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February 22, 2013

김회권 교수의 서재는 ‘놀이터’다.

http://media.godpia.com/mybook/mybook_view.asp?db_idx=67

내 서재는 나를 위한 놀이터

제게 서재는 새벽에 일어나 홀로 차지하는 놀이터입니다. 주로 서재에 혼자 있기 때문에 서재는 절대적으로 사적인 공간이자, 공적인 광장으로 나가는 하나의 관문이 됩니다. 파주에 있는 집 지하실 전체를 서재로 사용하는데 여기서 기도도 하고 말씀도 봅니다. 그렇게 제 놀이터에서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을 만나 교통합니다. 때로 큰 목소리로 찬양하기도 하는데 반지하라서 가족이나 이웃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습니다. (웃음)

서재를 가득 채운 다양한 분야의 책

저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일기와 독후감을 쓰며 자랐습니다. 대학생이 되기 전까지는 세 살 터울의 형을 따라 시, 희곡, 소설, 철학서적, 역사서적 등을 읽었고요. 그렇게 어려서부터 많은 책을 읽다 보니, 삶의 단계마다 감동의 파문을 일으킨 책과 작가가 켜켜이 쌓여 지층을 이룹니다.




제 서재에는 분야를 막론하고 다양한 책들이 빼곡히 꽂혀있습니다. 백과사전, 고문서, 고대 근동 문서로 시작해 최신소설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가졌습니다. 그 중 신학서적이 가장 많고요. 다음이 성서학, 인문학, 역사, 철학, 문학 서적 등 입니다.

잡지도 많은데 그중에 아내가 좋아하는 <녹색평론(녹색평론사편집부)>이나 <민들레(민들레편집부)>도 있지요. 저는 신학자이자 목회자이기 때문에,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그들을 이해하는 것이 인생에서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영혼을 돌보고, 위로하고, 돕는 데 필요한 책이라면 어떤 책이든 제게 중요한 책이 되지요. 그래서 책을 고를 때도 개인적인 취향보다는 내가 할 과업의 성격에 맞는 책인가를 먼저 고려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결과적으로 사람의 모든 관심사를 추적하며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고상한 삶을 사는데 도움을 줄 만한 아름다운 이야기라면 문학, 역사, 과학, 철학 어느 분야이건 추적합니다. 특히 저는 청년들과 함께하기 때문에 한 번뿐인 인생을 보람차고 성실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에 관심이 많습니다. 유의미한 인생의 발자취를 남긴 모든 이들의 이야기가 제게는 중요합니다. 이것이 책을 선택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의 남다른 독서 공간

주로 서재나 소파, 햇빛이 잘 비치는 테라스에서 책을 읽지만, 그 외에 남다른 독서 공간이 두 군데 있습니다. 바로 버스 안 그리고 이불 속입니다. 광역버스는 3번째에서 7번째 줄까지가 진동이 덜합니다. 2,100원짜리 이동식 서재인 셈인데요. (웃음)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돌아왔을 때, 그동안 주로 영어만 사용해 모국어에 대한 굶주림과 허기가 심했습니다. 그런 저를 달래기 위해 서점으로 달려가 다시 산 책이 박경리의「토지」였습니다.

21권 중의 16권을 광역버스 안에서 읽었어요. 또 흔들림이 심한 750원짜리 마을버스를 탈 때는 만화책처럼 글자크기가 큰 책을 읽습니다. 버스 안에서도 손 안에 책만 있으면 저는 너무 행복합니다. 그렇게 몰입해서 읽다가 내릴 정류장을 놓치고 지나간 적도 많습니다. 또 이불 속에서도 책을 많이 읽습니다. 그중에 특히 몰입해 읽었던 책들이 기억에 남습니다.「실록 한국기독교백년 (實錄 韓國基督敎百年)」에서 안창호, 조만식 등이 금강산에서 수양하며 남긴 수양회 강의록을 읽으며 눈물을 많이 쏟았습니다. 다양한 장소에서 독서를 하다 보면 동시에 2, 3권의 책을 같이 읽게 됩니다. 생체리듬에 따라 읽는 책의 종류를 달리하는데 정신이 맑을 때는 신학, 경제학, 철학 등의 원서나 논문을 읽습니다. 정신이 약간 느슨해져 지성적 논리를 따라가기 어려울 때는 감미로운 책, 어머니의 따뜻한 품을 떠올리게 하는 책을 읽습니다.

