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May 29, 2012

천로역정 -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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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May 24, 2012

느 13:1-31 <정결을 구체적으로 행동하라. 또한 정결은 계속되어야 한다.

느 13:1-31 <정결을 구체적으로 행동하라. 또한 정결은 계속되어야 한다.


1. 느헤미의 이야기가 비전과 기도로 시작하여 성벽이 재건된 후에, 이제 신앙개혁으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2. 성벽이 세워졌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3. 개혁은 끊임없이 계속 되어야 합니다. 결코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말씀이 중요합니다. 말씀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말씀은 우리를 자극합니다. 말씀을 우리를 정직하게 비추는 거울입니다.

4. 느헤미야는 말씀이 그토록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개혁의 말씀을 가까이하는 것을 두게 됩니다.

5. 말씀을 비추어 신앙개혁을 하면서, 다시금 회개합니다. 성벽 재건후에 시간이 지나면서 백성들의 신앙이 변질되었습니다.

6. 말씀을 읽으면서 그들이 발견한 것이 무엇입니까?

7. 1절 암몬 사람과 모암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총회에서 분리하게 됩니다. 3절에서 "백성이 이 율법을 듣고 곧 섞인 무리를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모두 분리하였느니라"

8. 5-9절까지에서 도비야의 행동을 발견하고 도비야를 분리시킵니다. 느헤미야가 성전에 돌아와서 보니까 성전 방안에 도비야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도비야가 제사장과의 개인적인 친분을 이용해 그 방을 사용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사용하는 창고의 모든 물건을 밖으로 던지고 대신 도비야가 들어가 살았습니다.

9. 이처럼 성전을 거룩하는 것이 곧 자신을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곧 자신을 거룩히 지키는 것입니다.

10. 교회에 대해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2장 13-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11.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전은 장사하는 집이 아니라 기도하는 집입니다. 기도할 때 성전이 거룩해집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길은 기도가 살아날 때입니다.

12. 느헤미야의 신앙개혁은 단지 성전을 거룩하는 것으로 멈추지 않습니다.

13. 백성들의 일상의 삶에 깊숙히 신앙의 개혁을 요구합니다.

14. 십일조를 철저하게 하라. 10-14절. 특별히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자기 밭으로 도망치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이 그들을 섬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금 그들을 불러들이고자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십일조가 회복되어야 했습니다. "십일조를 가져다가 곳간에 들이므로" 다시금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인들이 돌아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15.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키라. 15-22절.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관한 책을 썼는데 재미있는 문구가 있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마음에 와 닿습니다.

16. 예배가 회복되어야 삶이 회복됩니다. 예배가 온전하여 질 때 우리의 삶 또한 온전하여집니다. 안식일을 온전히 지키는 것은 안식일에 성전에서 장사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 뿐만 아니라 안식일을 섬기는 자들 또한 자신의 몸을 정결케 함으로 가능케됩니다.

17. 22절 "내가 또 레위 사람들에게 몸을 정결하게 하고 와서 성문을 지켜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라"

18. 마지막 신앙개혁은 이방인과 결혼하지 말고 결혼을 정결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23-31절.  솔로몬은 우리에게 분명한 사실 한 가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26절). 우상을 섬기는 여인과는 결코 결혼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27절 "너희기ㅏ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아 이 모든 큰 악을 행하여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을 우리가 어찌 용납하겠느냐"

19. 느헤미야의 신앙개혁을 이루짐으로 느헤미야를 통해서 새롭게 새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게 됩니다. 성벽 재건과 성전 청결, 그 뿐 아니라 거룩한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느헤미야의 믿음의 헌신을 통해 보게 됩니다.

20. 우리도 이 시대에 느헤미야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하는 일에 거룩하게 쓰임받기를 원합니다. 비롯 작은 일일지라도 주님이 쓰시겠다 하면 기꺼이 자신을 내어 드릴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21. 이 시대에 또 다른 느헤미야의 리더십을 기대하며...

2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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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그 날 모세의 책을 낭독하여 백성에게 들렸는데"
 1절 하-3절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는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들"
  왜? 2절에서...
 3절 "백성이 이 율법을 듣고 곧 섞인 무리를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모두 분리하였느니라"

4-9절 제사장 엘리아십과 도비야의 연락
 8-9절 "내가 심히 근심하여 .. 그 방을 정결하게 하고"

10-14절 레위 사람들을 불러 다시 제자리에 세움.
  11절 "내가 모든 민장들을 꾸짖어 이르기를 하나님의 전이 어찌하여 버린 바 되었느냐 하고 곧 레위 사람을 불러 모아 다시 제자리에 세웠더니"


15-22절 유다에서 어떤 사람이, 두로 사람이 안식일을 범함.
  17절 "내가 유다의모든 귀인들을 꾸짖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 이 악을 행하여 안식일을 범하느냐"
  22절 "내가 또 레위 사람들에게 몸을 정결하게 하고 와서 성문을 지켜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라 하였느니라"

23-27절  유다 사람이 아스돗과 암몬과 모압 여인을 맞아 아내로 삼았다.
 25절 "내가 그들을 책망하고 저주하며"
 26절 솔로몬 왕이 이 일로 범죄하였다. 이방 여인이 그를 범죄하게 하였다.
 27절 "우리 하나님께서 범죄하는 것을 우리가 어찌 용납하겠느냐"

28-31절 제사장들

=> 1-3절에 담긴 의미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
  3절 "섞인 무리를 분리하시는 하나님"

그런데. 23-24절에서 보듯 이방 민족과 결혼하여 다시 섞인 유다 백성들...

개혁은 쉽지 않습니다. 개혁 되었다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개혁이 되고 있는 그 순간에도 악은 틈을 타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개혁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이 말씀은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의 개혁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31절 '또 정한 기한에 나무와 처음 익은 것을 드리게 하였사오니"
=> 계속해서 정한 기한이 되면 하나님께 열매를 들려야 합니다. 처음 열매 한 번 드리는 것이 아니라, 매년 열매의 처음 익은 것을 드려야 합니다. 바로 이게 진정한 개혁입니다.
 계속 끊임없이 개혁해야 합니다.

무엇을 개혁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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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용조 목사님 느헤미야 13장 1-9절 "느헤미야의 네 가지 신앙 개혁"
1. 성전을 깨끗하게 하라. 1-9절.

개혁이란 즉시 회개하는 것. 개혁이란 시대와 문화와 상황을 뛰어넘어서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것이 바로 개혁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 우리가 어떻게 틀렸는지, 얼마나 틀렸는지 알게 됩니다.
성전 건축 후 변질된 모습. 4-6절. 느헤미야가 성전에 돌아와서 보니까 성전 방안에 도비야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도비야가 제사장과의 개인적인 친분을 이용해 그 방을 사용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사용하는 창고의 모든 물건을 밖으로 던지고 대신 도비야가 들어가 살았습니다.
 성전 건축 후 오랜 세월이 지나자 사람들의 생각이 무뎌진 것입니다. 성전을 비롯해 십일조와 안식일도 형식적으로만 지키게 되었습니다.
 신앙 생황의 구멍. 7-9절.
 교회를 거룩하게 지켜야. 교회가 새로워지는 방법은 순결을 지키는 것입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거룩하게 교회를 지켜야 합니다.
 기도하는 것이 교회의 본질.


2. 십일조를 철저하게 하라. 10-14절.
3.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키라. 15-22절.
4. 이방인과 결혼하지 말고 결혼을 정결하게 지키라. 23-31절.


 진정한 경건생활이란 생각과 육체가 균형을 이루고 하나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각조차도 훈련이 안 된 사람도 많습니다.
 느헤미야 13장을 보면 어떤 사람이 신앙이 있는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첫번째, 교회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두번째, 철저하게 십일조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세번째,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네 번째, 이방 여자와 결혼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즉 우상을 숭배하는 등 영적 혼음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십일조. 작은 것부터 베푸는 연습이 필요하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말3장8절.

  안식일이 사람을 지킨다. 교회 중심으로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
이 세상 중심의 삶을 살아갑니다. 느헤미야가 안식일에 경고한 것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안식일을 이용하는 것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관한 책을 썼는데 재미있는 문구가 있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내가 안식일을 지키려면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을 지키면 그 안식일이 나를 보호합니다. 마음 가운데 평안을 주고 물질의 복을 주고 죄를 짓지 않게 하는 기능이 안식일에 있다는 말입니다.

 영적 혼음을 막아라. 하나님은 우상을 섬기는 여자와 결혼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약의 고린도서에서 이 부분에 대해 숨통을 틔워주셨습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과 어쩔 수 없이 결혼하게 된다면 그 사람을 예수 믿게 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땅의 문제가 아니라 하늘에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일상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라. 27-28절.
 산발랏은 성벽 재건할 당시 도비야와 함께 느헤미야를 괴롭힌 사람입니다. 그런데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아들인 요야댜의 아들들 가운데 하나가 호론 사람 산발랏의 사위였습니다. 그래서 쫓아냈다는 것입니다.
 14, 22, 31절에서 느헤미야는 자신의 민족이 하나님 앞에 매를 맞게 되자 느헤미야는 마음이 매우 조급하고 암울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붙들고 내 백성을 고치려고 하니 용서해 달라고,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애원하고 있습니다. 그 기도를 세 번씩이나 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이 겪었던 저주를 받을까 봐 가슴이 찢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백성들에게 경고한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입니다. 이것이 신앙개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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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May 17, 2012

섬기고 보존하라. 토지

"그리스도인들이 창세기 2장 15절의 말씀처럼 "섬기고 돌보라"는 명령, 즉 지구를 섬기고 보존하며 하나님이 주신 자원에 대한 선한 청지기가 되라는 명령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가나한 사람들을 돌보라는 하나님의 또 다른 명령까지도 지킬 수 없었다."

 p170.

'피조물을 돌보아야' 하며 지구에 대한 돌봄이 가난한 이들에 대한 돌봄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밀, 콩, 옥수수가 자라는 밭을 지난다. 모두 땅에서 많은 양분을 흡수하는 작물이다. 같은 땅에서 몇 년 동안 계속 작물을 길러내면 이런 양분은 고갈되고 만다. 그러므로 장차 몇 년 동안 땅이 작물을 계속해서 길러낼 수 있게 하기 위해 농부들은 땅에 심을 작물들을 바꾼다.
 한 해는 땅에서 많은 질소를 끌어오릴 옥수수를 심었다가, 이듬해에는 반대로 질소를 돌려주는 '풋거름'인 자주개자리를 심기도 한다. 몇 년 동안은 땅에서 기운을 되찾을 시간을 주기 위해 그냥 잡초가 자라도록 내버려두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별로 자라는 것이 보이지 않는 들판을 지나기도 한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생각에는 그저 진보적인 농업 이론이 아니라 올바른 토지의 사용과 돌봄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이 반영된다는 사실이다."

"농부들은 농사에 매우 복잡한 화학과 기술을 활용한다. 그러나 땅으로 하여금 회복할 시간을 갖도록 한다는 생각, 언제나 받을 수만은 없으며 땅이 항상 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는 생각은 농업의 시작만큼이나 오래되었다."

레위기 25장 3-4절 "여섯 해 동안은 너희가 너희 밭에 씨를 뿌려라. 여섯 해 동안 너희가 포도원을 가꾸어 그 소출을 거두어라. 일곱째 해에는 나 주가 쉬므로, 땅도 반드시 쉬게 하여야 한다. 그 해에는, 밭에 씨를 뿌려도 안 되며, 포도원을 가꾸어도 안된다"

p172-173.


안식

"노동을 그치고 당신이 행한 일을 누리고 감사하는 것은 결핍이 아니라 충만함의 증거다."
p168.

"하나님은 하시던 일을 엿샛날까지 다 마치시고, 이렛날에는 하시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으므로, 하나님은 그 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
"토라와 기독교의 구약 성경에 대한 머리말에 해당되는 이 아름다운 시에서는, 안식이란 약함이 아니라 강함에서 나온다는 것을 보여준다. 
p168. 


가치란 무엇인가?

결정 그리고 다음 세대를 위한 배려

"미국의 원주민들은 중요한 결정에 앞서 그 결정이 다음 세대의 사람들과 땅에 어떤 영향을 줄지를 따져 보았다"
 가치란 무엇인가? p165.

"선한 사람이 악한 제도 속에서 살아갈 때 선한 사람조차 나쁜 결정을 내리기 시작한다."
 가치란 무엇인가? p165.



"돌맹이 스프"와 "potluck"

'돌맹이 스프' 와 'potluck'

'돌맹이 스프' 이야기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한 낯선 사람이 아무것도 없이 큰 솥과 돌멩이 하나만 들고, 먹을 것이 부족해 굶주린 아이들로 넘쳐나는 마을에 찾아왔다. 마을 사람들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이옷에는 먹을 것이 없으니 다른 마을로 가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은 채 자신은 필요한 것이 다 있으며 돌맹이 하나로 스프를 만들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고는 물을 끓이고 국자로 솥을 휘젓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감자 몇 알만 있으면 수프가 완성될 것이라고 크게 외친다. 곧 마을 사람 중 한 명이 감자 몇 알을 가져와 솥에 넣는다. 그런 다음 이 남자가 양파만 있으면 정말로 스튜가 완성될 것이라고 말하자 또 다른 사람이 양파를 가져온다. 이윽고 저마다 가져올 수 있는 모든 것을 솥에 넣자, 크고 작은 건더기들이 넘치도록 채워졌다. 수프가 다 준비되었고 모두 배부르게 먹었다.

