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September 29, 2011

한 날 묵상 - 창 13:11-18 <일어나... Go, Walk. 그렇다면, 얼만큼?>

 아브람의 양보를 하되 더 멀리 바라보는 양보에,  자기 포기가 있는 양보, 자기 희생이 있는 양보, 화해를 위한 양보, 그리고 생명을 살리는 양보에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그건 단지, 다시 한 번 약속의 말씀을 주시는 것 뿐입니다(14-17절).
그런데 그 약속의 말씀이 더욱 아브람을 어렵게 합니다. "너는 눈을 들어 ... see ... go ... walk ..."


 하나님의 약속은 새로운 것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전에 주셨던 약속을 다시 한 번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한 번 주셨다는 말씀은, 아직 여전히 하나님의 약속은 구체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약속의 말씀을 위한 순종의 한 발 전진을 말씀하십니다.


"너는 눈을 들어 ..."
"See"(14절)
"Go, walk through the length and breath of the land"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도 힘이 드는데, 하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라 말씀하십니다. 
"가라, 걸어라."

이 상황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우리는 얼마큼 걸어 다녀야 할까요? 그만 두고 싶을 때에 얼만큼 더 걸어야 할까요? 
정답은 믿음의 분량만큼 걸어다니겠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믿음의 분량을 키울 수 있을까요? 
마음에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약속의 말씀처럼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는 약속의 말씀의 확신이 있는 만큼 걷게 됩니다. 
마음에 확신이 있는만큼 보게 될 것이며, 마음에 확신이 있는 만큼 걷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전진입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더욱 더 큰 믿음을 요구합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는 복이 아닙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구체적인 축복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은 음성은 더욱 하나님의 자녀다운, 예수님의 제자다운, 성령님을 닮은 것을 원할 뿐입니다. 


 우리도 믿음을 갖되 더욱 더 큰 믿음을 갖기 원합니다.
 우리도 말씀을 듣되 더욱 힘든 것을 요구할지라도 순종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영광받으십니다.


희미하게 보이는 상황에서 우리도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보기를 원합니다.
믿음으로 나아가기 원합니다.
믿음으로 걸어가기를 원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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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에 되지 않는 제자의 길






모두들 단 번에 되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를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네요!


모두들 한 번에 하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닮음을
그러나 그게 쉽지 않네요!


모두들 한 방에 하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놀라운 기적을
그러나 그럴 수 없다네요!


한 번에 되지 않는 제자의 길을
날마다 경험합니다.
아브람을 통해서
모세를 통해서
제자들을 통해서


한 번에 되지 않기에 
오늘 인내하며 나아가렵니다.




* 창세기 말씀 묵상을 정리하면서.. 적어봅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을 위한 매일의 묵상 - 910호


개인적 변화의 원리 - 과정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 4:24)
당신의 삶의 결점을 없애고자 하실 때, 하나님은 손가락을 딱 부딪쳐서 그 일이 즉시 일어나게 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은 서서히 그렇게 하신다. 전에 나는 이런 말을 했었다. 하나님이 버섯을 만들고자 하실 때는 여섯 시간을 들이시지만, 떡갈나무를 만드실 때는 60년을 들이신다.
여기서 질문 - 당신은 버섯과 떡갈나무 중 무엇이 되고 싶은가?
성령은 당신의 인생에서 당신이 상상하지도 못했던 거대한 변화를 일으키실 것이지만, 그것은 하룻밤 새에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숙명의 1일’이 아니라 ‘숙명의 10년’을 계획해야 하는 것이다. 당신을 위한 내 기도는 이것이다. 오늘부터 10년 동안 성령의 역사하심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리고 소그룹의 지원으로 당신이 더 성숙해지고 더 그리스도를 닮고 당신의 삶의 목적을 더 많이 성취하는 것이다.
또한 내 기도는 지금부터 10년 동안 당신이 감정적으로,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심리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더 강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그에 대해 의도적이 되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라고 말한다. (엡 4:24)
이렇게 하면 더욱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말한다. “우리는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릅니다. 그 영광은 성령이신 주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고후 3:18, 쉬운성경)



 더 큰 믿음을 사모합니까?그렇다면 말씀의 훈련을 받으십시오. 아브람을 묵상하면 묵상할 수록 더욱 크게 들리는 음성이 있습니다. 믿음은 훈련과 관계속에서 성장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12제자를 위한 예수님의 삼 년의 공생애의 마음을 쪼금이나마 이해하고 있습니다. 