문자가 주는 유익

저는 영상보다 문자를 선호합니다. 영상으로 보면 졸리는데, 활자로 읽으면 상상력이 만개해 불꽃처럼 타오르기 때문입니다. 책은 상상력을 회화적, 공감각적으로 증폭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문자가 주는 유익’이라고 부릅니다. 의미 있게 연결된 문자는 제 뇌와 오감을 총체적으로 격동시킵니다. 상상력의 지평을 넓히거나 동정심을 비약적으로 증가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멀리 있는 이와 함께 있는 것 같은 가상적인 임재의식을 선사하기도 합니다. 문자는 상상력을 비약적으로 증가시킵니다. <닥터 지바고>를 영화로 보면, 책 「닥터 지바고」의 감동이 줄어듭니다. 왜냐하면 한정된 시간 안에 책 속의 내용을 영상언어로 표현해야 해서 빨리 지나가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내가 책에서 눈으로 읽은 대사는 우리의 뇌수에 박히게 됩니다. 문자 없이 영상만 전달하면 메시지가 모호해지기 쉽지만, 문자가 있으면 메시지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래서 책이 가장 나은 간접체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면서도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6권의 책을 다 읽은 사람이 볼 때, 영화가 원작의 감동을 채 10%도 전달하지 못하더라고요.


언어적 감수성을 예민하게 한 작가와 작품들

영문학을 공부하는 것은 아름다운 문장을 구사하기 원하는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아일랜드 서정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의 시를 보면 영시의 아름다움을 알 수 있습니다.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존 키이츠(John Keats), 쉘리(Shelley), 바이런(Baron Byron) 같은 낭만주의 영시인들의 시를 읽으면 영어가 영시를 위해 태어난 언어라는 생각이 들고요.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오셀로>, <리어왕>, <햄릿> 같은 희곡을 읽다 보면 한 번 읽고 지나가기에 아까운 명대사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인간이 언어를 어디까지 정제하고 조탁할 수 있는지 그 극한을 맛볼 수 있습니다. 현대 영문 작가의 작품으로는 아일랜드 출신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의 「더블린 사람들(Dubliners)」을 특히 추천합니다. 일종의 연작 단편 소설집인데 조이스의 압축적이고 시적인 문체의 묘미를 느낄 수 있는 작품입니다.

또 나다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 제인 오스틴(Jane Austen) 같은 작가들도 들 수 있겠지요. 저는 19세기 사회소설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특히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의 소설을 많이 읽었습니다. 디킨스는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영국이 인간성을 상실해가던 때에 유머와 익살을 섞은 소설을 많이 썼습니다. 「어려운 시절(Hard Times)」, 「위대한 유산(Great Expectations)」을 예로 들 수 있고요. 주로 어린아이와 노인처럼 연약한 사람들이 주요 인물입니다. 19세기는 산업혁명 직후, 문자를 식별할 수 있는 대중이 갑자기 늘어나면서 소설 장르가 꽃을 피웠던 시기입니다. 이 시기의 사회 소설에는 인간의 사회적 동정심과 상상력을 촉발시키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1862년에 빅토르 위고(Victor-Marie Hugo)가 쓴 「레미제라블」, 1881년 발표된 도스토예프스키(Dostoevskii)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The Brothers Karamazov)」, 톨스토이(Lev Nikolaevich Tolstoy)의 사회 및 역사소설들 「전쟁과 평화(Voina i mir)」, 「부활(Вой наимир)」, 「안나 카레리나(Анна Каренина)」, 업턴 싱클레어(Upton Sinclair)의 「정글」 등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한결같이 아름답고, 위대하고, 깊이가 깊은 책들이지요. 이런 작가들의 작품을 읽으면 대학을 다닌 것과 같은 효과를 얻을 겁니다.


