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죄(6) |
나태(Sloth, Acedia 懶怠): 정오의 마귀 |
그러나 기독교회 전통은 게으름에 대해 관용적이지 않다. 단지 좀 쉬는 것, 좀 여유를 갖는 것에 그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초기 교회의 교부들과 특히 사막 수도사들은 게으름을 ‘대죄’의 하나로 취급할 정도로 경계했다. 성 베네딕트는 게으름을 일컬어 “영혼의 원수”라고 했다. 그는 수도사들이 게으름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매일 노동을 해야 하고 정해진 시각에 함께 모여 경전읽기(lectio divina)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근면을 강조한 것이다. 이것은 게으름을 영적인 삶에 치명적인 독으로 보았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서 단절되는 상태로 이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게을러지면 영적인 생활에 느슨해지고 결국 하나님과 이웃에 대해 무뎌지게 마련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여가를 중시하는 현대 사회에서 이런 주장과 생각은 시대착오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느릿함을 넘어 무덤덤으로: 무의욕, 무감동, 무활동
나태라는 영어 단어 슬롯(sloth)은 나무늘보의 이름이기도 하다. 나무늘보는 중남미에 서식하는 것으로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가능한 움직이지 않으려 하는 동물이다. 움직이더라도 최소한으로, 꼭 필요한 만큼만 천천히 움직인다. 이처럼 나태라 하면 “행동이 느리고 움직이거나 일하기를 싫어하는 버릇”이 연상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나태를 몸이 좀 게으른 것으로,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느긋한 습관 정도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청소를 한 주에 한번 하느냐 마느냐의 차원으로 이해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곱 대죄의 하나로 살펴보려는 ‘나태’라는 것은 그보다는 훨씬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나태는 어떤 중요한 일에 집중할 수 없는 심각한 무기력과 무능력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것은 단순히 육체의 문제가 아니라 다분히 영혼의 무기력이고 곤고함이라 할 수 있다.
나태라는 의미의 슬롯(sloth)과 함께 쓰이는 어시디어(acedia)라는 말은 라틴어 아카디아에서 왔다. 이것은 또 헬라어 아케디아(akedia)에서 왔는데, 아케디아는 어떤 것에 대해 관심(kedos)이 없는 것, 즉 무관심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나태란 단순히 몸이 굼뜨고 행동이 느린 것과는 차원이 다른 도덕적인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중요한 일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으니 자연히 몸도 움직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태의 대표적 특징은 ‘무활동’이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마음이 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매사에 감동도 없고, 무엇을 하고자 하는 의욕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무감동과 무의욕이 나태의 또 다른 특징이다. 새해가 되어도 뭔가 새로운 결심을 하거나 해보려는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아름다운 산과 호수를 보고도 마음에 별 감동이 없다. 마음이 무뎌져 있다는 것이다. 갑자기 사고를 당해 생명이 위독한 상태에 처하게 된 친구의 소식을 들어도 별로 놀라지도 않고 마음이 아프지도 않다. 추운 겨울이 지난 뒤 갓 피기 시작한 노란 개나리와 하얀 매화를 보아도 별 감흥이 없다. 그렇다면 이는 심령이 거의 마비되었다는 것이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아 누려온 아름다운 산하가 대규모 공사에 파헤쳐지고 유린되어도 분노하려는 마음이 없고, 선한 미담이 들리고 주위 사람들이 열심히 참여해도 자신은 동참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이것은 거의 마비된 의지와 병적인 무활동의 상태에 빠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은 주위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자신은 가담하지 않고 그저 의자에 앉아 멍하니 보고 있을 뿐이다. 이런 나태의 성격과 상태에 대해 도로시 세이어즈(Dorothy L. Sayers)는 다음과 같이 탁월하게 묘사했다.
Sloth is the sin that believes in nothing, that care about nothing, that engages nothing, that sees no reason to learn or to grow, that see no purpose in life, that sees no reason to live, and yet lives because there is nothing for which it will die. (나태는 믿는 것도 없고 염려도 없고 다짐도 없고 배우거나 성장할 이유도 없고 인생의 목적도 없고, 살아갈 이유도 없고, 그저 자신이 죽을 이유도 없어서 살아가는 죄이다.)