미국 :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다

미국: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다


미국의 청년들은 청년 시절을 지나는 동안 몇 가지 중요한 경험을 하게 된다. 집을 떠나 대학에 진학하고, 직장과 집을 구하고, 경력을 쌓기 시작하고, 결혼을 한다. 그리고 오늘날 많은 미국 청년들이 기독교 신앙에서 멀어 진다.
최근 조사를 통해 이러한 추세가 드러나게 되었다. 2009년 미국인 종교성향 조사(American Religious Identification Survey) 결과 가운데 한 가지가 눈에 띄는 점은 ‘무종교’라고 답한 미국인들의 비율이 1990년 8.1%에서 2008년 15%로 20년 사이에 두 배 가까이 증가한 것이다. 이러한 추세는 특정 지역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세속적인 북동부에서 보수적인 바이블 벨트(Bible Belt, 기독교인들이 많은 미국의 남부 지역을 일컫는 말, 역주) 지역에 이르기까지 모든 주에서 무종교인들만 증가했다. 무종교인들은 젊은 세대 가운데 가장 많아서 18~29세 응답자 중에서 종교가 없다고 답한 비율은 1990년 11%에서 2009년 무려 22%까지 증가했다. 또한 무종교인들의 73%는 신앙의 가정 출신이었으며, 66%는 종교를 갖고 있다가 무종교로 ‘개종’한 이들이었다.
다른 조사 결과들은 더욱 암울하다. 미국의 종교 현상을 연구하는 기관 퓨 포럼(Pew Forum on Religion and Public Life)의 연구자 푸트남(Robert Putnam)과 캠벨(David Campbell)은 2010년 10월 출간한 저서 ‘미국의 은혜(American Grace)’에서 미국의 젊은이들이 이전의 속도보다 5~6배 빠른 속도로 종교로부터 이탈하고 있는데, 한 세대 전만 해도 미국의 젊은이들 중에 종교가 없는 이들의 비율이 5~10% 정도였지만 현재는 30~40%에 이른다고 소개했다.
미국인들의 교회 출석률 역시 하락해 왔다. 레이너 리서치(Rainer Research)에 따르면 미국 젊은이의 약 70%는 18~22세 사이에 교회를 떠난다. 바나 그룹(Barna Group)은 교회에서 양육된 젊은이들의 80%가 29세 이전에 교회에서 ‘분리’되는 것으로 추정한다.
바나 그룹의 대표 킨내먼(David Kinnaman)은 교회에 다니는 미국 청소년들 중 3/4이 20년 후에는 교회를 떠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킨내먼은 수천 명의 젊은이들과 나눈 인터뷰를 통해 발견한 사실을 자신의 저서 ‘비(非)기독교인(unChristian)’에서 소개했는데, 교회를 다니지 않는 미국인들의 대부분은 교회를 떠난 젊은 미국인들이며, 미국 젊은이의 65%는 과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헌신을 하였던 적이 있다. 다시 말해, 교회를 다니지 않는 미국인들의 대부분은 기독교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했던 이들이라는 것이다.
킨내먼의 말을 바꿔보면, 오늘날 문제는 비기독교인들이 아니라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엄격히 말해서 교회를 떠난 이들은 ‘미전도(unreached)’ 집단이 아니다. 이들은 기독교인들의 친구이자 자녀이며 기독교인들과 함께 살아 온 이들이다.
일부 연구자들은 20대의 영성이 급격히 떨어진 것에 불안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연구자들은 교회 이탈이 일시적인 것이며, 대학을 막 졸업한 수많은 미국인들이 일요일 아침에 ‘알람 시계를 꺼버리는’ 문제일 뿐이라고 여긴다.
사회학자 라이트(Bradley Wright)는 최근 자신의 저서 ‘그리스도인들은 증오로 가득 찬 위선자 … 그리고 우리가 듣게 되는 다른 거짓말들(Christians Are Hate-Filled Hypocrites … and Other Lies You’ve Been Told)’에서 신앙을 버리는 젊은이들이 기록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는 현대 기독교의 기우(myth) 중에 하나라고 말한다. 라이트는 모든 세대는 부모 세대로부터 걱정의 소리를 듣는다고 말한다. 부모 세대는 자신들이 젊었을 때 머리를 길게 기르고 디스코 무늬의 셔츠를 입고 다녔고 그로 인해 부모의 염려를 샀었다는 사실을 망각한다는 것이다. 앞으로 일을 단언할 수는 없지만 역사는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는 라이트는 젊은이들이 가족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조직화된 종교를 떠나는 것이 일반적이며 이 젊은이들이 가정을 꾸릴 때쯤이면 다시 종교로 돌아온다고 주장했다.
베일러 대학교(Baylor University)의 사회학자 스타크(Rodney Stark)도 자신의 학교에서 실시한 연구 결과를 통해 젊은이들이 기성 세대보다 교회 출석률이 저조한 것은 일상적인 것이며, 젊은이들이 인생을 좀 더 살면서 결혼을 하고 특히 자녀를 갖게 되면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하게 될 것인데, 이는 모든 세대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주장했다.
라이트와 스타크 같은 학자들은 기독교가 금방이라도 몰락할 것이라는 성급한 예측은 어리석은 것이며, 북미의 기독교는 멸종의 위기에 서 있지 않다고 여긴다. 하지만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위기 상황은 이전보다 심각성을 띠고 있다.
첫째, 오늘날 청년들은 과거에 비해 더 빠른 속도로 종교에서 멀어지고 있다. 퓨 포럼의 퍼트넘과 캠벨은 이전의 속도보다 5~6배 빠른 속도로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난다고 말했다.
둘째, 교회를 떠나는 것이 인생 단계의 일부라는 주장은 더 이상 해당되지 않을 수도 있다. 오늘날의 청년기는 예전과 다르다. 일단 그 기간이 훨씬 길어졌다. 성인들이 다시 종교에 헌신하도록 하는 일차적 사회적 동기인 결혼, 직장, 자녀와 같은 요소는 이제 20대 후반, 심지어는 30대 초반까지 미루어 지고 있다. 2,3년 공백기를 가진 후에 교회로 돌아올 수도 있지만 10년 이상 지난 후에 돌아올 가능성은 훨씬 더 희박하다.
셋째, 문화 전반에 걸쳐 구조상의 변화가 일어났다. 과거 세대들은 잠깐 반항하더라도 기독교가 지배적인 문화를 떠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원론적이고 포스트 기독교적(post-Christian)인 미국 문화 속에서 자란 세대들의 경우에는 이전 세대들을 다시 신앙으로 끌어당겼던 문화적 중력은 약화되었거나 아예 소멸돼버린다.
그러면 지금의 2,30대가 교회를 떠나고 있는 이유는 도덕적 타협과 관련이 있었다. 소녀들이 대학에 가면 파티 문화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젊은 남자들은 여자 친구와 동거를 한다. 곧 자신의 믿음과 행동 간의 갈등은 견딜 수 없는 수준이 된다. 결국 양심의 가책에 지치고 죄악된 생활 방식을 버리지 못하는 젊은이들은 기독교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는 것이다. 지적인 회의나 교회에 대한 실망감을 이유로 내세울 수도 있지만, 그런 이유는 진짜 이유를 숨기려는 위장일 뿐이다. 우리 부모님이 말씀하던 대로 행동에 맞춰 신념을 바꾸는 것이다.
교회를 떠나는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인정하려고 하지 않겠지만, 이 말은 사실이다. 수많은 유혹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지키기란 매우 어렵다. 과거에 기독교인이었던 많은 사람들과 심층면접을 실시한 한 연구자는 교회를 떠난 주원인이 도덕적 타협이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교회를 떠나는 많은 이들이 지적인 방황과 기독교적 윤리에 벗어난 생활 방식이 겹치는 것을 경험한다.
미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가 도덕적 타협만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명백한 포스트모던적 의구심을 갖고 있다. 신앙을 다시 갖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아버지로부터 C.S. 루이스(Lewis)의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를 선물 받아 읽은 한 청년은, 이 책에 흐르고 있는 논리와 합리성은 모두 서구 철학의 전통에서 온 것이며, 기독교를 통해서만 진리를 찾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기독교가 자신의 지성을 채워주지 못한다고 느껴서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많다. 루터교 가정에서 태어나 청소년 시절까지 교회에서 열심히 활동했지만 최근에는 무신론 서적들에 심취해 있는 27세의 한 청년은 이제 자신은 종교든 점성술이든 초자연적인 것은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인에게 상처를 받은 사람들도 있다. 30대 초반의 한 여성은 어린 시절 다니던 교회의 신자 두 명에게 성추행을 당했다. 그 후 그녀는 교회를 떠났고 기독교인들과 기독교 신앙에 대해 매우 냉정한 인물이 되었다.
교회를 떠난 사람들 중 꽤 많은 이들이 다른 신앙을 받아 들이는데, 많은 이들이 위카(Wicca)라는 종교를 선택했다. 기독교인이었다가 위카를 선택한 한 사람은 자신이 기독교를 떠난 이유가 기독교의 신이 자신에게 복종을 요구했기 때문이라고 털어 놓았다. 위카에서는 신자의 의지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김을 받으며, 위카를 믿는 이들 중 이전에 교회를 다녀보지 않은 이는 거의 없다고 그는 덧붙였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아주 다양하다. 이 모든 이유들을 ‘청년기의 반항’이라 부르기는 힘들지만 공통점이 있다. 외적인 것보다는 교회 내부에서 발생한 일로 인해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유물론적 세계관이나 유행하는 신앙을 선택한 사람들조차 교회를 떠나게 된 계기는 교회 내에서 일어난 사건들이었다.
교회를 떠난 젊은이들의 대부분은 참된 신앙으로의 발전을 막는 피상적 형태의 기독교에 노출된 적이 있었다. 미국 십대들의 신앙 생활을 조사한 사회학자 크리스챤 스미스(Christian Smith)와 그의 연구팀은 대부분의 십대들이 ‘도덕적 치료의 이신론(Moralistic Therapeutic Deism)’을 믿고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즉 신은 ‘착하고 훌륭하고 공정한’ 사람들을 축복하지만 세상의 문제에는 관여하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이며, 기독교의 핵심 목표는 신도들이 ‘행복하고 스스로에 대해 만족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많은 교회에서 이러한 생각을 암묵적으로 또는 노골적으로 가르친다. 많은 신도들이 새신자들을 위한 예배부터 가벼운 분위기의 소그룹 모임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교회의 모임에서 이러한 분위기를 느낀다. 신에 대한 이렇게 순진하고 냉철하리만치 실용주의적인 관점이 현실의 단단한 벽에 부딪힐 때 연령에 상관없이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20대와 30대의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복잡하다. 상당 부분은 현대의 사람들이 속해 있는 새로운 문화와 관련이 있는데, 이에 대해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너무 많다. 하지만 적어도 기독교인들이 통제할 수 있는 한 부분은 교회의 대응 방식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교회를 떠날 때 비탄에 빠지는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기독교인들이 당혹감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슬픔에 빠지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아들이 신앙을 버린 것에 낙담한 한 부모는 아들이 ‘사탄’에 빠졌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 아들은 예수를 영적인 대가의 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다원주의자일 뿐이었다.
교회를 떠난 사람들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두 가지 반응은 공격적이거나 아니면 방어적이다. 교회를 떠난 이들을 판단하고 비난하거나 아예 무관심한 이 두 가지 반응은 모두 해로운 방식이다.
교회를 떠난 이들 대부분은 교회를 떠나기 전 자신들이 의심을 표현할 때 배척당한 경험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생각이 무례한 것으로 취급 받았고 비웃음을 당하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진부한 대답을 들을 뿐이었다. 또 어떤 이들은 진부한 답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비난을 받기도 했고 심지어는 뺨을 얻어맞은 이들도 있었다.
2008년 미국 사회학회(American Sociological Association)에서 코네티컷 대학교(University of Connecticut)와 오레곤 주립 대학교(Oregon State University)의 학자들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떠날 때 기존의 기독교인들 역할은 주로 떠나는 사람들의 의구심을 강화하는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탈자들이 싹트는 의구심을 기독교인 친구나 가족에 털어 놓아봤자 돌아오는 것은 진부하고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대답뿐이다.
교회는 종종 이러한 문제에 대한 적절한 자원을 갖추고 있지 못하고 있다. 성별 및 연령집단, 그리고 중독문제로 힘들어하거나 신앙을 찾는 이들을 위해 고안된 프로그램들은 갖고 있지만 신앙에 대해 의심을 품는 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은 전무한 실정이다. 하지만 최근 출간된 책들을 보면 상황이 변화하고 있는 것 같다. 톰 레이너와 샘 레이너가(Thom and Sam Rainer)가 쓴 ‘본질적인 교회? 잃어버린 세대 되찾기(Essential Church? Reclaiming a Generation of Dropouts)”와 에드 스테처(Ed Stetzer)가 쓴 ‘분실물 보관소: 교회를 떠난 젊은 세대와 그들에 손을 내미는 교회(Lost and Found: The Younger Unchurched and the Churches That Reach Them)’가 바로 그 예이다. 두 책 모두 불만 가득한 사람들에게 교회가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물론 교회는 어떤 프로그램을 내놓는 것 이상의 해답이 필요하다. 번지르르한 말이나 과격한(edgy) 접근 방식의 효능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 기도와 신중한 접근을 통해서만 현재와 같은 이탈 추세를 멈출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출발점은 젊은이들이 나이를 먹음에 따라 그들을 어떻게 도울 것인지에 대하여 재고해보는 것이다. 피자나 비디오게임을 이용한 모임이나, 새신자들을 위한 예배, 기독교 신앙을 소개하는 가벼운 소그룹 모임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들이 진지한 제자훈련 및 성경 공부 프로그램을 대체할 수는 없다. 신앙에서 멀어지도록 하는 유혹은 예전부터 존재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게 모든 신도들을 성숙시키도록 노력하고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기를’ (에베소서 4:14) 권면했다.
궁극적으로 교회는 속도는 느릴지라도 신앙을 저버린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들의 회의감은 영적인 갈망이 고뇌에 찬 언어로 나타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교회가 그들의 사연을 열심히 들으며 신뢰를 쌓는다면, 그들에게 다시 돌아오는 길을 밝혀줄 수 있을 것이다.
(출처: Christianity Today 2010년 11월호에 실린 기사를 한국어 번역 판권을 보유하고 있는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한국판>의 허락을 받아 한국선교연구원이 번역하여 게재합니다, 한국선교연구원(krim.org) 파발마 747호, 748호)