기독교학과와 신학과를 놓고 고민하는 수험생에게

기독교학과 신학은 차이가 큽니다. 아주 과격하게 단순화하자면, 먼저 신학은 제도권 교회를 옹호하고 발전시키는 학문입니다. 반면 기독교학은 교회가 세상 안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기독교 신앙이 사람과 세상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받았는지를 객관화하는 학문입니다. 기독교학은 인간 옹호적인 인문과학입니다. 기독교학은 기독교 신앙의 사회적 파장과 기독교 신앙이 형성되는 사회적 맥락을 연구합니다. 기독교 신앙을 틀 지우는 세계관, 기독교 신앙이 변화시켜야 할 세속사회의 정신성과 구조 같은 것을 연구합니다. 인간의 신앙주체성과 신앙행복을 옹호하며 교회의 잘못된 부분을 분별하고자 하는 학문입니다. 쉽게 말해 목사님이 설교를 잘해서 성도 수를 늘리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 신학이라면, 목사님의 설교가 회중들에게 어떻게 호감을 사느냐를 분석하는 것이 기독교학입니다. 즉, 인문학적 관점에서 본 신학의 재인식이 기독교학입니다. 특히 숭실대는 그중에서 인문학적 전통이 매우 강한 학교입니다. 그래서 문학, 역사, 철학, 심리학, 사회학을 공부한 교수들이 기독교학을 가르칩니다. 기독교학과 교수들은 인문학과 신학을 융합시켜 가르치는 종합지성인입니다. 학생들은 신학교에 비해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고, 기독교학을 공부한다면 지식의 저변을 확대하며 공부할 수 있어 신학을 하려는 사람들에게도 유익할 겁니다. 제자 중에는 목회자를 희망하는 학생도 있지만, 크리스천 작가나 언론인을 꿈꾸는 학생도 있습니다. 제약회사나 보험회사, 은행에 취직하기도 하고요. 기독교학과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먼저 학과 홈페이지를 잘 살펴보고 기독교학과 교수의 책을 읽으실 것을 추천합니다. 박정신 교수의 「한국 기독교사 인식」, 「윤치호 일기2」, 이철 교수의 「사회 안에 교회 교회 안에 사회」, 오제은 교수의 「자기사랑 노트」, 권연경 교수의「로마서 산책」, 제 책「김회권 목사의 청년설교 1」등이 도움될 겁니다.

이 시대의 상처받은 청년을 위하여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는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 보편적 낙관주의가 필요합니다. 둘째, 특수한 낙관주의가 필요합니다. 셋째, 최악의 상황에도 죽지 말아야 합니다.

보편적 낙관주의란,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난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확신입니다. 지금의 20대는 시급 4,500원짜리 아르바이트를 하며, 불안한 장래와 고용기회가 촘촘하게 사람을 얽어 질식할 것 같은 상황에 부닥쳐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항시 불안한 사건과 상황에 묶어놓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앞과 뒤를 비관적인 전망이 막고 있지만, 이것이 영속적인 질서가 아니고 언젠가 바뀐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런 답답한 상황 속에서 ‘나’는 성장하고 있습니다. 전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일하면, 시간이 흘러 반드시 끝이 옵니다. 부모님의 이혼도, 실연도, 낙방도 언젠가는 끝날 찰나일 뿐입니다. 내가 모르는 사이, 하나님의 일반적인 원칙의 힘이 작용해 내 불행감을 엷게 희석하고 끝내 극복하게 할겁니다.

특수한 낙관주의는, 내 안에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고난을 빨리 끝낼 수 있는 ‘엄청난 잠재력’이 있다는 믿음입니다. 지금의 나를 우울하게 만들고 압착된 것처럼 보이는 내 삶의 조건들이, 반전의 기회이자 반전의 재능, 반전의 원동력이 되어줄 겁니다. 고난이 있어야 그것을 빨리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수한 역경과 특수한 고난 가운데 반전의 문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독특한 비밀입니다. 시편 84편에 보면 시온으로 올라가는 순례객은 눈물을 쏟은 곳에서 샘물을 발견합니다. 이사야 12장 3절에서도 눈물의 자리가 구원의 우물물을 발견하는 기회가 됩니다. 가정이 흔들리고 나를 잃고 나라를 잃은 경험이 내 안의 윤동주적 감수성을 발견하게 하고,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상화)> 같은 시를 쓰게 합니다. 에스겔서는 유배 중에 집필되었고, 단테도 유배 중에 그 유명한 「신곡」을 썼던 것처럼 말입니다. 역경이 굉장한 행운일 수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상황의 다른 면을 볼 수 있는 상상력을 키우려면, 독서를 많이 해야 합니다. 카를로 카레토(Carlo Carretto) 신부도 「주여 왜?(Perche Signore?)」라는 책에서 자신은 등산가를 돕는 구조대원이 되고 싶었지만, 다리를 저는 사람이 되어버렸다고 고백합니다. 괜찮습니다. 청년들이 좌절하는 이유는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시험 떨어지고, 실연당하고. 소위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예수님도 사흘 동안 매장당했다가 부활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묻히면 묻히리라, 찌르면 찔리고, 죽이면 죽임을 당하겠다는 강한 정신입니다. 쓰디쓴 실패, 좌절과 공존할 줄 알고 불확실성을 견딜 수 있는 강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의 저자 모건 스콧 팩(Morgan Scott Peck)은 하버드 대학 입학이 보장되는 학교에 비싼 등록금을 내고 들어갑니다. 하지만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3에 자퇴합니다. 그 일 때문에, 온 세상은 항상 흔들리고 불확실하므로 이 세상의 유일한 안정감은 ‘내가 언제나 동요하고 있다는 사실’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세상에 안정 대신 동요와 불안이 있을 뿐이라는 데에 생각이 이른 스콧 펙은 ‘심층 심리학적 교란’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부서진 자, 흔들리는 자, 진동을 경험하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갈대 같은 자에 대한 동정심은 이 자퇴생이 정신과 의사가 되도록 이끕니다.

