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April 19, 2012

결코 식을 줄 모르는 하나님의 열정- 로버트 맥체인



로버트 머리 맥체인 (Robert Murray M'Cheyne)
1813.5.21 - 1843.3.25
스코틀랜드의 목사로서 1835년부터 1843년까지 스코틀랜드 교회를 섬겼다. 그는 에든버러에서 태어나 에든버러 대학에서 교육받았다. 그는 1835년부터 1838년까지는 폴커크(Fallkirk) 부근에 있는 라버트(Larbert) 교구와 더니페이스(Dunipace) 교구에서 존 보나(John Bonar)의 조수로 섬겼다. 그 후로는 던디의 세인트 피터 교회의 목사로 일하다 29세에 발진티푸스병으로 요절했다.


기자: 우리는 소위 말하는 ‘인생의 황금기’를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
그 황금기는 지나간 날일 수도, 앞으로의 미래일수도, 혹은 오늘 이 순간일수도 있는데요.
오늘은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하나님과 함께 보낸 특별한 손님을 소개해 드립니다.

Q1. 맥체인 목사님의 교육에 관한 열정은 아주 유명한데요, 목사님의 학창시절에 대해서도 궁금해하는 독자들이 많아요.
 
맥체인의 고향 애딘버러 (Edinburgh)

A1. 저는 신실한 기독교 신앙을 기반에 둔 법률가의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하나님과 책은 제가 태어나서부터 자연스레 제 삶에 스며들어 온 것이나 마찬가지죠. 하지만 집안의 가풍이 제아무리 학구적이라 한들, 좋은 스승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제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외갓집이 있었던 루스웰이라는 지방에 ‘던컨 삼촌’이라 불리는 목사님이 생각나는군요. 그 고장의 최초의 은행을 설립하신 분이자 그 지역의 사람들 특히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은 목사님이었어요. 정원에 있는 운동 기구를 마음껏 사용할 수 있었음은 물론, 저녁마다 열리는 시 낭송회, 노래 대회, 연설 등을 기다리는 재미가 아주 쏠쏠했어요. 아이들에게 자칫 재미없게 느껴질 시 낭송회나 연설 대회 등이 루스웰에서는 즐거운 오락거리였다는 사실은 굉장히 특이한 일입니다. 저는 십대 후반까지 휴일이면 루스웰에서 지내면서 학문이란 어렵고 딱딱한 것이 아니라, 충분히 즐기고 향유할 수 있는 것으로 자연스레 체득했습니다. 참 흔치 않은 은혜죠.
또한 에든버러 대학에 입학했을 때 만난 스승들이 기억나는군요. ‘제임스 필란스’ 교수님은 제가 아는 가장 탁월한 교사 중 하나입니다. 가르칠 때만이 유일하게 행복한 때-라고 말씀하시던 그 분은 고등학교에 ‘반장 체제’를 최초로 도입하여 성공시키신 분이기도 하죠. 그 분의 고전문학 수업이 얼마나 기다려졌는지요! 학문적 깊이도 상당하셨지만 수업 방식에 도전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으셨던 제임스 교수님을 보며 저 뿐만 아니라 많은 학생들이 도전을 받았습니다.
또한 ‘존 윌슨’ 교수님도 빼놓을 순 없죠. 도덕 철학 교수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으신 분이었지만 실력은 그 중요한 직책에 미치지 못한다는 비난을 받았던 분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에게는 학생들의 생각을 자극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도전시키고, 자극하는 교수에게 열광했고, 저 역시 그 중 하나였습니다.

에딘버러 대학교(University of Edinburgh)


사실 에든버러 대학은 좋은 학교이지만 당시의 대학 교육이란 현재에 비하면 그 체제와 교육 커리큘럼이 허술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필기 시험은 도입되지도 않아 학생들이 객관적으로 자신의 학문적 실력을 체크할 수 없었고, 교사들은 대체적으로 자신의 학생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으며, 강의시간에 질문을 제시하거나 학생들의 논문을 교정해주는 교수는 소수에 불과했죠. 하다못해 교수들의 강의도 의무사항이 아니었으니, 그 당시의 대학이라는 곳을 상상하실 수 있으실런지요?
그런 환경에서 저에게 학문적 열의를 일깨우고 끊임없이 도전하게 만드는 스승들을 만났다는 것은, 지금 생각하건대 행운이라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Q2. 그럼 목회나 선교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한 때도 학창시절이었던 건가요?