퍼온글 :
http://missio.re.kr/zbbs/view.php?id=america&no=238
http://www.barna.org/teens-next-gen-articles/528-six-reasons-young-christians-leave-church

Monday, September 26, 2011

"나무가..."


나무가
실룩 실룩 춤을 춥니다

나무가
예쁜 소리를 냅니다.

나무가
자신의 화려했던 지난 날을
벗어 버리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

나도
춤추길 원한다
예쁜 소리를 내기 원한다
지난 날을 벗어버리기 원한다

무엇으로 할까?

* 주일 아침 예배하기 위해 교회에 가면서
오늘 따라 세차게 부는 바람때문에
춤을 추는 나무를 보며 적어봅니다.

한 날 묵상 - 창13:1-10 <기준이 있는 양보>

아브람은 12장의 나오는 말씀을 통해서 한 걸음 더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창세기 13장은 아브람과 롯이 함께 거하면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방식인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절 아브람이 애굽에서 나와 남방으로 올라갑니다. 올라갈 때 아브람인 큰 축복을 받았음을(2절) 성경은 언급하고 있습니다.
  문득 창12:5절이 생각납니다.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차이가 좀 있습니다. "아브람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13:2).
  성경은 보다 구체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아브람의 은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문제입니다.
 소유가 많았보니, 더 많이 하려는 마음이 아브람과 롯의 목자들 사이에 있었습니다(6-7절).
 서로 싸움이 그 안에 있었습니다.
 소유가 많이 동거할 수 없었기에 싸우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함께 살 수 없을 이유가 있습니다. 그럴 때 함께 살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함께 사는 것이 유익이지만, 그렇게 할 수 없을 때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면, 서로 싸우고 다투는 것보다 아브람의 제안을(8절) 기억해야 합니다.

