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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 (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
1821.11.11 - 1881.2.9
도스토옙스키 (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
1821.11.11 - 1881.2.9
모스크바 출생. 톨스토이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문호이다. ‘넋의 리얼리즘’이라 불리는 독자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내면을 추구하여 근대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농노제적(農奴制的) 구질서가 무너지고 자본주의적 제관계(諸關係)가 대신 들어서려는 과도기의 러시아에서 시대의 모순에 고민하면서, 그 고민하는 자신의 모습을 전적으로 작품세계에 투영한 그의 문학세계는 현대성을 두드러지게 지니고 있으며, 20세기의 사상과 문학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1821년 11월 11일 (러시아) - 1881년 2월 9일
1846년 장편소설 '가난한 사람들'로 데뷔.
1846년 장편소설 '가난한 사람들'로 데뷔.
기자: 러시아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잘 알려진 문학과 예술의 전당입니다. 러시아에서 배출한 예술가만해도 현재까지 알려진 사람들이 상당한데요, 오늘은 19세기 러시아가 발굴한 가장 위대한 작가로 알려진 도스토예프스키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도스토예프스키: 안녕하십니까, 기자님 그리고 갓피아 여러분. 이렇게 만나 정말 반갑습니다.
Q1. 러시아뿐 아니라 세계가 인정하는 명실공히 최고의 작가이신데요, ‘인간의 정신세계를 가장 완벽하게 파헤친 잔인한 천재’ 라는 수식어가 선생님 이름 뒤에 항상 붙는다는 것을 알고 계셨나요?
A1. 솔직히, 최고의 작가라느니 천재라느니 뭐 그런 수식어가 부담스럽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저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문단에 올랐지만, 사실 알려진 작품보다 그렇지 않은 작품이 더 많은 것이 사실이거든요.
한 예로 저의 첫 작품인 <가난한 사람들>은 당시 깐깐하기로 소문난, 그러나 최고의 문학 비평가였던 벨린스키의 극찬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했습니다.
한 예로 저의 첫 작품인 <가난한 사람들>은 당시 깐깐하기로 소문난, 그러나 최고의 문학 비평가였던 벨린스키의 극찬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했습니다.
고골 - 러시아의 작가ㆍ극작가. 러시아 리얼리즘의 시조.
‘러시아에 새로운 고골이 나타났다’ 가 제가 기억하는 최고의 찬사였죠. 당시 고골은 신인 작가가 넘보기에는 이미 너무 위대한 작가였거든요. 한국으로 치자면 이제 갓 작은 공모전에 입상한 단편소설 작가와 이미 고인이 되신 박완서, 박경리 선생님 정도의 차이라고나 할까요? 그러나 벨린스키의 그 한마디로 저는 유래 없이 화려하게 문단에 데뷔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저도 모르게 기고만장해졌던지, <가난한 사람들> 후에 내놓은 <분신>은 벨린스키의 혹평과 함께 문단에 알려지긴 알려졌으나 ‘수치스럽게’ 알려진 작품이 되었습니다. ‘겉멋이 가득 들어간’ 책이라는 비평이 대부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렇듯 몇몇 잘 알려진 제 작품들 뒤에는 소위 ‘그닥 좋지 않은’ 작품들이 더 길게 줄을 서 있다는 것을 부끄럽지만 먼저 알려드려야 할 것 같군요. ‘인간의 정신 세계를 가장 완벽하게 파헤쳤다’ 라고 하셨나요?
저는 인간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고, 그들이 살아가는 삶과, 더 나아가 인간은 어째서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의구심을 항상 가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 작품의 모델이자, 동기는 항상 ‘사람’이 되었죠. 예를 들어 가난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더라도 그의 ‘가난’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 가난이 어디서 시작되었고, 어떤 영향을 미치며 그를 결국에는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파멸이라면 가난의 어떤 면이 그를 파멸로 이끄는지 그 과정을, 행복이라면 행복과는 전혀 관계 없을 것 같은 가난 속에서 그가 어떻게 행복을 찾았는지 등 모든 인간 문제의 해답은 인간 본연의 마음 속에 있다고 생각하며 소설의 주인공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대로 펜을 굴렸습니다. ‘나’ 라면 이렇게 했을 것이다-라는 틀을 만들어두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상황에 직면할 수 있는 인간의 삶을 그 상황에 직면한 ‘그 사람’의 시각에서 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듯 몇몇 잘 알려진 제 작품들 뒤에는 소위 ‘그닥 좋지 않은’ 작품들이 더 길게 줄을 서 있다는 것을 부끄럽지만 먼저 알려드려야 할 것 같군요. ‘인간의 정신 세계를 가장 완벽하게 파헤쳤다’ 라고 하셨나요?
