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April 30, 2012

소그룹 인도자의 자질 - 소그룹 네트워크(국제제자훈련원)

퍼온글  http://www.disciplen.com/resource/mail/now2.asp?m_mode=sn&v_msid=2857&m3_No=4&page=1


완벽한 자격을 갖춘 소그룹 인도자는 없습니다. 하지만 소그룹을 성공적으로 인도하기 위해 인도자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요소는 있습니다. 다음에 소개하는 요소들은 소그룹을 성공적으로 인도하기 위해 인도자가 갖추어야 할 6가지 조건들입니다.

1. 영적 원리의 이해
디모데 전서 5:22의 요점은 새신자가 너무 일찍 많은 책임을 맡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소그룹 인도자를 선발할 때 중요한 요소입니다. 충분한 신앙생활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얼마나 오래 되어야 합니까? 1년이면 준비되는 사람도 있지만, 10년이 걸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개인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영적인 원리를 알 뿐만 아니라 다음에 설명하는 특성들을 삶에서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2. 그리스도와의 관계의 성장
베드로후서 3:18에서는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고 합니다. 영적 성장의 본이 되면 다른 사람들이 성장하도록 격려할 수 있으려면, 먼저 당신의 삶에 이런 모습이 드러나야 합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3. 다른 사람을 돌보고자 하는 헌신
고린도전서 1:25에는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기준에 도달한 사람은 그룹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나아가서 시련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즐거워하는 사람들과 함께 즐거워하며 개인 개발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관심과 사랑을 표현하는 여러 활동들에 시간을 투자 합니다.
4. 섬기고자 하는 열망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라디아서 5:13). 인도하는 것은 섬기는 것입니다. 섬기고자 하는 열망이 장차 인도자가 될 사람의 삶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합니다. 그룹을 인도하는 책임을 기꺼이 맡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5. 배우려는 태도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에베소서 5:10). 시험하여 보라는 말씀은 배우기를 힘쓰라는 말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모든 활동에 적용되어야 하며, 특히 소그룹을 인도하는 책임을 맡을 때도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 그룹 인도자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알 수는 없겠지만 적극적으로 배우고자 하는 태도가 있어야 합니다.
6. 시간을 투자하려는 결심
그룹을 인도하는 데에 드는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 자질 중에 하나입니다. 소그룹을 인도하는 일은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린도전서 14:40)는 말씀대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당신은 그룹을 인도하는 데에 드는 시간을 투자할 용의가 있습니까?
위에서 제시한 항목들이 벅찰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섯 가지는 소그룹 인도자로서 성공하는데 꼭 필요한 핵심입니다. 다른 자질들을 추가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 여섯 가지에 부연할 수 있는 내용일 것입니다.
처음에 언급했듯이 우리 중에 완벽한 자격을 갖춘 소그룹 인도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영역이 골고루 잘 드러나야겠지만 누구나 강한 영역이 있는 반면 한두 영역은 계발이 필요한 영역이 있을 것입니다. 약한 영역에 대하여 성령께서 당신을 변화시키시도록 내어 드릴 때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 이 글은 닐 F. 맥브라이드의「소그룹 인도법」의 일부를 발췌 각색한 글입니다.

Saturday, April 28, 2012

느헤미야 7:1-73 <성벽 재건 후에 일어나는 일 들을 보면, 지도자를 세우고,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중에 예배와 관련 자들을 기록하였고, 그들 모두가 또한 함께 성벽 재건 후에 이스라엘을 기초를 세우는 일에 함께하였다.>

느헤미야 7:1-73 <성벽 재건 후에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지도자를 세우고,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중에 예배와 관련 자들을 기록하였고, 그들 모두가 또한 함께 성벽 재건 후에 이스라엘을 기초를 세우는 일에 함께하였다.>

1. 수없이 많은 리더들이 목표를 이루고, 얼마되지 않아 무너져 버리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2. 정상에 오르는 것보다 정상을 지키는 것이 더 어렵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3. Fast Follower로서 정상까지 잘 같지만, 목표를 이루었다는 생각으로, 또 다른 목표를 세우지 않고, 더 분명한 목표를 제시하지 않음으로 인해, 목표 상실의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4. 더 이상 의욕을 가지지 않게 될 뿐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할 이유도 없게 된 것입니다.

5. 이 상황을 타계하는 여려 비책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리더십을 바꾸는 것입니다.

6. 보다 더 높은 목표와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리더십을 세우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7. 그러나 또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느헤미야 7장에서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또한 사도행전 6장에서 보여주는 일곱 집사를 세우는 모습과도 유사합니다.

8. 리더십을 공유하는 방법입니다.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뚜렷한 비전을 만들어 갈 수 있도록 아이디어를 많게 하는 것입니다.

9. 또한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도 방법입니다. 처음 조직의 기초와 철학을 다시금 정리하는 것입니다.

10.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성벽 재건의 이유는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는 철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1. 목표를 이룬 후에 다시 그 철학을 점검하며 더욱 굳건히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12. 그래서 함께 성벽을 재건한 후에 이스라엘의 기초를 세우는 일에 함께 할 사람들에게 율법을 낭독한 이유입니다. 73절.

13. 또 하나 느헤미야가 한 일이 있습니다. 기록입니다. 함께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함으로서 기념을 하게 합니다. 자부심을 심어줍니다. 감동을 줍니다.

14.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지속가능하도록 하는 힘이 됩니다.

15. 지도자를 세우고,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성벽 재건의 철학을 점검함으로서 더욱 공고히 후대에 성벽 재건의 목적과 필요가 전해지도록 하였습니다.

16. 하나님의 믿게 되었던 초심으로 돌아갑시다.

17.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기억합시다.

18. 오늘 하루 점검해야 할 사항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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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성벽이 건축되매 문짝을 달고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사람들을 세운 후에"

2절 "내 아우 하나니와 영문의 관원 하나냐가 함께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충성스러운 사람이요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리중에 뛰어난 자라"

4절 "성읍은 광대하고 그 주민은 적으며 가옥은 미처 건축하지 못하였음이니라"
 => 백성들을 생각하고 기억하다.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
5절 "내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동하사 귀족들과 민장들과 백성을 모아 그 계보대로 등록하게 하시므로"
6절 "옛적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에게 사로잡혀 갔던 자들 중에서 놓임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에 돌아와 각기 자기들의 성읍에 이른 자들 곧"

39절 "제사장들은 ... "
43절 "레위 사람들은 ..."
44절 "노래하는 자들은 ..."
45절 "문지기들은 ... "
63절 "제사장 중에는 ... "
=> 특별히 노래하는 자들을 기록하고 있다.

66절 "온 회중의 합계는 사만 이천삼백육십 명이요"
67절 "그 외에 노비가 칠천삼백삼십칠 명이요 그들에게 노래하는 남녀가 이백사십오 명이었고"
=> 모두가 함께 참여하다.

70절 "어떤 족장들은 역사를 위하여 보조하였고 ...  총독은 금 .. 제사장의 의복 .. 보물 곳간에 드렸고"
71절 "또 어떤 족장들은 금 .. 은 .. 역사 곳간에 드렸고"
72절 "그 나머지 백성은 금 .. 은.. 제사장의 의복을 ... 드렸더라"
73절 "이와 같이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백성 몇 명과 느디님 사람들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다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느니라"

Monday, April 23, 2012

느헤미야 6:1-19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느헤미야.. 안밖으로 들리는 수없는 어려움앞에 그는 그 앞에 넘어지거나 쓰러지지 않았다>


느헤미야 6:1-19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느헤미야.. 안밖으로 들리는 수없는 어려움앞에 그는 그 앞에 넘어지거나 쓰러지지 않았다>

1. 느헤미야 6장은 음모에 대한 회상인지? 새로운 음모인지? or 지난 날 있었던 음모에 대한 정리인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 수는 없다. 내용이 앞선 장에서도 언급되어 있기 떄문이다.

2. 중요한 것은 어떻게 보든, 일을 진행함에 있어서 있을 수 있는 음모들을 생각하게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느헤미야는 이 난국을 헤쳐나가고 있는지 우리에게 도전이 된다.

3. 무엇보다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귀한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서 사역을 방해하는 일들을 실제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4. 산도게비의 방해를 현명하게 대체하는 느헤미의 리더십을 살펴보도록 하자.

5. 무엇이 그를 이토록 강하게 만들었는가?

6. 첫번째는 그의 비전이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1절 "산발락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과 그 나머지 우리의 원수들이 내가 성벽을 건축하여 허물어진 틈을 남기지 아니하였다함을 들었는데 그 때는 내가 아직 성문에 문짝을 달지 못한 때였더라"
  2절 "산발락과 게심이 내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기를 오라 .. 서로 만나자 하니 실상은 나를 해하고자 함이었더라"
 => 만나야 할까? 말까? 왜 만나야 하는가? 왜 만나지 말아야 하는가?
  3절 "이르기를 내가 이제 큰 역사를 하니 내려가지 못하겠노라 어찌하여 역사를 중지하게 하고  너희에게로 내려가겠느냐 하매"

7. 1-3절의 내용을 정리하면, 느헤미야가 방해세력에 무너지지 않았던 힘은 바로 하나님의 비전이 결코 흔들리지 않는 것에 있다. 달리 말해, 어떤 상황에서도 그의 비전이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비전에 대한 확신이 크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8. 그들은 다섯 번이나 편지를 보내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이행한 방법은 봉인되지 않은 편지를 보낸 것이다.
 4절 "그들이 네 번이나 이같이 내게 사람을 보내되 나는 꼭 같이 대답하였더니"
 5절 "산발랏이 다섯 번째는 그 종자의 손에 봉하지 않는 편지를 들려 내게 보냈는데"

9. 손에 봉하지 않은 편지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때 그들의 노림수는 모든 사람들이 편지를 읽는 것입니다. 심리적으로 두려운 상태로 백성들을 몰아가기 위해서 봉인되지 않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10. 계속되는 모략과 거짓과 술수 앞에 느헤미야는 기도로 이 위기를 극복하고 있다.
  거짓 모략에 어떻게 느헤미야는 대처하는가?  거짓 모략에 대한 느헤미야의 대처법은? 그들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9절 "이는 그들이 다 우리를 두렵게 하고자 하여 말하기를 그들의 손이 피곤하여 역사를 중지하고 이루지 못하리라 함이라 이제 네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 하였노라"