 아브람의 롯에게 제안합니다. 지혜로운 제안입니다. 아브람의 제안에는 분명한 기준이 있습니다. 아브람의 양보에는 분명한 기준이 있습니다.
 롯에게 선택권을 주었다는 사실입니다.(9절)

 왜 롯에게 선택권을 주었을까요? 이 시간 함께 묵상하기 원하는 포인트입니다.
 선택권을 준다는 의미는 자기 우선권을 포기한 것입니다. 어른으로서의 권리를 포기한 것입니다. 아름다운 미덕입니다. 나아가 그 이면에 더욱 깊은 아브람의 마음이 있습니다.

 화해를 위한 양보입니다.
 아브람의 기준이 있는 양보의 핵심은 화해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투다"라는 말이 두 번(7, 8절) 언급됩니다.
 아브람이 원하는 해결책은 타툼을 피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타툼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기 권리, 자기 자신을 포기할 때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을 포기하셨습니다. 왜요? 하나님은 죄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과 화해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양보라는 아름다운 미덕을 즐겨 사용합니다. 그런데 기준이 있는 양보를 하기 원합니다.
 화해를 위한 양보입니다.  살리는 양보가 되어야 합니다.
 양보의 미덕을 보인다면서, 스스로 취하고, 유익을 위한 양보는 양보의 가치를 퇴색시킵니다.
 양보를 하되 더 멀리 바라보는 양보를 하는 한 날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자기 포기가 있는 양보인가?
 자기 희생이 있는 양보인가?
 화해를 위한 양보인가?
 생명을 살리는 양보인가?            
(cashe creek mission trip. pow wow 축제에서 함께 춤을 추며)

 오늘 이러한 문제로 고민하며 양보가 미덕이 되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소망의 길을 걸어가기를 기원합니다.
 

Friday, September 23, 2011

한 날 묵상 - 창 12:6-8 <훈련 받으실 준비 되셨나요?>

하나님의 이끄심에 순종하는 훈련이 아브람을 아브라함되게 하였습니다

12장
 6절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7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난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 나의 예배를 진단해야 합니다. 나의 예배는 누구를 위한 예배인가? 나 자신? 나의 문제들? 아님, 무엇을 위한 예배인가? 우리의 예배는 여호와를 위한 예배여야 합니다.
       무엇보다 나에게 나타나신 그 분을 위한 예배여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하나님이 아니, 나의 하나님을 위한 예배이기 원합니다.

 8절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 곳에서 여호와을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9-20절 하나님의 마음을 채우는 것이 쉽지 않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져가는 간다는 것은 믿음안에서 전진한다는 의미이다. 처음부터 완성되지 않는다. 찾고 두드리고 만나려고 할 때 점점 더 가까이 그분께 나아가게 된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져가는 훈련은 무엇인가?
 첫째 인간의 생각을 버리는 훈련이다. (11-13절)
 둘째,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훈련이다. (17-20절)

점점 더 거룩해지는 훈련은 하나님의 이끌림에 민감하게 더욱 더 반응할 때 성공적이 된다.
이끌림의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다.
나의 생각이 틀릴 때 인정하고 돌아오자.
나의 실패로 주어진 환경을 하나님께서 바르게 세우실 때 그 상황을 감사로 인정하자.

 오늘 날의 실수를 돌아본다. 그 실수는 나를 자만하지 않게 한다. 하나님의 세우심에 감사하게 한다. 하나님의 이끄심에 순종하게 한다. 다시 넘어지지 않으리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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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이끄심에는 나의 생각을 뛰어넘습니다. 기근 앞에 아브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잊어버렸습니다.
아직 하나님의 약속에 아무런 감이 없이 자신의 생각대로 살았습니다.
그때에도 하나님은 손길을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이 아버지되실 때 우리에게 향하신 원대한 계획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영적 미숙아로 오늘도 자신의 옛 자아라는 돌부리에
또 넘어져 하나님의 뜻하심을 쉬 분별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이끌어 가십니다.
그리고 세우십니다. 그리고 뜻대하신 대로 사용하십니다.

넘어졌다고 낙망하지 말고,
감사합시다.
그리고 일어나 이끄심에 순종합시다.
이게 바로 온전히 세워져가는 훈련입니다.
훈련이 바로 아브람을 온전히 세워가는 하나님의 방법이십니다.
12제자를 3년동안 훈련하셨던 것처럼 오늘도 하나님은 나를 훈련하기 원하십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을 위한 매일의 묵상 - 910호


개인적 변화의 원리 - 과정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 4:24)
당신의 삶의 결점을 없애고자 하실 때, 하나님은 손가락을 딱 부딪쳐서 그 일이 즉시 일어나게 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은 서서히 그렇게 하신다. 전에 나는 이런 말을 했었다. 하나님이 버섯을 만들고자 하실 때는 여섯 시간을 들이시지만, 떡갈나무를 만드실 때는 60년을 들이신다.
여기서 질문 - 당신은 버섯과 떡갈나무 중 무엇이 되고 싶은가?
성령은 당신의 인생에서 당신이 상상하지도 못했던 거대한 변화를 일으키실 것이지만, 그것은 하룻밤 새에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숙명의 1일’이 아니라 ‘숙명의 10년’을 계획해야 하는 것이다. 당신을 위한 내 기도는 이것이다. 오늘부터 10년 동안 성령의 역사하심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리고 소그룹의 지원으로 당신이 더 성숙해지고 더 그리스도를 닮고 당신의 삶의 목적을 더 많이 성취하는 것이다.
또한 내 기도는 지금부터 10년 동안 당신이 감정적으로,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심리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더 강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그에 대해 의도적이 되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라고 말한다. (엡 4:24)
이렇게 하면 더욱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말한다. “우리는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릅니다. 그 영광은 성령이신 주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고후 3:18, 쉬운성경)


Tuesday, September 20, 2011

한 날 묵상 - 창 12장 1-5절 <나침판을 보았으면 믿어라! 그리고 나아가라라!>

1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을 부르십니다. 

1절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들었습니다.  "이르시되... 지시할 땅으로가라"
     그리고 아직 구체적으로 어디로 가야할지도 정해지지 않았지만 "보여 줄 땅" 으로 나아갑니다(5절에서 구체적으로 "가나안 땅"으로 언급되고 있다).

