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March 26, 2013

한 날 묵상 - 막 1:16-20 <사람을 낚는 어부가 필요하시다>

한 날 묵상 - 막 1:16-20 <사람을 낚는 어부가 필요하시다>

1.  "때가 찾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2.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일에 관하여 앞서 막 1:14-15절 말씀을 통해서 회개한다는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회개는 주님께 돌아가는 것일 뿐 아니라, 나아가 주님이 주신 사명이 있음을 기억하고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진정 회개한 사람이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3.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하여, 회개의 선포를 위하여 사람을 부르시고 찾으시는 본문이 오늘 본문 1:16-20절의 말씀입니다. 

4. 16절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고"

5. 예수님은 사람을 주목하고 계십니다. 길을 지나가시다 시몬과 안드레를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보시고 반응을 하셨다는 의미는 예수님은 사람을 찾으시는 일을 마음에 늘 품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6. 예수님이 시몬과 안드레의 그 어떤 것을 보시고 그들을 주목한 것이 아니다. 이는 예수님이 늘 마음에 사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마음에 품고 계셨는데, 그 때에 그들이 예수님의 눈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7. 예수님은 지금도 사람을 찾으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들과 함께 교재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과 교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8. 하나님의 기다림과 예수님의 찾으심에 우리는 이제 순종의 반응을 하면 됩니다. 말씀에 자신의 것을 버리고 예수님이 허락하신 영적인 세계로 들어가기로 결단의 길을 걸으면 됩니다. 

9. 2013년 고난 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고난주간 예수님이 감당하셨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해 봅니다. 어떻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짊어지으실 수 있었을까? 과연 무엇이 예수님을 그 고통의 길임을 앎에도 불구하고 순종하게 하셨을까? 하나님 아버지의 부르심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형제된 사람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10. 하나님의 말씀과 부르심에 대한 예수님의 순종은 우리의 순종이 되어야 합니다. 고난과 고통의 길일지라도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면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길이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기쁨과 감사는 대부분이 영적인 부분일 경우가 많습니다. 육체적인 부분은 견디기 힘든 고통과 고난의 길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함과 교제함으로부터 오는 평안과 기쁨으로 인해 육체적인 고통 또한 능히 이길 수 있게 됩니다. 

11. 예수님께서 어부들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17절 "나를 다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2. 예수님의 부르심에 어부들을 반응을 하게 됩니다. 18절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13. 어부들의 반응은 "곧", "즉시로" 순종입니다. 주신 말씀에 영적으로 즉시로 순종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신의 미래를 계산하지 않는것입니다. 우리가 즉시로 순종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14. 즉시로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환경과 상황을 계산하기 시작하면 순종하기란 더욱 어려워집니다.

15. 본문에서 두 번의 부르심이 나옵니다. 16절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와 19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입니다.

16. 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부르심에 대한 어부들의 반응은 본문이 말하고 있는 의도는 즉시 순종입니다.  18절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20절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애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17. "곧" "즉시" 순종입니다. 즉시로 순종해야 오직 주님이 주신 사명에 집중하여 나아갈 수 있습니다. 20절에서 보는 세배대의 아들과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의 부르심은 아버지 세베대를 버려 두고 가야 하는 순종입니다. 그 뿐 아니라 지금까지 자신의 생계수단이었던 배도 버리고 가야 할 순종입니다.

18. 이러한 순종을 할 수 있는 영적인 인도하심은 "곧", "즉시로"하는 순종입니다. 자신의 생계로 계산하지 않고, 부모도 계산하지 않는 순종입니다. 

19. 그렇다면, 즉시로 순종하지 못하여 이것 저것 계산하기 이미 시작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20. 이때는 예수님의 부르심의 말씀,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해야 합니다. 즉 기도함으로 부르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부르심에 집중하기 위함입니다. 성령의 음성을 더욱 마음에 붙잡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21. 다시 15절말씀으로 돌아가, "때가 찾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이 말씀은 예수님이 오셔서 이 땅에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22. 이 말씀의 선포를 위해 제자들을 부르셨고, 지금 우리도 부르고 계십니다.

23. 사람을 낚는 어부가 필요한 이 때에 우리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함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24. 우리에게 있어서 이 세상 그 어떤 것이 이보다 더 거룩한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25. 이 일에 순종하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믿음으로 순종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26. 할레루야!

Monday, March 25, 2013

리더십 네트워크 633호 - 신뢰 받는 리더

http://www.disciplen.com/resource/mail/now2.asp?m_mode=rn&v_msid=3137&m3_No=2


리더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신뢰이다. 리더에 대한 신뢰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영향력도 깊어 질 것이다. 더욱이 주님을 위해 뭔가를 하기 원하는 리더라면 신뢰 쌓기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신뢰를 쌓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리더가 신뢰를 쌓으려면 다음 요소들이 필요하다.
  1. 인격을 닦아라

    리더에 대한 신뢰를 형성하는 첫 번째 요소는 인격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이야말로 그리스도인 리더의 밑바탕이 되는 자격요소이다. 올바른 인격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무엇보다 신뢰감을 주기 때문에 모든 대인관계의 기반이 된다. 사람들은 자신이 따르는 리더가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야 리더가 제안하는 것들을 마음으로부터 따를 것이다. 그리스도인 리더들은 신뢰를 쌓기 위해 예수님의 성품과 인격을 닮고자 기도하며 노력해야 한다.
  2. 유능함을 갖추어라
    신뢰 형성의 두 번째 요소는 능력 다른 말로 유능함이다. 유능함이란 무엇일까? 어떤 상황에서 일을 잘 처리하는 능력이다. 즉 뛰어난 재능으로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일을 수행 하는 데 필요한 은사, 지식, 재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리더들은 이것들을 계발하여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유능함은 리더에게 자신감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인간의 유능함은 제한적이고 한계가 있다는 것을 리더는 늘 명심하고 주의해야 한다.
  3. 분명한 방향을 제시하라

    리더에 대한 신뢰 형성의 세 번째 요건은 명확한 방향성이다. 요즘 사람들은 리더, 특히 교회의 리더들이 어디를 향해 가는가에 대해 매우 관심이 많다. 그러기에 리더는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리고 사람들을 어디로 이끌고 있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래서 누가 물어봐도 교회의 방향성이 어디인지를 확실하게 대답해 줄 수 있어야 한다.
  4.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려 주어라

    리더들은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정기적으로 알려 주어야 한다. 알려 주는 사람은 신뢰를 얻고 알려주지 않는 사람은 의심을 받는다. 리더가 무엇을 숨기고 있다는 의심이 들면 사람들은 그 리더를 따르려고 하지 않는다. 특히 교회의 리더들은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정기적으로 교인들에게 알려 주어 원활한 의사전달이 될 수 있어야 한다.
  5. 돌봄의 자세를 가져라

    사람들은 누군가가 자신을 돌봐 주고 진심으로 관심을 가져 주기를 바란다. 성의껏 돌봐주는 사람에게는 저절로 신뢰가 형성된다. 돌봄이란 리더가 따르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행복과 복지에 최선을 다하는 관심의 표현이다. 또한 상대의 인격을 존중하고 마음에서 우러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돌봄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돌보시듯 리더도 하나님의 사람들을 잘 돌봐 주기를 하나님은 바라신다. 사람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어떤 아픔과 두려움이 있는지를 알고 성경적으로 그러한 문제를 도와줄 수 있어야 한다. 
리더는 영향력을 통해 사람들을 따라오게 만들고 목적지까지 갈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리더는 신뢰를 깊이 쌓아가야만 한다. 만약 여러분이 리더의 위치에 있다면 위에서 제시된 요건들을 통해 신뢰가 더욱 깊어지길 바란다. 신뢰가 무너지면 리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신뢰가 무너진 후에 그것을 회복하고 다시 쌓게 위해 노력하기 보다 신뢰가 무너지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더 나아가 신뢰가 깨어지기 전에 오히려 깊어 질 수 있도록 만든다면 사람들은 더욱 기쁜 마음으로 리더를 따르게 될 것이다.
* 이 글은 오브리 맬퍼스의 「리더가 된다는 것은,」의 일부를 발췌해서 각색한 글입니다.