저는 인간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고, 그들이 살아가는 삶과, 더 나아가 인간은 어째서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의구심을 항상 가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 작품의 모델이자, 동기는 항상 ‘사람’이 되었죠. 예를 들어 가난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더라도 그의 ‘가난’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 가난이 어디서 시작되었고, 어떤 영향을 미치며 그를 결국에는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파멸이라면 가난의 어떤 면이 그를 파멸로 이끄는지 그 과정을, 행복이라면 행복과는 전혀 관계 없을 것 같은 가난 속에서 그가 어떻게 행복을 찾았는지 등 모든 인간 문제의 해답은 인간 본연의 마음 속에 있다고 생각하며 소설의 주인공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대로 펜을 굴렸습니다. ‘나’ 라면 이렇게 했을 것이다-라는 틀을 만들어두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상황에 직면할 수 있는 인간의 삶을 그 상황에 직면한 ‘그 사람’의 시각에서 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Q2. 한국의 한 러시아 기행 작가가 선생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다가 재밌는 사실을 발견했는데요, 선생님이 한창 작품활동을 하시던 1800년대 중반부터 후반까지 살던 일곱 개의 집들이 모두 모퉁이에 위치해있다는 사실이었어요. 모퉁이 집을 선호하셨던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A2.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었지요. 집세가 쌌거든요! (웃음)
모퉁이에 있는 집은 같은 아파트라도 바람이 많이 들어와 값이 헐한 편이었습니다. 뭐, 제가 모퉁이 집을 특별히 선호해서 찾은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집세가 많이 안 들어갈 곳을 찾다 보니 모퉁이 집으로 들어가게 된 것 인데요. 하지만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여러 곳의 모퉁이 집에서 살면서 모퉁이 집은 저의 거처뿐 아니라 제 소설 속 주인공들의 거처로도 여러 번 나오게 됩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죄와 벌>의 여주인공과 남자 주인공의 집이 둘 다 모퉁이에 있는 허름한 방입니다. 이렇게 보면 결과적으로 제가 살게 된 집이 제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골목 낀 모퉁이 집에서 거리를 내다 보면 정면이 막히지 않고 사방으로 터진 공간이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이 공간에서 제가 본 것은 러시아 사회의 불행한 참상이었습니다. 건물 지하에 세 들어 사는 가난한 사람들, 지하 선술집에서 난폭하게 보드카를 마시는 주정뱅이들, 어린 자식들을 학대하는 부모들, 몸을 파는 창녀들이 각각 한 장면으로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한 눈에 들어오는 장면의 디테일들입니다. 너무 끔찍해서 인정하기 싫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것을 외면해서는 어떤 출구도 찾을 수 없는, 민중의 가난하고 미래 없는 삶을 거의 매일 목격하고 있었던 셈이죠.
저는 저도 모르게 모퉁이 방에 앉아 이 모든 것을 구원할 수 있는 새로운 교차점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현실의 참혹함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것이어야 했으며, 길거리에서 고통 받고 있는 민중의 삶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이어야 했죠. 그것은 제가 이제껏 인생의 거의 전부라 믿었던 문학도, 예술의 영역도 아니었습니다. 문학과 예술은 그런 참상을 알리고 호소할 수 있을 뿐, 그들의 참혹한 매일을 대신해주지도, 또 개선시킬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해답을 현실 너머에서 발견했습니다. ‘끄레스뜨’. 푸른 하늘 아래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교차로의 교회 십자가였죠.