11. 느헤미야는 심리적으로, 물질적으로, 무슨 문제를 만나든 기도하였습니다. 참으로 부러운 사람입니다. 깊이 기도할 수 있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이번에 기도는 그들의 방해에 이길 힘을 달라는 기도입니다. 용기를 달라는 기도입니다.
 "나에게 용기를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나의 약함을 채워 강하게 만들어 주시옵소서"

12. 때로는 그들은 느헤미야의 가장 가까운 사람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10절 "이 후에 므헤다벨의 손자 들라야의 아들 스마야가 두문분출 하기로 내가 그 집에 가니 그가 이르기를 그들이 너를 죽이러 올터이니 우리가 하나님의 전으로 가서 .. 그 문을 닫자 저들이 반드시 밤에 와서 너를 죽이리라 하기로"

13."스마야"는 누구인가? 느헤미야가 찾아가 만나야 할 만큼 중요한 사람입니다. 방해하는 자들이 중요한 사람을 흔드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14. 왜 "우리가 전으로" 가자고 했을까? 왜냐하면 당시 밤에 제사장외에는 함부로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느헤미야가 밤에 성전에 들어갔다는 오명을 뒤집어 씌워 느헤미야를 잡기 위한 방법으로 스마야가 제안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것을 눈치채고 거부하고 있습니다.

15. 또 다른 그들의 공격을 이겨내는 느헤미야는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이었다.
  11절 "내가 이르기를 나 같은 자가 어찌 도망하며 나 같은 몸이면 누가 외소에 들어가서 생명을 보존하겠느냐"
  12절 "깨달은즉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바가 아니라 ... 뇌물을 받고 내게 이런 예언을 함이라"

16. 영적으로 깨어있는 느헤미야입니다. 정말 그는 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일어나는 사태를 보면서 바로 이게 하나님의 보내신 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영적으로 바로 서 있으면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확실하고 분명한 영적인 일에 서 있어야 합니다.

17. 느헤미야가 극한 외적 상황에서도 52일만에 성벽을 재건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느헤미야의 확신과 기도, 영적으로 깨어 있기 때문이다.

18. 특별히 느헤미야는 자신을 어렵게 만드는 물리적인 방해의 상황들이 생길 때마다 느헤미야는 무엇을 했는가? 바로 기도이다. 52일만에 성벽이 재건이 마무리 될 수 있는 원동력중에 하나가 바로 기도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는 기도했으면, 기도만을 붙잡고 살아갔다.
 14절 "내 하나님이여 도비야와 산발랏과 여선지 노야다와 그 남은 선지자들 곧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한 자들의 소행을 기억하옵소서"
=>

19.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서도 52일만에 성벽 공사가 끝나다. 1-14절과 15-19절의 대조를 이해하라.

20. 자료를 보니 엘룰 월은 8-9월 건기라고 합니다. 이 때의 기온이 40도 이상으로 올라 숨 쉬는 것차 힘들 때입니다. 그런데 이 때 52일만에 성벽을 재건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이처럼 믿음으로 살아갈 때 놀라운 일을 심심찮게 일어납니다. 이게 바로 영적인 세계입니다.
 15절 "성벽 역사가 오십이 일 만인 엘룰월 이십오일에 끝나매"

21. 우리를 두렵게 하고자 하는 자들을 두렵게 하는 방법이 있다. 그들처럼 똑같은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며, 무기나 힘을 사용하는 방법도 아니다. 바로 하나님의 역사와 일하심을 그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22. 16절 "우리의 모든 대적과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크게 낙담하였으니 그드이 우리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

23. 일의 역사가 이루어짐을 통해서 나를 두렵게 하던 자들을 두렵게 하라. 그들을 일의 이룸을 통해서 두려움과 떨음속에 몰아 넣으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느헤미야를 보자.

24. 우리의 전 삶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일 가운데 사역을 방해하는 일들은 계속되어질 것이다. 이 땅에서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이 있다면 바로 방해꾼들이다. 성벽이 완성된 후에도 산도게비와 유다 귀족은 계속해서 편지를 주고 받았다.
17절 "그 때에 유다의 귀족들이 여러 번 도비야에게 편지하였고"
18절 "도비야는 ... 유다에서 그와 동맹한 자가 많음이라"
19절 "그들이 도비야의 선행을 내 앞에 말하고 또 내 말도 그에게 전하매 도비야가 내게 편하하여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하였느니라"

25. 도비야와 유다의 귀족의 공격은 그 뒤로도 계속됩니다. 이처럼 한 번에 그들의 공격이 끝나지 않습니다. 성벽이 완성 된 후에도 그들의 방해는 계속됩니다. 아무도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영적으로 우리를 긴장하게 하는 도구들입니다. 때로는 그들이 있으매 감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6. 오늘도 주어진 하나님의 사명을 잘 감당하기 원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것은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그들의 방해지만, 우리에게는 유익입니다. 깨어 있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처럼 확신, 기도, 영적으로 깨어 있음을 통해서 믿음의 큰 역사를 이루어가는 복된 한 날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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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모에 대한 회상? 새로운 음모? or 지난 날 있었던 음모에 대한 정리? 어떻게 보든, 일을 진행함에 있어서 있을 수 있는 음모들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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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산발락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과 그 나머지 우리의 원수들이 내가 성벽을 건축하여 허물어진 틈을 남기지 아니하였다함을 들었는데 그 때는 내가 아직 성문에 문짝을 달지 못한 때였더라"


2절 "산발락과 게심이 내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기를 오라 .. 서로 만나자 하니 실상은 나를 해하고자 함이었더라"
 => 만나야 할까? 말까? 왜 만나야 하는가? 왜 만나지 말아야 하는가?

3절 "이르기를 내가 이제 큰 역사를 하니 내려가지 못하겠노라 어찌하여 역사를 중지하게 하고  너희에게로 내려가겠느냐 하매"
 => 하나님의 비전이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의 비전이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비전에 대한 확신이 크다는 반증이다.

4절 "그들이 네 번이나 이같이 내게 사람을 보내되 나는 꼭 같이 대답하였더니"

5절 "산발랏이 다섯 번째는 그 종자의 손에 봉하지 않는 편지를 들려 내게 보냈는데"
=> 손에 봉하지 않은 편지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때 그들의 노림수는 모든 사람들이 편지를 읽는 것입니다. 심리적으로 두려운 상태로 백성들을 몰아가기 위해서 봉인되지 않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6절 "그 글에 이르기를 이방 중에도 소문이 있고 .. 너와 유다 사람들이 모반하려 하여 성벽을 건축한 하나니 네가 그 말과 같이 왕이 되려 하는도다"
=> 거짓 모략에 어떻게 느헤미야는 대처하는가?
 거짓 모략에 대한 느헤미야의 대처법은? 그들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9절 "이는 그들이 다 우리를 두렵게 하고자 하여 말하기를 그들의 손이 피곤하여 역사를 중지하고 이루지 못하리라 함이라 이제 네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 하였노라"
=> 느헤미야는 심리적으로, 물질적으로, 무슨 문제를 만나든 기도하였습니다. 참으로 부러운 사람입니다. 깊이 기도할 수 있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이번에 기도는 그들의 방해에 이길 힘을 달라는 기도입니다. 용기를 달라는 기도입니다.
 "나에게 용기를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나의 약함을 채워 강하게 만들어 주시옵소서"

10절 "이 후에 므헤다벨의 손자 들라야의 아들 스마야가 두문분출 하기로 내가 그 집에 가니 그가 이르기를 그들이 너를 죽이러 올터이니 우리가 하나님의 전으로 가서 .. 그 문을 닫자 저들이 반드시 밤에 와서 너를 죽이리라 하기로"
=> "스마야"는 누구인가? 느헤미야가 찾아가 만나야 할 만큼 중요한 사람입니다. 방해하는 자들이 중요한 사람을 흔드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 왜 "우리가 전으로" 가자고 했을까? 왜냐하면 당시 밤에 제사장외에는 함부로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느헤미야가 밤에 성전에 들어갔다는 오명을 뒤집어 씌워 느헤미야를 잡기 위한 방법으로 스마야가 제안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것을 눈치채고 거부하고 있습니다.

11절 "내가 이르기를 나 같은 자가 어찌 도망하며 나 같은 몸이면 누가 외소에 들어가서 생명을 보존하겠느냐"

12절 "깨달은즉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바가 아니라 ... 뇌물을 받고 내게 이런 예언을 함이라"
=> 영적으로 깨어있는 느헤미야입니다. 정말 그는 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일어나는 사태를 보면서 바로 이게 하나님의 보내신 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영적으로 바로 서 있으면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확실하고 분명한 영적인 일에 서 있어야 합니다.

13절 "그들이 뇌물을 준 까닭은 나를 두렵게 하고 이렇게 함으로 범죄하게 하고 악한 말을 지어 나를 비방하려 함이었느니라"

14절 "내 하나님이여 도비야와 산발랏과 여선지 노야다와 그 남은 선지자들 곧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한 자들의 소행을 기억하옵소서"
=> 자신을 어렵게 만드는 물리적인 방해의 상황들이 생길 때마다 느헤미야는 무엇을 했는가? 바로 기도이다. 52일만에 성벽이 재건이 마무리 될 수 있는 원동력중에 하나가 바로 기도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는 기도했으면, 기도만을 붙잡고 살아갔다.

이런 상황에서 52일만에 성벽 공사가 끝나다.
1-14절과 15-19절의 대조를 이해하라.
15절 "성벽 역사가 오십이 일 만인 엘룰월 이십오일에 끝나매"
=> 자료를 보니 엘룰 월은 8-9월 건기라고 합니다. 이 때의 기온이 40도 이상으로 올라 숨 쉬는 것차 힘들 때입니다. 그런데 이 때 52일만에 성벽을 재건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이처럼 믿음으로 살아갈 때 놀라운 일을 심심찮게 일어납니다. 이게 바로 영적인 세계입니다.