 교회에서 하는 potluck은 오래 되고 소중한 전통이다. 교파와 배경을 막론하고 교회마다 교인들이 한 가지 음식을 마련해 와 모두가 함께 나눠 먹는 파티를 연다. 각 사람이나 가정은 샐러드나 주요리, 디저트를 하나씩 가져와 식탁에 차려 놓고 모두 함께 먹는다.
 교회에서 하는 포트럭은 거의 언제나 '불공평'하다. 사람들은 가져온 것보다 더 많이 먹거나 가져온 것보다 더 좋은 음식을 먹는다. 가져오지 않으면서도 배부르게 먹고 갈 생각으로 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 전통은 여러 세데가 지난 후에도 지속되고 있고 20대의 젊은 세대 사이에서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단순한 전통이 우리에게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 삶의 모든 영역에서 무언가 약간 불공평해 보이는 떄가 있기 마련이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기 책임을 회피하려는 사람들이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둘째, 대부분의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공동선에 기여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언제나 우리 모두가 충분히 쓰고도 남는다. 이웃에게 좋은 것을 올바른 일일 뿐만 아니라 대개는 우리에게도 좋은 일임을 배울 수 있다.


"가치란 무엇인가?" p155, 161-162

Wednesday, May 16, 2012

온가족축제예배 영상(나의 어머니)

느 12:1-47 <성벽 봉헌식. 삶과 성전 곳곳이 찬양과 예배를 통해서, 거룩과 정결로 물들고 있습니다. 꼭 그 아름다움이 가을에 단풍이 아름답게 물든 산과 같습니다.>

느 12:1-47 <성벽 봉헌식. 삶과 성전 곳곳이 찬양과 예배를 통해서, 거룩과 정결로 물들고 있습니다. 꼭 그 아름다움이 가을에 단풍이 아름답게 물든 산과 같습니다.>

1. 모진 고난속에서, 어려운 환경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흘린 수고의 땀방울이 결실을 맺는 시간입니다.

2. 하나님께 온전히 감사와 찬양의 제사를 드리는 시간입니다.

3. 이 날은 영광과 찬양과 존귀를 받으시에 합당한 주님께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성전 봉헌식을 하는 날입니다.

4. 성벽 재건에 참여한 백성들이 얼마나 기뻤을까요?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기쁨이었음을 충분히 알 수있습니다.

5. 성경은 그들이 얼마나 기뻤는지 이렇게 표현합니다. 27절 "예루살렘 성벽을 봉헌하게 되니 각처에서 레위 사람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데려다가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을 치며 비파와 수금을 타며 즐거이 봉헌식을 행하려 하매"

6. 그들은 기쁨을 추체하지 못하고 찬양을 합니다. 기뻐서 눈물이 나올 것 같습니다. 기쁨과 감사와 찬양과 영광의 시간입니다.

7. 바로 이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는 축제입니다. 예배는 축제이지만 예배자에게 기쁨과 감격이 되어서 축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홀로 영광 받으시기에 합당한 일들을 우리에게 행하셨기 때문에 그 은혜에 감사와 감격이 넘쳐서 예배를 드리는 축제입니다.

8. 시편 92편은 안식일의 찬송시 입니다.

9. 92편 1-3절을 보면, "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고"

10. 그 다음 말씀이 중요합니다. "아침마다 주의 인자하심을 알리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11. 아침에는 주님의 인자하심으로 이끄심을 기대하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으로 이끄신 은혜에 감사하여 예배하며 찬양하며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린다고 시편 기자는 고백합니다.

12. 봉헌식를 준비하는 제사자들과 레위 사람들을 보십시오.
 13절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몸을 정결하게 하고 또 백성과 성문과 성벽을 정결하게 하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마음을 요동치게 하셨습니다. 거룩과 정결로 그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들어오면 회개하고 자신의 행동을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삶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지속적으로 나의 잘못된 행동을 고쳐나가야 합니다.
 한마디로, 성숙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13. 그들의 예배는 성벽위에 올라 감사 찬송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14. 얼마나 기쁘고 감격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43절 "이 날에 무리가 큰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15. 예배에서의 즐거움은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에 즐거워하도록 하실 때 즐거움이 있어야 진짜 즐거움입니다. 스스로 감정이나 흥분이 도취되어 즐거운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감동하심이 임하여 즐거움을 느껴야 합니다.

16. 느헤미야 12장에 나오는 성벽 봉헌식은 많은 부분 감사 찬송의 무리들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27절, 28절, 31절, 38절, 40절, 42절, 43절,

17. 우리의 예배가 축제같은 예배가 되기를 원합니다. 함께 참여하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방관자나 방청객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마음과 몸을 함께 참여할 때 축제의 예배가 됩니다. 자신의 환경이나 삶에 집중하지 말고, 예배에 집중합시다.
 우리가 마음을 문을 열고, 닫힌 마음, 삐딱거리는 마음을 열고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하기를 원합니다.

18. 예배에 중요한 부분은 말씀입니다. 말씀을 사모합시다. 말씀에 집중합시다. 말씀을 통해서 제사장들과 레위사람들, 즉 예배를 섬기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결례의 일을 힘썼으며"

19. 성벽 봉헌식이 온가족축제예배가 되었습니다. 삶과 성전 곳곳이 찬양과 예배를 통해서, 거룩과 정결로 물들고 있습니다. 우리의 예배가 바로 이런 예배가 되기를 원합니다. 어느 누구 한 사람도 예어없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희생하며 봉사함으로 예배에 참여하고, 자신과 교회를 거룩과 성결하기에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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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절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

8-11절 대제사장 예수아의 자손들

12-21절 제사장의 족장들

22-26절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에 관한 기록

27-43절 성벽 봉헌식
 27절 "예루살렘 성벽을 봉헌하게 되니 각처에서 레위 사람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데려다가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을 치며 비파와 수금을 타며 즐거이 봉헌식을 행하려 하매"

 28절 "이에 노래하는 자들이 ... 모여서"
 30절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몸을 정결하게 하고 또 백성과 성문과 성벽을 정결하게 하니라"
 43절 "이 날에 무리가 큰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 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이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

44-47절 제사장과 레위 사람에게 준 몫
 47절 "스룹바벨 때와 느헤미야 때에는 온 이스라엘이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에게 날마다 쓸 몫을 주되 그들이 성별한 것을 레위 사람들에게 주고 레위 사람들은 그것을 또 성별하여 아론 자손에게 주었느니라"



소그룹을 묶어주는 기도 - 소그룹네크워크 350호




정해진 기간 동안 함께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모였던 소그룹이 그 목적을 달성한 이 후에도 계속해서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는 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물론 이들이 공유하고 있는 경험이 다른 이들과는 공유할 수 없는 유대감을 갖게 합니다만 이것만으로는 소그룹의 멤버들이 꾸준히 만남을 갖고 관계를 유지해나가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이런 특수한 목적을 가진 소그룹 외에 일반 소그룹에서도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는 공통분모를 찾는 것 외에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금새 소그룹 지도자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NCD의 데이브 얼리는 <성공하는 소그룹 리더의 8가지 습관> 중에 소그룹을 하나로 묶어 줄 수 있는 소그룹 리더의 습관들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얼리는 소그룹 리더가 소그룹의 비전과 방향성 제시하는 것 다음으로 기도를 가장 중요한 리더의 습관으로 손꼽고 있습니다.
얼리는 성공적인 소그룹 리더는 멤버들을 위해 매일 기도하는 사람이라 말합니다. 어떻게 보면 아주 기초적인 지침이지만 그는 기도의 유익함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그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소그룹 리더가 얼리가 말하는 대로 기도의 중요성을 깨닫고 기도를 할 때 왜 그 소그룹의 결속력이 더욱 강해 질 수 있을까요? 리더가 기도의 모범을 보였을 때 소그룹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입니다.
모범을 보았으니 멤버들은 조금씩 모방하며 자신들도 기도의 습관을 갖게 될 것입니다. 멤버들이 점차 기도하며 무릎을 꿇는 시간을 늘려갈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의 습관을 키워가다 보면 얼리가 말하는 기도의 유익함을 멤버들도 스스로 느낄 수 있게 됩니다.
  • 기도가 일상 속에서 시간과 에너지를 절약하게 해준다는 사실
  • 기도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할 수 있다는 사실
  • 기도가 꼭 필요한 통찰력을 얻게 해준다는 사실
이 외에도 얼리는 기도가 영적 성장을 위해 꼭 필요한 무기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리도 유익한 기도가 소그룹을 더욱 하나로 연합시켜 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눈으로 다른 멤버들을 바라보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끈은 소그룹을 묶어주는 가장 튼튼한 재료라 할 수 있는 사랑의 실제이기도 합니다. 한 멤버가 다른 멤버들을 위해 기도하며 하루에 정해 놓은 시간에 다른 지체들의 얼굴을 떠 올리며 그들의 삶 속에 지금 해결돼야 할 문제들, 그리고 그들의 영적 건강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멤버를 향하여 가지신 자신의 사랑을 기도하는 사람에게도 보여주십니다. 이 놀라운 사랑이 소그룹을 진정으로 하나되게 하는 것입니다.
한 주간 동안 못 보는 것도 아쉬워하는 소그룹 멤버들은 모임 장소로 들어오자 마자 서로의 안부를 묻습니다. 그냥 한 주간 동안 어떻게 지냈느냐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지난 한 주간 동안 함께 기도하며 지냈던 일들에 대해 확인하고 때론 감사의 찬양을 또는 더욱 간절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우리가 속한 소그룹에서는 지금 기도가 얼마나 넘쳐나고 있을까요?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는 소그룹 멤버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들의 기도제목을 가지고 또 한 번 무릎을 꿇고 기도의 자리로 조용히 나가봅니다.
* 이 글은 데이브 얼리의「성공하는 소그룹 리더의 8가지 습관」의 일부를 발췌 각색한 글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다 - 마5:13-16절


목적이 이끄는 삶을 위한 매일의 묵상 962호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13-16)
당신은 스스로를 세상의 빛으로 만들 수 없다. 예수님은 당신이 그분과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고후 4:6)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빛이 우리 마음에 비쳤고, 그 빛이 우리 안에 너무나 강하게 비쳐서 우리는 우주의 별처럼 빛나 모든 인간에게 진정한 삶을 향해 가리킨다.
이것이 제자도의 초상이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의 빛으로 재창조하신다. 우리는 스스로 중요한 존재라서가 아니라 세상의 빛과 초자연적으로 결합하였기 때문에 빛인 것이다. 주님은 자신을 따르라고 우리를 부르시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 8:12)
우리를 통해 빛을 드러내시도록 겸손하게 주를 의지하며, 우리의 초점은 늘 빛에 있어야 한다. 다음을 늘 기억하며 기도하라.
  • 내 영향력과 가시성(可視性)은 ‘내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내 안에 누가 사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나를 영향력과 가시성의 자리로 이끄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 나는 내게 주어진 영향력과 가시성을 관리하는 청지기일 뿐이다. 따라서 길을 비키고 예수님이 내 안에서 일하시게 맡기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 내 영향력과 가시성의 중요성을 측정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다. 내가 영향을 끼친 한 사람이 온 세상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내 초점은 주님이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그분을 따르는 데 있다.

Tuesday, May 15, 2012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를 그리다 - 렘브란트



렘브란트 하르먼스존 판 레인 (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년
바로크 시대의 네덜란드 화가이다. 일반적으로 그는 유럽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이자 판화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지며 네덜란드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이기도 하다. 예술 분야에서, 그의 기여는 역사가들이 소위 네덜란드 황금 시대라고 부르는 시대를 불러오게 하였다. 렘브란트는 1606년 7월 15일 암스테르담 서쪽으로 약 50km 떨어진 레이던에서 방앗간 주인의 아홉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모친은 가톨릭 신자이고,렘브란트는 개신교 신자였다.렘브란트는 화가가 되었을 때에 모친이 성서를 읽는 모습을 그림에 담아냄으로써 신심이 진지한 모친에 대한 존경을 보였다. 라틴어를 가르치던 학교를 나온 후, 렘브란트는 14세에 레이던 대학교에 입학 하였다. 렘브란트가 학교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그림 그리는 일에만 열중하자, 그의 부모는 야콥 판 스바넨뷔르흐(Jacob van Swanenburgh) 밑에서 3년간 미술 수업을 받게 하였다.
 
 
 
 
 

1625년 개인 화실을 연 직후, 암스테르담에서 활동하던 피테르 라스트만(Pieter Lastman)을 정기적으로 방문해 지도를 받으면서 미술에 관한 시야를 넓혔으며, 이를 계기로 1632년 거처를 암스테르담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 때 외과 의사 조합의 주문으로 <툴프 박사의 해부>를 제작하여 초상화가로서 명성을 떨쳤다.
The Night Watch or The Militia Company of Captain Frans Banning Cocq, 1642. Oil on canvas


1642년 <야경>을 제작하였으나, 그 당시에는 극히 나쁜 평을 받아 초상화가로서의 명성을 잃었다. 게다가 같은 해에 아내마저 죽자, 실망과 곤궁에 빠지게 되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작품에 정열을 기울였다. 1656년 파산 선고로 유대인 지구에서 가난에 시달리는 생활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작품을 계속 발표하였다. 끼니마저 굶는 만년의 비참한 삶에서도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을 부어놓은 듯한 독특한 그림을 제작하였다. 하지만 <야경> 제작 이후 무너진 그의 화가로서의 삶은 끝끝내 회복되지 못했고, 결국 1669년 암스테르담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였다.


