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September 26, 2011

한 날 묵상 - 창13:1-10 <기준이 있는 양보>

아브람은 12장의 나오는 말씀을 통해서 한 걸음 더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창세기 13장은 아브람과 롯이 함께 거하면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방식인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절 아브람이 애굽에서 나와 남방으로 올라갑니다. 올라갈 때 아브람인 큰 축복을 받았음을(2절) 성경은 언급하고 있습니다.
  문득 창12:5절이 생각납니다.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차이가 좀 있습니다. "아브람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13:2).
  성경은 보다 구체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아브람의 은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문제입니다.
 소유가 많았보니, 더 많이 하려는 마음이 아브람과 롯의 목자들 사이에 있었습니다(6-7절).
 서로 싸움이 그 안에 있었습니다.
 소유가 많이 동거할 수 없었기에 싸우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함께 살 수 없을 이유가 있습니다. 그럴 때 함께 살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함께 사는 것이 유익이지만, 그렇게 할 수 없을 때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면, 서로 싸우고 다투는 것보다 아브람의 제안을(8절) 기억해야 합니다.

 아브람의 롯에게 제안합니다. 지혜로운 제안입니다. 아브람의 제안에는 분명한 기준이 있습니다. 아브람의 양보에는 분명한 기준이 있습니다.
 롯에게 선택권을 주었다는 사실입니다.(9절)

 왜 롯에게 선택권을 주었을까요? 이 시간 함께 묵상하기 원하는 포인트입니다.
 선택권을 준다는 의미는 자기 우선권을 포기한 것입니다. 어른으로서의 권리를 포기한 것입니다. 아름다운 미덕입니다. 나아가 그 이면에 더욱 깊은 아브람의 마음이 있습니다.

 화해를 위한 양보입니다.
 아브람의 기준이 있는 양보의 핵심은 화해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투다"라는 말이 두 번(7, 8절) 언급됩니다.
 아브람이 원하는 해결책은 타툼을 피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타툼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기 권리, 자기 자신을 포기할 때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을 포기하셨습니다. 왜요? 하나님은 죄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과 화해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양보라는 아름다운 미덕을 즐겨 사용합니다. 그런데 기준이 있는 양보를 하기 원합니다.
 화해를 위한 양보입니다.  살리는 양보가 되어야 합니다.
 양보의 미덕을 보인다면서, 스스로 취하고, 유익을 위한 양보는 양보의 가치를 퇴색시킵니다.
 양보를 하되 더 멀리 바라보는 양보를 하는 한 날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자기 포기가 있는 양보인가?
 자기 희생이 있는 양보인가?
 화해를 위한 양보인가?
 생명을 살리는 양보인가?            
(cashe creek mission trip. pow wow 축제에서 함께 춤을 추며)

 오늘 이러한 문제로 고민하며 양보가 미덕이 되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소망의 길을 걸어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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