Monday, March 18, 2013

366호 - 예배하는 소그룹 - 국제제자훈련원


http://www.disciplen.com/resource/mail/now2.asp?m_mode=sn&v_msid=3132&m3_No=4&page=1

많은 사람들이 ‘예배’라 하면 ‘찬양’과 ‘경배’를 떠올립니다. 한편 ‘소그룹’이라 하면, 구역예배 드리는 모습을 쉽게 떠올립니다. 하지만 우리가 모이는 소그룹에서 주일 예배와 같이 우리에게 익숙한 예배 순서와 형식을 동일하게 사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만약 소그룹 모임 내내 기도만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교회에 처음 나온 지체들이 소그룹에 더러 있다면 그들은 기도만 하는 이 모임이 익숙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어색함을 잘 넘어선다면 그들에겐 아마도 잊지 못할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소그룹을 다음 순서로 인도해 보십시오.
  1. 우선 함께 기도하고 싶은 마음을 나눠 보십시오.
  2. 가사에 집중하며 좋아하는 찬양을 다 함께 불러 보십시오.
  3. 찬양을 부르면서 생각난 것을 나눠 보십시오.
  4. 또 다른 지체에게 소그룹을 위하여 적절한 시편을 읽되 천천히 또박또박 읽어 줄 것을 부탁해 보십시오. 다음으로는 시편의 내용을 더 깊이 살펴보고 왜 공동체에 유익한지 설명해 주십시오.
  5. 이제 모든 지체가 편안한 자세로 기도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필요하다면 기도에 필요한 요소들도 설명해 주십시오.
  6. 서너 개의 공동 기도제목과 개인 기도제목을 가지고 함께 기도한 후 마지막으로 인도자가 대표로 이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기도하는 시간은 소그룹의 형편에 맞게 하되 넉넉한 시간을 할애하십시오.
  7. 마지막으로 기도로 모임을 마치십시오. 다음 모임 때 이날 가졌던 모임에 대한 소감을 나눠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분의 뜻 가운데 우리와 함께하길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을 정하여 하나님과 함께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임재를 더욱 온전히 맛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이야말로 우리가 소중히 여겨야 할 예배일 것입니다.

소그룹 모임은 다양한 모습과 형태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위에 소개한 형식은 단순하게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그룹 모임이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체험할 수 있는 이런 시간을 정기적으로 가진다면 삶 속에서 하나님과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는 지체들의 모습을 점점 많이 보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배가 예배 장소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삶의 영역까지 침투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 이 글은 새들백교회에서 소개한 기본적인 소그룹 인도방식을 번역, 각색한 글입니다.

Saturday, March 16, 2013

김연아 2013 피겨세계선수권 대회 우승


2013 세계피겨선수권 김연아 레미제라블 World Figure Skating Championsh


http://youtu.be/F3c6SerKbuk

 13/03/16 ISU Worlds Medal Ceremony (런던시 여성 합창단 애국가 제창)
http://youtu.be/yM0jRlg7sw0


Thursday, March 14, 2013

한 날 묵상 - 막 1:14-15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한 날 묵상 - 막 1:14-15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1. 예수님의 가르침? 선포? 이는 상당히 단순합니다. 특별히 어려울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2.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 선포를 받아들이고 따라가는 삶은 단순하지 않다는 걸을 삶에서 알아가게 됩니다.

3. 왜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는 것일까?

4. 이는 우리가 예수님의 선포, 가르침을 잘못 받아들였거나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5.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 신 후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이 시작됩니다.

6. 예수님의 가르침의 중심 메시지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입니다. 

7. 14절에서 세례 요한이 잡힌 후 갈릴리에 오셔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합니다. 그리고 그 메시지가 15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입니다. 

8.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면서 "때가 찼다"고 말씀하십니다. 

9. 시간적으로 다 되었는데, 무엇을 위한 시간이 되었다는 의미일까요? 

10. 이는 이사야 61장 1-2절 말씀의 성취입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11.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는 앞서 살핀 막 1장 9-11절 말씀을 통해 성취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2. 예수님의 감당하셔야 할 사역은 이제 분명해 졌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13. 하나님 나라은 바로 이런 나라입니다. 가난한 자가 아름다운 소식을 듣게 되며, 마음이 상한 자가 고침을 받게 되며 포로된 자가 자유를 얻게 됩니다. 갇힌 자들은 놓임을 받게 됩니다. 모든 슬픈자가 위로를 받게 됩니다. 

14. 하나님 나라는 이런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나라를 이루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제 시작되었습니다.

15. 예수님이 전하는 복음에 말씀을 듣는 자들은 반응을 해야 한다. 

16.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참 평안와 위로를 누리기 위해서 위해서 회개하며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17. 그렇다면, 회개하며 복음을 믿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18.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회개는 주님께 되돌아가는 인생(아버지를 떠난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처럼,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19. 되돌아가야 회개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회개는 여기까지 있지만, 예수님의 회개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습니다. 

20. 되돌아와서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이를 잘 감당함으로서 온전한 회개가 이루어진 것이 됩니다.

21. 예수님의 가르침에 우리의 이해가 이 부분까지 가지 못해서 우리 스스로 생각하기에 믿음의 삶이 복잡하다고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22. 결국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면서 우리의 삶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온전히 감당해야 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몫이 있다는 것을 이해할 뿐 아니라, 그 일을 잘 순종하려고 할 때 우리는 예수님이 선포하신 단순한 삶을 이해하게 됩니다.

23.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의 핵심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말씀을 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24. 하나님께 돌아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누릴 뿐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가 꿈꾸는 나라를 위해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내가 누리는 은혜를 모든 이들이 함께 누리는 일에 대한 부르심)이 있음을 기억하고 매일의 삶에서 잘 감당하는 것이 내가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할 삶이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게 될 때, 우리의 삶은 이 목표와 방향앞에 아주 단순한 삶이 되게 됩니다. 