4세기 수도사 에바그리우스는 나태하게 되면 결국 몸에 증세가 나타나게 된다고 했다. 무력증이 오고, 잠은 자꾸 쏟아지며, 그저 눕고 싶고, 한 군데 두 군데 몸이 아프기 시작하다가, 급기야 신경이 쇠약하게 된다는 것이다. 심해지면 감정과 몸이 마비된 것과 같고 겨울잠을 자는 동물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웅크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태한 사람은 살아있기는 하지만 결국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생기와 은혜에 대해서도 반응하지 못하는 ‘죽어 있는 자’라 할 수 있다. 단테의 신곡에서 지옥편을 보면 이 게으른 자들은 진흙 창에 허우적거리면서 지낸다. 그들은 지상에 있을 때 자신들은 신선한 공기를 쐬면서도 늘 슬퍼했고 해가 눈부시게 빛나고 있음에도 늘 우울했는데, 그것은 자신들 안에 늘 연기가 자욱하게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핑계한다. 이런 자들은 죄에 대해서도 별로 심각하게 느끼지 않고 그래서 회개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에는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태는 어떤 악한 것을 ‘행하는 죄’라기 보다는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죄’(not sin of commission but of ommission)라는 표현이 딱 알맞다. 마치 초대 소아시아 교회의 계시록에 나오는 ‘라오디게아’교회와 같이 미지근한 상태이다. 이런 미지근하고 의욕 없는 자는 하나님이 쓰지 않으신다.
새로운 것에의 두려움과 용기 부족
70-80년대 한국 청년 문화는 ‘분노’와 ‘열정’이란 두 단어로 성격 지을 수 있다. 대학생 청년들은 민주, 자유, 정의, 평등이라는 고상한 가치를 들고 민주사회를 열망하면서 독재 타도를 외치며 거리로 나갔고, 심지어 학교를 포기하고 노동운동에 뛰어들고, 또 일부는 분신하며 생명까지 던지곤 했다. 무모할 정도로 열정이 있었다. 그러나 군사독재가 물러나고 어느 정도 민주화가 진행되고 경제적으로도 풍요한 사회가 되자 청년 대학생들의 분위기는 사뭇 달라졌다. 정의니 평등이니 하는 공공적 덕목과 가치보다는 부자 되기, 성공, 스펙 쌓기, 펀드투자 등에 마음이 기울어 있다. 기독교 청년 문화도 다르지 않는 듯하다. 복음, 진리, 기독교 문화에 대한 열정도 현저히 식었다. 이전에는 IVF, UBF, CCC, 네비게이토 등의 선교단체들이 대학가에 왕성했으나 현재는 힘을 잃고 있다고 한다. 기독 청년들의 열정이 옅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열정을 잃어버리니, 뭔가 목표를 향해 전향적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수비 위주, 이미 갖고 있는 것 누리기, 그리고 굳히려는 태도를 지니기 일쑤다. 좋게 표현하면 욕심이 없고 소박한 삶이지만 그것과는 성격이 다른 소시민적인 삶으로 퇴각하고 움츠려 드는 것이다. 뭔가 도전적이고 위험한 일을 하는 것을 내키지 않아 하고, 쉽고 일상적인 일만 하려고 한다. 그러려니 늘 이유 내지 변명거리를 찾는다. 잠언은 “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라”(잠 22:13)라고 말한다. 게으른 자는 일반적으로 쉬운 길, 남이 다 닦아 놓은 길을 택하기를 좋아한다. 새 길은 아예 시도조차 하려하지 않는다. 쉬워 보이고 편한 길은 가지만, 힘들고 험한 길은 가려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따르기는 원하지만,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않는다. 아는 길, 가본 길, 친구들이 많이 있는 길, 검증된 길을 가려 한다. 나이 40이 넘으면 새로운 것을 하지 못한다고 한다. 대신 기존의 방식을 약간 고치거나 그대로 유지하려 한다. 보수적이 되는 것이다. 두려움이다. 진리라면 그것을 보수해야 하지만, 그 외에는 마음을 넓게 열고 진취적인 태도를 가져야 하는데도 그것이 쉽지 않다. 밴 버드포드(Van Budford)는 사람은 대부분 인생의 하프타임을 갖곤 하지만, 실제로 후반전을 뛰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고 한다. 또 대부분의 사람들은 휴식기를 갖지만, 실제로 삶의 목표나 방향을 재조정하여 새로 출발하기를 머뭇거린다고 한다. 익숙하지 않는 삶을 새롭게 출발하려는 용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 도중 끊임없이 애굽의 고기 가마 곁을 되돌아보고 그리로 돌아가고자 했던 것과 같다.