모퉁이 방의 가장 좋은 점은 전망이 탁 트여있기 때문에 어느 모퉁이 방엘 가도 교회, 사원, 그리고 십자가가 보인다는 것이죠. 현실의 비참한 정경을 매일 목격한 저는 그 건너에 있는 교회나 사원의 십자가를 저도 모르는 사이에 구원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모퉁이에 있는 집은 같은 아파트라도 바람이 많이 들어와 값이 헐한 편이었습니다. 뭐, 제가 모퉁이 집을 특별히 선호해서 찾은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집세가 많이 안 들어갈 곳을 찾다 보니 모퉁이 집으로 들어가게 된 것 인데요. 하지만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여러 곳의 모퉁이 집에서 살면서 모퉁이 집은 저의 거처뿐 아니라 제 소설 속 주인공들의 거처로도 여러 번 나오게 됩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죄와 벌>의 여주인공과 남자 주인공의 집이 둘 다 모퉁이에 있는 허름한 방입니다. 이렇게 보면 결과적으로 제가 살게 된 집이 제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골목 낀 모퉁이 집에서 거리를 내다 보면 정면이 막히지 않고 사방으로 터진 공간이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이 공간에서 제가 본 것은 러시아 사회의 불행한 참상이었습니다. 건물 지하에 세 들어 사는 가난한 사람들, 지하 선술집에서 난폭하게 보드카를 마시는 주정뱅이들, 어린 자식들을 학대하는 부모들, 몸을 파는 창녀들이 각각 한 장면으로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한 눈에 들어오는 장면의 디테일들입니다. 너무 끔찍해서 인정하기 싫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것을 외면해서는 어떤 출구도 찾을 수 없는, 민중의 가난하고 미래 없는 삶을 거의 매일 목격하고 있었던 셈이죠.
저는 저도 모르게 모퉁이 방에 앉아 이 모든 것을 구원할 수 있는 새로운 교차점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현실의 참혹함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것이어야 했으며, 길거리에서 고통 받고 있는 민중의 삶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이어야 했죠. 그것은 제가 이제껏 인생의 거의 전부라 믿었던 문학도, 예술의 영역도 아니었습니다. 문학과 예술은 그런 참상을 알리고 호소할 수 있을 뿐, 그들의 참혹한 매일을 대신해주지도, 또 개선시킬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해답을 현실 너머에서 발견했습니다. ‘끄레스뜨’. 푸른 하늘 아래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교차로의 교회 십자가였죠.
모퉁이 방의 가장 좋은 점은 전망이 탁 트여있기 때문에 어느 모퉁이 방엘 가도 교회, 사원, 그리고 십자가가 보인다는 것이죠. 현실의 비참한 정경을 매일 목격한 저는 그 건너에 있는 교회나 사원의 십자가를 저도 모르는 사이에 구원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Q3. 선생님을 비롯한 러시아의 작가들을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특이하게도 군인이었던 이력이 있는데요(톨스토이라든지..), 군인이 되셨다가 작가로 전향하신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신가요?
A3. 그 당시 군인이란 전쟁에 참여하여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는 명예직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안정적인’ 직업이기도 했죠.
많은 귀족 출신의 작가들이 가문의 명예를 위해 군에 입대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저는 후자의 이유로 군인의 길을 택해야 했습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작은 영지를 관리하는 것만으로는 자식들의 교육과 생계를 책임질 수 없으셨던 아버지께서는 고심 끝에 저와 제 형을 공병학교에 보내기로 하셨습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는 무척 엄격하시고 자식들의 교육에 관심이 많으셨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을 거스른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채 저와 형은 공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죠.
많은 귀족 출신의 작가들이 가문의 명예를 위해 군에 입대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저는 후자의 이유로 군인의 길을 택해야 했습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작은 영지를 관리하는 것만으로는 자식들의 교육과 생계를 책임질 수 없으셨던 아버지께서는 고심 끝에 저와 제 형을 공병학교에 보내기로 하셨습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는 무척 엄격하시고 자식들의 교육에 관심이 많으셨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을 거스른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채 저와 형은 공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죠.