16절 "우리의 모든 대적과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크게 낙담하였으니 그드이 우리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
=> 일의 역사가 이루어짐을 통해서 나를 두렵게 하던 자들을 두렵게 하라. 그들을 일의 이룸을 통해서 두려움과 떨음속에 몰아 넣으라.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느헤미야를 보자.

17절 "그 때에 유다의 귀족들이 여러 번 도비야에게 편지하였고"
18절 "도비야는 ... 유다에서 그와 동맹한 자가 많음이라"
19절 "그들이 도비야의 선행을 내 앞에 말하고 또 내 말도 그에게 전하매 도비야가 내게 편하하여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하였느니라"
=> 도비야와 유다의 귀족의 공격은 그 뒤로도 계속됩니다. 이처럼 한 번에 그들의 공격이 끝나지 않습니다. 성벽이 완성 된 후에도 그들의 방해는 계속됩니다. 아무도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영적으로 우리를 긴장하게 하는 도구들입니다. 때로는 그들이 있으매 감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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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느헤미야

Thursday, April 19, 2012

느헤미야 5:1-19 <생벽재건을 함에 있어서 가장 힘들게 하는 요소는 내부적인 문제들입니다. 외부적인 어려움은 한 마음으로 해쳐나가려고 하지만, 내부적인 문제는 마음이 흩어지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 5:1-19 <생벽재건을 함에 있어서 가장 힘들게 하는 요소는 내부적인 문제들입니다. 외부적인 어려움은 한 마음으로 해쳐나가려고 하지만, 내부적인 문제는 마음이 흩어지기 때문입니다>

1. 예루살렘 성벽이 제법 올라가고 있습니다. 어려움을 내부적으로, 외적으로 만나기는 했지만 헤쳐 나가는 모습이 정말 아름답습니다.

2. 그런데 아쉽게도 5장에서도 똑같이 문제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5장에 나오는 문제는 더 큰 문제인 듯합니다.

3. 왜냐하면, 내적인 문제로서 공동체를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진행되는 아름다운 사역을 완성하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4.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어려움을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4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의 일을 섬김에 있어서 악한 세력이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5. 그런데 여기서 잠깐 생각해 볼 문제가 있습니다. 어려움에는 두 종류의 형태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6. 외적인 어려움과 내적인 어려움이지요.

7.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외적인 어려움은 때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되게 하는 크나큰 매력이 있습니다.

8. 외부의 저항앞에 하나되었다는 역사적인 사건은 너무나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자국을 침략하는 외부의 세력앞에 주류나 비주류, 또는 여나 야가 필요없다는 이야기입니다.

9. 모두가 하나되어 한 마음이 됩니다. 아주 큰 매력이지요. 그래서 어려움이 해결되기 전에 이미 우리는 하나가 되었을 뿐 아니라, 물론 기꺼이 난관을 극복해 갈 수 있습니다.

10. 이게 외적인 어려움으로부터 오는 매력이 아닐까 합니다.

11. 따라서 진짜 문제는 내부의 문제입니다. 내부의 문제는 한 팀을 오합지졸로 만들어 버립니다. 여야로 나누어 버립니다. 하나로 섞이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오직 자기만 좋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12. 내부적인 문제는 아주 큰 문제입니다. 이 어려움을 잘 극복하지 못하면 공동체가 무너져 버리는 것은 순식간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에도 내란으로 인해 스스로 무너져 버린 나라가 많습니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나라가 세워지는 것이지요.

13. 악한 세력이 하나님의 공동체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내부에 문제를 일으키게 합니다.

14. 내적인 문제의 시작은 탐심일 경우가 많습니다. 공동체 전체의 선보다 개인의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오는 욕심 때문입니다.

15. 오늘 본문에서도 5:2-4절을 보면, 어떤 사람들의 원망의 소리가 들립니다. 그리고 그 원망의 대상은 1절에서 언급하듯이 "그들의 형제인 유다 사람들"이었습니다.

16. 성벽 재건으로 인해 일을 하지 못해서 먹을 양식이 없었는데, 유다 사람들이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양식을 팔아서 이익을 보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17. 밭과 포도원 집까지 저당 잡히어 먹을 양식을 사게 됩니다. 그리고 자녀들까지 종으로 팔게 되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18. 이러한 원망의 소리가 들리는 때에 지도자로서 느헤미야는 참으로 난감합니다. 그렇지만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단호합니다.

19. 분명한 원칙과 소신을 가지고 유다 사람들을 책망하면서, 하나님의 심판까지 언급합니다. 느헤미야의 거룩한 분노입니다. 느헤미야의 마음속에 거룩한 분노가 터지기 시작합니다.

20.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무리들을 보고 상을 뒤엎으면서 채직을 휘드리는 모습이 연상됩니다. 그들의 탐심을 질타하시는 모습과 유다의 탐심으로 인해 고통의 소리가 들리는 백성들을 보며 분노의 화를 내는 느헤미야의 모습은 닮은 듯 합니다.

21. 참으로 보기 좋은 리더십입니다. 7-13절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이러한 행동을 하기 전에, 거룩한 분노를 나타나기 전에 먼저 했던 행동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22. 7절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깊이 생각하고"

23. 느헤미야가 깊이 생각한 것이 무엇일까요? 아니면 어떠한 행동을 보고 성경 저자는 "깊이 생각하고"라는 표현으로 기록하고 있을까요?

24. 먼저는 기도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비전과 기도의 사람입니다. 특별히 느2장 4절에 보면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왕 앞에 수심이 가득하여 있는 왕이 질문을 합니다. 그 때 느헤미야는 대답하기에 앞서 이러한 행동을 합니다.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묻고하고"

25. 매 순간 어떤 상황에서도 그는 기도하였습니다. 찰라의 기도에서 부터, 깊이 있는 기도까지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25. 하나 더 깊이 생각한 느헤미야의 모습은 지혜로운 선택을 위한 순간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의 비전과 기도는 지혜로움과 확신을 통해서 2장에서 구체화 되고 있습니다.

26.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놀랍도록 지혜롭게 행동합니다. 하늘의 하나님께 지혜를 구함으로 지혜로운 행동을 하게 됩니다.

27. 나아가 느헤미야의 리더십이 이어집니다. 14-19절까지의 내용입니다.

28. 내부의 흩어진 민심을 다시금 하나로 이루기 위해서 느헤미야가 택한 리더십은 몇 가지가 있습니다.

29. 첫번째는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성벽을 재건하는 일과 더불어 공정한 사회를 세워가는 것도 중요한 사역임을 보여주십니다.
 신명기 23장 20절에 보면, "이방 사람들에게는 이자를 물려도 되지만 형제에게는 꾸어 주어 이자를 받지 마라. 그래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들어가 차지할 그 땅에서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0. 하나님이 공동체에 주신 말씀을 근거로 이스라엘의 귀족을 질타하게 됩니다. 그 때 그들이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12절 "우리가 당신의 말씀대로 행하여 돌려보내고 그들에게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아니하리이다"

31. 두번째는 느헤미야의 희생의 리더십입니다. 14-15절에 보면, 유다 땅 총독으로 임명되던 해부터, 12년동안 형제들에게 총독의 몫으로 나오는 어떠한 녹도 먹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전에 있는 총독은 백성들에게 힘겨운 세금을 물리고 백성들의 재산까지 갈취했는데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32. 이렇게 희생의 리더십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이같이 행하게 됩니다. 다른 어떤 목적과 야망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였기에 당연히 그렇게 해야 했습니다.

33. 마지막으로 느헤미야의 솔선수범 리더십은 자신의 것을 내어 놓을 수 있는 리더십입니다. 16-18절에 보면, 총독으로 타국에서 손님이 오면 그들을 대접해야 했습니다. "매일 나를 위하여 소 한 마리와 살진 양 여엇 마리를 준비하며 닭도 많이 준비하고 열흘에 한 번씩은 각종 포도주를 갖추"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을 때문에 백성들에게 무리한 것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에게 이러한 것들이 짐이 되기 때문입니다(18절 하반절).

34. 느헤미야가 난국을 헤쳐나가기 위해 눈물겨운 희생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도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 봉착하게 됩니다. 포기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그리고 희생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35. 이러한 상황속에서 느헤미야는 하늘의 하나님께 선한 도움을 구합니다.
 5장19절이 이렇게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36. 하나님께 담대히 구하는 기도입니다.

37. 우리가 느헤미야의 마지막 기도를 올려 드릴 수 있을 청빈의 삶, 절제의 삶, 희생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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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그 때에 백성들이 그들의 아내와 함꼐 크게 부르짖어 그들의 형제인 유다 사람들을 원망하는데"

2, 3, 4절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 자녀, 양식, 저당 잡히고, 흉년,  세금.

6절 "내가 백성의 부르짖음과 이런 말을 듣고 크게 노하였으나"
7절 "깊이 생각하고 귀족들과 민장들을 꾸짖어" "너희가 각기 형제에게 높은 이자를 취하는도다"
9절 "너희의 소행이 좋지 못하도다"
  => 더욱 그들의 소행이 악한 것은 지금 백성들이 처한 상황이 좋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대적 이방 사람의 비방을 생각하고 우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행할 것이 아니냐"

12절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당신의 말씀대로 행하여 돌려보내고 그들에게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아니하리이다"
13절 "내가 옷자락을 털며 이르기를 이 말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모두 하나님이 또한 이와같이 그 집과 산업에서 털어 버리실지니"

14-19절 느헤미야가 총독의 녹을 받지 아니하다
 14절 "제이십년부터 제삼십이년까지 십이 년동안은 나와 내 형제들이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
 15절 "나보더 먼저 총독은 백성에게서,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그들에게서 빼앗았고 또한 그들의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
 16절 "도리어 이 성벽 공사에 힘을 다하여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 내 모든 종자들도 모여서 일을 하였으며"
 18절 "내가 총독의 녹을 요구하지 아니하였음은 이 백성의 부역이 중함이었더라"
 19절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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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의 작곡가 - 게오르크 프레드리히 헨델



게오르크 프레드리히 헨델(George Frideric Handel)
1685. 2. 23 작센 할레~ 1759. 4. 20 런던.
후기 바로크 시대 독일 태생의 작곡가. 특히 오페라, 오라토리오, 기 악 음악으로 유명하며 대표작으로는 오라토리오 〈메시아 Messiah〉(1741), 부수 음악인〈수상 음악 Water Music〉〈왕궁의 불꽃놀이 Music for the Royal Fireworks〉(1749)가 있다.