사역에서 벗어난 엘리야, 자기연민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진이 빠지도록 대치하여 결국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심을 증거한 엘리야는, 이어서 그 선지자들을 다 쳐 죽게 한 역사적인 선지자였다. 그러나 그는 다음날 왕후 이세벨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자 즉시 이스라엘 경계를 넘어 남쪽 유다지방의 광야로 도망했다. 그리고 로뎀나무 아래 누워 하나님께 죽기만을 간구했다.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사역한 대가가, 보상은커녕 살해위협으로 돌아온 것에 그는 절망했다.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기를 간청하기까지 이르게 되었다. “내가 주를 위한 열심히 특심했으나…” 엘리야의 이런 모습을 단순히 탈진한 사역자를 향한 연민으로만 보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다. 그는 자신의 특심한 헌신에 대한 결과로 뜻밖의 위협이 나타난 것에 좌절하고 자신을 연민한다. 그는 하나님의 일에 의욕을 가질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살아가는 가운데 어려운 일을 당하면 맥이 풀리고 위축된다. 헤쳐 나가지 못하고 좌절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면 그에 관련한 일에 의욕을 잃게 되면서 점점 그 일에서 물러나게 된다. 많은 수도사들도 이와 유사한 경험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수도 생활에 매일같이 정진했지만 그리스도와 신령한 연합의 신비를 경험하지 못하고 기쁨을 맛보지 못하면, 아무리 해도 되지 않는구나 하는 좌절감에 시달린다. 일반 신자들도 마찬가지이다. 특별 새벽기도를 통해 작정하고 새벽을 깨워 기도하며 하나님께 나아가 간구하고 선한 열심을 내었지만, 자신의 삶이 별로 달라지지 않고, 상황도 나아지지 않는다. 이럴 때 “하나님은 멀리 계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신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응답이 더딤을 견디지 못하게 되면 사람들은 종종 낙망하면서 의욕을 잃게 된다. 때때로 자신의 가정, 자녀, 또는 생업에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이 닥치게 되는 경우 낙망과 좌절은 더욱 깊어지고, 이런 일이 반복되다보면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기대하는 마음이 사라진다. 열심히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보상 대신 어려움만 더욱 생긴다는 생각에 분노와 자기 연민이 복잡하게 겹치기 때문이다.
사실 어떠한 좌절과 고통스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위로와 선하신 인도는 늘 함께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을 보지 못하게 하고, 보지 않게 만드는 것이 나태이다. 에바그리우스는 마귀가 이것을 조장하는 것이라고 했다.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 왜 나입니까?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납니까?” 이렇게 거듭 절규하고 분노하는 자는 그나마 낫다. 하나님을 원망하더라도 이런 사람은 적어도 하나님께 향하고 쳐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자는 하나님을 만나고 위로를 받게 될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나태에 빠지게 되면 이것을 포기해 버린다. 냉소적이 되면서 더더욱 물러나 자포자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없다, 관여하지 않는다, 이 부조리한 세상, 아무렇게나 살아버리자! 이렇게 되고, 기도하지 않는다. 분명히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있는데도 보려고 하지 않는다. 베네딕트 수사요 작가인 캐스린 노리스(Kathleeen Norris)는 ‘나태란 비록 척박한 곳이라도 거기에 존재하고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보기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마귀는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려는 노력을 ‘바보 같은 짓’이라고 현혹하면서 나태를 조장한다고 설명했다.
단테에 따르면 ‘나태는 이웃과 주위에 돌아가야 할 분량의 사랑과 관심을 자신에게 돌려 쏟는 것’이다. 이것 역시 매우 적절한 분석이라고 할 수 있다. 나태는 맡겨진 일을 소홀히 하는 죄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태만히 하는 죄이고, 우리 이웃에 대해 무정한 죄이다. 우리 사회 속에서 약하고 억눌린 자들에 대해 그들이 고통을 받고 있어도 그들을 위로하거나 그들의 아픔에 동참하려고 하지 않고 그들의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고 그들에게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는 것이다. 현대인들의 자기중심적인 삶이 나태의 죄를 유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웃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키고 자신을 하나의 종교처럼 만들어 자신으로 관심을 집중시키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로뎀나무 아래에서 자기의 특심을 거론하면서 죽기만을 간청한 엘리야의 모습은 나태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정오의 마귀와 “다음에…”
매사에 의욕이 없고 무엇을 새로 시작하거나 배우려 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삶과 미래에 더 이상 특별한 꿈과 목표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기가 바라보고 나아가는 비전과 목표가 있으면, 그 꿈을 성취하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 시간을 쪼개 치열하게 살아갈 수 있다. 꿈이 없으면 당연히 치열하게 살 이유도 없다. 그래서 늘 그날 해야 할 일을 내일로 미루곤 한다. “꼭 지금 해야 할 필요가 있나? 내일하지 뭐! 다음에 하지 뭐!” 그러나 그러다 보면 찾아온 기회를 놓치고 큰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다.