A2. 시기적으로 따지자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좋은 스승을 만나 성실한 학창 시절을 보낸 것이 제 인생의 단단한 기초적 토대가 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결정적인 항로를 정한 것은 아닙니다.
제가 그리스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기 시작한 계기는 어려서부터 정신적으로 의지하고 따르던 큰형 데이비드의 죽음이었습니다. 대학에 입학하여 정신 없이 공부하고 있을 때 큰형 데이비드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고, 저를 비롯한 온 가족이 큰 실의에 빠졌죠.
데이비드 형은 헌신적인 그리스도인이었고, 저를 위해 지속적으로 기도하며 자주 저와 기독교인의 삶과,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야 할 필요성에 대해 토론하곤 했습니다. 저는 형과 그런 토론을 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는데 데이비드 형은 단지 함께 있다는 자체로 제가 하나님과 가까워지게 하는 듯한 느낌이 들게 했거든요. 게다가 형은 종종 제가 언젠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사가 될 것이라고 말하곤 했어요.
형의 죽음 이후 저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과, 그리고 형이 생전에 입버릇처럼 했던 ‘목사로서의 삶’에 대해 스스로 진지하게 생각해보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형이 그토록 분명하게 소유하고 있었던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을 저는 누리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거든요.

Q3. 아, 가까운 형제의 죽음으로 목회자의 길을 생각하게 되셨군요. 하지만 평범한 대학생에서 목회자의 길로 그 방향을 선회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사역을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A3. 저는 모든 시작은 가장 기초적인 곳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데이비드 형의 거룩한 본과 행복한 죽음이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의로운 방향으로 저의 마음 속에 새로운 욕구를 지핀 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항상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의 자세로 살아왔고, 또 그러려고 노력했지만 진실한 회심을 겪은 것은 죽은 데이비드의 삶을 반추하며 그 동안의 제 삶을 뒤돌아 봤을 때 제 자신이 얼마나 거만한 사람이었는가를 깨달은 직후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모저모로 데이비드 형은 제 인생에 많은 영향을 끼쳤군요.
저는 그 동안 열심히 예배만 드렸던 교회에 찾아가 주일학교의 사역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이제껏 모범적인 자세로 목사님의 설교 말씀만 경청했지만 이젠 저의 시간과 육체를 아끼지 않고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찾아서 봉사하기 시작한거죠. 데이비드 형이 교회 사역이 이 땅에서 가장 축복받은 일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던 것이 기억나는군요. 어쨌든 이렇게 제가 할 수 있는 영역이 공부 이외의 것으로 점차 넓어지자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도 넓어졌고, 그제서야 형의 죽음에서 벗어나 제가 가야 할 길이 보이더군요.
사역의 현장에 뛰어든다는 것은, 솔직히 이제껏 이론적으로 성경만 읽고 설교만 듣던 삶과는 확연히 다른 삶이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라고 하죠? 이론만 알고 실제로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삶은 반쪽의 가치밖에 없는 삶입니다. 주일학교 사역을 도우면서 그것을 확실히 알았죠. 제가 알고 있었던 지식과 몸으로 느끼는 실제적인 사역은 그 느낌과 강도에서부터 확연히 차이가 나더군요. ‘실제적인 사역’의 맛을 본 저는 곧 스코틀랜드 교회의 에든버러 장로회에 목회자 후보생으로 등록했고, 1831년 9월 28일, 장로회에서 주관하는 시험을 치르고 목회 훈련을 받아도 좋다는 허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데이비드 형의 오랜 기도가 이루어진 순간이었죠.

Q4. 좋은 사역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요소가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A4. 두말할 것도 없이, 토론과 스승입니다. 그리고 이 두 요소를 동시에 가진 곳이 바로 학교라는 곳이죠.
토론은 좋은 목사와 교사로 훈련시키고 능력을 갖추게 하는데 매우 좋은 방법입니다. 물론 세대마다 토론의 유형이 조금씩 달라지기는 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토론에는 좋은 목회자를 양성하는데 밑거름이 되는 요소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편협한 사고를 갖는 것을 막을뿐더러 더 넓은 세상, 더 많은 시각들을 앉은 자리에서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토론뿐이라고 전 생각합니다. 탁월한 가르침, 활발한 영적 교제, 좋은 본을 제시해주는 선배 목사님들, 기독교 예배의 실제적인 체험 등이 그 예라고 할 수 있겠네요.
또한 사역은 물론 개인의 회심과 체험을 바탕으로 한 행위지만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하는 만큼 지식적으로 무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진리를 전하되 명확한 진리를 전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제가 진학한 에든버러 대학 신학부에는 훌륭한 교수님들이 많았습니다.