기자: 따뜻한 봄바람에 콧노래가 저절로 나오는 아름다운 봄입니다. 모두들 느끼고 계시죠? 오늘은 이 아름다운 봄에 어울릴 따뜻한 음악가 한 분을 모셔볼까 합니다. 안녕하세요, 헨델 선생님!



George Frideric Handel in 1733



헨델: 안녕하십니까. 정말 아름다운 날씨입니다. 음악을 이야기하기에 더 없이 좋은 날이군요(웃음).

Q1. 선생님이 사시는 이 탈리아는 연중 따뜻한 기후 때문에 전 세계적인 휴양지로도 유명한데요, 이곳에 사시게 된 특별한 이 유가 있나요?
A1. 이탈리아는 너무나 아름다운 나라이고, 제가 사랑하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음악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매일 매일 감사 드립니다. 제가 이탈리아어로 많은 오페라와 가곡을 작곡해서 저를 이탈리아인이라고 생각하 신 분도 있는 것 같은데요,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이라는 제 이름에서 볼 수 있다시피, 저는 독일의 할레 지방에서 태어난 독일인입니다. 제가 태어나 자란 할레 지방 사람들도 음악을 아주 좋아했죠. 또한 이 지방에는 음악의 요정이 자주 나타난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로 훌륭한 음악가들이 꾸준히 배출 된 지방이기도 합니다.
독일에서 살다가 이탈리아로 본격적으로 넘어온 것은 제가 스물 한 살 때의 일입니다. 당시 음악의 본고장이라 여겨졌던 이탈리아로의 여정은 사실 열 한 살 때부터 기회가 있었지만 제가 성인이 될 때 까지는 아버지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번번이 좌절되곤 했었죠.

Q2. 음악가가 되는 것에 대한 부모님의 반대가 있으셨나요?
A2. 어머니는 특별히 반대하지 않으셨지만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죠. 그 때나 지금이나 음악가보다는 법률가의 길로 가는 것이 안정적인 생활을 보장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안에서 폭발하듯 꽃피는 재능을 억누른 채 아버지의 명령에 법률 공부를 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지만 그에 대항해 반발하지 않은 이유는, 부모 의 뜻을 거역하지 않고 법률 공부를 하는 것 역시 하나님이 제 인생에 예비하신 길의 일부라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단 한 번도 제가 음악가가 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은 해 본적이 없거든요.

Q3.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음악 공부를 시작하신 때는 언제인가요?



birthplace of George Frideric Handel

A3. 독일 할레 지방은 원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었고, 훌륭한 음악가들도 많았습니다. 저는 매 주일마다 성당에서 웅장한 오르간 연주를 듣는 것을 아주 좋아했죠. 비록 그 때만해도 저를 법률가로 키 우려는 아버지의 반대 때문에 마음껏 음악을 배우거나 연주할 수는 없었지만 다락방에 클라비코드라는 소리가 거의 나지 않는 작고 부드러운 악기를 숨겨놓고 매일매일 연습하곤 했죠.
뜻밖의 기회가 찾아온 것은 제가 여덟 살 정도였던 때로 기억되는군요. 할레 지방의 영주인 작센 바이센펠스 공작 앞에서 우연찮게 연주할 기회가 생긴 것이죠. 하나님의 은혜로 공작은 저의 연주를 무척 마음에 들어 했 고, 아버지를 설득해 주셨습니다. 아버지는 법률 공부와 병행한다는 조건을 달고, 제가 음악 수업을 듣는 것을 허락하셨죠.



The Chandos portrait. The 1st Duke of Chandos
was an important patron for Handel.


저는 샨도스 공작(Baron Chandos)이 붙여준 개인 음악 교사인 차하우 선생님에게서 오르간, 클라브생, 바이올린과 오보에등 많은 악기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또한 전 세계의 많은 음악들을 듣고 작곡 하는 법도 배우게 되었지요. 당시 음악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과목들이었습니다.
그 때의 제 심정을 혹시 이해 하시겠습니까? 제가 언제나 꿈꾸기만 하던 음악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과, 제 가 음악 수업을 듣고 있다는 실로 믿어지지 않는 행운의 날들이 시작 된거죠(웃음).

Q4. 선생님의 재능을 알아보고 아낀 분들이 많았군요.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다면?
A4. 열한 살에 만난 베를린의 소피 샬로테 공작부인이 생각나는군요. 제게 음악 공부의 길을 열어준 작센 공작 과 차하우 선생님도 잊지 못할 만큼 좋은 분이셨지만 샬로테 부인은 음악에 대한 열정이 남다른 분이었습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재능 있는 음악가들에게 아낌없이 투자하는 모습이 어린 나이에도 굉장한 인상으로 남아있습니다.



A musical portrait of Frederick, Prince of Wales and his sisters


공작 부인은 저를 이탈리아로 보내고 싶어했죠. 당시 이탈리아는 음악의 요람 같은 곳이었거든요. 국적과 출신, 나이를 가리지 않고 재능 있는 음악가를 키워내고자 했던 공작 부인의 의도와는 달리 저희 아버지께서는 아직 제가 법률가가 되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계셨습니다. 저의 의지와 상관 없이 또 한번 그렇게 이탈리아 유학의 길은 멀어졌지만, 샬로테 부인이 제게 보인 열정과 사랑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죠.



Sophia Charlotte

십 년 후 이탈리아 로마의 생 장 드 라트랑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로 채용되어 꿈에 그리던 이탈리아 길에 올랐던 때 가장 먼저 생각난 사람도 샬로테(Sophia Charlotte) 공작 부인이었습니다.

Q5. 이탈리아에서 많은 작품 활동을 하셨는데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메시아도 이 때 작곡된 것으로 알고 있어요. 선 생님 스스로 생각하는 대표작이 있으신가요?
A5. 우선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 메시아가 아직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음에 감사 드립니 다. 이탈리아에 머무르는 첫 3년간 이탈리아의 자유의 빛깔에 매혹되었죠. 정적이고 웅장했던 독일 의 음악 분위기와는 확연히 다른 자유롭고 화사한 분위기가 눈에 띄더군요.
저의 종교 음악의 시작 은 이러한 이탈리아의 분위기를 많이 닮았습니다. 이탈리아의 음악적 색채가 짙은 메시아 역시 많은 묵상을 통해 만들어진 대곡이지만, 저는 개인적인 제 믿음의 고백을 옮긴 딕시 도미누스를 소 개하고 싶습니다. 제가 성인이 되어 하나님을 믿게 된 그 믿음을 가지고 저의 재능으로 하나님께 올 린 첫 곡이죠.



Handel by Philip Mercier


저는 음악의 고장 독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음악가가 되는 것을 꿈꿨지만, 아버지의 만만치 않은 반대에 부딪혀야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훌륭한 선생님 밑에서 음악을 배우게 되고, 시간이 흘러 몇 번이나 좌절 되었던 이탈리아 유학길에 올라 유럽을 무대로 활동하는 음악가가 되었 습니다. 그러나 이곳에 오는 결코 쉽지 않았던 여정 동안, 저는 저의 꿈을 지지하지 않으셨던 아버지께 대항한 적도, 이탈리아 행이 좌절 되어 낙담한 적도 없었습니다. 음악보다 중요했던 신념, 하나님이 저의 길을 바르게 인도하신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죠. 그리고 하나님은 저의 이 믿음에 신실하게 답해주셨습니다. 이쯤 되면 제 신앙의 고백시인 딕시 도미누스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상상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Q6. 오페라와 오라토 리움 같이 스토리가 있는 음악의 작곡으로 많이 알려져 있으신데요, 주로 어디에서 영감을 얻으셨나요?
A6. 앞에 말씀 드린 메시아나 딕시 도미누스처럼 신앙의 고백이나 성경을 중심으로 한 곡들도 많이 알려져 있지만, 저는 역사도 아주 좋아합니다. 줄리어스 시저와 타메를라노처럼 위대한 역사적 인물들 역시 성경 못지 않게 저의 음악적 영감을 자극하는 인물들이죠. 역사 안에 얽힌 전쟁, 분노, 사랑, 그리고 그 끝을 알 수 없는 스토리를 읽어보세요. 그 어떤 훌륭한 작가도 하나님이 만들어가시는 역사만큼 재미난 이야기를 쓸 수는 없을 겁니다.
*타메를라노: 타르타르의 황제로, 터키의 술탄인 바자 제를 잡아 가두었으나 바자제의 딸인 아스테리아를 사랑하게 된다.

기자: 날씨 좋은 봄날의 해가 지고 있네요. 오늘 이렇게 인터뷰를 해주신 헨델 선생님, 감사드립니다.
헨델: 따뜻한 봄 저녁 노을을 보고 있자니 거대한 런던 공원에서 울리던 왕궁의 불꽃놀이 음악이 생각나는군요. 영국의 군사적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아름다운 공원에서 거대한 불꽃놀이와 함께 연주되던 음악이죠. 아주 장관이었습니다만, 하나님이 만드신 이 봄의 노을에는 미치지 못하는군요. 저 역시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또 만나 뵐 날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참고도서: 음악의 어머니 헨델/ 밀드레드 클라리 지음/ 이경혜 옮김/ 비룡소

결코 식을 줄 모르는 하나님의 열정- 로버트 맥체인



로버트 머리 맥체인 (Robert Murray M'Cheyne)
1813.5.21 - 1843.3.25
스코틀랜드의 목사로서 1835년부터 1843년까지 스코틀랜드 교회를 섬겼다. 그는 에든버러에서 태어나 에든버러 대학에서 교육받았다. 그는 1835년부터 1838년까지는 폴커크(Fallkirk) 부근에 있는 라버트(Larbert) 교구와 더니페이스(Dunipace) 교구에서 존 보나(John Bonar)의 조수로 섬겼다. 그 후로는 던디의 세인트 피터 교회의 목사로 일하다 29세에 발진티푸스병으로 요절했다.