25.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서 사람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음을 통해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26. 오늘 한 날도 예수님이 선포하신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가르침에 순종하는 삶이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나의 가장 단순한 삶임을 기억하고 삶으로 순종해가는 한 날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27. 한 날의 삶이 올바른 회개의 삶이 되기를 소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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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절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절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15절 "때까 찼고"
=> 이사야 61장 1-2절의 성취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
* 이방에 빛을 4장 예수님이 선교적 사명을 감당할 종말론적 백성을 모으시다
p178-181.
 예수님은 그분의 청중에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촉구한다. 이에 응답한 이들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백성이라는 신분에 들어간다. 현대 사회에서 믿음의 개념은 계몽주의에 의해 형성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믿음을 단지 지적인 동의라고 생각하고, 회개에 대한 이해는 우리의 죄에 대한 유감을 뜻하는 것으로 개인화시켜 왔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의 본래 명령을 참으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그분의 상황 속에서 그 명령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회개하라는 요청은 구약의 배경, 특히 하나님께로 되돌아오라는 언어를 배경으로 삼는다. 신명기 저자는 마지막 날에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 돌아와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것을 온전히 따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며"(신30:2) 이스라엘이 번영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한다. 이 약속은 이스라엘의 심판 뒤에 오는 것이다(신29:29).
 회복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돌아와서 그분의 선교를 위해 섬기고 그분을 온 마음으로 사랑할 때만 이루어질 것이라고 약속된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우상숭배적인 길을 떠나서 
 온 마음을 다해 여호와께 돌아오고
 그분의 길을 걸어가겠다고 헌신함으로써
 예수님의 초청에 응답해야 한다.

예수님의 회개하라는 요청에서 발견되는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그분은 사람들에게 예수님 자신에게 완전한 충성을 바침으로써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요구하신다는 점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예수님께 헌신하는 것은 회개와 함께 "이스라엘의 신이 예수님 자신의 사역에서 결정적으로 행동하고 계신다는 믿음을 요구한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선포는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급진적이고 철저한 결심"을 요구한다. 회개하고 믿으라는 요청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삶 전체를 예수님께 드리고, 자신의 집과 가족을 포기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다른 모든 의무를 제쳐 놓을 것을 요구한다(눅 9:57-62). 그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 심지어 가족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마 10:34-39). 다른 모든 충성, 헌신, 관계, 의무는 매우 귀 중한 보화와 진주, 곧 예수님 안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를 얻기 위해 포기해야만 한다(마13:44-46). 

 복음서와 1세기 유대교 안에 나타난 제자도 개념의 차이는 이러한 부르심이 얼마나 근원적으로 제자들을 예수님의 인격과 결함시키는지 보여준다. 
 데이비드 보쉬David Bosch는 제자도에 대한 두 가지 개념을 잘 비교하여 보여준다.

 유대교에서 율법 혹은 토라는 랍비와 제자 관계의 중심에 서 있다. 랍비의 권위는 토라에 관한 그의 지식에 근거한다. 다시 말해 그는 율법의 자리를 차지하고 최고의 충성을 그의 인격과 사명에 바치도록 요구한다. 게다가 유대교에서 제자도는 단지 랍비와 같이 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랍비의 제자가 토라를 배우고 익힐 때, 그는 그 자신이 선생이 될 순간을 바라보며 노력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는 결코 랍비가 되는 일을 "마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 예수님의 추정자이지 자제자로 남아 있다. 게다가 유대교에서 랍비의 제자들이 단지 학생에 불과하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의 종으로서 그분의 위대한 가르침과 통찰로부터 지적인 혜택을 입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권위에 복종하고 그분을 그들의 여호와로 섬긴다. 

 주목할 점은 유대인을 위해 쓰여진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의 적들이 그분을 향해 "랍비"와 "선생"으로 불렀지만, 그분의 제자들은 그분을 "주님"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다만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 할 때 "랍비"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마 26:25, 28을 보라). 

 마지막으로 유대교의 가르침은 제자도의 목적이 예수님의 것과 다르다. 유대교에서 제자는 충실하게 랍비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과 함께 있어야 하고 그분의 하나님 나라 선교에 참여해야 하며, 그분을 증거해야 한다. -그분이 누구이고 그분이 성취하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이다(막3:14-15)

 마가복음 3:14-15절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서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그들은 단순히 배우는 공동체가 아니고, 하나님의 마지막 때에 예수님의 회집하시는 선교에 헌신적으로 참여하는 메시아적 백성의 선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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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March 12, 2013

한 날 묵상 - 막 1:8, 12-13 <거듭남의 비밀, 물세례만 받았는가? 성령세례도 받았는가? 성령시험과 사탄의 시험을 통해 알 수 있다>

한 날 묵상 - 막 1:8, 12-13 <거듭남의 비밀, 물세례만 받았는가? 성령세례도 받았는가? 성령시험과 사탄의 시험을 통해 알 수 있다>

1. 개인적으로 스포츠를 좋아합니다. 공으로 하는 종목들은 거의 좋아한다고 보면 됩니다. 스포츠 경기를 하거나 보거나 직접 하는 것 다 좋아합니니다.

2. 물론 잘 하지 못하지만, 스포츠 경기에 재미있게 참여하려고 합니다. 때론 함께 하는 팀원들이 저를 어려워 할 때도 있습니다. 나이도 많고 목사라고 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3.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지난 주에 참으로 안타까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농구스타 선수 출신이며서 감독이었던 강동희 감독이 농구 경기에서 승부조작으로 구속된 사건입니다.

4. 스포츠 경기는 항상 공정해야 합니다. 필드에서 뿐아니라 어떠한 외풍에서도 공정하게 진행되어 경기 결과를 가져야 합니다.

5. 그런데 가장 공정해야 하는 스포츠 경기에서 외적인 영향에 의해 승부가 조작되었다는 것을 실로 충격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스타 선수 출신이며 감독인 사람이 그 사건 중심에 있었다는 것이 더욱 큰 충격이었습니다.

6. 참으로 좋아한 선수이며 감독이었는데 말입니다.

7. 왜 이러한 사건이 일어났을까? 그러면서 생각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도 그러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8. 무슨 말씀입니까?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참으로 정직하고 진실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급격히 적어진 것(기독교인에 대한 사회적 이미지가 좋지 않다는 의미입니다)은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그래도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그리고 다른 사람이 생각하기에도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으로 빚어져 가야 합니다.

9. 그런데, 그렇지 못할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까요?

10. 마가복음 1장에서 보면, 오늘 본문에 앞서 예수님께서 세레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중생했다는 의미입니다. 거듭났다는 말입니다.

11. 그런데, 거듭난 사람들이 여전히 죄 아래 살아간다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모두가 그렇습니다.

12.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13절에서 보듯이 사탄에게 시험을 받음으로서 그 유혹에 노출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13. 거듭난 사람이라도 이처럼 죄의 유혹에 노출될 수 밖에 없습니다. 마지막 생애를 끝내는 그 순간까지 이와 같은 유혹은 계속될 것입니다.

14. 그래서 결코 우리는 방심해서는 안됩니다. 항상 말씀안에, 진리안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15.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의 유혹은 두 가지입니다.

16. 첫째는 성령의 시험입니다. 오늘 12절에 보면,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고 말씀합니다.