그러나 저의 성향상 군대는 맞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직도 열 여섯 살에 공병학교에 들어가려 그 동안 살던 모스크바를 떠나 뻬쩨르부르그로 향한 일이 제 인생의 심각한 실수였다고 생각합니다. 혹독한 군사훈련과 극단적인 기질을 요구하는 엄격한 분위기, 무미건조한 수업 내용 등은 한창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기를 지내던 저에게는 전혀 즐겁지 않았거든요. 그러나 또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런 질식할만한 환경 속에서 낭만주의적 몽상과 문학은 제게 오아시스 같은 역할로, 문학에 대한 갈증과 열정을 더욱 지피는 계기가 되었죠. 낭만주의적 문학가들에게 푹 빠진 시기도 이 공병학교 시절이었습니다.
솔직히, 아버지께서 제 마음대로 인생을 살아보라고 하셨어도 이 때만큼 열렬히 책과 문학, 그리고 작가에게 빠지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러고 보면 인생은 어디서나 숨 쉴 공간을 만들어주는 셈이랄까요(웃음).
솔직히, 아버지께서 제 마음대로 인생을 살아보라고 하셨어도 이 때만큼 열렬히 책과 문학, 그리고 작가에게 빠지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러고 보면 인생은 어디서나 숨 쉴 공간을 만들어주는 셈이랄까요(웃음).
Q4. 작가들에게는 ‘영감’을 주고 받는 특별한 장소가 있다고 하는데요, 선생님에게도 그런 장소가 있나요?
A4. 제 일생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뻬쩨르부르그가 바로 그 곳입니다. 열 여섯에 군인이 되기 위해 처음 찾아간 뻬쩨르부르그는 제국의 수도가 보여주는 위엄과 화려함을 자랑했지만 그 웅장함은 상류층에 속한 사람들에게만 보이는 모습이었습니다.
당시의 러시아는 산업혁명을 목전에 두고 빈부의 격차가 극심해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의 실상은 차마 눈 뜨고는 못 볼 정도였죠. 그리고 그들의 실상은 나라의 중심부로 들어갈수록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당시의 러시아는 산업혁명을 목전에 두고 빈부의 격차가 극심해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의 실상은 차마 눈 뜨고는 못 볼 정도였죠. 그리고 그들의 실상은 나라의 중심부로 들어갈수록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제가 뻬쩨르부르그에 도착해 제일 먼저 목격하고 경험한 것은 도시의 하층민과 그들의 비참한 삶이었습니다. 화려한 궁전과 저택, 기하학적으로 정비된 구역과 거리, 멋진 예술가와 미인들이 드나드는 극장과 살롱, 무도회와 만찬 따위가 같은 도시에서 열리고 있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모습이었죠.
게다가 이 도시의 막장으로 들어가면 어디서도 보기 힘든 끔찍한 광경이 펼쳐집니다. 이방인들이 웬만한 각오를 하지 않으면 출입할 수 없는, 기자님은 상상도 못할 공간이죠. 구역질 나는 뒷골목의 쓰레기들, 먼지가 켜켜이 쌓인 골목, 버려진 자동차, 험한 인상을 한 도시의 부랑자들,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힘겹게 견디고 있는 노파의 퀭한 눈동자, 존재를 알 수 없는 그림자, 숨막히는 열기 등, 아무리 문학적인 재능이 없는 사람이라도 무언가를 외치고 싶게 만드는 어둡고 음침한 모습을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원래는 네바 강변에 위치한 거대한 궁전과 저택, 네브스끼 대로의 화려한 고급 식당과 극장, 바실레프스끼 섬에 조성된 정방형 구역과 자로 잰 듯한 직선 거리 등이 뻬쩨르부르그의 대표적인 모습이지만, 제가 본 뻬쩨르부르그는 그런 모습이 아니었고, 이는 후에 이곳을 배경으로 한 저의 모든 작품에서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아마 저의 작품 속에서 뻬쩨르부르그를 부와 화려함의 상징이 되는 도시로 보기 힘든 이유일지도 모르죠. 저는 그런 화려함과 친숙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뒷골목 삶에 익숙한 이유가 저의 ‘작가로서의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운명’을 일깨워준 도시가 바로 러시아의 가장 아름다운 상류 도시로 손꼽히는 뻬쩨르부르그라는 사실이, 재미있지 않습니까?