Self Portrait with Beret and Turned-Up Collar, 1659

기자: 안녕하세요, 갓피아 여러분. 꽃피고 따사로운 봄, 분위기 잡으며 미술관 가기에 딱 좋은 날씨입니다^^ 오늘은 이런 분위기에 어울리는 거장 한 분을 모셔봤는데요, 안녕하세요 렘브란트 선생님!
렘브란트: 안녕하세요, 기자님 그리고 갓피아 여러분.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Q1. 선생님의 작품은 오늘날 ‘네덜란드의 황금시대’를 불러온 장본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요, 본인의 이런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1640, wearing a costume in the style of over a century earlier.

A1.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야 그림만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니, 결론적으로는 제 그림이 나쁘지 않았다는 말이 되겠군요. 그것 참 감사한 일입니다(웃음). 그러나 제가 그림을 그리던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그 때 그림을 그리던 저 자신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평가입니다.



Q2. 선생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요?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c. 1669

A2. 제가 살던 17세기 네덜란드는 칼뱅주의(Calvinism)의 영향이 지대하던 곳이었습니다.
엄격한 칼뱅주의자들은 성서를 시각화 시키고, 이미지화 시키는데 혐오의 눈길을 보냈었죠. 기존 가톨릭 교회의 화려했던 예술 장려 사업에 비해 굉장히 상반되는 입장이었죠. 실제로 가톨릭의 활발했던 성서화 작업이 오늘날까지 유명한 루벤스, 베르니니와 같은 화가를 낳았고, 바로크 양식이라는 웅장한 화법을 남긴 거죠. 그러나 비 가톨릭교도였던 제가 성서화를 그리는 것은 그다지 환영 받지 못했던 상황이었음을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끊임없이 저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붓을 들도록 만들었던 원천이었습니다.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가득한 지식의 보고였고, 그 안의 인물들과 대화하며 제 안의 열정을 다시 발견할 수 있게 하는 끝없는 자극제였던 셈입니다. 주변의 따가운 시선이 부담스러웠고 그림을 찾는 사람은 적었지만 저는 끝까지 성서화를 그리는 것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Q3. 이제 본격적으로 선생님의 그림 이야기로 넘어가 볼까요? 방금 성서화를 그리는 것에 굉장한 매력을 느꼈다고 하셨는데요, 성서와는 관련이 없는 그림도 몇몇 눈에 띕니다. 성서화는 아니지만 유명한 <아르테미시아>에 대한 설명을 좀 해주시겠어요?


Saskia as Flora, 1635

A3. 제가 성서화에 무한한 매력을 느낀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 말고도 사랑한 모델이 또 있었으니, 바로 제 아내 사스키아입니다.
말씀하신 <아르테미시아>는 제 아내를 모델로 그린 그림이지요. 사실 이것 말고도 사스키아를 모델로 그린 그림은 많습니다. 모델료를 지불할 만큼 넉넉한 상황이었던 적이 별로 없었거든요. 하지만 이 <아르테미시아> 안에는 아내에 대한 저의 사랑이 고스란히 녹아있다고 보셔도 됩니다.
아르테미시아는 소아시아 카리아의 페릐아 행정관 마우솔로스의 아내였지요. 남편이 후손 없이 죽은 후 그녀는 남편을 대신해 약 2년간 카리아를 통치했는데, 역사학자도 아닌 제가 알 만큼 아르테미시아라는 여성이 유명했던 이유는 단지 고대의 여성 통치자였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남편이 죽은 후 남편을 화장한 재를 물에 타서 마시고 자신을 ‘살아서 숨쉬는 남편의 무덤’으로 만들 만큼 남편에 대한 사랑이 유달랐기 때문이지요.
아마도 저는 아르테미시아라는 여인의 이야기를 듣고 제 아내 사스키아도 제가 죽은 후까지 저를 잊지 말아주기를 바랬던 것 같습니다만, 안타깝게도 아르테미시아 이야기는 제 아내의 이야기가 아니라 저의 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 너무도 사랑했던 아내는 아들 티투스를 낳다가 젊은 나이에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가버렸거든요.



Q4. 아, 선생님의 그림에 나오는 여성은 모두 아내를 모델로 삼아 그리신 것인가요?


Portrait of an Old Woman, 1655

A4. 전부는 아닙니다. 물론 사스키아를 모델로 그린 그림이 많긴 하지만 더러는 모델료를 지불하고 산 전문 모델도 있었고, 또 전혀 다른 여성이 모델이 된 적도 있었죠. 그림 <예언자 안나>를 보시면, 아내라고 하기에는 너무 늙은 여성이 모델입니다. 제 어머니이시죠.
가톨릭이 무너지는 사회에서도 끝까지 모범적인 신앙인의 태도를 잃지 않으신 분이었죠. 가톨릭과 개신교의 싸움이 팽팽했던 사회 속에서도 가톨릭이나 크리스천의 싸움에 끼는 대신 진정한 신앙인의 중심을 잃지 않으려 더욱 성경을 읽으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어머니는 성경을 펴고 글자 하나 하나를 손으로 짚어가며 매우 주의 깊게 읽으셨는데, 옆에서 보면 마치 성경의 글자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절박함까지 느껴질 정도였어요.
왜 하필 예언자 안나의 모델로 저희 어머니를 선택했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었죠. 성경에서 안나는 예수가 메시아임을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흔히 손을 들어 예수를 가리키는 당당한 여장부의 모습으로 그려지곤 했었거든요. 하지만 저는 어둠 속에서 오직 환히 빛나는 하나, 성경을 꼼꼼히 말씀을 읽는 예언자 안나의 특정 부분을 섬세하게 강조함으로 안나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선포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오직 말씀을 통해 얻어진 확신으로 인한 과정임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여기서 아마 가장 강조된 것은 많은 비평가들이 눈치 챘지만, 성경을 손으로 짚어가며 읽는 예언자 안나의 주름진 손입니다. 바로 제 어머니가 성경을 읽던 방법이었죠.



Q5. <선한 사마리아인>을 주제로 남겨진 그림 중에서도 <선한 사마리아인과 똥누는 개>라는 별명으로 더 알려진 그림이 있어요. 다친 사람을 여관 주인에게 넘겨주는 착한 사마리아인 옆에서 개가 똥을 누고 있는 왠지 이질적인(?) 구도가 인상적인 그림인데요, 이 그림을 그린 작가로서 설명을 해주신다면요?


The Landscape with Good Samaritan, 1638

A5. 제 의도와는 다르게 학자들간의 의견까지도 분분했다고 들었습니다(웃음). 하지만 이 그림을 통해 나타내고자 했던 저의 의도는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이나 개, 특히 똥누는 개가 유대인들에게 정결한 존재일 리가 없습니다. 둘 모두 잡종에 더러운 존재일뿐더러 둘 모두 ‘고상한’ 유대인의 사회적 정체성 혹은 체면을 모르는 상징물들이지요. 유대인은 그들만의 경계와 정체성, 체면을 넘어서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모두 아는 예수님의 비유에서 유대인들을 보세요. 유대인을 대표하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강도 당한 사람 앞에서 행한 행동은 측은지심은커녕, 바보처럼 강도 당한 이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결국 길거리에 쓰러진 사람을 스쳐 지나갑니다.
하지만 사마리아인은 다르죠. 저는 사마리아인이 특별히 이 강도 당한 사람에게 연민의 정을 느껴서 도왔다기보다, 그가 소위 말하는 ‘경계’안에 살지 않았기 때문에 길에 쓰러진 사람에게 자연스레 생기는 불쌍한 마음을 느끼고, 더 자연스럽게 다친 사람을 돌보아야 한다는 지극히 정상적인 행위를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느끼고 과감하게 행동으로 옮기는 사마리아인의 행위는 너무나 정상적이어서 마음 속에 그 어떤 걸림도 없음을 알게 하죠. 제사장과 레위인은 몰랐던,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는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마치 자기가 똥을 누고 싶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시원하게 일을 보는 개처럼 말이죠. 그림의 구도상 똥을 누는 개가 한 눈에 들어오는 위치인 사마리아인과의 대각선 구도에 넣어 그린 의도는 바로 거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가 똥을 누는 행위의 더러움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어 자연스러운 일을 거리낌하고 있는 둘의 모습이 하나의 선상에 있음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Q6. <삼손>을 그린 그림이 유난히 많아요. 삼손에게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있으신가요?


The Blinding of Samson, 1636

A6. 저의 <삼손>그림을 보면 성서화가들이 많이 그리는 삼손 인생의 클라이막스인 기둥 뿌리를 무너뜨려 블레셋 사람들을 모두 죽이는 삼손 같은 신화적 이야기보다 삼손의 ‘사생활’ 이야기가 더 많음을 볼 수 있습니다. 잘 알려진 작품만해도 <들릴라에게 배신 당하는 삼손>, <장인에게 으름장을 놓는 삼손>, <잔치에서 수수께끼를 내는 삼손> 등 성경에서 단지 삼손의 에피소드로 나오는 이야기들이 많죠. 저는 삼손의 영웅적 모습보다는 그가 가진 선천적 성격으로 인한 일상의 파장이 더 재밌더군요.
탄생 자체도 비범했던 영웅 호걸 삼손은 커갈수록 비범은 고사하고 평범한 나실인도 못되었습니다. 끊임없는 오입질에, 그도 모자라 이방 여인에게 속는 일은 다반사였고, 배신을 되갚는답시고 더 큰 화를 불러일으키는, 집안의 우환이자 천덕꾸러기였죠. 뭐, 물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겠지만요. 삼손이 마지막까지 사랑했던 여인 들릴라도 블레셋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성경은 들릴라가 삼손을 사랑했다고 한 번도 보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저 욕정에 불붙어 자신에게 구혼하는 삼손과, 강한 삼손을 저지하지 못하는 제 동족의 지도자들 사이에서 들릴라는 자신을 동족을 대표하는 희생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실제로 그녀는 삼손의 아내로서 남편을 사랑하는 길 대신, 은 5,500세겔, 지금 시가로 따지자면 약 66억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양의 은을 받고 삼손의 사랑을 이용하여 결국 죽이는 길을 선택합니다. 당시 왕의 몸값이 1,100세겔이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들릴라는 평생 쓰고도 다 못 쓸 돈을 받은 것이 됩니다.
성경에서 묘사한 삼손보다 제가 그리는 삼손이 좀 ‘못났다’라는 의견이 많은데, 특히 <결박 당하는 삼손>에서는 삼손의 머리카락을 손에 든 들릴라의 희열 넘치는 생동감 있는 표정에 비해 삼손은 우리가 이때껏 상상하던 근육질의 우락부락하지만 핸섬한 사나이가 아닌 그저 힘없이 포박당하는 고깃덩어리에 가깝습니다. 성경 이야기에 충실한 제 그림에 어째서 삼손이 이렇게 나왔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들릴라의 시각으로 삼손을 바라보았노라고 답해드리고 싶군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에게 욕정을 해소한 삼손, 거들먹거렸지만 이제 자신에게 은 5,500세겔을 내주어야 하는 블레셋 남성 지도자들에게 들릴라는 나름대로의 복수를 한 것입니다. 한 여인이 남성성을 상징하는 삼손의 힘을 거세하고, 남성들의 체제를 대표하는 블레셋 지도자들의 폭로하는 복수 장면을 극적으로 재구성해보고 싶었습니다.



Q7. 들릴라의 눈으로 보는 성경 이야기였군요! 아주 새로운 시각이네요! 선생님만의 새로운 시각으로 그린 다른 그림을 소개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Vienna c. 1655, oil on walnut, cut down in size

A7. 흠, 글쎄요. 이게 새로운 시각이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죽음’을 보는 시각을 좀 달리하려 했던 시도는 몇 개 생각나는군요.
당시 ‘죽음’은 매우 민감한 문제로, 이 세상을 살아가던 육신을 떠나 그 영혼이 천국으로 가느냐 지옥으로 가느냐, 혹은 이 세계가 죽음으로 인해 얼마나 허망해지느냐를 비유한 작품이 앞다투어 나왔습니다. 성서화도 거기에 큰 일조를 했지요.


Anatomy Lesson of Dr. Nicolaes Tulp, 1632


그러나 제 그림인 <도살된 소>나 <해부학 교실>, <죽은 두 마리 공작과 소녀>를 보시면 알겠지만 저는 죽음을 정물화처럼 아무런 감정 없이 ‘있는 그대로’ 보는 시각을 가져보려 시도했었습니다. <도살된 소>는 아름다운 유화의 기법을 따른 것도, 그렇다고 사실을 그대로 그린 사진 같은 정물화를 그린 것도 아닌 단지 푸줏간에 걸려있는 한 덩어리의 고기를 표현했습니다. 어둡고 침침한 푸줏간에서 잡은 지 꽤 된 소가 배가 갈리고 손 발이 잘린 채 축 늘어져 있는 모습이지요.
이 시기에 저는 개인적으로 ‘죽음’에 대해 생각할 시기를 맞았습니다. 3명의 자녀의 잇따른 죽음과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아내의 누이 동생의 죽음이었죠. 당시만해도 영아 사망률은 매우 높아서 죽음이 신기한 일이 아니었죠. 그러나 신기한 일이 아니라 해서 죽음이 익숙한 것은 아닙니다. 남들은 ‘일상적’인 일이라고 하는 것에서 ‘존재’를 묻지 않을 예술가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요? 저는 죽은 핏덩이들을 안고 생(生)과 사(死)를 끊임없이 묻고 또 물었습니다.
도살된 소와 해부학 교실을 그리며 제 자신에게 말하고자 했던 것은, 아마도 죽음 앞에 섰을 때 죽음에 대한 불안을 거리낌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힘찬 소, 예수의 영광에 반하는 우상으로 여겨지던 소이지만 죽음 앞에서는 뿔이 바닥에 뒹굴고, 한낱 푸줏간 아낙네도 죽은 소를 무서워하거나 경외하지 않습니다. 그토록 삶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죽음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 끊임없는 물음의 결과는 의외로 사실적인 죽음의 모습으로 붓 끝에서 나타났습니다. 기자님의 물음에 대답이 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죽음에 대해 유행하던 사상과 화풍을 이해하신다면 아마도 질문에 충분한 답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Q8. 앞에 성경에서 영감을 얻는다고 하셨는데요, 좋아하는 성경 구절을 주제로 그린 그림 중에 기억에 남는 그림이 있으시다면?