17. 이는 성령께서 광야로 예수님을 이끌었다는 의미입니다. 광야는 어디입니까? 세상입니다. 세상은 어떠한 곳입니까? 사탄의 유혹이 득실 거리는 곳입니다. 13절에서 보면,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8. 우리가 다른 복음서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사십 일 금식후에만 사탄이 유혹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마가복음 그렇게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19. 사십 일 동안 광야에 있을 때에도 사탄의 유혹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결정적 세 가지것을 준비했는데, 그 내용이 바로 다른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광야 40일 이후의 시험입니다.

20. 이처럼 성령도 우리를 시험합니다. 야고보서에서도 그 내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2-3절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브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참고로 약 1장 12-18절을 보는 것도 좋습니다.

21. 저는 성령의 시험을 가리켜 은혜 뒤에 찾아오는 고약한 시험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22. 은혜 뒤에 우리가 더욱 멋진 모습으로 믿음의 전성기를 누리면 좋겠는데, 아쉽게도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은혜뒤에 찾아오는 시험이 있습니다.

23. 그렇다면, 왜 은혜 뒤에 고약한 시험이 찾아올까? 그것도 성령이 우리를 시험하는 것일까요?

24. 저는 여기에서 몇 가지 성령의 시험이 주는 유익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24. 첫째는 성령이 충만할 때 어떠한 시험을 만나도 이길 수 있는 내성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이김을 주고자"함입니다. 승리를 하는 사람이 계속 승리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이김을 하는 사람이 어떤 유혹에도 이길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할 때 이김의 은혜를 체험하도로 하기 위함입니다.

25. 둘째는 "훈련을 하고자"함입니다. 믿음의 훈련, 신앙 성숙의 훈련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의 순간, 은혜의 순간에도 훈련은 계속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성령을 사모하고, 은혜를 충만히 누리는 정점은 우리가 살아 있는 이 순간 찾아오지 않습니다. 계속 해서 훈련을 통해 믿음은 성숙해져가야 합니다. 교만하지 않기 위한 훈련의 시간이 되는 거죠.

26. 셋째는 성령의 시험 또한 이김으로 통해 "궁극적으로 은혜의 자리로 이끌고자"함입니다. 은혜를 받은 자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27. 그런데 이러한 성령의 시험 말고도 자신 스스로의 죄의 유혹을 받는 경우도 참으로 많습니다.

28. 내 자신을 경험을 나열하지 않아도, 물론 그렇게 할 때 참으로 많은 먹과 종이가 필요하겠지만요. 우리는 스스로 넘어질 때가 많습니다.

29. 왜 그럴까요?

30. 스스로 넘어지는 경우는 가짜 세례를 받은 사람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이 부분은 조심스러운 말씀이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31. 오늘 본문 8절을 보겠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나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32. 우리는 물세례만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33. 어떤 사람들은 물 세례만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다면, 마가복음은 8절의 말씀을 구분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8절 말씀을 이유없이 기록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34. 우리가 물세례를 받고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경고를 주시기 위한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35. 우리가 물세례를 받고 성령세례를 받으면 궁극적으로 예수님처럼 사탄의 시험, 성령의 시험을 잘 통과할 수 있습니다.

36. 혹 우리가 자꾸 이러한 시험에 넘어지고 있다면, 자기 자신 스스로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어떻게요? 나는 물세례만을 받은 사람인가? 성령 세례까지 받은 사람인가?

37. 자꾸 나에게 시험이 찾아오십니까?

38. 이는 두 가지 이유입니다. 성령 시험이든지, 사탄의 시험입니다.

39. 그런데 이 시험에 자꾸 넘어지십니까?

40. 그럼 문제가 있습니다. 물세례만 받은 것이 아닌지? 진정 성령 세례를 받은 것인지? 자문해 봐야 합니다.

41. 오늘 스스로 자신에게 질문함으로 하루를 시작하며, 승리하였으면 합니다.

42. 신앙은 이처럼 살아있는 숨쉬는 것입니다.

43. 오늘 신앙이 춤추는 은혜를 기대합니다.

44. 할렐루야. 아멘.

‘사실’은 리더의 친구 - 리더십 네트워크 632호

http://www.disciplen.com/resource/mail/now2.asp?m_mode=rn&v_msid=3124&m3_No=2&page=1

 최근 교회에 대대적인 개혁을 감행하여 급진적인 변화의 길을 걷고 있는 교회가 있다. 바로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는 윌로크릭 교회이다. 
 이 교회는 2008년 이후 지금까지 계속 몇 가지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우선 이원화되어 있는 예배 모델을 없애고, 수요 예배를 강의식 형태로 바꾸었고, 주일 예배에도 중대한 변화를 단행했다. 그리고 20년이 넘게 가지고 있던 소그룹의 목표를 다시 설정하고 소그룹 전략을 변경했다.

 모든 교인들에게 기본적으로 매일 성경을 읽는 훈련을 요구하고, 지역 공동체를 섬기는 일에 더 많은 에너지와 물질을 투자하기 시작했다. 꾸준히 변화를 시도한 결과 현재 윌로크릭 교회에는 다음과 같은 변화가 생겨났다.
  1.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교인들의 비율이 35퍼센트 증가하여, 이 항목에 대한 윌로크릭의 수준이 다른 최고의 모범 교회들과 같아졌다.
  2. 주일 예배에 대한 교인들의 만족도가 모든 단계의 성도들에게서 골고루 상승했다. 이 예배들이 자신들의 영적 성장에 도움이 된다고 말하는 교인 수가 전체적으로 29퍼센트 많아졌다.
  3. 영적 삶에서 성장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도록 도전하는 교회의 역할에 대한 만족도가 27퍼센트 증가했다.
  4.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돕는 교회의 역할에 대한 전체적인 만족도가 34퍼센트 증가했다.
 윌로크릭 교회의 변화는 설문조사 결과가 보여준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가능했다. 그 과정에 대해서 잠시 알아보자. 

 빌 하이벨스 목사는 교회에서 처음 설문조사가 시작된 이유는 윌로크릭 교회가 제공하는 다양한 활동과 프로그램 가운데 어떤 것이 성도들의 영적 성장에 가장 큰 도움이 되는지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설문조사 결과를 가지고 기존의 다양한 사역들을 면밀히 재조정해서 좀 더 많은 사람들의 신앙을 성장시키는 데 도움을 주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사결과가 보여준 ‘사실’은 윌로크릭 교회가 가지고 있던 몇몇 핵심 전제들에 의문점을 남겼다고 한다.

 설문조사가 보여준 ‘사실’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전체 교인 중 18퍼센트의 사람들이 영적으로 침체된 상태에 있으면서도 그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고 있고, 아예 교회를 떠날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가장 성숙하고 열정적인 성도들은 더 깊은 신앙의 세계로 나아가고 더 큰 도전을 받고 싶어 했지만, 다음 단계로 성장하는 일에 교회가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보고받은 담임목사는 얼마나 힘들었을까가 상상된다. 한 기관의 리더가 자신이 추구하고 생각하고 있는 기관의 모습과 실제로 달성한 바가 상이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만큼 힘든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빌 하이벨스 목사처럼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길만이 원래 리더가 추구하고자 했던 그 본질을 더 확실히 이룰 수 있는 첫걸음이 된다는 것을 간접 경험했다. 그리고 ‘사실’을 바로 직시하기 위해서는 윌로크릭 교회와 같이 정확한 측정 도구를 가지고 교회를 진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윌로크릭 교회는 자신들의 교회를 진단했던 동일한 측정도구를 가지고 미국 내 1,000여개 교회의 25만 명 이상의 성도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고 그 결과를 가지고 중요한 책을 발간했다. 