아마 저의 작품 속에서 뻬쩨르부르그를 부와 화려함의 상징이 되는 도시로 보기 힘든 이유일지도 모르죠. 저는 그런 화려함과 친숙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뒷골목 삶에 익숙한 이유가 저의 ‘작가로서의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운명’을 일깨워준 도시가 바로 러시아의 가장 아름다운 상류 도시로 손꼽히는 뻬쩨르부르그라는 사실이, 재미있지 않습니까?
Q5. 선생님의 삶에 영향을 끼친 사람이 있다면요?
벨린스키 - 러시아의 문학 비평가, 러시아 리얼리즘 미학의 창시자.
A5. 저의 첫 작품과 두 번째 작품에 아주 상반된 비평을 내놓은 벨린스키(Belinskii, Vissarion Grigor'Evich)를 빼놓을 수 없죠. 저는 개인적으로 벨린스키를 매우 존경했습니다. 그의 비평은 날카롭고, 정확하게 핵심을 꿰뚫거든요. 다른 비평가들이 두리뭉실하게 호불호를 정하지 못하는 것과는 반대로 벨린스키의 비판에는 그 작가의 작품을 온 몸으로 흡수하고 토해내는 정도의 정확함이 있습니다. 가끔은 작가 자신도 몰랐던 작품의 의도를 꼬집어내기도 하는데, 정말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작가와 비평가의 관계에는 한계가 있어서 개인적인 친분을 충분히 쌓지 못한 것이 아쉽다면 아쉽지만, 또 어찌 생각하면 서로를 존경하는 비평가이자, 장래 유망한 작가 정도로 주시하고 있는 편이 저희 사이에선 최적의 관계가 아니었을까 합니다(웃음).
체르니 셰프스키 - 러시아의 비평가. 사회ㆍ정치 평론가.
또 저의 삶에 영향을 끼친 사람이라면, 저의 긴긴 유배 생활의 시초가 된 체르니 셰프스키(Chernyshevskii)가 있죠. 그는 푸리에, 생시몽, 오언 등 공상적 사회주의에 심취했던 러시아 사상가였습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세상의 기존 질서를 인간의 자연적인 욕구에 따라 개조해야 한다고 믿었던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겠군요.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소위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이념은 러시아의 진보적인 지식인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고, 체르니 셰프스키는 그 시기를 놓치지 않고 1844년부터 독서 서클을 조직했는데 거기의 회원들이 당시 매우 쟁쟁했던 문인들과 유명 지식인, 교수, 자연과학자, 교육기관의 수장, 정치인까지 두루 포함했던 서클이었습니다. 저 역시 친분 있던 한 시인의 추천으로 그 서클에 참여해보게 되었고, 우연찮게도 그 날 뻬뜨라셰프스키를 보게 되었죠. 큰 두상에 무성한 턱수염을 기른 서글서글한 그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에서는 각계의 쟁쟁한 수장들이 모여 진보적인 지식을 나누는 이 모임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러시아는 이념이나 사상을 떠나 나라 안팎의 문제만으로도 충분히 극심한 혼란 상태였거든요. 진보적인 지식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저와 그 독서클럽의 회원들은 그 안에 있던 첩자의 밀고로 1849년 4월 23일 새벽, 폰딴까 운하의 현수교로 연행되었습니다. 죄목은 ‘금서를 낭독한 죄’ 였습니다.