2-3절 왜 부르셨는지 말씀하고 있다. 복주시기 위해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 복 때문에 부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은혜의 복을 위한 부르심입니다. 
    아브라함의 부르심은 은혜의 복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또 다른 시작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아직 보지못한 땅", "보여 줄 땅"을 보며 나아가는 동행을 시작합니다. 
4-5절 "말씀을 좇아갔고 모은 모든 ...  마침내 가나안 땅"
    은혜의 복을 위한 부르심을 따라가는 믿음의 자세
    - 지시하는 땅으로 나아갈 때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아직 희미하지만, 그래서 어렵고 힘들지만, 그래도 마침내 들어 갈 수 있습니다. 
    - 구체적으로 보기를 원하는 것은 믿음의 말이 아닙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11:1)입니다. 보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보아도 믿음이 있어야 갈 수 있습니다. 
 목표를 분명히 알 수 없지만, 분명한 방향을 가지고 목표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나침판을 가지고 있으면 가능합니다. 나침판은 분명한 방향을 제시합니다. 
 아브람에게는 가야할 목적지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침판인 말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보여줄 땅으로 마침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나에게도 나침판이 있다. 그러나 그것을 사용하느냐? 사용하지 않느냐? 나의 믿음의 선택이다. 나에게 나침판이 있음에도 사용하지 않는 어리석은자가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문득, 목사로 말씀은 선포하지만, 선포된 말씀에 믿음이 없지는 않은지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말씀은 있지만, 믿음이 없어 말씀을 거들떠 보지도 않는 인생을 살지 마라.
 나침판을 보았으면 믿어라! 그리고 믿음으로 항해를 시작하라!


http://www.blogger.com/blogger.g?blogID=3681000074470592328#editor/target=post;postID=8287189164988706768

Saturday, September 17, 2011

<대통령 예수> 예수님의 파격적인 사랑을 실천하라

어떻게?
"우리는 정결한 기독교적 직업의 리스트를 작성하기보다는 예수님의 파격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더 관심을 쏟아야 한다" p252
"우리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을 바꿀 수 있다. 젊은이들에게 "커서 뭐가 될래?"라고 묻지 말고 "커서 어떤 사람이 될래?"하고 물으라. 의사나 변호사가 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의사나 변호사가 될지가 중요하다" p254

Friday, September 16, 2011

<대통령 예수> 복잡한 인간 이슈와 정치적 이슈

"나는 복잡한 인간적 이슈와 정치적 이슈를 다루면서 한 가지 결심을 했다. 까다로운 문제들을 언제나 은혜와 겸손의 태도로 다루기로 한 것이다. 모든 문제에서 서로 동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잘 반대하는 기술을 배우는 것이다. 교회는 모든 문제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는 것만큼이나 서로에게 성숙한 태도로 반대하는 것이 예수님을 잘 증거하는 길이다"
<대통령 예수> P244.

Thursday, September 15, 2011

한 날 묵상 - 창 11장 10-32절<하나님이 보신 가정공동체>

10-28절 셈의 후예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셈과 함과 야벳의 후예에 대해서 다시 기록이 있는 자녀는 셈입니다.

  27절 "데라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고"
  28절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본토 갈대아 우르에서죽었더라"
  29절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를 들고
  30절 사래는 잉태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31절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그 손자 롯,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여 하라에 이르러 거기 거함.


 오늘 본문의 족보를 보면서, 수많은 사람들중에서 선택된 아브라함으로 가면서 기록된 사람들의 수가 줄어드는 것을 보게 된다.
 홍수로 노아 식구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번성하게 되었고, 스스로 높아지려 할 때, 하나님은 한 사람에게 집중하셨다.

 하나님이 집중한 한 사람, 그가 가진 특징적인 모습은 무엇이었을까?

 이 땅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하나님의 집중하시며 보는 사람은 하나님에 마음에 든 사람이다.
  하나님의 집중한 사람, 데라가정에 시련이 닥쳐왔다(28절 "하란은 먼저 본토 갈대아 우르에서 죽었더라" 30절 "사래는 잉태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으므로").

 데라나 아브람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가정에 자녀가 없는 어려움이 있지만, 그래도 데라는 자부를 데리고 함께 갈대아 우르를 떠난다(31절). 데라, 아브람, 롯, 사래가 함께 했다.

  손자 롯을 데리고 간 데라
  아들은 죽고 며느리는 떠나버린 고아를 품은 할아버지
  자부를 품은 데라
  자식없는 며느리를 구박하지 않고 버리지 않은 시아버지
  아내와 함께 한 눈 팔지 않고 한 평생 함께 한 아브람

  데라의 가정 공동체가 바로 당시 시대에서 볼 수 없는 광경이 아닐까? 고아 롯을 품은 가정, 자녀를 낳지 못하는 사래를 계속 품고 있는 가정 공동체의 모습이다. 데라 가정 공동체에서 우리가 품을 이상적인 나의 가정 공동체,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보게 된다.

 한 사람 한 사람을 귀중하게 여기는 복된 가정 공동체를 보신 하나님,
 그 공동체가 바로 교회 공동체이며, 하나님이 꿈꾸는 공동체이다.

 나의 가정 한 사람, 한 사람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한 날 묵상하기 원한다.


Tuesday, September 13, 2011

한 날 묵상 - 에베소서 2:20-22 <잘 버무려져 있어야 함께 지어져 갈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20-22절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어렸을 때 흙으로 집을 지어가던 모습들이 기억이 난다.
  집을 잘 짓기 위해,
  외벽을 만들기 위해,
  지붕을 잘 만들기 위해,
  잘 버무려져 있는 것이 무척이나 중요하다.

  잘 뭉쳐있지 않으면, 그 집은 튼튼하지 못하다.
  그래서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면
  넘어지거나 쓸려버리게 된다.

  그리스도의 집을 잘 짓는 방법을 본문이 말하고 있다.
  함께 잘 지어져가기 위해
  흙과 흙사이에 모퉁잇돌 되신 그리스도가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
  흙을 버무릴 때 물이 서로 잘 연결되도록, 잘 뭉치도록 해 준다면,
  그리스도안에 한 몸으로 잘 지어져가기 위해 그리스도의 삶의 모습과 정신이 필요하다.

  함께 지어져가야 한다는 목표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함께 지어져 가야하는 것이 관심과 반응이 있는 한 날이 되기를 원한다.

  함께 지어져가는 일에 그리스도의 삶과 정신은 과연 무엇일까?