 바로 국제제자훈련원에서 최근 출간한 <무브_영적 성장에 대한 1,000여개 교회들의 증언>이라는 책이다. 이 책을 설문조사는 아직 실시하지 못하여도 이러한 책자를 통하여 교회를 올바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사실’은 리더의 친구라고 말하는 빌 하이벨스 목사의 말은 한 교회를 이끄는 목회자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명언이다. 

Saturday, March 9, 2013

영성훈련의 일곱가지 방법

http://www.disciplen.com/resource/mail/now2.asp?m_mode=rn&v_msid=701&m3_No=2&page=78

많은 목회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을 만나고, 또 다양한 목회현장을 방문하여 대화를 나누면서 확인하게 되는 진리는 ‘리더십의 중요성’입니다. 목회의 환경이나 토양 등은 다양하지만 열매맺는 사역의 중심에는 언제나 좋은 지도자가 있습니다. 좋은 리더십이 없이 성공적인 사역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정말 기적과 같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좋은 지도자가 되는 것과 좋은 지도자를 발굴하고 훈련시켜 지도자로 세우는 것은 너무도 중요한 일입니다.

물론 어떤 지도자가 좋은 지도자 인지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시편에 기록된 바처럼 ‘성실함과 그 손의 공교함“의 균형을 갖춘 지도자라고 표현할 것입니다. 깊은 영성과 참된 목자의 심정을 소유한 지도자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어느 것 하나도 놓칠 수 없는 것들입니다.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 할찌라도 우리가 어떠한 리더십을 지향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스스로에게 한번 물어보십시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지향함의 증거로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무엇인지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목회자의 리더십을 이야기할 때, 특별히 제자훈련 인도자로써의 리더십을 이야기 할때 ‘영성훈련’은 빼놓을 수 없는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영성의 깊이를 가지지 않고서는 사람들을 제대로 섬길 수가 없습니다. 성도들의 인격과 삶에 하나님의 흔적을 남기기 어렵습니다.

 저는 게리 토마스의 책 ‘뿌리 깊은 영성은 흔들리지 않는다’를 매우 인상깊에 읽었습니다. 한번 읽어버리고 말 책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 책에서 지금까지 잊혀졌거나 등한시된 영성훈련의 일곱 가지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습니다.

1. 경건한 책 읽기

믿음에서 성숙해 가기를 원한다면 성숙한 시각에서 우리 보다 앞서 고민하고 이 주제에 대해 글을 쓴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신학에 100% 동의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글은 우리 가슴에 헌신과 열정의 불길을 타오르게 해 줄 것입니다. 우리 영혼에게 ‘거룩한 열심이 타오르게 할 수 있는 고전작가’들을 찾아보십시오. 그들은 우리에게 깊이 있는 통찰력을 제공해 주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고전읽기를 권하는 또다른 이유는 이 시대가 너무나 분주한 시대라는 것입니다. 경건한 책들은 우리로 멈춰 서서 보다 중요한 것들을 볼 수 있도록 도움을 줍니다.

2. 훌륭한 본보기들을 본 받기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는 영적인 만남은 중요합니다. 제게는 영적으로 도전을 주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과 이메일을 주고 받거나 대화를 나누고 나면 내 영혼이 소생하는 느낌이 들 때도 있고,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자 하는 열정이 생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만남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동시에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는 것 또한 우리의 소명임을 잊지 마십시오.

3. 덕목을 기르기


성경은 우리가 성령의 일에 협력해야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전 원래 그래요”라는 말은 겸손의 고백이 아니라 게으름의 고백입니다. 아빌라의 테레사의 말처럼 덕을 기르고 행하는데 애쓰지 않으면 성장하지 않는데서 멈추지 않고 퇴보하게 될 것입니다.

4. 불편함을 활용하기


불편함을 꺼리는 우리의 태도를 극복해야 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편안한 길을 택하지 않고 훈련함으로써 우리의 열정과 습관을 새롭게 형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성장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불편함은 적이 아니라 친구일 수 있습니다.

5. 진리를 몸에 적용하기


훈련의 궁극적인 목표는 진리를 우리 삶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몸에 우리를 맡기면 우리는 하나님께 멀어지게 됩니다. 단지 바르게 행동한다고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율법주의의 위험 때문에 진리가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이게 하는 훈련을 포기하면 안됩니다. 외적행위들의 주인이 되는 것은 마음의 내적 상태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몸의 주인이 되느냐 몸이 우리의 주인이 되느냐에 따라 몸은 우리의 친구도 적도 될 수 있습니다.

6. 일찍 일어나기


역사적으로 일찍 일어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훈련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 왔습니다. 일찍 일어나는 것은 효율성 이상의 의미는 가집니다. 게리 토마스는 젊은이들을 훈련 시키면서 가장 골치 아픈 문제들은 저녁 늦은 시간에 일어난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말합니다. 훈련된 스케쥴은 실제로 죄를 없앨 수 있으며, 우리 마음과 삶에서 죄를 제거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로우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나친 수면은 영혼을 느슨하고 게으르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게으름은 자신을 부인하는 영, 곧 그리스도의 영, 그 분의 사도들의 영, 모든 성도들과 순교자들의 영과는 너무나 대조됩니다”

7. 되돌아 보면서 살기


지혜로운 사람, 성숙한 사람들은 자신을 돌아봅니다. 자기반성, 자기성찰이야말로 영적훈련의 핵심적인 요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규칙적인 자기 성찰은 세월을 허송하지 않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헌신이 없이 목표는 성취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거룩한 목표가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추구해야하며, 그 추구함의 과정에는 헌신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성은 일깨워진 마음으로 모든 것을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자비에 반응하는 은혜의 영성임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자비에 올바르게 반응하기 위해서 우리는 훈련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잘 훈련되는 만큼 우리는 더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으며, 우리의 사역도 건강하고 풍성해 질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세우는 일, 이것은 놓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일대일 제자 양육

http://www.one2one.or.kr/


개요
 일대일 제자양육은 한 사람의 충성된 양육자가 다른 한 사람인 동반자를 제자로 삼아 일대일로 만나 그리스도를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함께 삶을 나누며 서로의 인격과 삶을 변화시키는 평신도 사역입니다.
 따라서 동반자는 영적인 부모인 양육자를 통해 체계적인 양육을 받게 되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형성하여 말씀에 순종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세우심을 받고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탁하신 복음전파의 동역자로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양육이라는 훈련은 많지만 한 사람만을 위한 일대일 제자양육은 온누리교회에서 하고 있는 아주 특별한 제자양육 프로그램입니다.
 
목적
 일대일 제자양육의 목적은 이름뿐인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신앙과 삶이 일치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을 길러내는 데 있으며, 자기 중심의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 중심의 그리스도인으로 세우는 데 있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녀도 삶에 자신과 즐거움이 없거나,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왜 어떻게 드리는 것인지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면, 또 그 하나님이 나와 무슨 관계인지를 알지 못했다면 한번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대일 제자양육은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우리의 믿음을 올바르게 인도해 줍니다.
 양육자와 동반자가 16주 동안 만나면서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삶이 무엇인가를 생활 속의 구체적인 체험을 통해 가르침을 받게 되며, 그 과정에서 참된 신앙이 체계화되고 영적인 멘토를 얻게 됩니다.
 