생전 처음 감옥에 들어가고, 재판정에 선 제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새 저와 클럽의 몇몇 회원들은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기자님, 상상이 가시는지요? 뭐가 뭔지도 모르고 어리둥절하게(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은 있었습니다만) 서 있다가 갑자기 사형수가 된 그 때의 어이없는 기분을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사형선고는 우리로 하여금 다시는 이런 조직 활동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황제 니꼴라이 1세의 계략(?)이었고 실질적으로 저에게 내려진 형벌은 ‘4년간의 징역, 그 후에는 사병 복무’ 였습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황제의 계략에 따라 저희는 사형 집행장에 끌려가서 머리에 흰 수건을 쓰고, 무시무시한 칼날이 제 머리 위에서 둘로 쪼개지는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에서는 각계의 쟁쟁한 수장들이 모여 진보적인 지식을 나누는 이 모임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러시아는 이념이나 사상을 떠나 나라 안팎의 문제만으로도 충분히 극심한 혼란 상태였거든요. 진보적인 지식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저와 그 독서클럽의 회원들은 그 안에 있던 첩자의 밀고로 1849년 4월 23일 새벽, 폰딴까 운하의 현수교로 연행되었습니다. 죄목은 ‘금서를 낭독한 죄’ 였습니다.
생전 처음 감옥에 들어가고, 재판정에 선 제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새 저와 클럽의 몇몇 회원들은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기자님, 상상이 가시는지요? 뭐가 뭔지도 모르고 어리둥절하게(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은 있었습니다만) 서 있다가 갑자기 사형수가 된 그 때의 어이없는 기분을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사형선고는 우리로 하여금 다시는 이런 조직 활동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황제 니꼴라이 1세의 계략(?)이었고 실질적으로 저에게 내려진 형벌은 ‘4년간의 징역, 그 후에는 사병 복무’ 였습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황제의 계략에 따라 저희는 사형 집행장에 끌려가서 머리에 흰 수건을 쓰고, 무시무시한 칼날이 제 머리 위에서 둘로 쪼개지는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저는 이 사형집행 순간을 평생 잊지 못했습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 위에 서 본 사람이라면 어찌 그 순간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죽음은 삶을 돌아보는 거울 같은 것입니다. 삶은 유한하고, 그래서 인간은 무한의 가치에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저는 사형 집행장에 선 그 짧은 순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행히(아니죠, 당연히)도 사형은 취소되었고 저는 시베리아로 유배 생활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사형 집행장에 섰던 그 짧은 순간을 20여 년이 지난 후 저의 장편 소설 <백치>에서 그대로 재현했습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 때의 기억만큼은 생생하더군요(웃음).
체르니 셰프스키를 만난 것을 후회 하느냐구요? 모든 것에는 그 이유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를 만나 좋은 클럽에서 마음껏 진보적인 지식을 습득했고, 금서(禁書)라며 감히 손도 못 대던 책들을 맘껏 낭독해 보았으며, 또한 그가 아니었다면 결코 경험해보지 못했을 사형 집행의 순간과 유배 생활이 훗날 저의 작품의 모티브가 되고, 뼈대가 되었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Q6. 선생님의 작품은 읽을수록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데요, 가장 활동이 왕성했던 시기에 작품을 통해 독자들과 소통하고 싶은 것이 있으셨던 건가요?
A6. 저는 어려서부터 공상을 좋아하는 소년이었고, 낭만주의적 문학에 대한 열정을 한 순간도 놓지 않았지만 제가 가장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한 배경은 문학 자체에 대한 사랑이라기보단 생계를 꾸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거, 기자님의 환상을 깼나요?
유배 생활을 마치고 뻬쩨르부르그로 돌아와 형과 함께 시작한 잡지 사업인 <시대>에 저의 글을 기고하기 시작한 것을 시초로 저는 본격적으로 가정의 생계를 이끌어가기 위한 ‘생계형 작가’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처음에는 반응이 괜찮았던 <시대>가 점점 사양길로 들어설 때 아내가 위독해졌습니다. 저는 <시대>의 동업자이자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 회사를 살리고, 한편으로는 아내의 약값을 대기 위해 밤낮없이 원고에 몰두했습니다. <노름꾼>은 저의 최초의 생계형 소설이지요.
