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May 15, 2012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를 그리다 - 렘브란트



렘브란트 하르먼스존 판 레인 (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년
바로크 시대의 네덜란드 화가이다. 일반적으로 그는 유럽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이자 판화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지며 네덜란드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이기도 하다. 예술 분야에서, 그의 기여는 역사가들이 소위 네덜란드 황금 시대라고 부르는 시대를 불러오게 하였다. 렘브란트는 1606년 7월 15일 암스테르담 서쪽으로 약 50km 떨어진 레이던에서 방앗간 주인의 아홉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모친은 가톨릭 신자이고,렘브란트는 개신교 신자였다.렘브란트는 화가가 되었을 때에 모친이 성서를 읽는 모습을 그림에 담아냄으로써 신심이 진지한 모친에 대한 존경을 보였다. 라틴어를 가르치던 학교를 나온 후, 렘브란트는 14세에 레이던 대학교에 입학 하였다. 렘브란트가 학교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그림 그리는 일에만 열중하자, 그의 부모는 야콥 판 스바넨뷔르흐(Jacob van Swanenburgh) 밑에서 3년간 미술 수업을 받게 하였다.
 
 
 
 
 

1625년 개인 화실을 연 직후, 암스테르담에서 활동하던 피테르 라스트만(Pieter Lastman)을 정기적으로 방문해 지도를 받으면서 미술에 관한 시야를 넓혔으며, 이를 계기로 1632년 거처를 암스테르담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 때 외과 의사 조합의 주문으로 <툴프 박사의 해부>를 제작하여 초상화가로서 명성을 떨쳤다.
The Night Watch or The Militia Company of Captain Frans Banning Cocq, 1642. Oil on canvas


1642년 <야경>을 제작하였으나, 그 당시에는 극히 나쁜 평을 받아 초상화가로서의 명성을 잃었다. 게다가 같은 해에 아내마저 죽자, 실망과 곤궁에 빠지게 되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작품에 정열을 기울였다. 1656년 파산 선고로 유대인 지구에서 가난에 시달리는 생활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작품을 계속 발표하였다. 끼니마저 굶는 만년의 비참한 삶에서도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을 부어놓은 듯한 독특한 그림을 제작하였다. 하지만 <야경> 제작 이후 무너진 그의 화가로서의 삶은 끝끝내 회복되지 못했고, 결국 1669년 암스테르담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였다.


Self Portrait with Beret and Turned-Up Collar, 1659

기자: 안녕하세요, 갓피아 여러분. 꽃피고 따사로운 봄, 분위기 잡으며 미술관 가기에 딱 좋은 날씨입니다^^ 오늘은 이런 분위기에 어울리는 거장 한 분을 모셔봤는데요, 안녕하세요 렘브란트 선생님!
렘브란트: 안녕하세요, 기자님 그리고 갓피아 여러분.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Q1. 선생님의 작품은 오늘날 ‘네덜란드의 황금시대’를 불러온 장본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요, 본인의 이런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1640, wearing a costume in the style of over a century earlier.

A1.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야 그림만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니, 결론적으로는 제 그림이 나쁘지 않았다는 말이 되겠군요. 그것 참 감사한 일입니다(웃음). 그러나 제가 그림을 그리던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그 때 그림을 그리던 저 자신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평가입니다.



Q2. 선생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요?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c. 1669

A2. 제가 살던 17세기 네덜란드는 칼뱅주의(Calvinism)의 영향이 지대하던 곳이었습니다.
엄격한 칼뱅주의자들은 성서를 시각화 시키고, 이미지화 시키는데 혐오의 눈길을 보냈었죠. 기존 가톨릭 교회의 화려했던 예술 장려 사업에 비해 굉장히 상반되는 입장이었죠. 실제로 가톨릭의 활발했던 성서화 작업이 오늘날까지 유명한 루벤스, 베르니니와 같은 화가를 낳았고, 바로크 양식이라는 웅장한 화법을 남긴 거죠. 그러나 비 가톨릭교도였던 제가 성서화를 그리는 것은 그다지 환영 받지 못했던 상황이었음을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끊임없이 저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붓을 들도록 만들었던 원천이었습니다.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가득한 지식의 보고였고, 그 안의 인물들과 대화하며 제 안의 열정을 다시 발견할 수 있게 하는 끝없는 자극제였던 셈입니다. 주변의 따가운 시선이 부담스러웠고 그림을 찾는 사람은 적었지만 저는 끝까지 성서화를 그리는 것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Q3. 이제 본격적으로 선생님의 그림 이야기로 넘어가 볼까요? 방금 성서화를 그리는 것에 굉장한 매력을 느꼈다고 하셨는데요, 성서와는 관련이 없는 그림도 몇몇 눈에 띕니다. 성서화는 아니지만 유명한 <아르테미시아>에 대한 설명을 좀 해주시겠어요?