에바그리우스는 나태는 자꾸 뒤로 미루도록 유혹한다고 했다. 그는 나태를 ‘정오에 찾아오는 마귀(noonday demon)’라고 비유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정오를 전후해서 이 마귀가 집중적으로 찾아온다고 했다. 악마는 나태라는 죄, 악한 사상으로 수도사에게 엄습해서 “해가 중천에 떠서 지지 않고 50시간 동안이나 지속될 것처럼” 속삭이고는, 천천히 쉬엄쉬엄 하라고 유혹한다는 것이다. “그처럼 매일 기도해 봐야 뭐가 달라지나? 세상도 너 자신도 주위도 크게 달라지는 것 없어! 그렇게 지루하고 따분하게 계속 똑 같은 것이나 반복하며 살아갈 건가?” 햇볕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긴긴 오후에 마귀는 또 이렇게 유혹한다. 기도해야 할 자리, 노동해야 할 자리를 벗어나서 조금 쉬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 주위에 돌봐주어야 할, 자비를 베풀고 격려해 주어야 할 사람이 더 이상 없다고 생각하도록 혼미케 한다는 것이다.
마귀는 그렇다면 왜 정오에 찾아오는 것일까? 에바그리우스는 ‘어차피 수도사들은 2시 이후 저녁 먹을 때까지의 시간에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게 되는 경우가 많고, 저녁식사 후 저녁 기도시간 전까지는 식곤증이 찾아오는 경우가 많기에, 마귀는 그 시간에 수도사를 적극적으로 유혹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대신 마귀는 낮 10시부터 2시 사이에 집요하게 유혹하여, 수도사가 있어야할 자리를 이탈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날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도록 한다는 것이다.
한 시간 미루는 것은 두 시간으로, 두 시간 미루는 것은 내일로 미뤄진다. 이것은 또 다른 내일로 미뤄지면서 결국 목표의식은 완전히 사라진다. 일상이 점점 느슨해지고 마음은 방만해지면서 매번 적절한 시기와 기회를 놓치는 경우로 발전한다. 어느 겨울날 나이아가라 폭포를 향해 떠내려가던 빙판이 있었는데, 그 위에는 죽은 동물의 시체가 있었다. 이를 본 독수리가 내려가 얼어붙은 사체를 뜯어 먹고 있었다. 폭포가 다다르기 직전에 날아올라 가려고 생각하며 피하기를 미루고 미룬 결과, 정작 날아올라야 할 때가 되었을 때는 자기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발톱이 빙판에 얼어붙어 아무리 애를 써도 날 수 없게 되었다. 독수리는 결국 그 동물과 함께 폭포에 떨어져 죽고 만다. 날아오르기를 미루다가 시기를 놓쳐 생각지도 못한 결말을 맞게 된 것이다. 다음에 해야지 하고 미루는 것은 종종 이와 유사한 불행한 결과를 초래한다. 자그마한 일이라도 그날 해야 할 일을 결코 미루지 않는 것이 지혜이다. 나태는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결과를 가져다주게 될지 모른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고 경계해야 한다.
목표와 훈련
이러한 나태를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태를 극복하는 첫 걸음이자 가장 중요한 것은 ‘목표’를 확보하고 분명히 하는 것이다. 방향과 도달지점, 즉 ‘과녁’이 분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추구해야할 가치와 성취해야 할 목표가 무엇인지를 정해야 푯대를 향해 달려갈 수 있다. 갈렙은 팔십이 넘은 나이에도 헤브론 땅을 치려는 목표가 있었기에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외쳤고 그 땅의 거민과 싸웠다.
목표가 분명하면 그에 따라 도달하는 길을 선택할 수 있고, 그 다음으로는 교통수단을 정하게 된다. 목표가 없이 그냥 걷는다면 방향을 잃을 수도 길을 잘못 들 수도 있다. 분명한 목표가 있으면, 그리고 누구도 뭐라 할 수 없을 만큼 고상한 목표를 세워 놓으면, 그것을 향해 나가는 사람의 자세가 달라지게 마련이다.