Monday, September 12, 2011

한 날 묵상 - 창 11장 1-9절<점점 멀어져만 가는 인간의 경영하는 일>

1절 온 땅에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3-4절 자기의 무한한 능력을 자랑하는 인간들.
            "우리 이름을 내고" 인간의 자기의 무한 능력을 자랑하는 극치는 결국 자기 이름을 내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6절점점 멀어져만 가는 인간의 경영하는 일.
            "이후로는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8-9절 언어의 혼잡과 하나님의 은혜
  8절 "그 성 쌓기를 그쳤더라" 인간의 경영을 그치게 하시는 하나님.
  9절"그들은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사도행전 8장 2절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흩어짐이 은혜임을 알아야 할 때


 함께 함이 은혜여야 하는데,
 함께 함이 따뜻함이 되어야 하는데,
 함께 함이 감사해야 하는데,

 함께 함이 인간의 경영만 될 때
 함께 함이 점점 그 분에 멀어져만 가네.

 함께 함이 은혜되기 위해
 함께 함의 은혜를 충만키 하기 위해
 하나님은 그들을 흩으셨네.

 함께 함의 새로운 법칙을 주셨네
 하나님과 함께 함에 출발하라 하셨네.
 함께 함이 그 분과 함께 시작 될 때
 함께 함의 은혜가 세상 곳곳에 넘쳐 흩어날아가네.

 정원에 민들레를 보니 하나님의 흩으심의 은혜가 나를 깨우네.

Friday, September 9, 2011

2011 밴쿠버삼성교회 유년부 여름성경학교

수하와 예원이가 함께 했습니다.
섬김으로 수고하신 분들과 기도해주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2011 밴쿠버삼성교회 유치부 여름성경학교

요셉, 시온이가 함께 했어요!
수고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Wednesday, September 7, 2011

2011 밴쿠버삼성교회 청소년부 여름수련회

한 날 묵상 - 사 5:1-2 <극상품(極上品) 포도나무>


이사야 5장에 나오는 극상품 포도나무에 대해서 묵상을 했습니다.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極上品)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나무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혔도다” 이사야 5장 1-2절

먼저는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하나님이 찾으신 산은 심히 기름진 산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여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시고 심히 기뻐하는 택함 받은 백성입니다.
 곧 믿음의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심히 좋은 땅에 심히 좋은 씨앗을 뿌리는 것은 이치에 당연한 것입니다.
어느 누가 기름지지 못한 땅에 좋은 씨앗을 뿌리고, 기름진 땅에 좋지 않는 씨앗을 뿌리겠습니까?
 항상 자신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최고의 작품으로 바라보기 원합니다.

두 번째는 기름진 산이지만, “땅을 파고 돌을 제하고”
 아무리 좋은 자동차도 정기적으로 잘 관리를 해주지 않으면 곧 쓸모없게 되겠지요.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도 잘 관리하지 않으면
역시나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겠지요.
 이런 관점으로 볼 때 하나님은 참으로 멋지신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온전한 열매를 맺도록 최대한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죄악에 물든 사람들에게 독생자를 보내주셔서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아울러,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결코 자신의 자녀들을 홀로 두지
않으시는 정말 멋진 분이십니다.
 하나님도 좋은 땅, 좋은 열매를 뿌렸음에도 불구하고 또 관리를 하시는데. 우리는 얼마나 더 해야 합니까?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여정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새생명을 주시고 새로운 삶을 허락해주셨고, 풍성함의 은혜가 보장된 삶이지만, 그래도 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것을 갈고 닦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더욱 더 예리한 칼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니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왜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극상품 열매를 맺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셨다.

사과나무에서 사과열매가 맺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왜 그럴까요?

이스라엘 백성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백성들의 삶을 질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렇다면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방법은 무엇을 찾고 구하고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먼저가 아닙니다. 먼저 해야 할 일이 따로 있습니다.
구하는 것이 아니라 버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채우니 너희는 버려라"

내가 채우려고 하는 것으로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나의 상태가 교만하며, 무지하며, 게으르며, 나의 의가 완전히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기에 제자들에게, 우리에게 버리라고 그토록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버려야만 합니다. 그래야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이제는 버리십시오. 
 요한복음 15장에서 함께 나눈 포도나무의 가지치기처럼, 가지를 쳐야 할 부분을 찾아보는 한 주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밴쿠버올림픽 단상[斷想]>


2010년 2월 밴쿠버 올림픽으로 인해 많은 즐거움과 아쉬움이 교차되는 시간이었다. 자국의 경기결과에 따라 기쁨과 안타까움으로 보낸 시간들이었다. 열심히 한 선수가 메달을 탄 후 기쁨의 환호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정말 멋진 모습이다. 한편으로 메달은 따지 못했지만 최선을 다한 후 만족하는 모습은 세상의 어떤 모습보다 멋진 모습이었다.
그러나 열심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모습이다. 특별히 김연아의 피겨 금메달로 환호 할 때,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은메달에 만족해야 하는 아사다 마오의 흘린 눈물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녀가 경기 후 한 인터뷰에서 “최고지만 2등은 함부로 울 수도 없었다”라고 말한 부분은 동양적 사고의 1등만 기억하는 세상적 사고의 단면을 보게 된다. 지난 1월 교사신년새다짐 시간에 담임목사님께서 말씀하신 1등이 아닌 1등급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 본다. 믿음의 경주에 1등은 필요치 않습니다. 사역의 열매에도 1등은 필요치 않습니다. 5달란트 받은 자나 2달란트 받은 자 모두 “잘하였다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의 경주에서, 사역의 현장에서, 그리고 교사로서 1등급의 교사가 되기를 원하신다

 올림픽에 생각하며 또 하나 생각해보는 것은 쇼트트랙 여자 3000미터 릴레이 경기이다. 이 때 심판의 판정에 대해서 여러 이야기를 하게 된다. 특별히 피해자인, 아닌 앞서 말한 열심히 하고 정당한 결과를 기대했던 선수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 세상은 공평하지 못한 세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공평하신 하나님이시지만, 그리고 세상을 향해 공의를 행하라 말씀하시지만, 이 땅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과 세상은 공평하지 못한 게 현실이다. 단 하나의 사건을 일반화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우리는 공평하지 못한 세상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온라인상에서 우리 청소년부 친구들이 격하게 분노하는 모습을 보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마침 요즘 몇 권의 책을 읽고 있는데, 거기에서 동일하게 하박국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 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 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 났나이다” 하박국 1장 2-3절
 모순 된 세상, 모순된 권력, 모순된 통치자 밑에서 살아가는 우리이다. 이러한 세상에 살아가는 우리는 무엇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가?이다. 정당한 노력을 기대하기 힘들거나 어려운 세상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여기에 대한 질문의 답은 간단한다. 첫째는 하박국 선지자는 이 질문에 대해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버티다’라는 뜻이 있다. 의인은 버텨야 한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가고자하는 마음으로부터 믿음을 성실하게 지키며 버티는 것이다. 그들의 달콤한 유혹에 빠지지 않고 믿음을 지키는 것이다. 둘째는 로마서, 전도서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로마서 13장 1절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전도서 8장 2절 “내가 권하노라 왕의 명령을 지키라” 답은 간단하다. 악한 권세도 하나님이 그 자리를 허락하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에 순복해야 한다. 우리가 굴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권력의 근원자앞에 순복하는 것이다.