기자: 우리는 소위 말하는 ‘인생의 황금기’를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
그 황금기는 지나간 날일 수도, 앞으로의 미래일수도, 혹은 오늘 이 순간일수도 있는데요.
오늘은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하나님과 함께 보낸 특별한 손님을 소개해 드립니다.

Q1. 맥체인 목사님의 교육에 관한 열정은 아주 유명한데요, 목사님의 학창시절에 대해서도 궁금해하는 독자들이 많아요.
 
맥체인의 고향 애딘버러 (Edinburgh)

A1. 저는 신실한 기독교 신앙을 기반에 둔 법률가의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하나님과 책은 제가 태어나서부터 자연스레 제 삶에 스며들어 온 것이나 마찬가지죠. 하지만 집안의 가풍이 제아무리 학구적이라 한들, 좋은 스승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제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외갓집이 있었던 루스웰이라는 지방에 ‘던컨 삼촌’이라 불리는 목사님이 생각나는군요. 그 고장의 최초의 은행을 설립하신 분이자 그 지역의 사람들 특히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은 목사님이었어요. 정원에 있는 운동 기구를 마음껏 사용할 수 있었음은 물론, 저녁마다 열리는 시 낭송회, 노래 대회, 연설 등을 기다리는 재미가 아주 쏠쏠했어요. 아이들에게 자칫 재미없게 느껴질 시 낭송회나 연설 대회 등이 루스웰에서는 즐거운 오락거리였다는 사실은 굉장히 특이한 일입니다. 저는 십대 후반까지 휴일이면 루스웰에서 지내면서 학문이란 어렵고 딱딱한 것이 아니라, 충분히 즐기고 향유할 수 있는 것으로 자연스레 체득했습니다. 참 흔치 않은 은혜죠.
또한 에든버러 대학에 입학했을 때 만난 스승들이 기억나는군요. ‘제임스 필란스’ 교수님은 제가 아는 가장 탁월한 교사 중 하나입니다. 가르칠 때만이 유일하게 행복한 때-라고 말씀하시던 그 분은 고등학교에 ‘반장 체제’를 최초로 도입하여 성공시키신 분이기도 하죠. 그 분의 고전문학 수업이 얼마나 기다려졌는지요! 학문적 깊이도 상당하셨지만 수업 방식에 도전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으셨던 제임스 교수님을 보며 저 뿐만 아니라 많은 학생들이 도전을 받았습니다.
또한 ‘존 윌슨’ 교수님도 빼놓을 순 없죠. 도덕 철학 교수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으신 분이었지만 실력은 그 중요한 직책에 미치지 못한다는 비난을 받았던 분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에게는 학생들의 생각을 자극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도전시키고, 자극하는 교수에게 열광했고, 저 역시 그 중 하나였습니다.

에딘버러 대학교(University of Edinburgh)


사실 에든버러 대학은 좋은 학교이지만 당시의 대학 교육이란 현재에 비하면 그 체제와 교육 커리큘럼이 허술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필기 시험은 도입되지도 않아 학생들이 객관적으로 자신의 학문적 실력을 체크할 수 없었고, 교사들은 대체적으로 자신의 학생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으며, 강의시간에 질문을 제시하거나 학생들의 논문을 교정해주는 교수는 소수에 불과했죠. 하다못해 교수들의 강의도 의무사항이 아니었으니, 그 당시의 대학이라는 곳을 상상하실 수 있으실런지요?
그런 환경에서 저에게 학문적 열의를 일깨우고 끊임없이 도전하게 만드는 스승들을 만났다는 것은, 지금 생각하건대 행운이라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Q2. 그럼 목회나 선교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한 때도 학창시절이었던 건가요?

A2. 시기적으로 따지자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좋은 스승을 만나 성실한 학창 시절을 보낸 것이 제 인생의 단단한 기초적 토대가 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결정적인 항로를 정한 것은 아닙니다.
제가 그리스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기 시작한 계기는 어려서부터 정신적으로 의지하고 따르던 큰형 데이비드의 죽음이었습니다. 대학에 입학하여 정신 없이 공부하고 있을 때 큰형 데이비드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고, 저를 비롯한 온 가족이 큰 실의에 빠졌죠.
데이비드 형은 헌신적인 그리스도인이었고, 저를 위해 지속적으로 기도하며 자주 저와 기독교인의 삶과,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야 할 필요성에 대해 토론하곤 했습니다. 저는 형과 그런 토론을 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는데 데이비드 형은 단지 함께 있다는 자체로 제가 하나님과 가까워지게 하는 듯한 느낌이 들게 했거든요. 게다가 형은 종종 제가 언젠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사가 될 것이라고 말하곤 했어요.
형의 죽음 이후 저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과, 그리고 형이 생전에 입버릇처럼 했던 ‘목사로서의 삶’에 대해 스스로 진지하게 생각해보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형이 그토록 분명하게 소유하고 있었던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을 저는 누리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거든요.

Q3. 아, 가까운 형제의 죽음으로 목회자의 길을 생각하게 되셨군요. 하지만 평범한 대학생에서 목회자의 길로 그 방향을 선회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사역을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A3. 저는 모든 시작은 가장 기초적인 곳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데이비드 형의 거룩한 본과 행복한 죽음이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의로운 방향으로 저의 마음 속에 새로운 욕구를 지핀 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항상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의 자세로 살아왔고, 또 그러려고 노력했지만 진실한 회심을 겪은 것은 죽은 데이비드의 삶을 반추하며 그 동안의 제 삶을 뒤돌아 봤을 때 제 자신이 얼마나 거만한 사람이었는가를 깨달은 직후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모저모로 데이비드 형은 제 인생에 많은 영향을 끼쳤군요.
저는 그 동안 열심히 예배만 드렸던 교회에 찾아가 주일학교의 사역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이제껏 모범적인 자세로 목사님의 설교 말씀만 경청했지만 이젠 저의 시간과 육체를 아끼지 않고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찾아서 봉사하기 시작한거죠. 데이비드 형이 교회 사역이 이 땅에서 가장 축복받은 일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던 것이 기억나는군요. 어쨌든 이렇게 제가 할 수 있는 영역이 공부 이외의 것으로 점차 넓어지자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도 넓어졌고, 그제서야 형의 죽음에서 벗어나 제가 가야 할 길이 보이더군요.
사역의 현장에 뛰어든다는 것은, 솔직히 이제껏 이론적으로 성경만 읽고 설교만 듣던 삶과는 확연히 다른 삶이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라고 하죠? 이론만 알고 실제로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삶은 반쪽의 가치밖에 없는 삶입니다. 주일학교 사역을 도우면서 그것을 확실히 알았죠. 제가 알고 있었던 지식과 몸으로 느끼는 실제적인 사역은 그 느낌과 강도에서부터 확연히 차이가 나더군요. ‘실제적인 사역’의 맛을 본 저는 곧 스코틀랜드 교회의 에든버러 장로회에 목회자 후보생으로 등록했고, 1831년 9월 28일, 장로회에서 주관하는 시험을 치르고 목회 훈련을 받아도 좋다는 허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데이비드 형의 오랜 기도가 이루어진 순간이었죠.

Q4. 좋은 사역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요소가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A4. 두말할 것도 없이, 토론과 스승입니다. 그리고 이 두 요소를 동시에 가진 곳이 바로 학교라는 곳이죠.
토론은 좋은 목사와 교사로 훈련시키고 능력을 갖추게 하는데 매우 좋은 방법입니다. 물론 세대마다 토론의 유형이 조금씩 달라지기는 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토론에는 좋은 목회자를 양성하는데 밑거름이 되는 요소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편협한 사고를 갖는 것을 막을뿐더러 더 넓은 세상, 더 많은 시각들을 앉은 자리에서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토론뿐이라고 전 생각합니다. 탁월한 가르침, 활발한 영적 교제, 좋은 본을 제시해주는 선배 목사님들, 기독교 예배의 실제적인 체험 등이 그 예라고 할 수 있겠네요.
또한 사역은 물론 개인의 회심과 체험을 바탕으로 한 행위지만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하는 만큼 지식적으로 무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진리를 전하되 명확한 진리를 전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제가 진학한 에든버러 대학 신학부에는 훌륭한 교수님들이 많았습니다.

토마스 챔머스 (Thomas Chalmers)

그러나 제 인생에서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친 교수님을 꼽자면 저는 토머스 챔머스 교수님을 꼽습니다. 그 분은 신학 교수진 가운데서도 가장 탁월한 사람으로 평가 받으시는 분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명확한 가르침으로 유명하셨죠. 신학부에는 많은 탁월한 교수님들 중에서도 그 분은 그저 좋은 교수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대 최고의 설교가로 평가 받으셨습니다. 그 분의 강의는 신학생들 뿐만 아니라 에든버러 지역의 저명인사들까지 몰려와 들을 정도였으니까요. 매 번의 강의마다 오랜 시간 연구하고 심혈을 기울인 학문적 깊이와 진리에 대한 명확함, 그리고 그것을 전하는 사람에게만 느낄 수 있는 커다란 자부심이 녹아있었습니다. 그 분의 강의를 들으며 매번 많은 도전을 받은 사람은 저 뿐만이 아닐 겁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챔머스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끼친 영향력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전도 유망한 목사들 및 교사들이라는 것을 교수님 자신이 늘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실제적이고 목회적인 신학에 대한 그분의 강의는 우리들의 사고를 형성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고, 특히 적극적이고 진지한 목사들의 세대를 깨우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누구에게나 그렇지만 사역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토론의 기회가 제공된다는 것과, 또한 좋은 스승을 만나게 되는 것은 특별한 은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학이라는 학문의 공간은 사역자들이 결코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되는 공간이라고 생각되는군요. 결코 가볍지 않은 진리라는 이름의 짐을 지고 나아가야 할 사역자들에게 양질의 지식적 토양을 제공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평생에 걸친 ‘동역자’들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Q5. 결코 쉽지 않은 시험을 통과하고 졸업을 하셨는데요, 그 감동을 가장 먼저 누구와 나누셨나요?