Raising of Lazarus

A8. 저를 매료시킨 성경 이야기 중 하나는 나사로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나사로의 소생>이라는 제목으로 각각 유화와 에칭(여러 작품을 찍어낼 수 있는 기법)으로 제작했지요.
유화 <나사로의 소생>을 보면 당시 무덤으로 사용됐던 동굴에 예수께서 빛을 받으며 서 계시는 구도가 눈에 띄죠. 동굴 무덤 안은 어둠이 자연스러운 곳이고, 저는 이 그림을 보는 사람에게 빛과 구도에 집중하도록 유도하고자 빛의 방향을 예수님에게로 향하게 했습니다. 손을 번쩍 든 예수의 오른팔과 마리아로 보이는 여인 사이에 빛이 통과하도록 한 것이죠. 그 빛은 예수의 오른팔과 광경을 지켜보는 마리아의 얼굴, 그리고 나사로를 비추죠. 저는 하나님의 빛이 예수를 통해 기적을 이루고, 사람들에게 믿음을 만들어내고, 죽은 이에게 새로운 생명을 불어놓는 장면을 한 폭의 그림 안에 연출해내고자 했습니다. 빛, 곧 하나님의 은총과 기적을 예수와 연관 짓고자 한 것이죠.


Anatomy Lesson of Dr. Nicolaes Tulp, 1632


믿음은 그리스도인들을 살게 하는 근원적인 힘입니다. 비록 그리스도가 잠들어 있는 듯 해도, 그리스도를 기다리다 ‘이틀’이 지나 고통 속에 ‘잠’들었어도 부활과 생명의 주가 있는 그곳에는 절망이나 죽음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때’에 일어나 그분이 사랑하시는 사람에게로 틀림없이 가는 분이십니다.



기자: 따뜻한 봄 날을 더욱 풍성하게 비춰주는 한 폭의 그림 같은 렘브란트 선생님과의 인터뷰였습니다. 위대하면서도 따스한 성경의 이야기들과 선생님의 신앙 고백이 어우러진 멋진 시간에 감사 드립니다.







참고도서 : 렘브란트, 성서를 그리다/ 김학철 지음/ 대한기독교서회

목적이 이끄는 삶을 위한 매일의 묵상 - 960호(히 12:2)


하나님의 비전은 위대한 일을 하도록 동기 부여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 12:2)
‘비전’의 가장 강력한 측면은 아마도 사고방식에 변화가 일어난다는 점일 것이다. 사고방식의 변화는 곧 삶의 방식의 변화로 연결된다.
올림픽에 출전하는 수영 선수는 매일 수영장 바닥을 바라보며 오랜 시간을 견딘다. 금메달을 따겠다는 비전이 그에게 동기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새로 태어난 아기가 삶의 힘이 되어주리라는 비전이 있기에 출산의 고통을 견딘다.
또, 네 살짜리 아이는 아주, 아주 착한 아이가 되려고 2주를 더 참고 견딜 수 있다. 크리스마스 때 선물을 받으리라는 비전이 동기 부여를 했기 때문이다.
비전은 우리가 언제나 위대한 일을 하고, 위대한 것을 주고, 사랑할 수 있도록 동기를 주는 힘이다. 비전은 목표를 향해 계속 전진해야 할 다른 이유가 전혀 없어 보일 때도, 우리로 하여금 계속 나아갈 수 있게 해준다.
예수님은 비전 때문에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셨다. -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히 12:2)
오스왈드 챔버스는 우리가 주변의 모든 것, 또는 모든 사람이 넘어뜨리려고 해도 계속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비전’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는 바로 하나님이 우리 앞에 두신,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는” 비전이다. (골 3:2)
하나님께 그분의 비전을 주시길 구하라. ‘당신의 목적’이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과 뜻의 연장선상에 있는지 보여주시길 구하라. 그리고 나서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라.” (빌 3:14)

Wednesday, May 9, 2012

느헤미야 11:1-36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로 자원하는 사람들의 수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제비뽑아 10분 1민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벽이 재건 된 후 예루살렘 성은 전혀 살만한 곳이 아니없습니다. 선교적 사명이 아니면 살 수 없었습니다>

느헤미야 11:1-36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로 자원하는 사람들의 수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제비뽑아 10분 1민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벽이 재건 된 후 예루살렘 성은 전혀 살만한 곳이 아니없습니다. 선교적 사명이 아니면 살 수 없었습니다>

1.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였고, 그 남은 백성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거주하게 하고"

2.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되고, 이제 그곳에 누군가 살아야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이 상징적인 건물이  아니라면, 실제로 누군가 그곳에 살아야 합니다.

3.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이 사람이 살만한 곳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4.  느7장 4절에 보면, "그 성읍은 광대하고 그 주민은 적으며 가옥은 미처 건축하지 못하였으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5. 성벽은 건축되었지만, 무법천지나 다름 없었습니다. 성벽인 무너지면서 그곳에 도적과 강도들이 많았을 것이며, 짐승들 뿐만 아니라 풀이 무성하였습니다. 사람이 산지 오래 된 곳이 어떤 상태가 되는지 우리늘 잘 알 수 있습니다.

6. 왜 그곳이 무법천지였는지를 잘 알 수 있게 해주는 본문이 있습니다. 느헤미야 11장 6절, 8절에 보면, "용사"가 그곳에 들어가 살았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느 사람들과 함께 그 당시에 꼭 필요한 사람이 바로 용사였습니다. 그들이 그곳에서 해야 할 일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7. 그런데 그곳에 지금 누군가 들어가야 살아야 했습니다. 첫번째로 지도자입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이 들어갔습니다. 지도자의 솔선수범과 희생을 볼 수 있습니다.

8. 지도자들이 희생이 백성들의 자발적 참여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에 살고자 했기 때문에 그중에 10분 1만 성안에 살도록 했습니다.

9. 이처럼 지도자의 희생은 아름다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10. 또 한편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공동체 의식을 볼 수 있습니다. 2절에 보면,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자원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백성들이 복을 빌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나머지 10분 9도 함께 참여하고 있습니다.

11. 흔히 우리 모두를 가리켜 선교사라로 합니다. 실제적으로 선교사역에 동참하시는 선교사님과 후방에서 물질로, 기도로 후원하는 보내는 선교사입니다.

12. 이 두 조직이 아름답게 하모니를 이루어야 참맛나는 선교사역을 감당할 수 있씁니다. 지금 예루살렘 성에 거주하는 사람들과 성 밖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13. 하나님 편에서 이들 모두가 귀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11장 3-9절까지 지도자의 이름, 10-14절까지 레위 자손의 이름, 19-24절까지 성문지기의 이름, 25-36절까지 성 밖에서 살게 된 사람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14. 성 안에서 살든지, 성 밖에 살던지 모두가 다 하나님 나라의 일에 참여한 사람들입니다.

15.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16.  하나님의 일에 대한 희생이며, 자발적 참여이며, 하나님의 일에 전적 헌신 하는 사람들을 축복하며 그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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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였고"
      "그 남은 백성은 제비 뽑아 십분의 일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거주하게 하고 그 십분의 구는 다른 성읍에 거주하게 하였으며"
=> 예루살렘에 자원하고자 하는 사람이 많아서, 10분1을 특별히 제비뽑아 구별하였다. 예루살렘이 살만한 곳이 아니었다. 느7장 4절에 보면, "그 성읍은 광대하고 그 주민은 적으며 가옥은 미처 건축하지 못하였으니라"
2절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자원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백성들이 복을 빌었느니라"

3절 "예루살렘에 거주한 그 지방의 지도자들은 이러하니"
4절 "예루살렘에 거주한 자는 유다 자손과 베냐민 자손 몇 명이라"
6절 "용사"
10절 "제사장 중에는"
14절 "또 그들의 형제의 큰 용사들이니"
15절 "레위 사람 중에는"
17절 "그는 기도할 때에 감사하는 말씀을 인도하는 자가 되었고"
19절 "성 문지기는"
22절 "노래하는 자들은"
25절 "마을과 들로 말하면 유다 자손의 일부는"



Tuesday, May 8, 2012

벼랑 끝에 선 아이들, 교계에서 말하는 대안은?


성경원리에 따른  관심어린 대화로 ’ 풀어가야


OECD국가 중 청소년행복지수 최하위, 물질적 행복지수는 4위 가정신앙공동체 회복위해 자녀교육주도권 회복이 필요한 때 꿈도 많고 하고싶은 것도 많은 십대 어린시절. 오늘 하루 우리 자녀들은 행복한 하루를 보내고 있을까? 하루의 대부분을 가정과 교회보다 학원과 학교에서 보내는 아이들. 교육의 주도권이 가정과 교회에서 학교와 학원으로 옮겨진 오늘날 잃어가는 아이들의 행복과 신앙의 현주소를 살펴본다. .


‘아이들의 현주소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와 한국방정환재단에서 발표한 ‘2011 한국 어린이ㆍ청소년 행복지수 국제비교’ 조사에 의하면 한국 어린이ㆍ청소년 행복지수는 65.98점으로 OECD 23개국 중 최하위라고 발표했다. 행복지수 끝에서 두 번째인 헝가리(86.7점)보다도 20.72점 낮은 점수다. 그러면 물질적 행복지수는 어떨까? 4위로 의외로 높은 편으로 나타나 전체행복지수와 대조적 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조사 항목 중 ‘행복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에 대한 아이들의 선택 결과다. 초등학교 4학년의 경우 54.4%가 행복을 위해 ‘가족’을 택한 반면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은 26%가 ‘돈’을 행복을 위한 첫 번째 조건으로 선택했다. 8년 동안 아이들의 행복을 위한 가치관이 ‘가족’에서 ‘돈’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이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돈을 행복의 조건으로 선택한 학생이 3.1%에 불과했다는 사실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해볼 수 있다. 월간 ‘좋은교사’ 김중훈 편집장은 “우리나라 청소년 행복지수를 살펴볼 때 저개발국가나 내전을 겪고 있는 국가의 아이들보다 불행한 경우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어 “매년 7만여 명의 학생들이 학업을 중단하고 있고 그 수가 매년 증가하는 추세”라고 전했다. 또한 OECD 국가 자살률 통계 현황에 의하면 2010년 한 해 동안 국내에서만 초등학생 3명, 중학생 53명, 고등학생 90명, 총 146명의 청소년이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고 전했다. 조사단체는 자살을 시도한 경우는 훨씬 많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행복을 입에 담기도 전에 아이들은 그야말로 벼랑 끝에 서있는 셈이다. 그러면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대안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





‘원인은 가정공동체 붕괴 ’ 우려 확산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교육자원부 김명옥 목사는 ‘가정 신앙공동체’의 회복을 답으로 제시했다. 기독교 가정도 사회 속에서 맞벌이부부, 주말부부, 이혼율 증가 등으로 최소한의 기능만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 목사는 “오늘날은 사회 경쟁 속에서 뒤쳐질까 두려워 자녀교육의 자리를 국가와 교회에 일임한 채 스스로 보조하는 역할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고 평가했다. 자녀 교육의 주체인 가정과 지원을 하는 교회와 국가의 역할이 뒤바뀌어 버린 것을 지적한 것이다. “집만 있고 가정은 없는 깨진 가정공동체 속에 어린이들이 쇠락하고 있다”고 오늘의 가정을 진단한 김 목사는 “가정은 대부분의 기능을 상실한 채 아이들을 학교와 학원에 보내는 기능만 수행하고 있다”며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문제에 대한 원인으로는 가정 내 대화부족이 지적됐다. 대한성결교총회 교육국장 차희성 목사는 국무총리 산하 청소년보호위원회가 발간한 청소년 보호백서에 의하면 고교생 가운데 22%는 아버지와 대화하는 시간이 하루에 1분도 안되며 그 중 11%는 어머니와의 대화 시간도 1분에 못 미친다고 밝혔다. 인사나 안부와 같은 기본대화를 제외한 일상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1분에 못 미친다는 얘기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성윤숙 박사도 이와 같은 현상을 하나님이 창조한 건전한 가정의 붕괴에 원인이 있다고 설명했다. 성 박사는 “한 부모가정, 조부모가정, 빈곤가정을 포함해 방과 후 홀로 방치되는 아이들은 백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며 “예수님의 사랑으로 아이들을 이끌 수 있는 가정 내 해결방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오기표 목사도 부모의 무관심ㆍ무책임ㆍ무방비가 가장 큰 문제로 가정과 교회 간 자녀교육시스템이 연계되지 못한데 원인이 있다고 주장했다. 부모는 자녀 교육을 교회에 보내면 다된다고 생각하고 교회는 가정에 그 역할을 전적으로 넘기는데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