Saskia as Flora, 1635

A3. 제가 성서화에 무한한 매력을 느낀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 말고도 사랑한 모델이 또 있었으니, 바로 제 아내 사스키아입니다.
말씀하신 <아르테미시아>는 제 아내를 모델로 그린 그림이지요. 사실 이것 말고도 사스키아를 모델로 그린 그림은 많습니다. 모델료를 지불할 만큼 넉넉한 상황이었던 적이 별로 없었거든요. 하지만 이 <아르테미시아> 안에는 아내에 대한 저의 사랑이 고스란히 녹아있다고 보셔도 됩니다.
아르테미시아는 소아시아 카리아의 페릐아 행정관 마우솔로스의 아내였지요. 남편이 후손 없이 죽은 후 그녀는 남편을 대신해 약 2년간 카리아를 통치했는데, 역사학자도 아닌 제가 알 만큼 아르테미시아라는 여성이 유명했던 이유는 단지 고대의 여성 통치자였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남편이 죽은 후 남편을 화장한 재를 물에 타서 마시고 자신을 ‘살아서 숨쉬는 남편의 무덤’으로 만들 만큼 남편에 대한 사랑이 유달랐기 때문이지요.
아마도 저는 아르테미시아라는 여인의 이야기를 듣고 제 아내 사스키아도 제가 죽은 후까지 저를 잊지 말아주기를 바랬던 것 같습니다만, 안타깝게도 아르테미시아 이야기는 제 아내의 이야기가 아니라 저의 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 너무도 사랑했던 아내는 아들 티투스를 낳다가 젊은 나이에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가버렸거든요.



Q4. 아, 선생님의 그림에 나오는 여성은 모두 아내를 모델로 삼아 그리신 것인가요?


Portrait of an Old Woman, 1655

A4. 전부는 아닙니다. 물론 사스키아를 모델로 그린 그림이 많긴 하지만 더러는 모델료를 지불하고 산 전문 모델도 있었고, 또 전혀 다른 여성이 모델이 된 적도 있었죠. 그림 <예언자 안나>를 보시면, 아내라고 하기에는 너무 늙은 여성이 모델입니다. 제 어머니이시죠.
가톨릭이 무너지는 사회에서도 끝까지 모범적인 신앙인의 태도를 잃지 않으신 분이었죠. 가톨릭과 개신교의 싸움이 팽팽했던 사회 속에서도 가톨릭이나 크리스천의 싸움에 끼는 대신 진정한 신앙인의 중심을 잃지 않으려 더욱 성경을 읽으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어머니는 성경을 펴고 글자 하나 하나를 손으로 짚어가며 매우 주의 깊게 읽으셨는데, 옆에서 보면 마치 성경의 글자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절박함까지 느껴질 정도였어요.
왜 하필 예언자 안나의 모델로 저희 어머니를 선택했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었죠. 성경에서 안나는 예수가 메시아임을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흔히 손을 들어 예수를 가리키는 당당한 여장부의 모습으로 그려지곤 했었거든요. 하지만 저는 어둠 속에서 오직 환히 빛나는 하나, 성경을 꼼꼼히 말씀을 읽는 예언자 안나의 특정 부분을 섬세하게 강조함으로 안나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선포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오직 말씀을 통해 얻어진 확신으로 인한 과정임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여기서 아마 가장 강조된 것은 많은 비평가들이 눈치 챘지만, 성경을 손으로 짚어가며 읽는 예언자 안나의 주름진 손입니다. 바로 제 어머니가 성경을 읽던 방법이었죠.



Q5. <선한 사마리아인>을 주제로 남겨진 그림 중에서도 <선한 사마리아인과 똥누는 개>라는 별명으로 더 알려진 그림이 있어요. 다친 사람을 여관 주인에게 넘겨주는 착한 사마리아인 옆에서 개가 똥을 누고 있는 왠지 이질적인(?) 구도가 인상적인 그림인데요, 이 그림을 그린 작가로서 설명을 해주신다면요?