배경
 온누리교회는 1985년 예배공동체, 성령공동체, 선교공동체로서 모든 성도들을 참된 예배자, 성령충만한 사역자, 능력 있는 전도자로 세우는 교회를 목표로 창립되었습니다. 온누리교회는 사도행전에 나타난 바로 그 교회 ' 를 꿈꾸며, 우리의 현재를 점검하고 꿈의 실현을 위해 달려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향하신 교회가 사도행전의 초대교회에서 가능했던 것은 예수님의 삶을 통한 양육 때문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평범한 사람들을 부르셔서 삶을 함께 나누시며 그들을 훈련시키시고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거룩한 사역을 제자들에게 부탁하시고 또한 우리에게도 부탁하셨습니다.
 “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 (딤후 2:2) 는 말씀처럼 우리는 주님께서 분부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고자 합니다. 가르쳐 지키게 하는 일은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삶의 나눔을 통해 섬기는 본을 보이는 것으로만 가능합니다. 일대일 제자양육은 삶의 나눔과 섬김의 본을 통해 사도행전의 바로 그 교회 ' 를 이루어가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가는 가장 확실한 도구입니다.
 
필요성
 일대일 양육은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는 방법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모세를 일대일로 만나셨고 모세는 여호수아를 일대일로 양육하여 후계자로 세웠습니다. 다윗과 요나단도 일대일의 아름다운 관계를 맺었으며, 엘리야는 엘리사를 일대일로 훈련하였습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베드로와 요한을 일대일로 훈련시키셨고, 세리 마태와 삭개오를 만나 주셨으며, 죄지은 여인과 사마리아 여인 또 니고데모등도 일대일로 대면하여 그들을 돌보고 치유하고 가르치셨습니다
 이러한 일대일의 관계는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아나니아로부터 일대일로 돌봄을 받았으며, 마찬가지로 실라, 디모데, 오네시모를 일대일로 양육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도록 가르쳤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 (28:19-20)은 주님의 지상명령입니다. 한국교회 선교 120년이 되었지만 주님의 말씀은 성도의 삶을 지배하지 못하고 여전히 진리의 말씀은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일대일 제자양육은 이러한 미지근한 신자들과 차지도 덥지도 않은 교회들을 치유하는 시대적인 요청입니다.
 일대일 양육이란 양육자의 인격과 동반자의 인격이 일대일로 맞부딪쳐 삶을 나눔으로, 한 사람의 인격과 삶이 근본적으로 변화되도록 집중양육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놀라운 변화는 주위 사람들을 연쇄적으로 변화시키는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학교교육과 가정교육으로 이루지 못한 근본적인 변화는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일대일 만남의 현장에서 가능합니다. 온누리교회를 통해서 지난 20년 동안 일대일로 변화된 성도들이 온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음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 (9:37-38)
 
장점
* 상대방에 대한 집중과 의사 전달이 용이하며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양육방법입니다.
* 인격적 만남을 통해 동반자의 인격과 삶의 변화를 분명하게 알 수 있기 때문에 확실한 양육의 열매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의 말씀과 양육자의 기도 그리고 따뜻한 위로로 공동체에서 숨겨진 개인적인 깊은 상처와 문제까지 치
유가 가능합니다.
* 개인의 형편과 문제 중심의 맞춤 양육으로 동반자의 신앙이 체계화되고 견고해 집니다.
* 양육자는 목자의 심정으로 말씀을 가르치고 삶을 나누면서 동반자를 돌보게 되므로 영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 일대일 제자양육은 오랜 기간을 투자하며 수고 하여야 하지만, 그 대가로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 받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의 풍성한 삶을 보상으로 얻게 됩니다.
 
목표
 일대일 제자양육은 새로 등록한 신자들이 체계적인 양육을 통해 말씀에 순종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세워지고, 세워진 사람이 또 다른 한 사람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양육하며 섬길 수 있기를 원합니다.
 훈련된 양육자가 동반자를 일대일로 만나 말씀을 중심으로 삶을 나누고 서로 섬기며, 격려하고, 도전 받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를 체험하고 온전한 그리스도의 제자와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일대일로 만나 주시고 사랑해 주시듯 우리도 주님을 잘 모르는 한 사람의 영적 부모가 되어 섬기며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눔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이 땅에 실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전략
 모든 등록교인들이 일대일 제자양육 동반자과정을 이수하도록 하여 훈련을 받도록 합니다.
 동반자과정에서 양육자와 동반자가 서로의 삶을 나누고 섬기면서 성령님의 역사를 체험하도록 합니다.
 일대일 제자양육 동반자과정을 이수한 동반자를 양육자로 훈련시킵니다.
 양육자는 동반자를 섬기는 삶을 통하여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가도록 합니다.
 양육을 망설이거나 양육에 자신이 없는 성도들은 양육자 배가코스를 통하여 배우면서 며며며며올바른 양육자로 설 수 있도록 인도 합니다.
 양육자를 지도할 수 있는 일대일 전문사역자와 지도자를 육성하여, 일대일 제자양육에 앞장 서도록 합니다.
 
프로그램
 일대일 동반자 과정
 일대일 양육자반 과정
 일대일 양육자 배가코스
 일대일 열린강좌
 일대일 지도자 훈련학교
 
비전
 일대일의 비전은 충성된 소수의 사람을 집중적으로 양육하여 예수님의 제자를 지속적으로 재생산함으로써 온 땅에 하나님의 백성이 충만케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에 순종하여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 일군을 땅끝까지 파송하여 온땅(온누리)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충만하도록 일대일로 세계로 뻗어가는 것입니다.
 사과씨 한 개를 통해 울창한 사과나무 숲을 바라보는 것처럼 영적 배가를 통한 제자의 재생산 원리로 당신이 현재 양육하고 있는 한 사람을 통해 하늘의 허다한 별과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수 많은 영적 자손을 볼 수 있습니다. 양육자 여러분은 복의 근원이며 축복의 통로입니다.
 

한 날 묵상 - 막 1:9-11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으시러 오시다>

한 날 묵상 - 막 1:9-11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으시러 오시다>

어떻게 이런 일이라고 할 수 있다.

1. 예수님의 행적은 때론 상상을 초월하는 경우가 있다. 인간의 생각을 넘어서는 일들을 하셨다는 의미이다.

2. 세례는 상징적으로 죄를 씻는다는 의미가 있다. 자신은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이 세례식이다. 그래서 우리는 당연히 죄인이기에 세례를 받아야 한다.

3. 그렇다면, 예수님은 세례를 받지 않으셔도 된다. 당연하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례요한에게 나아와 세례를 받으셨다.

4. 이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왜?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는가? 예수님의 세례를 달리 생각해 보면, 세례에 대해 상징적이면서,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다.