자녀교육 주도권 회복 

깨어진 자녀와의 관계, 무너져 가는 가정 공동체는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기독교대안교육센터 마병식 사무총장은 가정이 자녀교육의 주도권을 회복할 것을 강조했다. 오늘날 자녀교육의 중심이 국가와 교회, 가정 순으로 이루어져가는 현상을 다시 성경의 원리에 따라 가정과 교회, 국가 순으로 회복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마 사무총장은 “성경에서 말하는 어린이 교육의 분명한 첫 책임을 맡은 공동체는 가정이며 다음이 교회라는 언약 공동체에 있고 마지막 교육책임의 보루는 국가에 있다”고 규정했다. 이어 “기독가정의 자녀 양육은 가정의 신앙고백이라고 말하며 신앙을 바탕으로 아이에게 우선순위를 갖고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줄 수 있는 신앙 가치관이 필요한 때”라고 강조했다. 그는 거창함으로 다가가기보다 성경에 기초한 우선순위와 가치관을 삶과 대화에서 보여줌으로써 기본으로 다가갈 것을 권했다. 또한 오늘날 우리에게는 두 번째 거듭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는 첫 번째 거듭남에 이어 자녀교육에서도 성령님께서 인도해주실 것을 믿을 수 있는 또 한 번의 거듭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녀와의 관계 회복을 위해 부부 간의 관계 회복과정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주님의은혜교회 길미란 사모는 “회복된 부부 사이의 관계는 자연히 자녀와의 관계로 이어진다”며 관계회복을 위한 부부대화를 제안했다. 일주일에 한 번 두 시간씩 △한 주간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떠했는지 △자녀와의 관계는 어떤지 △지난 한 주간 마음속 근심과 힘든 점은 △배우자로서 내가 지금 도울 수 있는 일은 네 가지 질문사항을 중심으로 대화하는 연습 할 것을 권했다. 4ㆍ14 윈도우 한국협의회 허종학 장로는 “깨어진 가족공동체 회복이 무엇보다 필요한 이때 기독가정 내 가정예배를 통한 신앙공동체로서의 회복이 필요하고 기독학부모 운동을 통해 부모가 변화되어 깨어진 가정이 하나님 안에서 회복되어야 할 때”라고 전했다. 


-출처 : 이덕형 기자, 기독교연합신문 2012년 4월 27일자 기사에서

성공하는 사역의 7가지 특징 - 출처 : 목적이 이끄는 사역자료, 릭워렌 칼럼



기독교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리더 가운데 한 사람은 사도 바울일 것입니다. 바울은 휴대전화도 없었고 비행기도 없었으며 인터넷도 되지 않은 시대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 로마제국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에 큰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새들백교회의 릭 워렌 목사는 사도 바울의 삶에서 리더의 7가지의 특징을 발견하고.SUCCESS(성공)이라는 단어에 대입해 설명합니다. 이 7가지 특징이 바울을 기독교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로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그 중에서 우선 세 가지를 살펴 보겠습니다.
S- Sense of direction (방향감각)
U- Understanding (이해)
C- Commitment (헌신)
C- Compassion (긍휼)
E- Enthusiastic faith (열정적인 믿음)
S- Service to others (섬김)
S- Staying power (지속력)
S- Sense of Direction(방향감각)

여러분이 만약 어디로 갈 지 모른다면, 결국 아무 곳에나 가 있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롬 15:20). 바울은 선구자였습니다. 그는 이미 있는 교회를 이끌려고 하지 않았고 새로운 것을 시작하길 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어떤 종류의 사역으로 부르셨는가 라는 물음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미 바울은 그 사역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몇 년간은 어떤 일을 했다가 또 다음에는 다른 일을 하고 그 다음에 또 바꾸고 이런 식으로 살아갑니다. 그리고는 40,50,60세가 되어 뒤 돌아 보면 한 열 가지쯤 다른 일을 해 왔음을 알게 됩니다. 정확히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린 삶을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무엇 때문에 부르셨는가?”라는 질문에 즉시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삶 속에서 ‘왜’라는 질문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하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를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시작할 때 사역은 성공합니다.

U- Understanding (이해)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 4:12). 바울은 살아오면서 만족하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결코 쉬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은 목표를 가진 사람들이지만 어떤 상황에도 만족해야 한다는 말은 상당히 모순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목표가 없을 때 즉 목표를 다 이루고 나서 만족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어디를 가든지 목표와 함께 행복해 하는 것이 만족입니다. 목표에 도달하기 전까지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결코 행복해 질 수 없습니다.
실제적인 사역의 모습과 이상적인 사역 사이에는 항상 팽팽한 긴장감이 있습니다. 마음속에는 이상과 목표를 간직하고 있어야 하지만, 현실과 함께 살아가야 하고 그것 때문에 좌절해서는 안됩니다. 목회자는 교회가 안정되고 좋은 상태에 이르렀다고 해서 안주해서도 안됩니다. 늘 노력하고 움직이며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살후 3:5). ‘인내’와 ‘이해’는 항상 함께 하는 단어입니다. 사람들이 일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만두는 것은 그 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비전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소한 일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사역의 전체적인 그림을 보지 못합니다.
문제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했을 때보다 충분히 이해했을 때 훨씬 더 인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사역을 지속해주는 인내는 어디에서부터 온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말씀으로 채우십시오. 말씀이 여러분을 지혜롭게 할 것입니다.
C- Commitment (헌신)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4).
바울은 헌신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리고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 사람만이 주님을 따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우유부단 하지 말고 겁쟁이처럼 주저 하지 말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온전한 헌신을 드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단호하게 이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일에 헌신 하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을 섬기는 일에 자원하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을 드리십시오.

C- Compassion(긍휼)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 13:2-3). 
사랑이 없는 삶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마태복음 22장에서 예수님은 ‘사랑’이 우리의 첫째 되는 책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역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곧 선택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갖겠다는 헌신입니다. 성공적인 사역을 하고 싶다면,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골로새서 3장 12절에서 바울은 사역의 성공 비밀 한 가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긍휼을 옷 입으라” 이것이 바울의 사역을 성공적으로 이끈 비법입니다. 긍휼이란 무엇입니까? 긍휼이란 사람들의 필요에 민감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단순히 민감해 지는 것을 넘어서 그들에게 무언가를 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정은 “네가 아프다니 참 안됐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공감이란 “네가 아프니 나도 아프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긍휼은 “네 아픔을 멈출 수 있다면 내가 어떤 것이라도 해 줄께”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십자가에서 죽는 일이라도 말입니다.

E- Enthusiastic faith(열정적인 믿음)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롬 8:31b).
제가 바울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가 영원한 낙천주의자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태장으로 맞고, 돌로도 맞았으며, 파선하고, 옥에 수없이 갇히기도 하였지만 늘 긍정적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들을 하였고 또한 하나님께서 베푸실 위대한 일들을 기대하였습니다. 성공적인 사역을 하고 싶다면, 열정적인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소망을 가지십시오. 바울은 소망이 없는 불가능한 상황은 없다고 믿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에서는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고 고백 하였습니다. 바울은 열정적인 믿음으로 정말 그렇게 했습니다. 열정이 없이는 어떤 위대한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9장 23절 후반부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저를 비웃으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오렌지 카운티에서 교회를 짓기 위해 70에이커(약 85,694평)의 땅을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제가 교회에서 처음 예배를 드릴 때, “우리가 앞으로 최소한 50에이커(약 61,210평)의 땅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더니 사람들이 “우리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잘못된 질문입니다. 올바른 질문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십니까?”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사역의 크기를 결정하도록 하십시오.

S- Service to others(섬김)
효과적인 사역을 하고 싶다면, 다른 사람을 섬기십시오. “이뿐 아니라 그는 동일한 주의 영광과 우리의 원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 교회의 택함을 받아 우리가 맡은 은혜의 일로 우리와 동행하는 자라” (고후 8:19). 바울은 자신을 표현할 때 “그리스도의 종된 나 바울은”이라는 타이틀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섬김이 없이는 성공도 없습니다. 교회에서나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지 않고도 성공 했다면, 그것은 거짓이고 위조된 성공입니다. 진정한 성공이 아니고 보이는 이미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만나십시오. 사역뿐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성공하는 방법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하므로 재물을 사용하고 또 내 자신까지도 내어 주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사랑을 덜 받겠느냐” (고후 12:15). 바울이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섬김의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S- Staying power(지속력)
사역은 포기하고 싶어도 참아야 하는 것입니다. 문제가 있다고 해서 바로 포기해 버리면, 사역에서 어떤 일도 이룰 수 없습니다. 갖가지 어려움은 언제나 여러분 주변에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후 4:8-9). 바울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쉽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포기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좋은 예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4장에서 바울이 한 마을에 들어가 말씀을 전합니다.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듣기 싫어하여 그를 돌로 쳤습니다. 사람들은 바울이 죽은 줄로 알고 그를 시외로 끌어 내쳤습니다. 그 다음에 바울이 어떻게 한 줄 아십니까? 다음 마을에 가서 말씀을 다시 전했습니다. “저는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했는데 정말 낙심됩니다. 다시는 교회를 섬기지 않겠습니다. 아무도 제 사역에 대해서 감사해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그만 두겠습니다.”라고 바울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다시 일어났고, 다른 마을에 가서 지금껏 해왔던 일을 동일하게 했습니다.

사역의 최종 목적지는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역의 방향은 지금 즉시 바꿀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사역이 살짝 잘못된 방향으로 빗나가있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오늘 바꾸실 수 있습니다. S-U-C-C-E-S-S의 7가지 원리를 적용해 보십시오. 올바른 방향으로 다시 시작하도록 여러분을 이끌어 줄 것입니다.

출처 : 목적이 이끄는 사역자료, 릭워렌 칼럼

Saturday, May 5, 2012

완성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성취 - 신명기의 구조와 신학 - 송제근교수


 
- 그 말씀 2004년 1월호를 위하여 -
땅의 완성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성취
-신명기의 구조와 신학 -
宋 濟 根 교수   -  2004/6/19(토)


도 입

 성경 66권 중에서 가장 구조적으로 복잡하고 신학적으로 깊은 책이 신명기다.   신명기의 이러한 특성은 신명기 연구의 복잡성 혹은 난맥성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이런 난관을 뚫을 수 있는 연구의 기초는 아무래도 신명기 자체 속에 있다기보다 신명기와 가장 유사한 출애굽기, 특히 출 19-24장과의 관련성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두 책의 상관성은 오래 전부터 세 가지 관점에서 인식되었다 : 법, 신학, 구조.
 첫째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은 법의 상관성이다.  전체적으로 이 두 법체계는 (출 21-23장, 신 12-26장) 내용적인 유사성이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명확하다.  물론 일반적이고 거친 면이 있는 출애굽기의 법에 비해서 신명기의 법은 예민하고 구체적이며 대단히 설득적이다.
 둘째로, 법적 차원의 근본적인 내용으로서, 두 책이 신학적으로 상관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제일 특이한 점은 양자가 모두 신학적으로 언약(조약, berith)을 기초로 한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본인의 학위논문 시내산언약과 모압언약 (이레서원, 2004, 제2판 예정)에서 잘 드러내었다.  본인의 오경과 구약의 언약신학 (두란노, 2003)도 참조하라.
 물론 첫째 책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본격적인 언약으로서 첫째 언약인 시내산 언약을 다루고, 둘째 책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맺은 언약으로서 갱신된 언약인 모압(세겜)언약을 다룬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러나 셋째로,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구조에서 나타난다.  출애굽기는 사건의 진행순서를 따라서 역사서술적으로 묘사되어서 구조를 파악해  내기가 쉽다.  그러나 신명기는 설교적 혹은 제의적 맥락 S.R. Driver,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Deuteronomy, 1895, lxxvii-lxxxviii; M. Weinfeld, Deuteronomy and the Deuteronomic School, 1972, 320-365; G. von Rad, Deuteronomium, passim; J.G. McConville, Deuteronomy (Apollos Old Testament Commentary), 2022, 19,  반복적 단어와 용례사용, 특징적인 용어나 구절 사용 등이 그 특징으로 보인다.  6시간 정도면 낭독이 되는 히브리어 신명기 본문의 설교적 맥락은 아마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가 성전을 중심으로 예배를 드리는 상황과 관계되는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속에 - 심지어는 사건의 역사적 진행순서를 마음대로 변용하면서 - 그 신학적 내용이 완벽히 재편되었기 때문에 복잡한 구조를 띌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차이를 명확하게 의식하여서 신명기의 신학과 구조를 다루어야 할 것이다. 



1. 신명기구조의 특이성

1.1. 구조란 무엇인가 ? - 구조의 다중성 (多重性 Multiplicity)

 일반화된 용어인 구조라는 단어는 어떤 책이나 장이 어떻게 전체를 형성하고 있는 지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런데 구조는 주로 그 책이나 장이 전달하려는 핵심적인 내용인 신학의 구조로만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그 속에 기록된 원래 사건의 핵심적인 내용뿐 아니라 그것을 기록하는 현 상황에서의 목표와 관련된 구조가 있을 수 있다.  전자를 '신학적 구조'(theological structure)라고 할 수 있고 후자를 '상황적 구조'(situational structure)라고 표현할 수 있다. 두 가지 예를 들 수 있다.
    첫째로 출애굽기(특히 19-24장)와 신명기는 신학적으로 유사한 구조를 가지는데 그것은 언약체결 혹은 언약갱신체결이다.  그러나 출애굽기를 기록하는 현상황에서는 그것을 역사적, 연대기적인 순서로 기록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물론 이런 역사기록을 하는 Sitz im Leben이 어떤 것인지 재구성하기는 어렵다.  반면에 신명기를 기록하는 현상황에서는 그것을 철저히 재구성하여서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제시하는 것을 본다.
    둘째로 소위 신명기적 역사서로 불리우는 삼상하-왕상하와 역대상하는 모두 신학적으로는 언약적 구조를 가진다.  그러나 상황적 구조에 있어서는 차이를 보인다.  전자에서는 무너진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비판하고 역사의 책임과 회복의 가능성이 어디에 있는가를 살피는 상황적 구조를 가진다.  그러나 후자는 동일한 신학적 구조를 이스라엘을 재건해야 할 역사적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에게 다시 주어진 재건의 기회를 어떻게 제사장적, 제의적 기초에서 이룰 것인가를 다룬다. 