밝은 곳에서 계속 박수받는 사람은 성공은 하나 얕은 사람에 그칩니다. 삼수 하다 떨어져 골방에 박힌 사람은 윤동주도, 키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도 될 수 있습니다. 낙방하고, 부르는 곳이 없는 사람도 책만 500여 권 넘게 읽고 나면 대 작가가 될 수 있습니다. 대결의식이 필요합니다. 시험에 안 떨어질 것처럼, 안 떨어진 자가 되기를 열망하면서 초조해하지 마세요. 정신적인 소시민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정신적 대범인이 되어야 합니다. 인생에는 무수한 반전의 찬스가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의 실패를 절대화시키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의 비참함과 우울증을 영속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해는 다시 떠오르고, 반드시 반전의 기회는 옵니다. 우리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세요.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는 희년운동

저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바로 서기를 바랍니다. 성경과 제가 주장하는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천당’으로써의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이 땅에서 이루어질 성령 공동체, 고도로 민중자치적인 공동체, 대항사회, 대조사회인 하나님 나라를 의미합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 이전, 정통 기독교에서는 사도들과 속사도 교부(사도들의 뒤를 이어서 교회를 가르친 교사)들이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세우기 위해 애썼습니다. 우리의 과업은 정통 기독교의 원류로 돌아가서 초대 기독교의 열정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예배당이 아니라 주중 6일, 사람들이 모이는 을지로, 충무로, 테헤란로가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재의 기독교는 무게 중심이 사후로 옮겨가 수세적인 기독교, 교회로 후퇴한 기독교, 교회가 신앙의 중심이 되어버린 기독교로 변질하였습니다. 희년운동은 우리가 바라는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는 메타포이자 패러다임입니다.




저는 ‘성경적 토지 정의 모임’, ‘희년함께’ 등에서 신학전문위원으로 활동합니다. 모두 토지가 하나님 것이라는 근본 사상을 바탕으로 합니다. 즉, 주거권, 주택권, 토지로부터 나온 소출의 향유권이 보장되는 것이 희년사회입니다. 그러므로 대한민국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선물인 토지에서 나온 산물로부터 소외되어서는 안 됩니다. 태생부터 토지에서 나온 산물을 누릴 권리를 갖고 태어났다고 보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존권을 기본적으로 보장해주는 경제체제가 이 땅에 들어서야 합니다. 동시에 부동산 투기, 부당한 자산 불리기를 끊임없이 경계하는 것도 필수입니다. 대신 노동의욕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모종의 자존심과 인권을 고취할 수 있는 일거리 또는 이에 준하는 것이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이 희년운동입니다. 희년운동은 사유재산을 박탈하는 운동이 아닙니다. 희년선포는 하나님 은총이 인간의 탐욕을 압도적으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있을 때에 가능합니다. 은총의 힘으로 구원을 받은 이들이 자발적으로 자기 것을 나누는 겁니다. 복음의 나팔소리를 듣지 않은 사람의 것도, 무조건 빼앗아 평등하게 하겠다는 좌파와는 다릅니다. 희년운동에는 재물 나눔, 재산 나눔, 재능 나눔, 시간 나눔 등이 있고, 저 역시 제 재능이 특권의 빙거(憑據)가 되지 않도록 나눔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희년은 구원의 나팔소리를 들은 사람이 먼저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의 나팔소리가 크게 퍼질수록 자발적 나눔이 늘어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사회 전체의 행복총량이 늘어납니다. 이것이 이어지면 희년사회가 실현될 것이고, 착한 정치도 가능해질 겁니다. 이 세상을 주님의 통치 안에 복속시킬 사람은 증오에 가득 찬 사람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에 북받친 사람입니다.