그럼 마지막으로, 언제까지, How long?이란 질문이 남게 된다.
 그 답 역시 간단한다. 하나님이 이 땅이 온전히 통치하실 그 날을 소망하면서 인내하며 기다리며 기다리는 것이다.

시편 37편 1-40절 <내가 여호와의 경외함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시편 37편을 가지고 함께 예배드렸다. 11절 말씀에 이런 말씀이 나온다. “너희 소자들아 와서 내게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함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적극적으로 부모가 자녀들에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에 대해서 가르쳐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의 유익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다.

 WBC 주석에서는 시편 37편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삶이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삶의 기초가 될 때, 그 삶은 기쁨을 누리게 되고, 장수하게 되며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 있는 비결이 된다. 그러나 이것이(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인생을 편하게 만들어 주고, 고통을 맛보지 않게 해주리라는 사실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단 그것은(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상한 마음을 바로 잡아 줄 수 있지만, 마음이 상하지 못하게 막아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영적으로 무너진 자를 회복시켜 줄 수 있지만, 그를 내려누리는 압력을 제거하지 못한다.
 또한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기도할 때 고난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지만, 고난이 오는 것을 전적으로 막을 수 없다.

 왜냐하면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도서 5장 1절에서 “내가 해아래서 큰 폐단되는 일이 있는 것을 보았나니” 이렇게 말하고, 큰 폐단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폐단”은 히브리어로 보면, 고통, 질병, 슬픔을 묶어 회복할 수 없는 비참한 상태를 가르키는 말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한다할지라도 이러한 폐단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고통, 질병, 슬픔을 피할 수 없으며, 그로인해 오는 마음의 상함을 포함한 비참함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경외할 때 우리는 그러한 비참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회복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참한 삶이 호시탐탐 노리는 삶에서 기쁨을 누리며 장수하며 행복한 날을 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2010년 1월 가정예배에서

한 날 묵상 - 창 10장 1-32절<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자손대대에 미칩니다>

노아의 후손들이 아들들을 낳기 시작합니다.
2-4절 야벳의 자손
  5절 이들로부터 여러 나라 백성으로 나뉘어서 각기 방언과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에 머물렀더라
6-20절 함의 자손
  20절 이들은 함의 자손이라  각기 족속과 방언과 지방과 나라대로이었더라
21-31절 셈의 자손
 31절 이들은 셈의 자손이라 그 족속과 방언과 지방가 나라대로였더라


32절 이들은 노아 자손의 족속들이요 그 세계와 나라대로라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땅의 열국 백성이 나뉘었더라

노아의 자손들의 계보를 보면서 하나님은 신실하심을 엿볼 수 있게 됩니다.
 야벳의 후손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5절 "이들로부터 여러 나라 백성으로 나뉘어서"
 함과 셈의 자손의 계보에 나오는 마지막 말씀들은(20절,31절) 야벳의 후손들처럼 특별히 다른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어핏보면 함의 자손들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이 특이할 뿐입니다.
 반전은 11장입니다. 창세기 10장 11절 이하에서 "셈의 후예"에 대해서 기록하면서, 셈의 후예는 예수님까지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자에게 대대로 축복하십니다. 악인은 심판하십니다.
내가 더욱 주님께 더욱 의로운 자로 세워져 가기를 원합니다.
 순종하고자 할 때에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오늘 한 날도 더욱 주님께 순종하고자 힘쓰는 한 날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Tuesday, September 6, 2011