A5. 아마 하늘에 있는 데이비드 형이 가장 좋아하지 않았을까 싶은데요(웃음).
신학과 4년의 절반이 지날 무렵부터는 신학생들은 장로회로부터 설교권을 받기 위해 실제 설교 시험 및 다섯 가지 언어로 된 설교문을 제출해야 하는 매우 까다로운 시기에 서게 됩니다. 저는 무사히 그 시험들을 통과하고 저의 의미 깊은 첫 설교지로 루스웰을 택했죠. 기억하시죠? 던컨 삼촌이라 불리던 목사님이 있으셨던, 제 어린 시절의 추억이 가득한 고장이죠.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자란 꼬맹이가 어느새 시간이 흘러 그곳에서 설교를 하게 되다니!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감개무량한 순간입니다. 가족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축하해주었지만, 그 누구와도 루스웰 교회 강단에 섰던 그 순간만큼의 감동을 나누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 날의 제 일기에 적힌 것을 잠시 읽어드리고 싶군요.
‘그리스도를 권위 있게 선포하는 것이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경이롭게 거룩하고 엄숙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실로 영광스런 특권이다!’

Q6. 졸업 후 설교자(부목사)로 사역하실 수 있는 기회가 많았을 텐데 선교에 관심을 가지신 계기가 있나요?

A6. 대학을 졸업하기 전, 스코틀랜드 교회가 인도로 파송한 최초의 선교사인 알렉산더 더프 선교사님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시기에는 마침 선교사들의 전기가 특별히 인기를 끌고 있었고, 때문에 선교사들에 대한 기사와 글들을 자주 접할 수 있기도 했지만, 알렉산더 더프와의 만남은 그 동안 읽은 선교사들의 전기나 기사보다 더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실제로 복음이 필요한 곳에서 발로 뛰는 사람의 한 마디가 이론 서적 백 장보다 마음을 후려치는 경우가 있는데, 더프 선교사님과의 만남이 바로 그런 것이었거든요.
신학대학 졸업 후 약 4년 동안 부목사로 사역하는 중에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언젠간 복음이 필요한 나라에 내 발로 가보리라, 하는 소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Q7. 선교적 사명을 가진 선교여행을 떠나셨던 일을 종종 설교에서도 인용하시는데요, 선교 여행은 어떤 여행이었나요?

앤드류 보나 (Andrew Alexander Bonar )

A7. 앤드류 보나 목사의 팔레스타인 선교 여행에 참여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은 당시에는 당혹스러웠지만 곧 하나님께서 저에게 뜻하신 바가 있기 때문에 준비하신 여정이라는 확신이 불현듯 들어 즉흥적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런던에서 출발하여 프랑스와 예루살렘을 거쳐 팔레스타인까지 갔던 선교 여정은 제 인생에 가장 그림처럼 기억될 날들입니다.
특히 예루살렘의 베다니와 겟세마네는 성지에서 이곳보다 더 순수한 즐거움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의미 깊은 장소가 되었죠. 같이 간 일행과 겟세마네 동산에 앉아 겟세마네와 연관된 성경의 모든 본문을 읽어갈 때의 그 벅차오름은 다시 느껴보기 힘든 감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선교 여행의 목적은 팔레스타인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저희는 수 개월의 여행 도중 예루살렘에서처럼 가슴 벅찬 감격도 느꼈지만 믿음의 시련이 저희를 기다리고 있는 순간도 종종 마주해야 했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 목회 생활만 하고 있었을 때는 미처 몰랐던 시련들이었죠.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밝히기를 꺼려했습니다. 타인에 대한 오랜 불신과 원망이 그곳에 뿌리내린 것이죠. 우리는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할 뿐만 아니라 개신교도들을 섬길 수 있는 다른 곳들도 살펴보아야 했는데 우리를 반기기는커녕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현지인들과 소통하는데 매우 애를 먹었습니다. 저는 저를 경계하는 눈빛을 살면서 처음 받아보았다는 새로운 사실을 깨닫는 동시에, 그 동안 제가 얼마나 안온한 환경에서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사역을 하고 있었는지를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팔레스타인은 극도의 빈곤함과 잦은 싸움이 만연한 곳이었습니다. 그런 곳에는 철저하게 준비된 한 사람의 좋은 선교사를 보내는 것이 준비되지 않은 50명을 보내는 것보다 더 지혜로운 일이었죠. 이는 꼭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수 천명의 유대인에게 해당되는 일이었습니다. 정말, 그들에게는 완벽하게 훈련된 선교사가 필요했습니다. 비록 수 개월의 여행을 하는 동안 건강은 눈에 띄게 상했지만,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깨달은 선교 여행은 제 인생에 다시 오지 못할 귀중한 시간으로 남겨지게 됩니다.

Q8. 사역자로 몸담으셨던 교회 중 기억에 남는 교회가 있으시다면요?
 
세인트 피터교회 (St. Peter's Church)

A8. 저와 함께 영적 교감을 나누었던 교회를 어떻게 잊을 수가 있을까요? 하나하나 소중하지 않은 추억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제가 가장 마지막까지 사역했던 세인트 피터 교회에 대해 잠시 말씀 드릴까 합니다. 팔레스타인 선교 여행에 참여하기로 했을 때 저는 세인트 피터 교회에서 사역하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교회를 두고, 성도를 두고 수 개월 동안이나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경우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걱정과 우려가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제가 팔레스타인 여정을 망설였던 단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제가 팔레스타인에서 돌아왔을 때 세인트 피터 교회는 믿기지 않는 영적 각성이 일어난 교회로, 제가 있었을 때보다 한 단계 더 성숙한 교회가 되어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독특하고 특별한 방식으로 임하시기를 간절히 간구하던 성도들의 하나 된 마음이 일으킨 놀라운 역사이자, 세인트 피터 교회에서 일어난 영적 부흥이 그 주변 교회에 광범위한 영향까지 미치고 있었죠.
스코틀랜드로 돌아오는 중에 이런 소식을 들은 저는 하루라도 빨리 교회로 돌아가고 싶어 안달을 했습니다. 출발할 때의 모든 우려와 불안을 한 번에 종식 시켰음은 물론이고 저 역시 그 영적 부흥을 겪은 성도들의 일원이 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부흥에는 인간 본성의 결점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저 역시 그런 상황을 예상했습니다. 죄의 자각을 느낀 사람이 다시 타락된 삶으로 돌아가는 일이 있듯, 부흥도 순간적인 불길처럼 타오르다 사라질 수 있거든요. 다시 돌아간 세인트 피터 교회는 여전히 따뜻하게 저를 반겨주었고, 저는 교회가 변화되었음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제 제가 할 일은 이제 이 곳에 부어진 영적 부흥의 불씨를 최대한 살려서 이 교회를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단단한 토대로 만드는 일이었죠. 성도들이 메시지와 그것을 근원적으로 베풀어주시는 분보다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을 영적인 축복으로 여기는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성령을 부어주시는 이는 오로지 단 한 분 뿐이심을 알 수 있도록 교육시키는 것이 제가 세인트 피터 교회로 돌아와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또한 제가 선교 여정에서 느꼈던 유대인 선교에 대한 필요성을 세인트 피터 교회를 통하여 전함으로서 교회는 ‘선교’라는 다소 넓은 영역에까지 관심을 갖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보수적인 스코틀랜드의 교회가 비로소 세계로 눈을 돌려, 나 혹은 내 주변 사람뿐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알지 못하는 수많은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게 되는 은혜도 체험하게 된 것이죠.
그러고 보면 말이죠, 어쩌면 세인트 피터 교회에서 일어난 영적 부흥은 그 동안 안온한 환경에서, 양질의 설교를 들으며 양육 받아 자칫 작고 편협한 시각을 갖고 있던 스코틀랜드 그리스도인들의 시야를 전 세계로 넓히기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밑 작업이 아니었을까 싶군요. 안 그렇습니까?(웃음)
 
도서명: 로버트 맥체인과 떠나는 여행
 
                      http://en.wikipedia.org/wiki/Robert_Murray_M%27Cheyne

진리는 불행 가운데서 빛나는 것이기에- 도스토옙스키


퍼온글 http://knowledge.godpia.com/sub03/sub_3_1.asp?reg_no=M201203250001


도스토옙스키 (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
1821.11.11 - 1881.2.9
모스크바 출생. 톨스토이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문호이다. ‘넋의 리얼리즘’이라 불리는 독자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내면을 추구하여 근대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농노제적(農奴制的) 구질서가 무너지고 자본주의적 제관계(諸關係)가 대신 들어서려는 과도기의 러시아에서 시대의 모순에 고민하면서, 그 고민하는 자신의 모습을 전적으로 작품세계에 투영한 그의 문학세계는 현대성을 두드러지게 지니고 있으며, 20세기의 사상과 문학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1821년 11월 11일 (러시아) - 1881년 2월 9일
1846년 장편소설 '가난한 사람들'로 데뷔.



기자: 러시아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잘 알려진 문학과 예술의 전당입니다. 러시아에서 배출한 예술가만해도 현재까지 알려진 사람들이 상당한데요, 오늘은 19세기 러시아가 발굴한 가장 위대한 작가로 알려진 도스토예프스키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도스토예프스키: 안녕하십니까, 기자님 그리고 갓피아 여러분. 이렇게 만나 정말 반갑습니다.

Q1. 러시아뿐 아니라 세계가 인정하는 명실공히 최고의 작가이신데요, ‘인간의 정신세계를 가장 완벽하게 파헤친 잔인한 천재’ 라는 수식어가 선생님 이름 뒤에 항상 붙는다는 것을 알고 계셨나요?