여러분께 선물하고 싶은 책

가까운 사이에 책을 추천할 때 저는 그 사람에게 필요한 책을 골라 추천하고는 합니다. 먼저 목회자 후보생들과 하나님 나라 운동에 관심 있는 모든 교우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은 제 책「목회자 후보생들에게」입니다. 이 책은 하나님 나라 신학을 압축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 2장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이 땅에서 얼마나 위력적인 기관이 될 수 있는지, 얼마나 큰 영적 부피와 질량을 가지고 힘있게 세상을 격동시킬 수 있는지, 그 극한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일반 청년 교우들이 읽어도, 예수님이 말로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갖고 계신 이유를 자세히 알 수 있어 도움이 될 겁니다. 저는 인터뷰를 거의 안 하는데 책의 부록에 제 신앙편력, 결혼생활, 독서생활 등에 대한 자전적인 내용도 담았습니다.

내면 지향성, 영성이 필요한 목회자에게는 고든 맥도날드(Gordon MacDonald)의 책「내면 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을 권합니다. 사회과학적 인식에 부족함을 느끼는 목회자는 칼 폴라니(Karl Polanyi)의 「거대한 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 헨리 조지(Henry George)의 「진보와 빈곤(Progress And Poverty)」같이 거시적 사회 변동이 담긴 책을 추천합니다. 이 경우에, 신앙 성공스토리뿐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적인 역동 관계를 규명한 사회과학서적을 많이 읽는 것이 탄탄한 설교에 도움이 될 겁니다. 남 교우들은 교회사 관련 도서를 많이 읽었으면 합니다. 2000년 교회사에서 한국 기독교의 위상을 알려면 교회사를 알아야 합니다. 특히 이만열 교수님, 박용규 교수님의 역사책을 추천합니다. 여 교우들은 경건 서적보다C.S 루이스(Clive Staples Lewis)의 세계관을 접할 수 있는, 논리적인 책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 「고통의 문제(The Problem of Pain)」, 「천국과 지옥의 이혼(The Great Divorce)」 등을 읽기 바랍니다. 또 본인들의 소비행위, 살림 사는 것이 하나님 나라와 어떤 맥락 속에서 만나는지 알 수 있는 책, 사회의식에 눈뜰 수 있는 책을 봤으면 합니다.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의「나를 따르라(Following Jesus)」나 존 F. 캐버너(John F. Kavanaugh) 신부가 쓴 「소비사회를 사는 그리스도인(Following Christ in a consumer society)」, 칼 헨리(Carl Henry)의 「복음주의자의 불편한 양심((The) Uneasy Conscience of Modern Fundamentalism)」 같은 책을 추천합니다.

기독교 신앙이 왜 사회적으로 표현되며,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노동조합과 공산당보다 세상의 문제 해결에 왜 더 적극적이어야 하는지를 알게 될 겁니다. 또 개인적으로 신앙을 갖는 것을 넘어서서 사회적 지향성이 뚜렷한 메시지에 민감해야 하는 이유, 개인적인 고백과 달리 사회경제적으로 주님의 정의에 어긋나게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에 대해 알게 될 겁니다. 특히 TV와 영상문화에 물든 사람들에게는 존 F. 캐버너(John F. Kavanaugh)의「소비사회를 사는 그리스도인」을 적극 추천합니다. 청년들은 칼 헨리(HENRY, Carl F. H.)의「복음주의자의 불편한 양심」도 꼭 한번 읽어보았으면 합니다.


비전과 기도 제목

제 비전은 한국 대다수 교회가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하는 날이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한국교회의 보편과 상식이 되기를 원합니다. 죽어서 천당에 가는 수세적인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사도들과 속 사도교부들이 기독교 공인 이전까지 가졌던 신앙, 패기에 찬 공세적인 기독교 복음을 널리 전파할 수 힘을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같은 맥락에서 한국이 북한을 무장해제시키고, 거룩한 흡수통일에 이르기를 소망합니다.


기도제목은 첫째로, 제가 신행일치의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뱉은 말에 책임을 지는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영음을 듣기 위해 안 보이는 곳에서도 부지런히 엎드리는 목회자가 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주셨으면 합니다.

- 인터뷰 진행&정리 : 신은정 작가

- 사진: 유재호 작가

- 기획·제작 : 사랑의교회 인터넷사역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