5.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 사건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6. 예수님의 세례받으심이 말씀하는 첫번째 의미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기 위해서이다. 마태복음 3장 15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하럭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7.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의"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하나님의 인류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인성과 신성을 모두 지니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요한에게 세례를 받게하심을 통해서 인성을 확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9.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것임을 예언하고 계십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말라기 4:5)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찐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마태복음 11:13~14)
  "제자들이 묻자와 가로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마태복음 17:10~13)

10. 하나님의 공의를 위해서는 예수님은 반드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셔만 했습니다.

11. 그랬기에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너무나 기뻐하셨습니다. 11절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을 보시고 하나님은 참으로 기뻐하십니다.

12. 이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증명할 수 있는 길의 출발점에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13. 우리도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의 부르심의 출발점에 서기 위해서는 당연히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14. 세례를 받아야 하는 참으로 놀라운 일은 사도행전 8장 26-40절에서 나오는 빌립과 에디오피아 내시의 대화의 마지막 부분에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15. 행 8:36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16. 예수님의 제자로서 기쁘게 부르심의 길을 가기 원한다면,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내시처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우리도 참으로 기쁘게 주의 길을 예비하러 떠날 수 있습니다.

17. 세례에는 이러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이며 우리 또한 기쁨으로 우리의 길, 주님이 주신 부르심의 길을 갈 수 있게 됩니다.

18. 참으로 세례를 많이 받는 교회는 복된 교회입니다. 세례식은 기쁨이 차고 넘치는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세례를 받는 사람도 기뻐하고, 세례에 참여하는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함께 기뻐하는 시간입니다. 그렇기에 세례를 많은 그것만으로도 참으로 기쁨이 넘칩니다.

19.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의 교회마다 이처럼 세례의 기쁨의 은혜가 자주 있는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20. 예수님의 세례가 말해주는 세 번째 의미는 삼위 일체 하나님이 함께하는 시간입니다.

21.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10-11절을 보면, "성령이 비둘기 깥이 자기에게 내려오심",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라는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 성령님,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하는 시간임을 알 수 있습니다.

22. 이처럼 우리의 세례를 받는 시간은 삼위 하나님이 함께 하는 시간이면서 기뻐하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세계가 얼마나 고귀한 시간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23. 예수님의 세례에 세 가지 의미를 가지고 살펴보았습니다. 우리의 세례가 의미하는 것 또한 이와 같습니다.

24. 우리의 세례식이 예수님의 세례처럼 되기 위해 닮아야 할 예수님의 모습이 있습니다. 바로 기도입니다.

25. 눅3장 21절에 보면,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6. 세례 받으시고 기도하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기도해야 합니다.

27. 세례를 위한 기도뿐 아니라, 세례 이후에도 기도해야 합니다. 더욱이 세례를 통한 고백이 삶에서 지속적 행동으로 고백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28. 오늘도 다음주에 있을 세례식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고 또한 나의 지난 날의 세례를 돌아봅니다. 아울러 세례 받은 이후의 나의 오늘의 시간 또한 점검해 봅니다.

29. 기도함으로 세례의 참된 의미가 날마다 삶속에서 새롭게 되기를 원합니다.

30. 할렐루야. 아멘.

==
9절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세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10절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11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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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방의 빛 p342.

"세례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편입이며 기독교 공동체로 들어가는 길이다. 세례는 우리로부터 거리 두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간격이 교회적인 형태라고 말해 줄 것이다. 세례는 버다 큰 사회적 환경 가운데 '거류민'으로 살아가는 공동체 안에 포함되는 것이다..... 베드로전서에 나타난 사회적 환경으로부터의 간격은 단순히 종말론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교회론적이다."

Thursday, March 7, 2013

한 날 묵상 - 막 1:6-7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들의 일상>

한 날 묵상 - 막 1:6-7 <주의 길을 예배하는 자들의 일상>

point -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들의 일상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1. 우리가 매일 하는 것들 중에서 먹는 것, 입는 것에 대한 고민은 끝이 없다.

2. 나는 오늘도 아내가 무엇을 먹을까에 대한 고민에 빠진 모습을 보게 되었다. 가족을 위한 아침 준비, 아이들의 점심 그리고 저녁에 무엇을 먹어야 할 것까지 계속되는 먹는 고민을 더 이상 하지 않을 수 없을까?

3. 나는 오늘 집을 나오면서 무엇을 입어야 할까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특별히 옷을 잘입는 편은 아니니 그다지 많은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져 옷에 손이 가는 것으로 입고 나온다. 그런데 오늘은 내 옷을 본 아내가 말을 한다. "옷이 좀 커 보이네요. 오늘 입고 있을 때 마다 이렇게 잘 관리하면 되겠네요"

4. 의, 식, 주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들이다. 일상이며, 아주 중요한 삶의 요소들이다. 옛날보다 지금이 더욱 그렇다.

5. 그래서 가끔 우리의 생각이 이러한 문제들에 너무 집중할 때가 있다. 가장 필요하며 일상적이기에 그 어느것보다 우선시 되는 경우가 있다.

6. 그렇지만 우리의 일상에서 이 보다 더 먼저인 것이 분명히 있다. 바로 부르심이다. 일상의 이러한 것 또한 부르심을 위한 것들이다. 부르심이 존재하기 위해 일상의 것들이 필요한 것이다.

7. 나의 지난 날을 돌아보니, 깨닫는 아쉬움들이 있다. 나는 얼마나 일상의 것보다 부르심에 더욱 집중했는가? 아내과 함께 한 지난 일들을 돌아보니 아내는 참으로 이러한 일상들을 놓치지 않으면서 부르심에 집중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 왔음을 기억하게 된다.

8. 난 그렇지 못함이 솔직한 고백이다.

9. 우리가 부르심에 집중하기 우해서는 우리의 삶을 단순화시킬 필요가 있다. 목표가 많으면 하나의 어떤 목표도 이룰 수 없다. 목표를 단순화 할 필요가 있다.

10. 세례 요한은 그의 부르심에 순종하기 위해 그의 삶을 아주 단순화 시켰다.

11. 삶을 복잡하게 할 여러 요소들을 제거함으로서 그는 부르심에 집중하였다.

12. 먼저 아주 삶이 간단했다. 입는 것, 먹는 것 모두가 간단한 삶이었다. 잘 먹으려 하지 않았고, 많이 먹으려 하지 않았다. 단 건강을 위해 먹었을 뿐이다. 잘 입으려 하지 않았고, 멋지게 보이려 하지 않았다. 단, 건강을 위해 입었을 뿐이다. 세례 요한에게 있어서 건강이란 부르심에 순종하기 위한 최소한의 준비였던 것이다.

13. 나의 삶도 이처럼 단순한 명제 앞에 서 있었으면 한다. 부르심에 한 번 더 순종할 수 있는 삶의 단순함이 나에게 필요하다.

14. 또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세례 요한의 자세는 겸손한 왕을 섬기는 종이 되었다. 겸손한 왕을 섬기는 종들은 겸손한 왕처럼 역시 겸손해야 한다.

15.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7절)

16. 일상에서 우리는 늘 겸손해야 한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겸손의 상징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진정한 겸손은 삶에서의 성육신이었다.