A1. 솔직히, 최고의 작가라느니 천재라느니 뭐 그런 수식어가 부담스럽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저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문단에 올랐지만, 사실 알려진 작품보다 그렇지 않은 작품이 더 많은 것이 사실이거든요.
한 예로 저의 첫 작품인 <가난한 사람들>은 당시 깐깐하기로 소문난, 그러나 최고의 문학 비평가였던 벨린스키의 극찬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했습니다.
고골 - 러시아의 작가ㆍ극작가. 러시아 리얼리즘의 시조.

‘러시아에 새로운 고골이 나타났다’ 가 제가 기억하는 최고의 찬사였죠. 당시 고골은 신인 작가가 넘보기에는 이미 너무 위대한 작가였거든요. 한국으로 치자면 이제 갓 작은 공모전에 입상한 단편소설 작가와 이미 고인이 되신 박완서, 박경리 선생님 정도의 차이라고나 할까요? 그러나 벨린스키의 그 한마디로 저는 유래 없이 화려하게 문단에 데뷔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저도 모르게 기고만장해졌던지, <가난한 사람들> 후에 내놓은 <분신>은 벨린스키의 혹평과 함께 문단에 알려지긴 알려졌으나 ‘수치스럽게’ 알려진 작품이 되었습니다. ‘겉멋이 가득 들어간’ 책이라는 비평이 대부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렇듯 몇몇 잘 알려진 제 작품들 뒤에는 소위 ‘그닥 좋지 않은’ 작품들이 더 길게 줄을 서 있다는 것을 부끄럽지만 먼저 알려드려야 할 것 같군요. 
‘인간의 정신 세계를 가장 완벽하게 파헤쳤다’ 라고 하셨나요?
저는 인간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고, 그들이 살아가는 삶과, 더 나아가 인간은 어째서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의구심을 항상 가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 작품의 모델이자, 동기는 항상 ‘사람’이 되었죠. 예를 들어 가난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더라도 그의 ‘가난’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 가난이 어디서 시작되었고, 어떤 영향을 미치며 그를 결국에는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파멸이라면 가난의 어떤 면이 그를 파멸로 이끄는지 그 과정을, 행복이라면 행복과는 전혀 관계 없을 것 같은 가난 속에서 그가 어떻게 행복을 찾았는지 등 모든 인간 문제의 해답은 인간 본연의 마음 속에 있다고 생각하며 소설의 주인공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대로 펜을 굴렸습니다. ‘나’ 라면 이렇게 했을 것이다-라는 틀을 만들어두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상황에 직면할 수 있는 인간의 삶을 그 상황에 직면한 ‘그 사람’의 시각에서 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Q2. 한국의 한 러시아 기행 작가가 선생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다가 재밌는 사실을 발견했는데요, 선생님이 한창 작품활동을 하시던 1800년대 중반부터 후반까지 살던 일곱 개의 집들이 모두 모퉁이에 위치해있다는 사실이었어요. 모퉁이 집을 선호하셨던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A2.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었지요. 집세가 쌌거든요! (웃음)
모퉁이에 있는 집은 같은 아파트라도 바람이 많이 들어와 값이 헐한 편이었습니다. 뭐, 제가 모퉁이 집을 특별히 선호해서 찾은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집세가 많이 안 들어갈 곳을 찾다 보니 모퉁이 집으로 들어가게 된 것 인데요. 하지만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여러 곳의 모퉁이 집에서 살면서 모퉁이 집은 저의 거처뿐 아니라 제 소설 속 주인공들의 거처로도 여러 번 나오게 됩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죄와 벌>의 여주인공과 남자 주인공의 집이 둘 다 모퉁이에 있는 허름한 방입니다. 이렇게 보면 결과적으로 제가 살게 된 집이 제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골목 낀 모퉁이 집에서 거리를 내다 보면 정면이 막히지 않고 사방으로 터진 공간이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이 공간에서 제가 본 것은 러시아 사회의 불행한 참상이었습니다. 건물 지하에 세 들어 사는 가난한 사람들, 지하 선술집에서 난폭하게 보드카를 마시는 주정뱅이들, 어린 자식들을 학대하는 부모들, 몸을 파는 창녀들이 각각 한 장면으로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한 눈에 들어오는 장면의 디테일들입니다. 너무 끔찍해서 인정하기 싫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것을 외면해서는 어떤 출구도 찾을 수 없는, 민중의 가난하고 미래 없는 삶을 거의 매일 목격하고 있었던 셈이죠.
저는 저도 모르게 모퉁이 방에 앉아 이 모든 것을 구원할 수 있는 새로운 교차점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현실의 참혹함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것이어야 했으며, 길거리에서 고통 받고 있는 민중의 삶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이어야 했죠. 그것은 제가 이제껏 인생의 거의 전부라 믿었던 문학도, 예술의 영역도 아니었습니다. 문학과 예술은 그런 참상을 알리고 호소할 수 있을 뿐, 그들의 참혹한 매일을 대신해주지도, 또 개선시킬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해답을 현실 너머에서 발견했습니다. ‘끄레스뜨’. 푸른 하늘 아래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교차로의 교회 십자가였죠.
모퉁이 방의 가장 좋은 점은 전망이 탁 트여있기 때문에 어느 모퉁이 방엘 가도 교회, 사원, 그리고 십자가가 보인다는 것이죠. 현실의 비참한 정경을 매일 목격한 저는 그 건너에 있는 교회나 사원의 십자가를 저도 모르는 사이에 구원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Q3. 선생님을 비롯한 러시아의 작가들을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특이하게도 군인이었던 이력이 있는데요(톨스토이라든지..), 군인이 되셨다가 작가로 전향하신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신가요?

A3. 그 당시 군인이란 전쟁에 참여하여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는 명예직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안정적인’ 직업이기도 했죠.
많은 귀족 출신의 작가들이 가문의 명예를 위해 군에 입대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저는 후자의 이유로 군인의 길을 택해야 했습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작은 영지를 관리하는 것만으로는 자식들의 교육과 생계를 책임질 수 없으셨던 아버지께서는 고심 끝에 저와 제 형을 공병학교에 보내기로 하셨습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는 무척 엄격하시고 자식들의 교육에 관심이 많으셨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을 거스른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채 저와 형은 공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죠.


그러나 저의 성향상 군대는 맞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직도 열 여섯 살에 공병학교에 들어가려 그 동안 살던 모스크바를 떠나 뻬쩨르부르그로 향한 일이 제 인생의 심각한 실수였다고 생각합니다. 혹독한 군사훈련과 극단적인 기질을 요구하는 엄격한 분위기, 무미건조한 수업 내용 등은 한창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기를 지내던 저에게는 전혀 즐겁지 않았거든요. 그러나 또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런 질식할만한 환경 속에서 낭만주의적 몽상과 문학은 제게 오아시스 같은 역할로, 문학에 대한 갈증과 열정을 더욱 지피는 계기가 되었죠. 낭만주의적 문학가들에게 푹 빠진 시기도 이 공병학교 시절이었습니다.
솔직히, 아버지께서 제 마음대로 인생을 살아보라고 하셨어도 이 때만큼 열렬히 책과 문학, 그리고 작가에게 빠지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러고 보면 인생은 어디서나 숨 쉴 공간을 만들어주는 셈이랄까요(웃음).

Q4. 작가들에게는 ‘영감’을 주고 받는 특별한 장소가 있다고 하는데요, 선생님에게도 그런 장소가 있나요?


A4. 제 일생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뻬쩨르부르그가 바로 그 곳입니다. 열 여섯에 군인이 되기 위해 처음 찾아간 뻬쩨르부르그는 제국의 수도가 보여주는 위엄과 화려함을 자랑했지만 그 웅장함은 상류층에 속한 사람들에게만 보이는 모습이었습니다.
당시의 러시아는 산업혁명을 목전에 두고 빈부의 격차가 극심해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의 실상은 차마 눈 뜨고는 못 볼 정도였죠. 그리고 그들의 실상은 나라의 중심부로 들어갈수록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제가 뻬쩨르부르그에 도착해 제일 먼저 목격하고 경험한 것은 도시의 하층민과 그들의 비참한 삶이었습니다. 화려한 궁전과 저택, 기하학적으로 정비된 구역과 거리, 멋진 예술가와 미인들이 드나드는 극장과 살롱, 무도회와 만찬 따위가 같은 도시에서 열리고 있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모습이었죠.


게다가 이 도시의 막장으로 들어가면 어디서도 보기 힘든 끔찍한 광경이 펼쳐집니다. 이방인들이 웬만한 각오를 하지 않으면 출입할 수 없는, 기자님은 상상도 못할 공간이죠. 구역질 나는 뒷골목의 쓰레기들, 먼지가 켜켜이 쌓인 골목, 버려진 자동차, 험한 인상을 한 도시의 부랑자들,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힘겹게 견디고 있는 노파의 퀭한 눈동자, 존재를 알 수 없는 그림자, 숨막히는 열기 등, 아무리 문학적인 재능이 없는 사람이라도 무언가를 외치고 싶게 만드는 어둡고 음침한 모습을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원래는 네바 강변에 위치한 거대한 궁전과 저택, 네브스끼 대로의 화려한 고급 식당과 극장, 바실레프스끼 섬에 조성된 정방형 구역과 자로 잰 듯한 직선 거리 등이 뻬쩨르부르그의 대표적인 모습이지만, 제가 본 뻬쩨르부르그는 그런 모습이 아니었고, 이는 후에 이곳을 배경으로 한 저의 모든 작품에서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아마 저의 작품 속에서 뻬쩨르부르그를 부와 화려함의 상징이 되는 도시로 보기 힘든 이유일지도 모르죠. 저는 그런 화려함과 친숙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뒷골목 삶에 익숙한 이유가 저의 ‘작가로서의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운명’을 일깨워준 도시가 바로 러시아의 가장 아름다운 상류 도시로 손꼽히는 뻬쩨르부르그라는 사실이, 재미있지 않습니까?

Q5. 선생님의 삶에 영향을 끼친 사람이 있다면요?

벨린스키 - 러시아의 문학 비평가, 러시아 리얼리즘 미학의 창시자.