 '신학적 구조'(theological structure)는 그 장만 혹은 그 책만이 가지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성경전체 계시의 구조 속에 부분 혹은 전부를 형성하는 것으로 하나의 나무의 일부분을 형성하는 것과 같다.  이 신학적 구조들의 연관 안에 성경 계시의 통일성을 발견한다.
 '상황적 구조'(situational structure)는 그 신학적 뼈대 혹은 틀을 지금 기록되는 글의 현실적 상황을 위해서 재구성되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사건과 글은 역사성을 가지고 있고 후대의 기록은 반드시 전자의 단순한 반복은 아닐 수 있고 또 아니어야 하기 때문이다.


1.2. 신명기의 신학적 구조 (theological structure)

 신명기의 핵심적인 내용이자 근본뼈대라고 할 수 있는 신학적 구조는 신명기만의 독창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은 신명기가 성경의 다른 책과 공유하고 있는 것이고 이것을 통해서 성경 전체 계시역사의 대하(大河) 속에 신명기가 같이 흘러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명기가 출애굽기 특히 19-24장과 공유하는 신학적 근본은 언약체결이다.  그러나 거기에서는 언약체결이지만 여기서는 언약갱신이다.  즉 거기서는 최초의 언약으로서 시내산언약을 체결하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언약갱신으로서 모압(세겜)언약을 체결하는 것이다.  언약체결로서는 다섯 가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 (1) 언약당사자의공적 정의, (2) 언약당사자의 직접 대면, (3) 언약관계유지법, (4) 언약체결예식, (5) 언약체결 축하 피로연.
 이 근본구조는 성경, 특히 구약의 각 권의 신학적 구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의 각권은 이 근본구조를 자신들의 특수한 목적에 맞게 조정하여서 사용하였다. 여기에 대해서는 필자의 오경과 구약의 언약신학 (두란노, 2003), 제 2장을 참조하라.
 신명기도 마찬가지로 이런 구조를 자신의 제의적, 예식적 상황에 맞게 재조정하고 있으나 본질적인 구조의 요소를 다음과 같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 
 (1) 언약관계의 공적인 정의 : 신 26:17-19
 (2) 언약당사자의 공적인 대면 : 신 5:1-5,22
 (3) 언약관계유지법 : 신 5:6-21, 신 12-26장
 (4) 언약관계체결예식 : 신 27:1-8
 (5) 언약체결축하 피로연 : 신 27:7   
                                              
그러나 출애굽기의 비교에서 알 수 있듯이 출애굽기 속에서는 언약체결의 내용적 구조 자체가 출애굽기 서술 자체가 되었지만 신명기의 경우는 이런 근본적인 신학적 구조 위에 다른 구조가 씌워있다는 것이 중요한 차이이다.  예를 들어서 신 1-3장, 4장, 29-30장, 31-34장은 언약체결 그 자체의 구조를 넘어서는 것 혹은 구조 밖에 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외적 구조를, 물론 내적인 언약체결구조를 포함하는, 우리는 신명기의 상황적 구조라고 표현할 수 있다.


1.3. 신명기 상황적 구조 (situational structure)

 신명기의 이러한 상황적 구조는 출애굽기의 그것과 판이하게 다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판명될 수 있는 점은 신명기가 제의적/예식적이라는 특징과 설교적이라는 특징을 지닌다는 부인할 수 없는 점이다.
 우선 현재의 신명기는 제의적/예식적 상황을 반영한다.  전체가 거의 모세의 말을 인용하고 그 속에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인용되는 등, 수많은 인용으로 이루어진 것은 신명기가 읽는 책이 아니라 들려지는 말씀으로 사용되었던 것을 반영한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예가 소위 신언공식(神言公式 divine speech formular)가 그 어떤 책보다 많이 쓰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명확하게 창세기-민수기와는 다른 점이다.  사실을 알리는 기록식이 아니라 어떤 내용을 선포하거나 낭독하는 식으로 제시되었다는 점이 다르다.
 두 번째로 이와 유사하지만 이 점과 관련된 것이 신명기가 설교적이라는 점이다.  전체를 다 읽어도 6시간 정도 걸리는 것이라면 어떤 예식에서 공식적인 낭독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이 예식은 짧게 하는 현대적 예배가 아니라 일주일씩 걸리는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의 축제와 상관이 있을 수 있다.
 이런 특징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는 상황적 구조의 중요한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1) 신학적 핵심의 중요성 : 1-4:43 [A] // 4:44-29:1 [X] // 29:2-34:12 [A']
 (2) 핵심의 반복 : 4:45-11:32 // 12:1-28:68
 (3) 현재와 미래의 반복적 변화 : 4:45-11:32 (현재(모압)-미래(세겜))
                                12:1-28:68 (현재(모압)-미래(세겜))
 (4) 시간의 흐름 : 1-4:43(과거) - 4:44-29:1(현재) - 29:2-34:12(미래)
 (5) 봉투구조 1 (envelope figure) : 4:44 / 29:1 (MT 28:69)
 (6) 봉투구조 2 (envelope figure) : 1:1-4 // 34:1-12

1.3.1. 신학적 핵심의 중요성 : 1-4:43 [A] // 4:44-29:1 [X] // 29:2-34:12 [A']

 먼저 현재의 신명기의 신학적 핵심이 중심에 놓여지는 모습을 보인다.  신명기의 핵심은 이스라엘이 모압(세겜)에서 맺는 모압(세겜)언약이다.  이 내용이 근본적인 핵심을 이루도록 4:44-29:1까지를 중심에 배열하고 있다.  그 앞에는 (1:1-4:43) 이 핵심이 이루어지는 사실적 기초로서의 역사, 즉 시내산에서 모압에까지의 여정을 낭독체로 서술한다.  그 뒤에는 29:2-34:12)은 모압(세겜)언약을 맺고 난 뒤의 언약적 충성을 할 것을 2인칭으로 권고하고 권면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이렇게 핵심을 주위로 좌청룡 우백호로 펼쳐진 변두리를 명확하게 구분하고 정교하게 배열하고 있다.    

1.3.2. 핵심의 반복 : 4:45-11:32 // 12:1-28:68

 이렇게 중심에 배열된 신학적 핵심이 처리되는 방법이 특이하다.  그것은 중복적으로 처리되었다는 것이다.  즉 4:45-11:32까지와 12:1-28:68이 근본적으로 동일한 내용의 반복이라는 것이다.  그 내용이란 모압(세겜)언약의 체결이다.  언약을 체결할 때에는 법적요소와 제의적요소가 다 동원된다. 필자의 시내산언약과 모압언약(1998, 193f.)를 참조하라.
 법적요소의 두가지는 언약당사자의 공적인 관계정의와 언약법의 선포이다.  그리고 제의적 요소는 언약체결예식과 언약체결축하피로연이다.  이미 설명한대로 법적 요소는 모압에서 완성하고 제의적 요소는 세겜에서 완성하게 되어 있는 특이한 언약이 모압(세겜)언약이다.  현재(모압)에서 이루어졌으나 미래(세겜)에서 완성되어져야 할 언약이 바로 모압(세겜)언약인 것이다. 물론 이 반복은 무분별한 복사가 아니라 히브리시의 평행법의 원리를 따라서 만들어졌다.  즉 앞에서는 일반적인 내용을, 뒤에서는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내용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이 두 요소가 두 본문 4:45-11:32, 12:1-28:68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

                               <4:45-11:32>       <12:1-28:68>
  법적 요소 :
        (1) 언약관계정의 :       6:4                  26:17-19
        (2) 언약법의 선포 :      5:6-21              12:1-26:15
  제의적 요소 :
        (3) 언약체결예식 :       11:26-32            27:1-8, 28:3-6,16-19  
        (4) 언약체결축하피로연 : 11:26-32(암시)       27:7

 이렇게 반복되는 것은 다음의 두가지를 고려하면 이상한 일이 아니다 : (1) 핵심의 중요성, (2) 반복이 흔한 히브리 문학적 관습.

1.3.3. 현재와 미래의 반복적 변화 :
     4:45-11:32 (현재(모압)-미래(세겜))
     12:1-28:68 (현재(모압)-미래(세겜))

 이 구조와 필연적으로 관계되어 있는 점이 장소와 시간의 변화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명기의 핵심적 내용이 모압에서 시작되나 세겜에서 완성되어야 하는 특별한 언약인 점과 관계한다.  그래서 모압에서 세겜으로 다시 모압으로 또 다시 세겜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보인다.  장소의 변화뿐 아니라 시간의 변화에서도 동일하다.  현재에서 미래로 다시 현재로 다시 미래로 나가는 모습을 보인다.  다시 이것은 모세에 의하여 현재에 시작되었으나 여호수아에 의해서 미래에 완성되어야 할 언약의 모습을 보인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러면 이렇게 독특하게 배열된 이유는 무엇일까 ?  그것은 이미 필자가 밝힌 바와 같이 필자의 오경과 구약의 언약신학(두란노, 2003, 314f.)과 더 자세하게는 시내산언약과 모압언약(1998, 242ff.)을 보라
두 장소, 두 시간대를 걸쳐서 행해져야 하는 예식이기 때문이 이 예식이 둘이 아니라 하나의 언약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문학적 구조와 구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점이 학자들이 신명기의 통일성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혼돈하는 원인이다.  이것은 현대적 관점으로 고대의 책들과 제도들을 이해하려고 하였을 때에 생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3.4. 시간의 흐름 : 1-4:43(과거) - 4:44-29:1(현재) - 29:2-34:12(미래)

 다시 신명기 전체를 보면 시간상의 명확한 흐름을 볼 수 있다.  우선 핵심에 해당하는 4:44-29:1은 근본적으로 이스라엘이 이제 들어가서 살아야 할 역사적 삶의 현재를 다룬다.  물론 이것은 이스라엘이 들어가서 살아야 할 삶을 나타내기 때문에 엄밀하게 아주 가까운 미래이지만 이 핵심 속에서 사실상 이스라엘이 그 땅에 정착하였다는 것을 전제로 어떻게 살것인가를 구체적으로 다룬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실상 이스라엘의 삶의 현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앞의 내용(1:1-4:43)은 이스라엘의 과거의 삶을 여러 각도에서 다양한 장르를 사용하여 총정리한다.  우선 1:1-3:29까지는 호렙(시내산)에서 모압까지의 여정을 역사서술적으로 나타낸다.  그러므로 이것은 가까운 과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4:1-43까지는 설교적 맥락에서 현재에서 시간을 거꾸로 아주 먼 과거로 여행하는 모습을 본다.  즉 현재, 모압(4:3)에서 호렙(4:10)을 거쳐 애굽으로 간다 (4:20).  거기서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열조의 시간으로 가서 (4:32), 다시 거기서 최초의 역사의 시작인 태초(4:32)에까지 올라간다.    
 그리고 그 뒤의 내용(29;2-34:12)도 여러 가지로 이스라엘의 미래의 삶을 역시 다양한 장르를 사용하여 정리한다.  우선 31-34장은 이스라엘의 가까운 미래를 예언적으로 묘사한다.  이 속에 유명한 두 장, 31장과 32장이 시적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29-30장은 아주 먼 미래로 여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먼 미래를 나타내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당할 가장 먼 미래의 불길한 예언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이스라엘이 언약에 충성하지 못해서 하나님의 언약적 저주를 받아서 포로로 끌려가는 상황까지를 상정하는 것이다 (30:1).  그리고 이 장들은 대단히 설교적이고 교훈적이다.

 이것을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1) 시간의 흐름에 있어서는 순서는 명확하다 :
   과거 (1:1-4:43[A]) --> 현재 (4:44-29:1[X]) -->미래(29:2-34:12[A'])
 (2) 그 변두리의 시간적 변화는 독특하다 :
   1:1-3:29       4:1-43             29-30장    31-34장
   가까운 과거    먼 과거             먼 미래     가까운 미래
    [a1]          [a2]                [b2]        [b1]

 이렇게 해서 신학적 핵심(4:44-29:1)을 중심으로 동심원적 구조를 형성하는 것을 알 수 있다 : [a1] - [a2] - [X] - [b2] - [b1]

1.3.5. 봉투구조 1 (envelope figure) : 4:44 / 29:1 (MT 28:69)

 이런 구조를 형성하는 작지만 중요한 특징의 하나로 중요한 지시어 두개가 신학적 핵심을 주위로 봉투구조(envelope figure, inclusio)를 형성하는 것이다.  즉 4:44에 표현된 torah라는 단어와 29:1(MT 28:69)이 표현한 Moab berith란 단어이다.  이것은 신학적 핵심의 시작과 끝에 있어서 하나의 지시어로 역할(signal fuction)하는데 하나는 시작을 나타내며 다른 하나는 끝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 둘은 하나를 표현하는데 그것은 바로 이 토라(torah)가 모압언약(Moab berith)라는 점이다.  이 점은 4:44의 표현이 겉보기에는 4:45과 중복된 것같이 보이는 데서도 나타난다.  신명기같이 정교한 책이 불필요한 반복을 이은 절에서 할 수가 없으므로 이것은 저자의 의도적인 반복으로 보아야 할 것이고, 이것이 바로 신명기가 신명기의 핵심을 지칭하는 진정한 내용은 토라(torah)이며 그 구체적인 내용은 모압(세겜)언약이라는 것이다. 