The Landscape with Good Samaritan, 1638

A5. 제 의도와는 다르게 학자들간의 의견까지도 분분했다고 들었습니다(웃음). 하지만 이 그림을 통해 나타내고자 했던 저의 의도는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이나 개, 특히 똥누는 개가 유대인들에게 정결한 존재일 리가 없습니다. 둘 모두 잡종에 더러운 존재일뿐더러 둘 모두 ‘고상한’ 유대인의 사회적 정체성 혹은 체면을 모르는 상징물들이지요. 유대인은 그들만의 경계와 정체성, 체면을 넘어서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모두 아는 예수님의 비유에서 유대인들을 보세요. 유대인을 대표하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강도 당한 사람 앞에서 행한 행동은 측은지심은커녕, 바보처럼 강도 당한 이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결국 길거리에 쓰러진 사람을 스쳐 지나갑니다.
하지만 사마리아인은 다르죠. 저는 사마리아인이 특별히 이 강도 당한 사람에게 연민의 정을 느껴서 도왔다기보다, 그가 소위 말하는 ‘경계’안에 살지 않았기 때문에 길에 쓰러진 사람에게 자연스레 생기는 불쌍한 마음을 느끼고, 더 자연스럽게 다친 사람을 돌보아야 한다는 지극히 정상적인 행위를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느끼고 과감하게 행동으로 옮기는 사마리아인의 행위는 너무나 정상적이어서 마음 속에 그 어떤 걸림도 없음을 알게 하죠. 제사장과 레위인은 몰랐던,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는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마치 자기가 똥을 누고 싶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시원하게 일을 보는 개처럼 말이죠. 그림의 구도상 똥을 누는 개가 한 눈에 들어오는 위치인 사마리아인과의 대각선 구도에 넣어 그린 의도는 바로 거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가 똥을 누는 행위의 더러움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어 자연스러운 일을 거리낌하고 있는 둘의 모습이 하나의 선상에 있음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Q6. <삼손>을 그린 그림이 유난히 많아요. 삼손에게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있으신가요?


The Blinding of Samson, 1636

A6. 저의 <삼손>그림을 보면 성서화가들이 많이 그리는 삼손 인생의 클라이막스인 기둥 뿌리를 무너뜨려 블레셋 사람들을 모두 죽이는 삼손 같은 신화적 이야기보다 삼손의 ‘사생활’ 이야기가 더 많음을 볼 수 있습니다. 잘 알려진 작품만해도 <들릴라에게 배신 당하는 삼손>, <장인에게 으름장을 놓는 삼손>, <잔치에서 수수께끼를 내는 삼손> 등 성경에서 단지 삼손의 에피소드로 나오는 이야기들이 많죠. 저는 삼손의 영웅적 모습보다는 그가 가진 선천적 성격으로 인한 일상의 파장이 더 재밌더군요.
탄생 자체도 비범했던 영웅 호걸 삼손은 커갈수록 비범은 고사하고 평범한 나실인도 못되었습니다. 끊임없는 오입질에, 그도 모자라 이방 여인에게 속는 일은 다반사였고, 배신을 되갚는답시고 더 큰 화를 불러일으키는, 집안의 우환이자 천덕꾸러기였죠. 뭐, 물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겠지만요. 삼손이 마지막까지 사랑했던 여인 들릴라도 블레셋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성경은 들릴라가 삼손을 사랑했다고 한 번도 보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저 욕정에 불붙어 자신에게 구혼하는 삼손과, 강한 삼손을 저지하지 못하는 제 동족의 지도자들 사이에서 들릴라는 자신을 동족을 대표하는 희생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실제로 그녀는 삼손의 아내로서 남편을 사랑하는 길 대신, 은 5,500세겔, 지금 시가로 따지자면 약 66억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양의 은을 받고 삼손의 사랑을 이용하여 결국 죽이는 길을 선택합니다. 당시 왕의 몸값이 1,100세겔이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들릴라는 평생 쓰고도 다 못 쓸 돈을 받은 것이 됩니다.
성경에서 묘사한 삼손보다 제가 그리는 삼손이 좀 ‘못났다’라는 의견이 많은데, 특히 <결박 당하는 삼손>에서는 삼손의 머리카락을 손에 든 들릴라의 희열 넘치는 생동감 있는 표정에 비해 삼손은 우리가 이때껏 상상하던 근육질의 우락부락하지만 핸섬한 사나이가 아닌 그저 힘없이 포박당하는 고깃덩어리에 가깝습니다. 성경 이야기에 충실한 제 그림에 어째서 삼손이 이렇게 나왔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들릴라의 시각으로 삼손을 바라보았노라고 답해드리고 싶군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에게 욕정을 해소한 삼손, 거들먹거렸지만 이제 자신에게 은 5,500세겔을 내주어야 하는 블레셋 남성 지도자들에게 들릴라는 나름대로의 복수를 한 것입니다. 한 여인이 남성성을 상징하는 삼손의 힘을 거세하고, 남성들의 체제를 대표하는 블레셋 지도자들의 폭로하는 복수 장면을 극적으로 재구성해보고 싶었습니다.



Q7. 들릴라의 눈으로 보는 성경 이야기였군요! 아주 새로운 시각이네요! 선생님만의 새로운 시각으로 그린 다른 그림을 소개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Vienna c. 1655, oil on walnut, cut down in size

A7. 흠, 글쎄요. 이게 새로운 시각이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죽음’을 보는 시각을 좀 달리하려 했던 시도는 몇 개 생각나는군요.
당시 ‘죽음’은 매우 민감한 문제로, 이 세상을 살아가던 육신을 떠나 그 영혼이 천국으로 가느냐 지옥으로 가느냐, 혹은 이 세계가 죽음으로 인해 얼마나 허망해지느냐를 비유한 작품이 앞다투어 나왔습니다. 성서화도 거기에 큰 일조를 했지요.