“제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훈련되어 만들어지는 것이다.” 유명한 네비케이토 선교회의 창립자 중 한 사람인 도슨 트로트맨(Dawson Trotman)이 한 말이다. 이것은 영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훌륭한 외과 의사는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 수련의로서 레지던트 과정을 거치고 전문의가 되어도 그 분야에서 셀 수 없을 정도의 시술을 반복함으로써 한 분야의 깊이에 이르고 권위자가 되는 것이다. 끊임없는 반복과 훈련 없이, 마음과 머리만으로는 결코 되는 것이 아니다. 건강한 몸을 만드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하루아침에 보기 좋고 건강한 몸매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꾸준한 운동을 하고 음식을 절제해야만 한다. 우리의 영성과 경건, 성품도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고, 한 순간의 은혜 체험으로 깊어지는 것이 아니다. 의를 향해 꾸준히 노력하고, 적극적으로 죄와 싸우는 끊임없는 투쟁으로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살면서 예상치 않게 당하는 고통의 순간에 봉착했을 때 하나님을 의뢰할 수 있는 믿음의 힘은, 이전에 그런 체험이 있던 자,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미 맛보아 안 자, 그래서 그분에 대한 신뢰를 갖게 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힘은 결코 한 순간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평소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가벼운 감기도 큰 병으로 발전할 때가 있다. 그러나 평소 운동을 많이 하고 꾸준히 건강을 다져온 사람은 면역 체계가 잘 형성되어 바이러스에 더 잘 저항한다. 우리의 경건과 영성도 마찬가지다. 경건의 훈련으로 믿음과 영성의 면역 체계를 형성하는 것이 단기간에 되지는 않을 것이다. 말씀 묵상, 기도, 금식 등 이 모든 것이 쉬지 않고 계속되어야 할 일이다. 게으름과 타협하지 않도록 경건 훈련을 제도화하고 규칙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건강을 유지하겠다는 목표가 있으면 꾸준히 해야만 한다. 덕도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 아니다. 절제, 용서, 관용, 오래 참음, 그리고 훈련을 통해, 성화의 과정을 통해, 비로소 형성되는 것이다.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22-4)고 가르쳤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골 3:16)고 일상적으로 경건한 삶을 훈련해 나갈 것을 주문했다. 삶에 분명한 목표가 있으면, 더욱 모질게 훈련하게 될 것이다. 믿음의 분량과 비전을 확장하고 목표를 더 높은 데 두며 훈련해야 할 것이다.
나가면서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게으름은 단순히 해야 할 의무를 무시하고 소홀히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을 발견하고 누리는 삶을 팽개치고 포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영적인 일, 의로운 일, 도덕적인 일들에 대해 소홀히 하고 꾸물거리고,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유혹에서 자신을 보호해 나가야 한다. 심지어 절망스런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은혜 베푸실 것을 바라보고 그 은혜를 찾으려 노력해야 한다. 나태한 자는 그것을 보지 못하고 또 거절하려 한다. 그래서 조금씩 우리 삶을 갊아 먹고 결국 무기력하게 만든다.
게으름은 은밀하게 찾아오기에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 길을 걸을 때 큰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는 일은 드물고 오히려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나태도 방심하는 사이에 자리 잡게 된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어려운 상황에서 특히 깨어있어야 한다.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에도 결국 정의가 승리한다는 분명한 성경적 진리를 소망하며, 그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 그분의 때에 역사하실 것을 믿는 신앙을 갖고서, 불의한 것을 볼 때 “아니오”라고 분명히 말하고, 불이 났으면 “불이야” 소리쳐야 한다. 내가 소리쳐도 효과가 없다는 패배적인 생각에, 그저 넘기거나 뒤로 물러서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선을 행하는 것이 당장 변화도 가져오지 못한 채 피곤만 가중시키는 듯이 보이더라도 때가 이르면 반드시 거두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갈 6:9) 살아야 할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우리가 한 날을 다른 날들보다 낫게 여기거나 혹은 모든 날들을 똑같이 여기거나 관계없이, 가장 중요한 것은 매 날이 모두 주께 속한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야 할 것을 강조했다.(롬 14:5-6) 새해를 시작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날과 시간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기로 하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난 해 보다 더 열심히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해 성실하게 걸어 나가야 할 노릇이다.
신원하 l 교수는 연세대 사회학과와 고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칼빈신학교에서 기독교윤리학으로 석사(Th. M.)와 보스톤 대학에서 사회윤리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Ph. D.) 저서로는 『전쟁과 정치』, 『교회가 꼭 대답해야 할 윤리 문제들』, 『가난과 부요의 저편』, 『시대의 분별과 윤리적 선택』 등이 있으며, 지금은 천안에 있는 고신대 신대원 교수이면서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신학위원으로 봉사하고 있다.
글쓴이 / 신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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