What is Justice? 2


http://www.patheos.com/community/jesuscreed/2011/09/06/what-is-justice-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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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is Justice 2
David Opderbeck is Professor of Law at Seton Hall University Law School.  In this series, David reflects on Nicholas Wolterstorff’s most recent book, Justice in Love (Emory University Studies in Law and Religion).
In my first post, I highlighted some of the major themes in Wolterstorff’s recent books:  Justice:  Rights and Wrongs, and Justice in Love.  Wolterstorff seeks to ground human rights in the claim that each and every human being has worth because God loves each and every human being with the “love of attachment.”  In this post, I want to jump ahead to the final two chapters of Justice in Love to confront a fundamental issue that lurks underneath Wolterstorff’s entire project.  Those chapters are entitled “The Justice of God’s Generosity in Romans” and “What is Justification and What is Just?”
For now, what do you think of Wolterstorff’s treatment of the nature of God’s justice in Romans?  Is Luther’s treatment of Romans in On the Bondage of the Will correct, or does Luther overstate or mis-state the case?  I’m particularly interested to hear from readers who are knowledgeable about the New Perspective on Paul:  does Wolterstorff properly frame these two chapters in terms that are consistent with the NPP?
When I was a child, we used to sing the tune “Jesus loves the little children, all the children of the world.  Red and yellow, black and white, they are precious in his sight.  Jesus loves the little children of the world.”  Today we might blush a bit at the racial and colonialist undertones of this song, but we might want to affirm its basic message:  Jesus loves all the children of the world.  God loves everyone.  As children, we also memorized John 3:16 (in the King James, of course!):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ly begotten son, that whosoever believeth in him shall not perish, but shall have eternal life.” God loves the whole world.   Jesus died for everyone and God’s gift of life is available toeveryone.  Wolterstorff’s basic notion that God loves everyone seems manifestly attested to in popular evangelical piety and in scripture.
There were no Sunday School ditties, however, referring to Paul’s dense and tangled argument in Romans 1-11.  The famous passage in Romans 9:13-22 must give us pause as we think about “justice”:
Just as it is written, “JACOB I LOVED, BUT ESAU I HATED.”
What shall we say then? There is no injustice with God, is there? May it never be! For He says to Moses, “I WILL HAVE MERCY ON WHOM I HAVE MERCY, AND I WILL HAVE COMPASSION ON WHOM I HAVE COMPASSION.” So then it does not depend on the man who wills or the man who runs, but on God who has mercy. For the Scripture says to Pharaoh, “FOR THIS VERY PURPOSE I RAISED YOU UP, TO DEMONSTRATE MY POWER IN YOU, AND THAT MY NAME MIGHT BE PROCLAIMED THROUGHOUT THE WHOLE EARTH.” So then He has mercy on whom He desires, and He hardens whom He desires.
You will say to me then, “Why does He still find fault? For who resists His will?” On the contrary, who are you, O man, who answers back to God? The thing molded will not say to the molder, “Why did you make me like this,” will it? Or does not the potter have a right over the clay, to make from the same lump one vessel for honorable use and another for common use? What if God, although willing to demonstrate His wrath and to make His power known, endured with much patience vessels of wrath prepared for destruction?
Obviously, this is a massively difficult passage for any Christian perspective on human rights and justice.  God hates some people?  God creates some people for destruction?  In what sense can a person God creates for “common use,” a person whom God “hates,” have “human rights” – particularly rights grounded in God’s love?  For many theologians and ethicists in the Reformed traditions, Romans 1-11 demonstrates that there is, in fact, no such thing as “human rights” and no such thing as any “natural” sense of ethics or justice.
In his treatise “On the Bondage of the Will,” Martin Luther responded to Catholic theologian Desiderius Erasmus’ claim that Luther’s theology destroyed the concept of human free will.  Exactly, Luther responded:  we do not have free will because God foreknows everything, including the fact of each person’s salvation or reprobation.  This is not a problem for “justice,” Luther said, because
If [God’s] justice were such as could be adjudged just by human reckoning, it clearly would not be Divine; it would in no way differ from human justice. But inasmuch as He is the one true God, wholly incomprehensible and inaccessible to man’s understanding, it is reasonable, indeed inevitable, that His justice also should be incomprehensible; as Paul cries, saying: “O the depth of the riches both of the wisdom and knowledge of God! How unsearchable are His judgments, and His ways past finding out!”
It is not a stretch to suggest that Luther’s rejection of the Catholic view of human freedom and natural justice lay at the heart of the Protestant Reformation. It also is not a stretch to suggest that this remains a fundamental dividing point not only between the Reformed and Catholic and Orthodox traditions, but also among evangelicals today.
Wolterstorff dives boldly into this historical debate.  He suggests that his “interpretation of Paul will be along the lines of ‘the new Paul’ initiated by Stendahl and Sanders.”  (JIL, p. 247).  Romans, he says, “can be seen as a meditation on the theological significance of Jesus’ actions [in showing “no partiality” to non-Jews] and Peter’s vision [in Acts 10, in which table fellowship is opened to gentiles].”  Paul’s central argument in Romans 1-11 is that God is substantively just in extending covenant blessings to the Gentiles because those blessings are extended on the same basis upon which they were made available to the Jews:   faith.
This line of thought obviously diverges significantly from Luther’s.  Wolterstorff suggests that the substantive principle of God’s justice is, indeed, discernible and is made known in the course of Paul’s argument.  For Wolterstorff, Romans 1-11 is not about the unknowability of God’s justice.  Rather, it is a theodicy in which Paul argues that God impartially offers justification to Jew and Gentile alike.
But what about Paul’s theme of election?  Wolterstorff argues that Paul is
not talking about who shares in the final redemption; he’s talking about the pattern of God’s action in history to bring about redemption.  He’s not talking about who God ultimately justifies; he’s talking about the fact that God chooses certain persons for a special role in the story line of redemption.  He’s not talking about divine strategy; he’s talking about divine tactics.  He’s not talking about who God declares justified on the great day of final judgment; he’s talking about who belongs here and now to “the children of God,” to “the children of the promise.”  (JIL, pp. 267-68).
Wolterstorff subsequently unpacks what he takes as the purpose and meaning of “faith” in relation to justification and justice.  He also tackles the nature of the atonement and its relation to justice.  These are enormous topics in themselves, so I’ll leave them for later posts.
For now, what do you think of Wolterstorff’s treatment of the nature of God’s justice in Romans?  Is Luther’s treatment of Romans in On the Bondage of the Will correct, or does Luther overstate or mis-state the case?  I’m particularly interested to hear from readers who are knowledgeable about the New Perspective on Paul:  does Wolterstorff properly frame these two chapters in terms that are consistent with the NPP?
For my part, I’m not a Biblical scholar or a Paul scholar.  I can’t (and don’t want to try to) speak with authority on how to interpret this incredibly difficult text.  Yet, I’ve read Romans 9-11 dozens of times in recent months, trying to reflect on this very issue of God’s justice.  To me, the interpretive key for Romans 9 must be Romans 11.  But I’ll refrain for the moment from offering more of my thoughts.   Who is right – Luther, or Erasmus and Wolterstorff?

Friday, September 2, 2011

◐ 예수님의 전도 방법 ② 제자 양육 - 퍼온글




예수님은 대중에게 주목하지 않으셨어요.

예수님은 소수에 관심이 있으셨고,
예수님은 자신의 공생애 3년의 대부분을
사람을 키우는데 사용하셨거든요.

그건 다시말해, 양보다는 질을 택하신 거예요.
질은 양을 만들기 때문이지요.

그렇기에  많은 교회들이 이 사실을 주목해,
제자훈련을 실시하고 양육에 관심을 갖고,
많은 성공을 거두기도 해요.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는,
아무리 제자훈련과 제자양육을 받았더라도,
양을 만들지 못하면,
다 소용 없다는 사실이예요.

그래서 예수님도 제자들을, 둘씩 짝을 지어,
전도하러 보내셨거든요.

그런데도 이런 제자훈련과 양육을
나만의 것으로 끝내서는 곤란해요.
그럼 예수님은  다른 방법을 사용하셨을 것이기 때문이예요.

그래요. 그러니 이제 우리,
예수님의 제자로써,
세상을 향해 소리쳐 보는건 어떨까요.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말이지요.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세요.

예수님 믿으시죠.  ^^
사랑합니다.  샬롬!


출처
http://blog.paran.com/eyejesus/45680688



한 날 묵상 - 창 9장 18-29절 <허물은 덥어주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담긴 무지개를 주시고, 무너진 땅 가운데 풍성함이 가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안에 가족이 함께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풍성함의 맛만 봐서는 결코 안됩니다.
하나님의 우리에게 하신 약속은 "풍성함이 가득할 것이다"는 것이 아닙니다. "너를 통해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칠 것이다"는 부어지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풍성함에 사로잡히면 넘어지게 됩니다.

노아는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20절).
풍성함에 사로잡혀, 주신 분을 향한 마음을 쏟지 못할 때 넘어집니다.

노아에게는 넘어짐을 일으켜 세워 줄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바로 가족입니다.
그렇다고,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넘어짐을 일으켜 세워주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사랑으로 허물을 덥어 줄 때 가능합니다.

우리를 향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용서입니다. 허물을 덥어준 용서입니다.
가나안과 셈, 야벳의 차이는 노아의 허물을 덮어주었느냐? 그렇지 않았으냐?(22-23절)입니다.

우리에게는 믿음의 공동체인 가족이 있습니다.
허물은 덥으라고 있는 것입니다. 들춰내야 더 많은 허물의 파편이 많은 사람들에게 튀게 되어 있습니다.

풍성함이 축복입니다. 그러나 풍성함은 생수의 강이 되어야 합니다. 때론 그 풍성함이 넘어짐의 돌부리가 됩니다. 그 때 "잘 됐다! 시원하다!"라고 말하는 것이 덮어줄 사랑이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오늘 한 날도 흘러 넘치는 풍성함이 있기를 사모합니다. 돌부리에 넘어진 지체가 있다면, 덮어줄 사랑과 내마음을 이길 용기가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