Anatomy Lesson of Dr. Nicolaes Tulp, 1632


그러나 제 그림인 <도살된 소>나 <해부학 교실>, <죽은 두 마리 공작과 소녀>를 보시면 알겠지만 저는 죽음을 정물화처럼 아무런 감정 없이 ‘있는 그대로’ 보는 시각을 가져보려 시도했었습니다. <도살된 소>는 아름다운 유화의 기법을 따른 것도, 그렇다고 사실을 그대로 그린 사진 같은 정물화를 그린 것도 아닌 단지 푸줏간에 걸려있는 한 덩어리의 고기를 표현했습니다. 어둡고 침침한 푸줏간에서 잡은 지 꽤 된 소가 배가 갈리고 손 발이 잘린 채 축 늘어져 있는 모습이지요.
이 시기에 저는 개인적으로 ‘죽음’에 대해 생각할 시기를 맞았습니다. 3명의 자녀의 잇따른 죽음과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아내의 누이 동생의 죽음이었죠. 당시만해도 영아 사망률은 매우 높아서 죽음이 신기한 일이 아니었죠. 그러나 신기한 일이 아니라 해서 죽음이 익숙한 것은 아닙니다. 남들은 ‘일상적’인 일이라고 하는 것에서 ‘존재’를 묻지 않을 예술가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요? 저는 죽은 핏덩이들을 안고 생(生)과 사(死)를 끊임없이 묻고 또 물었습니다.
도살된 소와 해부학 교실을 그리며 제 자신에게 말하고자 했던 것은, 아마도 죽음 앞에 섰을 때 죽음에 대한 불안을 거리낌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힘찬 소, 예수의 영광에 반하는 우상으로 여겨지던 소이지만 죽음 앞에서는 뿔이 바닥에 뒹굴고, 한낱 푸줏간 아낙네도 죽은 소를 무서워하거나 경외하지 않습니다. 그토록 삶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죽음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 끊임없는 물음의 결과는 의외로 사실적인 죽음의 모습으로 붓 끝에서 나타났습니다. 기자님의 물음에 대답이 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죽음에 대해 유행하던 사상과 화풍을 이해하신다면 아마도 질문에 충분한 답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Q8. 앞에 성경에서 영감을 얻는다고 하셨는데요, 좋아하는 성경 구절을 주제로 그린 그림 중에 기억에 남는 그림이 있으시다면?


Raising of Lazarus

A8. 저를 매료시킨 성경 이야기 중 하나는 나사로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나사로의 소생>이라는 제목으로 각각 유화와 에칭(여러 작품을 찍어낼 수 있는 기법)으로 제작했지요.
유화 <나사로의 소생>을 보면 당시 무덤으로 사용됐던 동굴에 예수께서 빛을 받으며 서 계시는 구도가 눈에 띄죠. 동굴 무덤 안은 어둠이 자연스러운 곳이고, 저는 이 그림을 보는 사람에게 빛과 구도에 집중하도록 유도하고자 빛의 방향을 예수님에게로 향하게 했습니다. 손을 번쩍 든 예수의 오른팔과 마리아로 보이는 여인 사이에 빛이 통과하도록 한 것이죠. 그 빛은 예수의 오른팔과 광경을 지켜보는 마리아의 얼굴, 그리고 나사로를 비추죠. 저는 하나님의 빛이 예수를 통해 기적을 이루고, 사람들에게 믿음을 만들어내고, 죽은 이에게 새로운 생명을 불어놓는 장면을 한 폭의 그림 안에 연출해내고자 했습니다. 빛, 곧 하나님의 은총과 기적을 예수와 연관 짓고자 한 것이죠.


Anatomy Lesson of Dr. Nicolaes Tulp, 1632


믿음은 그리스도인들을 살게 하는 근원적인 힘입니다. 비록 그리스도가 잠들어 있는 듯 해도, 그리스도를 기다리다 ‘이틀’이 지나 고통 속에 ‘잠’들었어도 부활과 생명의 주가 있는 그곳에는 절망이나 죽음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때’에 일어나 그분이 사랑하시는 사람에게로 틀림없이 가는 분이십니다.



기자: 따뜻한 봄 날을 더욱 풍성하게 비춰주는 한 폭의 그림 같은 렘브란트 선생님과의 인터뷰였습니다. 위대하면서도 따스한 성경의 이야기들과 선생님의 신앙 고백이 어우러진 멋진 시간에 감사 드립니다.







참고도서 : 렘브란트, 성서를 그리다/ 김학철 지음/ 대한기독교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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