토마스 챔머스 (Thomas Chalmers)

그러나 제 인생에서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친 교수님을 꼽자면 저는 토머스 챔머스 교수님을 꼽습니다. 그 분은 신학 교수진 가운데서도 가장 탁월한 사람으로 평가 받으시는 분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명확한 가르침으로 유명하셨죠. 신학부에는 많은 탁월한 교수님들 중에서도 그 분은 그저 좋은 교수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대 최고의 설교가로 평가 받으셨습니다. 그 분의 강의는 신학생들 뿐만 아니라 에든버러 지역의 저명인사들까지 몰려와 들을 정도였으니까요. 매 번의 강의마다 오랜 시간 연구하고 심혈을 기울인 학문적 깊이와 진리에 대한 명확함, 그리고 그것을 전하는 사람에게만 느낄 수 있는 커다란 자부심이 녹아있었습니다. 그 분의 강의를 들으며 매번 많은 도전을 받은 사람은 저 뿐만이 아닐 겁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챔머스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끼친 영향력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전도 유망한 목사들 및 교사들이라는 것을 교수님 자신이 늘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실제적이고 목회적인 신학에 대한 그분의 강의는 우리들의 사고를 형성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고, 특히 적극적이고 진지한 목사들의 세대를 깨우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누구에게나 그렇지만 사역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토론의 기회가 제공된다는 것과, 또한 좋은 스승을 만나게 되는 것은 특별한 은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학이라는 학문의 공간은 사역자들이 결코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되는 공간이라고 생각되는군요. 결코 가볍지 않은 진리라는 이름의 짐을 지고 나아가야 할 사역자들에게 양질의 지식적 토양을 제공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평생에 걸친 ‘동역자’들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Q5. 결코 쉽지 않은 시험을 통과하고 졸업을 하셨는데요, 그 감동을 가장 먼저 누구와 나누셨나요?

A5. 아마 하늘에 있는 데이비드 형이 가장 좋아하지 않았을까 싶은데요(웃음).
신학과 4년의 절반이 지날 무렵부터는 신학생들은 장로회로부터 설교권을 받기 위해 실제 설교 시험 및 다섯 가지 언어로 된 설교문을 제출해야 하는 매우 까다로운 시기에 서게 됩니다. 저는 무사히 그 시험들을 통과하고 저의 의미 깊은 첫 설교지로 루스웰을 택했죠. 기억하시죠? 던컨 삼촌이라 불리던 목사님이 있으셨던, 제 어린 시절의 추억이 가득한 고장이죠.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자란 꼬맹이가 어느새 시간이 흘러 그곳에서 설교를 하게 되다니!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감개무량한 순간입니다. 가족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축하해주었지만, 그 누구와도 루스웰 교회 강단에 섰던 그 순간만큼의 감동을 나누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 날의 제 일기에 적힌 것을 잠시 읽어드리고 싶군요.
‘그리스도를 권위 있게 선포하는 것이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경이롭게 거룩하고 엄숙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실로 영광스런 특권이다!’

Q6. 졸업 후 설교자(부목사)로 사역하실 수 있는 기회가 많았을 텐데 선교에 관심을 가지신 계기가 있나요?

A6. 대학을 졸업하기 전, 스코틀랜드 교회가 인도로 파송한 최초의 선교사인 알렉산더 더프 선교사님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시기에는 마침 선교사들의 전기가 특별히 인기를 끌고 있었고, 때문에 선교사들에 대한 기사와 글들을 자주 접할 수 있기도 했지만, 알렉산더 더프와의 만남은 그 동안 읽은 선교사들의 전기나 기사보다 더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실제로 복음이 필요한 곳에서 발로 뛰는 사람의 한 마디가 이론 서적 백 장보다 마음을 후려치는 경우가 있는데, 더프 선교사님과의 만남이 바로 그런 것이었거든요.
신학대학 졸업 후 약 4년 동안 부목사로 사역하는 중에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언젠간 복음이 필요한 나라에 내 발로 가보리라, 하는 소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Q7. 선교적 사명을 가진 선교여행을 떠나셨던 일을 종종 설교에서도 인용하시는데요, 선교 여행은 어떤 여행이었나요?

앤드류 보나 (Andrew Alexander Bonar )