17. 예수님은 일상의 삶에서도 한 인간으로서 사람들을 섬기셨다. 하늘을 버리고 땅으로 오신 성육신의 삶을 넘어, 이 땅의 바닦으로 내려 가셔서 진정한 섬김의 삶을 몸으로 실천하셨다.

18.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는 그의 제자들 또한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을 닮아야 한다. 우리가 찾아가야 할 섬김의 자리는 많다. 세상 사람들은 가지 않는 그곳으로 가야 한다.

19.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섬김의 삶은 죄인과 세리의 친구이셨다. 그 당시 어느 누구도 가까이 가기를 원치 않았던 사람들에게 찾아가셔서 친구가 되셨고 함께 식사를 하셨고, 함께 대화하며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들의 필요를 따라 병고침등 필요를 채워주셨다.

20. 오늘 세상의 이목을 전혀 받지 않는 곳은 너무나 많다. 세상은 그러한 곳에 더 이상 관심이 없다. 오직 그들을 이용하려 할 뿐이다. 그들의 친구는 누구인가? 누가 그들에게 다가가야 하는가? 바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는 그들의 제자들인 우리가 아니겠는가!

21. 우리의 일상의 삶의 원리 세 번째는 예수님의 목표와 나의 목표는 구분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예수님이 아니다. 교만하지 말자. 단지 예수님을 닮아가야 한다.

22. 세례요한은 자신의 부르심을 알았다. 물 세례와 성령 세례가 결코 같을 수 없나는 것임을...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사역과 자신의 사역이 구분되어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23. 자신의 사역을 잘 아는 것이 공동체에서 꼭 필요한 구성원들의 자세이다. 자신의 역할을 넘어서지도 않아야 할 뿐 아니라,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을 잘 감당해야 한다.

24.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인간이시다. 우리를 위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오셨다. 그리고 그 일을 감당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다. 이제 성령님이 이 땅에서 역사하신다. 나를 도우시기 위해서이다.

25. 나라는 존재는 예수님의 은혜안이 있는 것이며, 성령의 함께 예수님이 남겨주신 부르심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26. 나는 결코 예수님이 아니다. 나는 예수님의 제자일 뿐이다. 그것만으로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27.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의 오늘 나의 일상의 삶이 오직 예수님의 부르심을 위한 가장 합당한 자의 삶이 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28. 오늘도 나는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이기 원한다.


Tuesday, March 5, 2013

케이 워렌의 신간, ‘기쁨을 택하라: 행복으로는 충분하지 않기에(Choose Joy: Because Happiness Isn’t Enough)’

국제제자훈련원 메일이 묵상 글


재미 없는 분? 하나님에 대한 오해
“인자는 와서 삶을 즐기매…” (눅 7:34a, Phillips 성경)
오늘의 묵상글은 케이 워렌의 신간, ‘기쁨을 택하라: 행복으로는 충분하지 않기에(Choose Joy: Because Happiness Isn’t Enough)’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우리 중 대부분은 늘 기뻐하려고 할 때, 큰 장애물을 만난다. 바로 성경이 매정하고 재미 없는, 건조한 규칙과 법규만으로 이루어진 책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실 성경은 기쁨에 관한 책이다!
성경의 NIV 버전에 따르면 기쁨, 환희, 즐거움, 유쾌함, 웃음 등의 단어가 500개가 넘게 나온다. 그럼 아마도 슬픔, 비탄, 눈물 같은 부정적인 단어는 한 열 배쯤 더 많으리라 생각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단어는 158번밖에 나오지 않는다. 이것만 봐도 하나님 말씀이 슬픔보다는 기쁨의 책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이 누구신지, 또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매우 강한 오해를 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우리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인간의 모든 재미를 억누를 생각만 하는, 분노에 찬 심판자로 인식한다. 미술작품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보라. 보통 턱수염이 있고 머리가 하얗게 센 괴팍해 보이는 노인으로 그린다. 예수님을 묘사한 작품을 보라. 대부분의 그림은 끔찍한 고통을 당하고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준다.
성경은 이사야서 53장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슬픔과 고통에 익숙한 ‘비탄의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셨던 역할은 구원자이자 인류의 구세주였고, 그러려면 끔찍한 고통을 겪어야 했으며 난폭하고 철저하게 피를 흘려야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쁨, 환희, 즐거움을 누릴 여지가 없는 비탄의 사람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본질적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이셨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은 기쁨의 하나님이시다.
누가복음 7장 34절은 “인자는 와서 삶을 즐기매…”라고 말한다. (Phillips 성경) 이것은 재미를 모르는 분, 또는 눈물 없이는 살 수 없는 분이라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는 표현이다. 예수님은 슬픔만큼이나 기쁨도 경험하셨다. 우리가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드는 분이다. 그러한 예수님이 기쁨을 경험하실 수 있었다면, 나도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신도 그렇게 할 수 있다.
다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자.
  • 예수님께서 오셔서 삶을 즐기셨다는 사실은 그분에 대한 당신의 시각에 변화를 주는가?
  • 하나님이 왜 기쁨의 하나님이시라고 생각하는가?

기쁨의 모델이신 예수님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요 2:2)
오늘의 묵상글은 케이 워렌의 신간, ‘기쁨을 택하라: 행복으로는 충분하지 않기에(Choose Joy: Because Happiness Isn’t Enough)’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어제의 묵상글에서 우리는 성경이 가르쳐주는 기쁨을 얻기 위해 극복해야 할 가장 큰 장애물이 다름아닌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시각임을 알았다. 나는 당신이 스스로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 주로 당신에게 ‘비탄의 사람’인지, 혹은 ‘기쁨의 사람’으로 여겨지는지 -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기 바란다.
소리 내어 웃으시고, 미소 지으시고, 아이들과 놀아주시고, 제자들과 농담을 하는 예수님을 상상하는 것이 이상할 수도 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인성을 최소화하는 제한된 시각으로 주님을 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매력 있는 분이었다. 사람들은 그분의 밝은 태도에 이끌렸다. 예수님을 결혼잔치에 초대하지 않았는가! 재미없고 지루한 사람은 잔치에 초대를 많이 받지 않는다. 어린아이들도 예수님을 좋아했다! 같이 있으면 누가 재미있는지는 아이들이 가장 잘 안다.
사람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좋아했다. 예수님은 재미 있는 분이기도 했다. 우리는 1세기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분의 유머를 놓치는 것들이 많다.
예수님은 죽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그러한 그분의 사명과 역할은 자명하다. 이 역할을 위해 예수님은 우리의 슬픔을 감당하고 고통을 겪으셨다. 그러나 주님은 또한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 친절하심, 오래 참으심, 그리고 사랑스러우심도 나타내 보이셨다. 이 점에서 예수님은 기쁨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나 매력적이며, 우리와 동질감이 느껴진다. 예수님은 고통과 배신과 엄청난 고통을 감당하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도 아셨지만, 웃으시고 즐기시고 이 깨어진 땅에서조차 삶의 면면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분이기도 했다.
예수님이 그러한 삶을 사셨기에, 우리 역시 기쁨의 삶을 추구할 수 있다.
다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자.
  • ‘기쁨의 사람’이신 예수님을 상상하면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이 되는가?
  • 하나님께서 당신을 비탄의 사람 대신, 기쁨의 사람으로 만들어주시도록 구해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