A5. 저의 첫 작품과 두 번째 작품에 아주 상반된 비평을 내놓은 벨린스키(Belinskii, Vissarion Grigor'Evich)를 빼놓을 수 없죠. 저는 개인적으로 벨린스키를 매우 존경했습니다. 그의 비평은 날카롭고, 정확하게 핵심을 꿰뚫거든요. 다른 비평가들이 두리뭉실하게 호불호를 정하지 못하는 것과는 반대로 벨린스키의 비판에는 그 작가의 작품을 온 몸으로 흡수하고 토해내는 정도의 정확함이 있습니다. 가끔은 작가 자신도 몰랐던 작품의 의도를 꼬집어내기도 하는데, 정말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작가와 비평가의 관계에는 한계가 있어서 개인적인 친분을 충분히 쌓지 못한 것이 아쉽다면 아쉽지만, 또 어찌 생각하면 서로를 존경하는 비평가이자, 장래 유망한 작가 정도로 주시하고 있는 편이 저희 사이에선 최적의 관계가 아니었을까 합니다(웃음).

체르니 셰프스키 - 러시아의 비평가. 사회ㆍ정치 평론가.

또 저의 삶에 영향을 끼친 사람이라면, 저의 긴긴 유배 생활의 시초가 된 체르니 셰프스키(Chernyshevskii)가 있죠. 그는 푸리에, 생시몽, 오언 등 공상적 사회주의에 심취했던 러시아 사상가였습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세상의 기존 질서를 인간의 자연적인 욕구에 따라 개조해야 한다고 믿었던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겠군요.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소위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이념은 러시아의 진보적인 지식인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고, 체르니 셰프스키는 그 시기를 놓치지 않고 1844년부터 독서 서클을 조직했는데 거기의 회원들이 당시 매우 쟁쟁했던 문인들과 유명 지식인, 교수, 자연과학자, 교육기관의 수장, 정치인까지 두루 포함했던 서클이었습니다. 저 역시 친분 있던 한 시인의 추천으로 그 서클에 참여해보게 되었고, 우연찮게도 그 날 뻬뜨라셰프스키를 보게 되었죠. 큰 두상에 무성한 턱수염을 기른 서글서글한 그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에서는 각계의 쟁쟁한 수장들이 모여 진보적인 지식을 나누는 이 모임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러시아는 이념이나 사상을 떠나 나라 안팎의 문제만으로도 충분히 극심한 혼란 상태였거든요. 진보적인 지식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저와 그 독서클럽의 회원들은 그 안에 있던 첩자의 밀고로 1849년 4월 23일 새벽, 폰딴까 운하의 현수교로 연행되었습니다. 죄목은 ‘금서를 낭독한 죄’ 였습니다.
생전 처음 감옥에 들어가고, 재판정에 선 제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새 저와 클럽의 몇몇 회원들은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기자님, 상상이 가시는지요? 뭐가 뭔지도 모르고 어리둥절하게(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은 있었습니다만) 서 있다가 갑자기 사형수가 된 그 때의 어이없는 기분을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사형선고는 우리로 하여금 다시는 이런 조직 활동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황제 니꼴라이 1세의 계략(?)이었고 실질적으로 저에게 내려진 형벌은 ‘4년간의 징역, 그 후에는 사병 복무’ 였습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황제의 계략에 따라 저희는 사형 집행장에 끌려가서 머리에 흰 수건을 쓰고, 무시무시한 칼날이 제 머리 위에서 둘로 쪼개지는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저는 이 사형집행 순간을 평생 잊지 못했습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 위에 서 본 사람이라면 어찌 그 순간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죽음은 삶을 돌아보는 거울 같은 것입니다. 삶은 유한하고, 그래서 인간은 무한의 가치에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저는 사형 집행장에 선 그 짧은 순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행히(아니죠, 당연히)도 사형은 취소되었고 저는 시베리아로 유배 생활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사형 집행장에 섰던 그 짧은 순간을 20여 년이 지난 후 저의 장편 소설 <백치>에서 그대로 재현했습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 때의 기억만큼은 생생하더군요(웃음).
체르니 셰프스키를 만난 것을 후회 하느냐구요? 모든 것에는 그 이유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를 만나 좋은 클럽에서 마음껏 진보적인 지식을 습득했고, 금서(禁書)라며 감히 손도 못 대던 책들을 맘껏 낭독해 보았으며, 또한 그가 아니었다면 결코 경험해보지 못했을 사형 집행의 순간과 유배 생활이 훗날 저의 작품의 모티브가 되고, 뼈대가 되었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Q6. 선생님의 작품은 읽을수록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데요, 가장 활동이 왕성했던 시기에 작품을 통해 독자들과 소통하고 싶은 것이 있으셨던 건가요?

A6. 저는 어려서부터 공상을 좋아하는 소년이었고, 낭만주의적 문학에 대한 열정을 한 순간도 놓지 않았지만 제가 가장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한 배경은 문학 자체에 대한 사랑이라기보단 생계를 꾸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거, 기자님의 환상을 깼나요?
유배 생활을 마치고 뻬쩨르부르그로 돌아와 형과 함께 시작한 잡지 사업인 <시대>에 저의 글을 기고하기 시작한 것을 시초로 저는 본격적으로 가정의 생계를 이끌어가기 위한 ‘생계형 작가’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처음에는 반응이 괜찮았던 <시대>가 점점 사양길로 들어설 때 아내가 위독해졌습니다. 저는 <시대>의 동업자이자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 회사를 살리고, 한편으로는 아내의 약값을 대기 위해 밤낮없이 원고에 몰두했습니다. <노름꾼>은 저의 최초의 생계형 소설이지요.


안나 스니트키나 Annagrigdost

러나 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대>는 폐간되었고 아내는 끝내 세상을 떠났습니다. 실의에 빠져 있을 틈도 없이 저는 바로 다음 사업인 <세기>라는 잡지를 창간했지요. 문학에 대한 열정이 시작한 사업이라기보단 <시대>의 폐간으로 충격을 받아 세상을 떠난 또 한 사람인 형의 남은 가족과 저의 가족의 생계가 걸린 문제였지요. <세기>라는 잡지에 <지하 생활자의 수기>를 열심히 연재했지만 <세기> 역시 폐간되고 맙니다. 아마도 저의 사업적인 소질이 없었던 탓이겠지요.
두 개의 잡지가 연달아 폐간되자 더 이상 돈을 꿀 만한 곳도 없어졌고, 빚쟁이들의 독촉도 나날이 심해졌습니다. 그 상황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제 작품 모두를 걸고 출판업자와 거래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음악서적상을 비롯하여 작가들의 작품을 사 모으는 브로커가 많았는데 이제껏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무지했던 저는 지금 생각하면 노예 계약서나 다름없는 그 서류에 절박한 마음으로 사인을 해버렸지요.
빚쟁이들의 몽둥이에 두들겨 맞지 않으려면 정신 없이 작품을 써나가야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렇게 빚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작품을 쓸 수 밖에 없는 현실이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만, 한편으로는 나의 진짜 삶이 비로소 시작되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죠. 우습죠? 그러나 정말 그랬습니다. 그토록 절박한 상황에 처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거든요. 게다가 눈을 뜨면 그 날을 또 살아가야 하지 않습니까? 어쩔 수 없이 충실하게 살아가게 되는 하루하루를 지내며 ‘이것이 진짜 삶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작품을 통해 독자들과 소통하는 것은 모든 작가들의 꿈입니다. 독자들의 손에 자신의 책이 들려져 있는 달콤한 상상을 하며 글을 쓰는 것이 작가에게 허락된 최고의 행복이죠.
그러나 가장 작품활동이 왕성했던 그 시기의 제겐 그런 상상조차 사치였습니다. 오죽하면 항상 아슬아슬한 마감 날짜를 맞추기 위해 속기사까지 고용했을 정도니까요. 정말 다시는 그렇게 펜대를 잡을 수 있을 만큼 많은 글을 쓸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할 양의 글을 정말 전투적으로 썼습니다. <죄와 벌>도 그 때 탄생한 작품 중 하나입니다.

Q7. 말 그대로 ‘밥벌이의 지겨움’ 이었네요!(웃음) 최고의 작가에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 놀라울 뿐입니다. 이제는 독자들과 소통하실 수 있는 여유가 생기셨을 것 같은데요, 후대들에게, 특히 작가 지망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A7. 어린 시절 원치 않았던 진로 선택에서부터 나의 의지와는 상관 없었던 유배 생활, 그리고 평생 동안 빚쟁이에게 쫓기며 써왔던 작품 활동까지. 저의 작품은 어떤지 몰라도, 저의 인생은 한 사람의 인생으로서는 그닥 본받고 싶지 않은 생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결코 쉽지 않은 시간을 살아오며 깨달은 것 하나는, 진리는 불행 가운데에서도 찬란히 빛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불행이 더할수록 진리도 더욱 빛나죠.
그 진리는 현실 세계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현실은 제가 모퉁이 방에서 본 거리의 모습처럼 그 때나 지금이나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참혹한 모습 그대로이거든요.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이 생을 살아가는 인간은 그 진리를 간절히 찾으며 살아가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 진리의 불빛이 없다면 생은 완전한 암흑이 되어버리기 때문이죠. 저는 그 진리가 ‘끄레스뜨’, 곧 십자가라고 믿습니다. 모든 것이 절망적인 상황이어도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우리를 운명으로 인도한다는 그 손길을 굳게 믿는다면, 생애 최악의 절망의 순간이라고 생각되던 그 때가 바로 ‘운명’이라는 멋진 순간으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그리고 인생은 그렇게 자신의 가치를 찾아가게 되죠.
작가의 소임에 관해서는 많은 말 보다는, 외면하고픈 진실일수록 직시하는 시각을 가져야 함을 말하고 싶습니다. 세상에 책을 쓰는 작가가 아니라면 대체 누가 모든 사람이 외면하는 사실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아름다운 세상이라도 우리 같은 사람들이 눈을 돌려야 할 곳, 친숙해져야 할 곳은 언제나 있음을 많은 작가 지망생들이 알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참고도서: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이병훈 지음/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