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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September 29, 2011

한 날 묵상 - 창 13:11-18 <일어나... Go, Walk. 그렇다면, 얼만큼?>

 아브람의 양보를 하되 더 멀리 바라보는 양보에,  자기 포기가 있는 양보, 자기 희생이 있는 양보, 화해를 위한 양보, 그리고 생명을 살리는 양보에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그건 단지, 다시 한 번 약속의 말씀을 주시는 것 뿐입니다(14-17절).
그런데 그 약속의 말씀이 더욱 아브람을 어렵게 합니다. "너는 눈을 들어 ... see ... go ... walk ..."


 하나님의 약속은 새로운 것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전에 주셨던 약속을 다시 한 번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한 번 주셨다는 말씀은, 아직 여전히 하나님의 약속은 구체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약속의 말씀을 위한 순종의 한 발 전진을 말씀하십니다.


"너는 눈을 들어 ..."
"See"(14절)
"Go, walk through the length and breath of the land"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도 힘이 드는데, 하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라 말씀하십니다. 
"가라, 걸어라."

이 상황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우리는 얼마큼 걸어 다녀야 할까요? 그만 두고 싶을 때에 얼만큼 더 걸어야 할까요? 
정답은 믿음의 분량만큼 걸어다니겠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믿음의 분량을 키울 수 있을까요? 
마음에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약속의 말씀처럼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는 약속의 말씀의 확신이 있는 만큼 걷게 됩니다. 
마음에 확신이 있는만큼 보게 될 것이며, 마음에 확신이 있는 만큼 걷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전진입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더욱 더 큰 믿음을 요구합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는 복이 아닙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구체적인 축복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은 음성은 더욱 하나님의 자녀다운, 예수님의 제자다운, 성령님을 닮은 것을 원할 뿐입니다. 


 우리도 믿음을 갖되 더욱 더 큰 믿음을 갖기 원합니다.
 우리도 말씀을 듣되 더욱 힘든 것을 요구할지라도 순종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영광받으십니다.


희미하게 보이는 상황에서 우리도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보기를 원합니다.
믿음으로 나아가기 원합니다.
믿음으로 걸어가기를 원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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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에 되지 않는 제자의 길






모두들 단 번에 되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를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네요!


모두들 한 번에 하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닮음을
그러나 그게 쉽지 않네요!


모두들 한 방에 하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놀라운 기적을
그러나 그럴 수 없다네요!


한 번에 되지 않는 제자의 길을
날마다 경험합니다.
아브람을 통해서
모세를 통해서
제자들을 통해서


한 번에 되지 않기에 
오늘 인내하며 나아가렵니다.




* 창세기 말씀 묵상을 정리하면서.. 적어봅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을 위한 매일의 묵상 - 910호


개인적 변화의 원리 - 과정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 4:24)
당신의 삶의 결점을 없애고자 하실 때, 하나님은 손가락을 딱 부딪쳐서 그 일이 즉시 일어나게 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은 서서히 그렇게 하신다. 전에 나는 이런 말을 했었다. 하나님이 버섯을 만들고자 하실 때는 여섯 시간을 들이시지만, 떡갈나무를 만드실 때는 60년을 들이신다.
여기서 질문 - 당신은 버섯과 떡갈나무 중 무엇이 되고 싶은가?
성령은 당신의 인생에서 당신이 상상하지도 못했던 거대한 변화를 일으키실 것이지만, 그것은 하룻밤 새에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숙명의 1일’이 아니라 ‘숙명의 10년’을 계획해야 하는 것이다. 당신을 위한 내 기도는 이것이다. 오늘부터 10년 동안 성령의 역사하심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리고 소그룹의 지원으로 당신이 더 성숙해지고 더 그리스도를 닮고 당신의 삶의 목적을 더 많이 성취하는 것이다.
또한 내 기도는 지금부터 10년 동안 당신이 감정적으로,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심리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더 강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그에 대해 의도적이 되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라고 말한다. (엡 4:24)
이렇게 하면 더욱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말한다. “우리는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릅니다. 그 영광은 성령이신 주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고후 3:18, 쉬운성경)



 더 큰 믿음을 사모합니까?그렇다면 말씀의 훈련을 받으십시오. 아브람을 묵상하면 묵상할 수록 더욱 크게 들리는 음성이 있습니다. 믿음은 훈련과 관계속에서 성장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12제자를 위한 예수님의 삼 년의 공생애의 마음을 쪼금이나마 이해하고 있습니다. 

Monday, September 26, 2011

한 날 묵상 - 창13:1-10 <기준이 있는 양보>

아브람은 12장의 나오는 말씀을 통해서 한 걸음 더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창세기 13장은 아브람과 롯이 함께 거하면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방식인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절 아브람이 애굽에서 나와 남방으로 올라갑니다. 올라갈 때 아브람인 큰 축복을 받았음을(2절) 성경은 언급하고 있습니다.
  문득 창12:5절이 생각납니다.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차이가 좀 있습니다. "아브람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13:2).
  성경은 보다 구체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아브람의 은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문제입니다.
 소유가 많았보니, 더 많이 하려는 마음이 아브람과 롯의 목자들 사이에 있었습니다(6-7절).
 서로 싸움이 그 안에 있었습니다.
 소유가 많이 동거할 수 없었기에 싸우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함께 살 수 없을 이유가 있습니다. 그럴 때 함께 살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함께 사는 것이 유익이지만, 그렇게 할 수 없을 때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면, 서로 싸우고 다투는 것보다 아브람의 제안을(8절) 기억해야 합니다.

 아브람의 롯에게 제안합니다. 지혜로운 제안입니다. 아브람의 제안에는 분명한 기준이 있습니다. 아브람의 양보에는 분명한 기준이 있습니다.
 롯에게 선택권을 주었다는 사실입니다.(9절)

 왜 롯에게 선택권을 주었을까요? 이 시간 함께 묵상하기 원하는 포인트입니다.
 선택권을 준다는 의미는 자기 우선권을 포기한 것입니다. 어른으로서의 권리를 포기한 것입니다. 아름다운 미덕입니다. 나아가 그 이면에 더욱 깊은 아브람의 마음이 있습니다.

 화해를 위한 양보입니다.
 아브람의 기준이 있는 양보의 핵심은 화해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투다"라는 말이 두 번(7, 8절) 언급됩니다.
 아브람이 원하는 해결책은 타툼을 피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타툼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기 권리, 자기 자신을 포기할 때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을 포기하셨습니다. 왜요? 하나님은 죄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과 화해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양보라는 아름다운 미덕을 즐겨 사용합니다. 그런데 기준이 있는 양보를 하기 원합니다.
 화해를 위한 양보입니다.  살리는 양보가 되어야 합니다.
 양보의 미덕을 보인다면서, 스스로 취하고, 유익을 위한 양보는 양보의 가치를 퇴색시킵니다.
 양보를 하되 더 멀리 바라보는 양보를 하는 한 날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자기 포기가 있는 양보인가?
 자기 희생이 있는 양보인가?
 화해를 위한 양보인가?
 생명을 살리는 양보인가?            
(cashe creek mission trip. pow wow 축제에서 함께 춤을 추며)

 오늘 이러한 문제로 고민하며 양보가 미덕이 되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소망의 길을 걸어가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