물로서 본래 창조 때 누리던 남녀의 부끄러울 것 없는 하나 됨과 그로 말미암는 성적 쾌락을 회복해 가야 할 것이다. 부부간에 성적 친밀감을 높이는 것은 정욕으로 빠지는 것을 막는 최상의 예방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남편과 아내는 서로를 위하여 욕구를 가꾸어가야 하고 상호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권리이자 동시에 도덕적 의무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정욕과 다른 극단에 있는 것도 죄라고 말하였는데, 그것은 성에 대한 무감각(insensibility)과 성 혐오증(aversion to sex)이라고 했다. 결혼한 부부들은 부부생활을 통해 더 성적 즐거움을 누리도록 서로 노력해야 한다. 바울이 가르친바 자신의 몸은 자신이 아니라 배우자가 주관하도록 해야 한다는 권고(고전 7:4)에 따라, 서로의 욕구를 존중해서 마귀가 틈을 탈 기회를 주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근원적 즐거움을 더 누리기: 궁극적 처방
정욕을 극복하기 위해 실제적인 방안과 훈련들도 필요하지만 근원적인 해결책에 더 가치를 두어야 한다. 세이어즈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살지만 정작 포르노와 음란에 더 탐닉하는 것은 사람들이 삶에서 참된 즐거움을 얻지 못하고 지루해하고 싫증을 느끼는 영적인 빈곤에서 그 원인을 찾았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을 근원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채 정욕 자체의 문제만 가지고 그 대책을 강구하려는 그 어떤 방법도 성공할 수 없다고 역설했다. 아퀴나스는 사람들이 인생에서 기쁨과 만족이 없을 때 그 허전함을 달래고 채우기 위한 한 방편으로 정욕을 더 추구한다고 보았다. 성 어거스틴도 사람이 영적인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게 될수록 더 육체적 쾌락에 빠지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욕을 통해 즐거움과 쾌락을 누리게 된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근원적 기쁨을 대체할 수 없기에 여전히 허전하고 불만족할 수밖에 없음을 이들은 한결같이 강조한다. 성은 하나님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이 결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성적으로 문란한 젊은 시절을 보냈던 어거스틴은 회심한 후 진리를 찾고 그 안에서 사는 삶의 엄청난 기쁨을 맛보게 된 이후, 비로소 정욕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는 독신으로 살게 되었는데 이것은 그에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 더 큰 기쁨이 되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이 주시는 삶의 기쁨을 더 누리게 될수록 육체적 쾌락에 대한 욕망은 덜해진다.
이와 아울러 친구들 간의 우정과 공동생활을 더 풍성하게 누리고 즐기는 생활도 아주 긴요하다. 마음과 뜻이 통하는 친구들과 함께 생활하고 삶을 나누는 것은 삶에 큰 활력과 기쁨을 준다. 특히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선한 목표를 공유하며 정서적으로 가깝게 생활하는 것은 정욕에 빠지는 것을 예방해 주는 실제적인 자원이다.(딤후 2:22) 크리프트 교수는 “천국에 성이 있을까?”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한 뒤,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성이 지닌 기능이 요구되지 않는 곳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성의 중요한 기능은 두 사람의 하나 됨과 연합을 위한 것인데, 천국은 부부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모든 사람들 간의 연합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성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동료와의 우정과, 공동생활에서 맛보는 기쁨과 만족이 더 크면 클수록, 정욕을 통해 쾌락을 찾으려는 욕구는 줄어들게 될 것이다.
나가면서
오늘날 이 시대사조는 성과 성욕을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한정된 사적인 문제로 취급한다. 그리고 개인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성적인 자유와 만족을 얼마든지 누릴 수 있다고 말한다. 또 이것을 그 어떤 국가나 사회도 간섭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과 성욕은 결코 사적인 영역으로 축소할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개인뿐만 아니라 가정, 나아가 공동체와도 관련되는 것이기에 공적인 영역의 문제이다. 이것이 잘못되면 사회가 점점 도덕적으로 병들게 될 수밖에 없다. 신자는 정욕을 정당화하는 현 사회 문화에서 자신과 가정과 신자 공동체를 지켜나가기 위해 더욱 말씀으로 깨어있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그리스도인들은 정욕에 탐닉함 없이도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는 정욕에 대한 훌륭한 대안적 삶을 이 사회에 보여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신원하 l 교수는 연세대 사회학과와 고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칼빈신학교에서 기독교윤리학으로 석사(Th. M.)와 보스톤 대학에서 사회윤리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Ph. D.) 저서로는 『전쟁과 정치』, 『교회가 꼭 대답해야 할 윤리 문제들』, 『가난과 부요의 저편』, 『시대의 분별과 윤리적 선택』 등이 있으며, 지금은 천안에 있는 고신대 신대원 교수이면서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신학위원으로 봉사하고 있다.
글쓴이 / 신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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