유배 생활을 마치고 뻬쩨르부르그로 돌아와 형과 함께 시작한 잡지 사업인 <시대>에 저의 글을 기고하기 시작한 것을 시초로 저는 본격적으로 가정의 생계를 이끌어가기 위한 ‘생계형 작가’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처음에는 반응이 괜찮았던 <시대>가 점점 사양길로 들어설 때 아내가 위독해졌습니다. 저는 <시대>의 동업자이자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 회사를 살리고, 한편으로는 아내의 약값을 대기 위해 밤낮없이 원고에 몰두했습니다. <노름꾼>은 저의 최초의 생계형 소설이지요.
안나 스니트키나 Annagrigdost
그러나 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대>는 폐간되었고 아내는 끝내 세상을 떠났습니다. 실의에 빠져 있을 틈도 없이 저는 바로 다음 사업인 <세기>라는 잡지를 창간했지요. 문학에 대한 열정이 시작한 사업이라기보단 <시대>의 폐간으로 충격을 받아 세상을 떠난 또 한 사람인 형의 남은 가족과 저의 가족의 생계가 걸린 문제였지요. <세기>라는 잡지에 <지하 생활자의 수기>를 열심히 연재했지만 <세기> 역시 폐간되고 맙니다. 아마도 저의 사업적인 소질이 없었던 탓이겠지요.
두 개의 잡지가 연달아 폐간되자 더 이상 돈을 꿀 만한 곳도 없어졌고, 빚쟁이들의 독촉도 나날이 심해졌습니다. 그 상황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제 작품 모두를 걸고 출판업자와 거래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음악서적상을 비롯하여 작가들의 작품을 사 모으는 브로커가 많았는데 이제껏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무지했던 저는 지금 생각하면 노예 계약서나 다름없는 그 서류에 절박한 마음으로 사인을 해버렸지요.
빚쟁이들의 몽둥이에 두들겨 맞지 않으려면 정신 없이 작품을 써나가야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렇게 빚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작품을 쓸 수 밖에 없는 현실이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만, 한편으로는 나의 진짜 삶이 비로소 시작되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죠. 우습죠? 그러나 정말 그랬습니다. 그토록 절박한 상황에 처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거든요. 게다가 눈을 뜨면 그 날을 또 살아가야 하지 않습니까? 어쩔 수 없이 충실하게 살아가게 되는 하루하루를 지내며 ‘이것이 진짜 삶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작품을 통해 독자들과 소통하는 것은 모든 작가들의 꿈입니다. 독자들의 손에 자신의 책이 들려져 있는 달콤한 상상을 하며 글을 쓰는 것이 작가에게 허락된 최고의 행복이죠.
그러나 가장 작품활동이 왕성했던 그 시기의 제겐 그런 상상조차 사치였습니다. 오죽하면 항상 아슬아슬한 마감 날짜를 맞추기 위해 속기사까지 고용했을 정도니까요. 정말 다시는 그렇게 펜대를 잡을 수 있을 만큼 많은 글을 쓸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할 양의 글을 정말 전투적으로 썼습니다. <죄와 벌>도 그 때 탄생한 작품 중 하나입니다.
두 개의 잡지가 연달아 폐간되자 더 이상 돈을 꿀 만한 곳도 없어졌고, 빚쟁이들의 독촉도 나날이 심해졌습니다. 그 상황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제 작품 모두를 걸고 출판업자와 거래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음악서적상을 비롯하여 작가들의 작품을 사 모으는 브로커가 많았는데 이제껏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무지했던 저는 지금 생각하면 노예 계약서나 다름없는 그 서류에 절박한 마음으로 사인을 해버렸지요.
빚쟁이들의 몽둥이에 두들겨 맞지 않으려면 정신 없이 작품을 써나가야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렇게 빚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작품을 쓸 수 밖에 없는 현실이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만, 한편으로는 나의 진짜 삶이 비로소 시작되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죠. 우습죠? 그러나 정말 그랬습니다. 그토록 절박한 상황에 처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거든요. 게다가 눈을 뜨면 그 날을 또 살아가야 하지 않습니까? 어쩔 수 없이 충실하게 살아가게 되는 하루하루를 지내며 ‘이것이 진짜 삶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작품을 통해 독자들과 소통하는 것은 모든 작가들의 꿈입니다. 독자들의 손에 자신의 책이 들려져 있는 달콤한 상상을 하며 글을 쓰는 것이 작가에게 허락된 최고의 행복이죠.