13.6. 봉투구조 2 (envelope figure) : 1:1-4 // 34:1-12

 여기에 또 다른 봉투구조가 보이는데 이것은 앞에서 말한 봉투구조보다 더 외곽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의 신명기의 시작과 끝에서 보이는 모세를 3인칭으로 서술하는 부분이다 : 1:1-4 // 34:1-12.  전자는 모세가 모압에서의 특별한 활동의 시작을 알리고 후자는 모세의 죽음을 다룬다.  이 두 부분은 그 안의 내용을 모두 포괄하여 운송하는 보자기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 안에서는 실제로 모세가 거의 모든 부분에서의 서술자로 등장한다.  이것은 신명기의 시작과 끝이 모세의 모압에서의 활동과 그 끝으로 이루어짐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우리가 신명기의 이러한 독창적이고 전무후무한 상황적 구조를 형성하는 것에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전통 위에 서 있음 : 우선 신명기는 출애굽기에서 민수기까지에 포괄적으로 표현된 시내산언약의 기초 위에 확실하게 서 있다.  그 본래의 내용을 결코 벋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쉽게 언약법의 핵심인 십계명의 거의 그대로의 반복에서 볼 수 있다 : 출 20:1-17, 신 5:6-21.  그리고 언약관계 당사자의 공적인 정의에 대한 표현에 있어서 알 수 있다 :   

   출 19:5-6 :   보배  -----  제사장 나라            --- 구별된 백성
                 (segullah)                                 (goi qadosh)
   신 26:18-19 : 보배  ----- 칭찬,명예,영광 / 지존자  --- 구별된 백성
                 (segullah)                   (elyon)       (am qadosh)

 (2) 반복이 아닌 진정한 발전 : 그렇다고 해서 신명기는 단순한 반복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속에 진정한 역사적 발전을 담고 있다.  십계명을 표현해도 그 속에 진정한 발전을 볼 t수 있는데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제 4계명이다.  더 구체적으로 법을 다룸에 있어서도 훨씬 더 구체적이고 발전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즉 출 21-23장까지가 시내산언약의 세부법이라면 신 12-26장 전체가 모압언약의 세부법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두 법체계의 근본적인 내용은 동일하게 십계명의 구조를 따르고 있으나 신명기는 훨씬 더 구체적이고 자세한 모습을 보인다.  또 같은 언약적 축복과 저주이나 시내산언약의 축복과 저주(레 26장)에 비하여 풍성하고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신명기의 축복과 저주이다 (신 28장).

 (3) 독창적인 내용과 표현방식들 : 신명기의 내용과 표현은 독창적이다.  예를 들어서 시내산언약에서 제사장 나라(출 19:6)라는 용어를 칭찬-명예-영광 그리고 지존자로 풀어서 표현함(신 26:19)으로 그 의미를 명확하게 드러내었다.  출애굽기에서 십계명(출 20:1-17) 어서 바로 세부법(출 21-23장)이 주어졌으나, 신명기에서는 십계명(신 5:6-21)과 세부법(신 12-26장) 사이에 긴 강화 내지 설교가 포함되어 있다 (신 6:4-11:32).  이것은 신명기에 아주 흔하게 나타나는 설교적 표현들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 현실(재)적 목적에 충실함 : 신명기는 이 책이 만들어지던 상황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고 그 현실적인 목회적 목적에 부응하는 내용과 구조를 가진다.  신명기는 전체적으로 설득적이다.  심지어 법 항목을 표현함에 있어서도 고대법에 비하여 엄청나게 높은 동기절(動機節 motive clause)의 사용비율이 높음을 통하여 이 선포와 낭독을 듣는 이로 하여금 행동하도록 유도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설교적인 신명기의 모습과 일치하는 것이다.

 (5) 신명기는 읽혀지는 책이 아니라 낭독되고 들려지는 책 D.L. Christensen, Deuteronomy 1:1-21:9 (WBC), ci.
: 이런 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신명기는 읽혀지는 책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책은 의도적으로 공적인 예배적 상황 속에서 낭독되고 들려지도록 만들어졌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점이 신명기가 신학적 내용에 있어서도 독특할 뿐 아니라 상황적 구조나 형식에 있어서도 완연히 구분되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2. 신명기의 신학

2.1. 신명기신학의 기초로서의 사경(四經 tetrateuch)

 신명기의 내용은 사경(tetrateuch)과 상관이 있는 점은 명확하다.  그 중에서 핵심으로서의 언약적 상관성은 필자가 명백하게 지적하였다. 오경과 구약의 언약신학 (2003, 13-55)을 참조하라.
 즉 창세기는 족장언약을, 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는 시내산언약을 나타내고 신명기는 모압언약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 언약들이 모두 하나의 목표인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성취하려고 한다.  창세기의 족장언약은 하나님 나라의 씨와 땅이 준비완료되는 것을 드러내고, 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의 시내산언약은 하나님의 나라의 씨가 완성되는 것을 나타낸다.  이에 비해서 신명기의 모압언약은 땅의 완성을 나타낸다.  이렇게 해서 다섯 책이 하나를 이루어서 하나의 총체적인 목표를 이룬다.  이 점에서 신명기는 독창적이기는 하나 선배의 기초  위에 명확하게 서고 있다.
 특히 신명기는 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의 기초 위에 선다는 것은 이미 많이 지적되었다.  시내산언약은 최초의 언약으로서 가치를 가지지만 신명기의 모압언약은 갱신되는 언약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특히 신명기에서 언약형성에서 시내산언약을 전제로 하고 있는 부분은 언약당사자의 직접대면이라는 부분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언약의 당사자로서의 이스라엘과의 만남은 시내산에서 최초로 이루어졌고 그 다음에 이어지는 언약갱신은 모두 이 언약의 만남을 전제로 한다.  신 5:2-5에 나타난 소위 열조의 역사의 ‘현재화’(Vergegenwaertigung, actualization)는 바로 이런 점을 잘 나타내는 것이다.  그 때 그 시내산의 언약체결의 현장에 이미 후대에 있는 이스라엘이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이 법적인 관련성인데 그 중에 차이가 나는 가장 중요한 점은 출애굽기에서는 공적 예배장소의 복수성(출 20:24)을 나타낸 반면에 신명기에서는 예배의 중앙집중화를 표방한다 (신 12장).  이러한 차이를 여러 가지 신학적 배경을 따라서 해석하는 전통이 주어졌으나 두 본문의 실제적인 차이를 그대로 일단은 반영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출애굽기의 본문은 이스라엘에게 아직 그 땅이 주어지는 상황이 아닌 가운데 주어진 것이나, 신명기의 경우는 이스라엘이 이제까지 살던 성막을 중심으로 하던 삶을 중지하고 다양하게 흩어진 삶을 살아야 하는 경우를 반영하고 있다.  그럴 경우에 언약공동체가 하나로 될 수 있는 상황을 아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배처소의 단일화로서 할 수 있는 것일 것이다.


2.2. 신명기의 언약적 기초로서의 모압(세겜)언약

 이제 신명기의 핵심부분(신 4:44-29:1)에 담긴 신학에 대해서 살필 때가 되었다.
 신명기의 모압(세겜)언약은 실체성은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도깨비같은 언약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신명기의 ‘모압언약’(신 29:1)이라는 표현은 실체적이고 그 실체의 구체적인 내용은 신 4:44-29:1에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시내산언약과 모압언약 (1998).
 거기서 명확하게 호렙(시내산)언약의 실체성 외에 모압언약의 실체성을 인정하고 있는데, 주로 학자들에게 어려움은 시내산언약과 모압언약의 상관관계였다.  신 5:2-5에 나타난 시내산의 언약맺는 현장에 왜 현세대, 즉 출애굽 제 2세대가 거기 그 시간에 원리적으로 있었다고 표현하는 지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의 연구에 의하면 출애굽 당시의 시내산언약의 원리를 그대로 응용하는 모압언약의 성격 때문에 그러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당시의 것을 거의 그대로 응용하는 것이 시내산언약 만이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속에는 그 후대에 이루어질 언약의 구체적인 내용이 포함되었으므로 그것에 근거하여서 언약갱신을 이루는 것을 표현할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압언약을 표현하는 중심부분인 신 4:44-29:1에서 수많은 '신언공식'(神言公式 divine speech formular)를 볼 수 있다.  모압언약의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2.2.1.  언약당사자의 공적 관계정의 (신 26:17-19)

 이 점은 시내산언약의 그것보다 훨씬 더 정교하게 표현되었다.  시내산언약의 경우는 거의 하나님 편에서의 언약관계적 표현을 한다 : 출 19:(1-4)5-6(7-8).  그러나 신명기의 경우는 언약의 양당사자의 입장이 골고루 고려되어 있다 : 신 26:17-19.

 신 26:17 : 이스라엘의 편에서의 여호와의 언약적 위치로서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된다는 선포를 한다.
 신 26:18-19 : 여호와 편에서의 이스라엘의 언약적 위치로서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보배(am segullah), 칭찬,명예,영광/지존자(elyon), 탁월한(거룩한) 백성
            (am qadosh)이 됨을 선포한다.

 이 선포는 모압언약을 세울 때에 새롭게 한 것이라기 보다 시내산언약에서 이미 형성된 관계를 원리적으로 부연하면서 재설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언약관계는 영원히 고정되기 때문이고 필요한 것은 상황마다 그 원리적 선언을 재사용, 재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2.2. 언약당사자의 공적인 대면

 이 부분 역시 모압언약에서 새롭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이미 시내산언약에서 이루어진 사실을 근거로 해서 부연 설명하는 것만이 주어졌다 : 신 5:3-5.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였고 직접 음성을 들은 사실의 심각한 경험성은 강하게 표현되었다 : 신 5:23-27.  그 경험이 바로 다른 사람들의 경험이 아니라 현재 이 모압 땅에 서 있는 출애굽 제 2세대에 하신 것이라는 소위 ‘역사의 현재화’(actualization)의 과정을 통하고 있다.

2.2.3. 언약법의 선포

 언약법은 두가지 형태로 표현되었다.  하나는 직접적인 하나님의 선포요 둘은 그것에 대한 세부법을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아가지고 오는 것이다.  이 두가지가 표현되는 양식에 있어서는 시내산언약의 상황과 같으나 (출 20:18-22), 모압언약에서 새로운 차원이 소개되었다.  그 새로운 차원은 모세가 적극적으로 자신의 대리적 선포의 권위를 사용하여서 자신의 말로 백성에게 세부법을 선포하고 설명한다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이 직접 선포하신 언약법으로서의 십계명의 절대적인 권위는 부인할 수 없다 (신 5:6-21).  그것은 약간의 차이를 제외하고는 시내산언약의 그것과 거의 그대로 표현되었다 (출 20:1-17).  그러나 그 약간의 차이는 제 4계명에서 발견하는데 그것은 신명기의 모압언약법의 법정신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것이다.  즉 안식일 계명의 기초가 창조가 아니라 재창조, 출애굽이 됨으로 훨씬 더 우리의 행동의 기초가 역사적이 된다.  그래서 모압언약세부법이 담긴 신 12-26장에서 출애굽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해야 할 많은 종교적 윤리적 행동의 기초 원리가 됨을 알 수 있다.    
 또 둘째로 모세를 통해서 간접으로 선포하신 세부법(신 12-26장)도 원리적으로 직접 선포하신 법, 십계명(신 5:6-21)에 근거하는 것은 시내산언약법과 동일하다.  그러나 그 세부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훨씬 더 확대되었고 자세하며 설득력있게 표현되었다.  무엇보다도 신 12-26장에 표현된 세부법은 하나님에게서 모세가 받아오는 면(신 5:31)보다 그것을 전제로 하는 면이 두드러졌다.  오히려 모세 자신의 말로 그 법들은 백성들에게 절대적 권위로 선포되었다.
 무엇보다도 독특한 면은 모세를 통한 세부법이 주어지기 전에 (신 12장), 모세의 긴 설교와 같은 것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 신 6-11장.  이것을 소위 주요법(主要法 Hauptgebot)라고 밖에 표현하지 못했고 앞 뒤 문맥과의 상관관계는 설명되지 못했다. N. Lohfink, Das Hauptgebot. Eine Untersuchung literarischer Einleitungsfragen zu Dt 5-11, Rome, 1963.
 이제 우리는 전체 구조에서 이것을 다음과 같이 배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신 4:45-11:32까지의 모압언약에 대한 일반적인 묘사와 12:1-28:68까지의 세부적인 묘사 속에 평행법적 반복을 이루며 대칭을 이룬다.  즉 신 5:6-21과 신 6:4-11:25까지에서 모압언약의 법적요소가 일반적으로 표현되었는데 비해서 신 12:1-26:15에서 모압언약의 법적인 요소가 세부적으로 묘사되었다.  그런데 신 6:4-11:25까지에서 시내산언약에서는 없는 모세의 긴 설교 혹은 강화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신명기가 모세 자신의 권위적인 말로 표현된 것과 관계한다. 