A7. 앤드류 보나 목사의 팔레스타인 선교 여행에 참여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은 당시에는 당혹스러웠지만 곧 하나님께서 저에게 뜻하신 바가 있기 때문에 준비하신 여정이라는 확신이 불현듯 들어 즉흥적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런던에서 출발하여 프랑스와 예루살렘을 거쳐 팔레스타인까지 갔던 선교 여정은 제 인생에 가장 그림처럼 기억될 날들입니다.
특히 예루살렘의 베다니와 겟세마네는 성지에서 이곳보다 더 순수한 즐거움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의미 깊은 장소가 되었죠. 같이 간 일행과 겟세마네 동산에 앉아 겟세마네와 연관된 성경의 모든 본문을 읽어갈 때의 그 벅차오름은 다시 느껴보기 힘든 감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선교 여행의 목적은 팔레스타인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저희는 수 개월의 여행 도중 예루살렘에서처럼 가슴 벅찬 감격도 느꼈지만 믿음의 시련이 저희를 기다리고 있는 순간도 종종 마주해야 했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 목회 생활만 하고 있었을 때는 미처 몰랐던 시련들이었죠.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밝히기를 꺼려했습니다. 타인에 대한 오랜 불신과 원망이 그곳에 뿌리내린 것이죠. 우리는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할 뿐만 아니라 개신교도들을 섬길 수 있는 다른 곳들도 살펴보아야 했는데 우리를 반기기는커녕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현지인들과 소통하는데 매우 애를 먹었습니다. 저는 저를 경계하는 눈빛을 살면서 처음 받아보았다는 새로운 사실을 깨닫는 동시에, 그 동안 제가 얼마나 안온한 환경에서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사역을 하고 있었는지를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팔레스타인은 극도의 빈곤함과 잦은 싸움이 만연한 곳이었습니다. 그런 곳에는 철저하게 준비된 한 사람의 좋은 선교사를 보내는 것이 준비되지 않은 50명을 보내는 것보다 더 지혜로운 일이었죠. 이는 꼭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수 천명의 유대인에게 해당되는 일이었습니다. 정말, 그들에게는 완벽하게 훈련된 선교사가 필요했습니다. 비록 수 개월의 여행을 하는 동안 건강은 눈에 띄게 상했지만,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깨달은 선교 여행은 제 인생에 다시 오지 못할 귀중한 시간으로 남겨지게 됩니다.

Q8. 사역자로 몸담으셨던 교회 중 기억에 남는 교회가 있으시다면요?
 
세인트 피터교회 (St. Peter's Church)

A8. 저와 함께 영적 교감을 나누었던 교회를 어떻게 잊을 수가 있을까요? 하나하나 소중하지 않은 추억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제가 가장 마지막까지 사역했던 세인트 피터 교회에 대해 잠시 말씀 드릴까 합니다. 팔레스타인 선교 여행에 참여하기로 했을 때 저는 세인트 피터 교회에서 사역하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교회를 두고, 성도를 두고 수 개월 동안이나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경우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걱정과 우려가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제가 팔레스타인 여정을 망설였던 단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제가 팔레스타인에서 돌아왔을 때 세인트 피터 교회는 믿기지 않는 영적 각성이 일어난 교회로, 제가 있었을 때보다 한 단계 더 성숙한 교회가 되어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독특하고 특별한 방식으로 임하시기를 간절히 간구하던 성도들의 하나 된 마음이 일으킨 놀라운 역사이자, 세인트 피터 교회에서 일어난 영적 부흥이 그 주변 교회에 광범위한 영향까지 미치고 있었죠.
스코틀랜드로 돌아오는 중에 이런 소식을 들은 저는 하루라도 빨리 교회로 돌아가고 싶어 안달을 했습니다. 출발할 때의 모든 우려와 불안을 한 번에 종식 시켰음은 물론이고 저 역시 그 영적 부흥을 겪은 성도들의 일원이 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부흥에는 인간 본성의 결점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저 역시 그런 상황을 예상했습니다. 죄의 자각을 느낀 사람이 다시 타락된 삶으로 돌아가는 일이 있듯, 부흥도 순간적인 불길처럼 타오르다 사라질 수 있거든요. 다시 돌아간 세인트 피터 교회는 여전히 따뜻하게 저를 반겨주었고, 저는 교회가 변화되었음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제 제가 할 일은 이제 이 곳에 부어진 영적 부흥의 불씨를 최대한 살려서 이 교회를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단단한 토대로 만드는 일이었죠. 성도들이 메시지와 그것을 근원적으로 베풀어주시는 분보다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을 영적인 축복으로 여기는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성령을 부어주시는 이는 오로지 단 한 분 뿐이심을 알 수 있도록 교육시키는 것이 제가 세인트 피터 교회로 돌아와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또한 제가 선교 여정에서 느꼈던 유대인 선교에 대한 필요성을 세인트 피터 교회를 통하여 전함으로서 교회는 ‘선교’라는 다소 넓은 영역에까지 관심을 갖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보수적인 스코틀랜드의 교회가 비로소 세계로 눈을 돌려, 나 혹은 내 주변 사람뿐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알지 못하는 수많은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게 되는 은혜도 체험하게 된 것이죠.
그러고 보면 말이죠, 어쩌면 세인트 피터 교회에서 일어난 영적 부흥은 그 동안 안온한 환경에서, 양질의 설교를 들으며 양육 받아 자칫 작고 편협한 시각을 갖고 있던 스코틀랜드 그리스도인들의 시야를 전 세계로 넓히기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밑 작업이 아니었을까 싶군요. 안 그렇습니까?(웃음)
 
도서명: 로버트 맥체인과 떠나는 여행
 
                      http://en.wikipedia.org/wiki/Robert_Murray_M%27Cheyne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