그러나 가장 작품활동이 왕성했던 그 시기의 제겐 그런 상상조차 사치였습니다. 오죽하면 항상 아슬아슬한 마감 날짜를 맞추기 위해 속기사까지 고용했을 정도니까요. 정말 다시는 그렇게 펜대를 잡을 수 있을 만큼 많은 글을 쓸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할 양의 글을 정말 전투적으로 썼습니다. <죄와 벌>도 그 때 탄생한 작품 중 하나입니다.
Q7. 말 그대로 ‘밥벌이의 지겨움’ 이었네요!(웃음) 최고의 작가에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 놀라울 뿐입니다. 이제는 독자들과 소통하실 수 있는 여유가 생기셨을 것 같은데요, 후대들에게, 특히 작가 지망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A7. 어린 시절 원치 않았던 진로 선택에서부터 나의 의지와는 상관 없었던 유배 생활, 그리고 평생 동안 빚쟁이에게 쫓기며 써왔던 작품 활동까지. 저의 작품은 어떤지 몰라도, 저의 인생은 한 사람의 인생으로서는 그닥 본받고 싶지 않은 생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결코 쉽지 않은 시간을 살아오며 깨달은 것 하나는, 진리는 불행 가운데에서도 찬란히 빛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불행이 더할수록 진리도 더욱 빛나죠.
그 진리는 현실 세계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현실은 제가 모퉁이 방에서 본 거리의 모습처럼 그 때나 지금이나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참혹한 모습 그대로이거든요.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이 생을 살아가는 인간은 그 진리를 간절히 찾으며 살아가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 진리의 불빛이 없다면 생은 완전한 암흑이 되어버리기 때문이죠. 저는 그 진리가 ‘끄레스뜨’, 곧 십자가라고 믿습니다. 모든 것이 절망적인 상황이어도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우리를 운명으로 인도한다는 그 손길을 굳게 믿는다면, 생애 최악의 절망의 순간이라고 생각되던 그 때가 바로 ‘운명’이라는 멋진 순간으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그리고 인생은 그렇게 자신의 가치를 찾아가게 되죠.
작가의 소임에 관해서는 많은 말 보다는, 외면하고픈 진실일수록 직시하는 시각을 가져야 함을 말하고 싶습니다. 세상에 책을 쓰는 작가가 아니라면 대체 누가 모든 사람이 외면하는 사실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아름다운 세상이라도 우리 같은 사람들이 눈을 돌려야 할 곳, 친숙해져야 할 곳은 언제나 있음을 많은 작가 지망생들이 알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러나 결코 쉽지 않은 시간을 살아오며 깨달은 것 하나는, 진리는 불행 가운데에서도 찬란히 빛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불행이 더할수록 진리도 더욱 빛나죠.
그 진리는 현실 세계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현실은 제가 모퉁이 방에서 본 거리의 모습처럼 그 때나 지금이나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참혹한 모습 그대로이거든요.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이 생을 살아가는 인간은 그 진리를 간절히 찾으며 살아가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 진리의 불빛이 없다면 생은 완전한 암흑이 되어버리기 때문이죠. 저는 그 진리가 ‘끄레스뜨’, 곧 십자가라고 믿습니다. 모든 것이 절망적인 상황이어도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우리를 운명으로 인도한다는 그 손길을 굳게 믿는다면, 생애 최악의 절망의 순간이라고 생각되던 그 때가 바로 ‘운명’이라는 멋진 순간으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그리고 인생은 그렇게 자신의 가치를 찾아가게 되죠.
작가의 소임에 관해서는 많은 말 보다는, 외면하고픈 진실일수록 직시하는 시각을 가져야 함을 말하고 싶습니다. 세상에 책을 쓰는 작가가 아니라면 대체 누가 모든 사람이 외면하는 사실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아름다운 세상이라도 우리 같은 사람들이 눈을 돌려야 할 곳, 친숙해져야 할 곳은 언제나 있음을 많은 작가 지망생들이 알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참고도서: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이병훈 지음/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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