2.2.4. 언약갱신예식체결

 이 요소와 아래의 요소(2.2.5.)는 신명기에서 크게 부각되지 못한 것은 신명기의 주요관심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가서 해야 할 법적인 행동에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후자의 요소가 극단적으로 축소된 것을 알 수 있다 (신 27:7뿐 “여호와 앞에 즐거워하라”).  언약갱신예식이 체결될 장소는 여기, 모압이 아니라 세겜이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강조되어야 할 요소는 여전히 법이었다.
 먼저 신 27:1-8에서 언약갱신예식을 체결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법의 수행과 기록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27:1,3,8) 그리고 강조해서 (27:8 “명백히 기록할지리니라”) 표현한다.  이어서 언약적 축복과 저주의 선포(신 28:3-6,16-19)와 그것에 대한 모압에서의 모세의 부연설명(신 28:7-14,20-68)에 있어서도 얼마나 언약법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가를 설명한다.  또 백성이 해야 할 서약(dodeca-logue 신 27:15-26)에 있어서도 그 시대에 당장에 필요한 법적인 요소가 구체적으로 강조되었다. 이런 것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필자의 시내산언약과 모압언약(1998), 3.9., 3.10.을 참조하라.

2.2.5. 언약체결축하피로연

 이것도 장차 세겜에 가서 여호수아의 지휘하에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가장 들 강조된 부분이다 (신 27:7, 수 8:30-35, 비교 출 24:9-11).  그러나 명백히 이 요소가 언약체결시에 있어야 할 것이었다.  그래서 위의 요소와 함께(2.2.4.) 이 요소가 명백히 여호수아의 영도하에 행해졌을 것이나, 정작 여호수아서에서 이 요소가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요소가 행해지지 않았던 것은 아닐 것인 것은 축제와 즐김이 중요한 고대의 예식이기 때문이다.


2.3. ‘땅의 신학’으로서의 신명기 신학

 이런 기본적인 언약신학의 요소 외에 신명기 만이 독특하게 가지고 있는 신학적 요소가 있는 데 바로 땅의 신학이라는 점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 신학자들이 많이 언급하였으나 그 이유에 대해서 소개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앞의 시내산언약과의 상관관계나 창세기의 족장언약과의 상관관계를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고, 더 나가서 언약과 하나님 나라의 상관관계를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 나라가 역사 속에 구현되려면 반드시 세 요소가 있어야 한다 : 국민(씨), 주권(뜻), 영토(땅).  이 요소를 구현시키는 역사적인 방법과 수단이 바로 인격당사자인 여호와와 이스라엘이 맺는 언약이다.  구약시대에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일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행동하신다.  즉 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의 시내산언약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씨의 완성을, 신명기의 모압언약에서는 땅의 완성을 이루신다.  그러므로 시내산언약이 독자적이지 않고 모압언약을 필요로 하듯이 모압언약도 시내산언약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두 언약이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이루는 데, 이 둘이 합쳐서 하나님 나라의 씨와 땅의 완성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이 두 요소가 완성되려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을 현재적으로 이루어야 한다.  이 현재적 요소에 있어서 칼과 같이 명백함을 시내산언약에서나, 모압언약에서 볼 수 있다. 
 즉 신명기는 그 땅을 소유할 것을 전제로 하고 그 땅에서의 구체적인 삶의 다양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므로 씨의 완성의 요소가 강한 시내산언약 세부법의 간략한 모습보다 모압언약 세부법이 자세할 수 밖에 없다.  신명기에서야 말로 이제는 이스라엘이 완전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구현할 수 있게 된 상황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여러 가지 구체적인 상황 중에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이,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모압언약 세부법 중에서 가장 먼저 표현된 예배처소의 중앙집중화이다 (central sanctuary law 신 12장).  즉 땅을 정복하고 난 뒤에 흩어져서 살게 되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12지파가 하나가 된 언약공동체를 이룰 것인가의 문제는 아주 중요한 관건이기 때문이다.  이 역시 신명기에서 중요한 땅의 요소라는 거점 때문에 특별히 주어진 법이라고 볼 수 있다. 


2.4. 신명기의 역사철학 (4:29-30, 30:1-10)

 이제 신명기의 중심부(신 4:44-29:1)를 벋어나면서 외곽에 위치한 내용들의 의미를 볼 때가 되었다.  이 내용들은 이미 말한 것과 같이 신명기의 독특한 상황적 구조(situational structure) 속에서 주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신 4:29-30, 30:1-10에 나타난 신명기의 특별한 역사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 양 본문이 놓인 장들은 역사를 앞뒤로 거슬러 올라가거나 앞으로 멀리 진행하는 모습을 보인다.  즉 신 4장은 현재 모압 땅에서 역사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서 창조까지 이르며, 29-30장은 역사를 미래로 나아가서 이스라엘의 먼 미래인 이스라엘의 멸망과 포로됨까지를 다루고 있다.  이런 양자의 시간의 확장 속에서 일어나는 특별한 교훈이 바로 4:29-30과 30:1-10에 나타난 신명기의 역사철학이 보이는 부분이다.
  이 둘은 동일하게 인간의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두 가지 의지의 현실화와 관계되는 데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의지이다.  하나님의 뜻만이 나타나면 역사는 인간에게 무의미하고 인간은 로봇과 같은 존재가 된다.  반면에 인간의 의지만 발현되면 그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허무와 무의미 밖에 없게 된다.
 이제 언약으로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이것이 적용되는데 특별히 이스라엘이 한계상황 속에 처했을 때에 그러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멸망과 포로생활이다.  이런 상황속에서도 역시 바랄 수 있는 것은 두가지인데 이스라엘의 행동과 하나님의 행동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파멸이라는 이 역사적 난관을 뚫고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있는데 그것은 이 두 행동주체가 서로 가진 특별한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언약관계와 그 속에서 표현되는 원리인 인자와 성실(chesed we-emet)이다.  언약의 양주체는 이 원리 속에서 움직여야 한다.  이스라엘의 파멸이라는 절대적 위기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아야 할 것은 언약적 성실함(emet)으로 언약법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러나 언약의 다른 당사자인 여호와 편에서 언약적 자비(chesed)를 베푸실 날은 이스라엘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 있다.  이러한 변증법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상황타개의 긴장된 모습이 양 본문 속에 드러난다.  즉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도(신 4장), 역사를 미래까지 전개해도(신 29-30장) 이 긴장을 인간은 벋어날 수 없고 오히려 그 속에 충실할 때에 역사가 해방되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그런데 신 4:29-30은 어느 정도는 이 열쇠를 표현하고 있으나 30:1-10만큼은 자세하게 표현하고 있지 못하다.  신 30:1-10은 이 두가지를 특별한 방식으로 표현한다.  이스라엘 편의 언약적 의무인 언약적 자비(chesed)를 두 번 표현한다 (신 30:2,9-10) :

    이스라엘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순종하면”
                  ---> 여호와가 회복케 하시리라 

이것은 조건과 결과라는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즉 이스라엘이 언약적으로 다시 순종할 때에 하나님의 자비가 맛보아질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중간에 있는 신 30:6에는 하나님의 자비는 이스라엘이 이런 조건을 채우지 않는 데도 부어지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이것은 거의 하나님 편에서의 무조건적 자비베푸심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역사의 현실 속에서 이런 것이 가능한가 ?  하나님은 인간을 조롱하시는 듯이 역사를 조정하시는가, 아니면 역사는 인간편의 활동으로만 충만한가 하는 선택적 질문에서 우리는 너무 쉽게 둘 중의 하나로 빠지는 것은 아닌가 ?  특히 여호와와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관계 속에서 역사는 어떻게 이렇게 진행될 수 있는가 ?  하나의 대답은 여호와는 자신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의 개별적 모습에 대해서는 철저한 언약적 심판을 행할 수 있지만, 총체적 이스라엘은 전멸시키실 수 없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다” (애 3:22).  이것이 언약적 자비의 실체이다.  그러므로 구체적인 이스라엘마다 이런 하나님의 마지막 자비를 경험할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것은 총체적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역사요 궁극적인 하나님과 언약의 승리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개별 이스라엘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가 있다.  그것은 총체적, 거시적, 초역사적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지막 자비가 주어지고야 만다는 것을 믿고 혹시 자신의 시대에 경험될 수도 있다고 기대하며 그 기대를 후손들에게 전하는 일이다.  그 기대가 성취될 때에는 우리가 가장 어려워하던 일이 일어날 것이다.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마음에 할례를 베풀어주시는 것이다.  이것은 그렇게 예언자들이 앞으로 호통치면서 이스라엘의 책임으로 선포하던 것이 될 것이다.  육체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자비로 이루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이 놀라운 복음은 장차 후대에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 진행하는 동안 이 복음을 기대하면서도 개별 이스라엘의 역사적 책임의식은 조금도 죽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앞으로 수천년의 역사를 이어가면서 지고가야 하고 궁극적 승리를 기대할 수 있는 역사의식인 것이다.  이 역사의식은 특히 앞으로 예언자들의 고통스러운 개인적 삶과 심판받으나 궁극적인 미래의 승리를 확신하는 공동체를 향한 선포 속에서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3.5. 신명기의 상황적 구조에 나타난 삶의 정황 : 정기적 언약갱신축제 (31:9-13)

 신명기의 상황적 구조(situational structure)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고대의 삶의 정황(Sitz im Leben)은 정확하게 재구성하기는 극히 힘들다.  우선 성경이 이런 것에 대한 적극적인 증거를 말하지 않기 때문이고, 고대 근동의 제의들로 성경을 재구성하는 데 동원할 수 없을 정도로 이스라엘이 여호와와 맺은 언약관계는 아주 독특하기 때문이다.

3.5.1. 독특한 문서조항 (document clause) : 정기적 언약법의 공적인 낭독 (신 31:9-10)

 그러나 이런 삶의 정황을 설명하는 구체적인 요청이 본문 자체에서 일어난다.  즉 신 31:9-13의 내용은 조약문에서의 소위 ‘문서조항’(document clause)과 관계한다.  조약, 특히 종주권조약(suzerainty treaty)을 맺은 약한 당사자 국가(왕)는 그 조약문을 정기적으로 꺼내서 공적 예식에서 낭독(봉독)하게 되어 있는 의무조항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이것과 유사한 것이 신 31:9-13에서 발견된다.  이스라엘은 토라를 제 7년 즉 정기면제년 초막절마다 정기적으로 꺼내어 봉독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하여 H. Gunkel - S. Mowinckel - G. v. Rad를 이으면서 하나같이 학자들은 7년을 1년으로 본문을 수정하고 그 이유로 고대근동의 매년제(Thronbesteigungsfest)에서 이것이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근동의 매년제와 이스라엘의 7년마다 하는 이 제의는 성격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고대 근동의 매년제는 신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자연현상에 절기를 맞춘 자연종교의 모습을 가진다면, 고대 이스라엘은 언약과 언약법의 수행이라는 역사적 행위에 특정절기를 지정하는 역사적 모습을 지닌다.  새해가 출발되는 일반적인 초막절이 아니라 매 7년마다 하는 정기면제년 초막절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초막절을 보통의 초막절과는 다른 독특한 것이 되는 것이다. 
 이 절기를 우리는 언약갱신축제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축제의 편린을 우리는 시 24, 50편에서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 필자의 오경과 구약의 언약신학 II (두란노, 2004 예정)을 보라.


3.5.2. 재구성해 본 삶의 정황(Sitz im Leben) : 길갈전승 가설
  
 그러면 이러한 해석이 역사적인 사실로 있을 수 있는 삶의 정황은 어떻게 설정할 수 있을 것인가 ?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구체적인 증거 부족으로 재구성은 거의 불가능하나 가설로 재구성해 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소위 ‘길갈전승’이다.  이 가설은 이스라엘의 7년 정기면제년 초막절마다 진행되는 언약갱신의 축제기간에 이스라엘이 출(出)애굽-입(入)가나안의 역사를 재현하는 것을 기초로 한다.  즉 가나안 정복의 초기에 중요거점이었던 길갈에서 나중에 이스라엘의 중심이 될 증거막이 유하던 곳, 그 중에서도 예루살렘까지의 순례행진과 같은 것을 행했을 것이다.  그 때에 가나안 입성 때와 같이 증거궤를 제사장들이 메고 행진을 했을 것이다.  증거궤를 메고 중심도시인 실로나 예루살렘에 들어올 때에 시편 24편과 같은 것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시 24:7,9).  그리고 그 성에 도착하고 나서 증거궤 속의 언약의 책(seper haberith)이 봉독되는 가운데 예식이 7일 정도 진행될 것이다.  실제로 6-7시간이면 낭독이 끝날 수 있는 신명기의 양이 7일동안 전개되는 초막절의 행사에 적당할 것이다.  소위 ‘레위인 설교자’(levitical preacher)들이 자연스럽게 등장하여서 봉독된 언약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설명하였을 것이다.  이런 모습들이 자연스럽게 느 9장과 같은 언약갱신과 같은 후대의 역사에 반영되었다.  그러나 이 속에도 생길 수 있는 위선과 타락에 대한 경고가 시편 50편 같은 곳에서 주어졌다.  

 그래서 우리는 신명기의 상황적 구조에 나타난 신학적 내용인 언약갱신축제는 여전히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적 원리 속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그것이 행해지는 의 정황으로서의 길갈전승가설을 통해서 우리는 설명 가능한 다음 단계의 증거를 찾아야 한다는 의무를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