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April 30, 2013

한 날 묵상 - 막2:1-12 <중풍병자를 향한 친구들의 믿음과 예수님의 병고침 넘어 죄사함의 권세>

한 날 묵상 - 막2:1-12 <중풍병자를 향한 친구들의 믿음과 예수님의 병고침 넘어 죄사함의 권세>


1. 누구에게나 예수님은 필요하다.

2. 어떤 사람은 그 필요성을 인정하며 살아 갈 것이고,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필요성을 무시하며 살 뿐이다.

3. 당신은 예수님이 인생에 꼭 필요한 한 분이십니까? 예수님이 필요치 않으십니까?

4. 그렇지만 예수님이 인생에서 꼭 필요한 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도 함께 섞이지 못하며, 필요성의 이유가 예수님께서 품으시고 계시는 우리에게 오신 이유와 일치하는 필요성과 그렇지 못하는 필요성으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한다.

5. 그렇다면, 나와 당신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오신 이유에 합당한 필요성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예수님이 필요한 이유가 그와 전혀 다른가?

6. 우리가 예수님이 필요한 이유는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우리를 위해 오셨어야 했는가?에 대한 답과 일치한다.

7.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는가? 병고치기 위해 오셨는가? 아니면, 죄사함을 위해 오셨는가?

8. 당신은 지금 예수님이 왜 필요한가? 병고침을 받기 위함인가? 죄 사함을 받기 위함인가?

9. 마가복음 2장 1-12절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은 위에서 언급한 예수님이 왜 우리에게 필요성에 대해 자신의 입장이 드러나는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다.

10. 먼저는 중풍병자가 있다. 그리고 그 중풍병자를 위한 친구들이 있었다.

11. 중풍병자는 예수님의 병고침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한 번 만나고 싶은 강렬한 열망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혼자서는 결코 예수님의 얼굴을 뵈올 수 없었다.

12. 그렇지만 중풍병자에게는 예수님을 뵈옵기 바라는 자신의 열망만큼이나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가고 싶어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13. 친구들은 중풍병자를 데려가기 위해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그 어떠한 방법이든 다 하고 있었다. 쉽게 갈 수 없었지만, 그들은 어려운 일들을 만날 때 꼭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가야 한다는 바램앞에 어려움은 결코 그들에게만은 넘지 못할 어려움이 아니었다.

14. 4절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15. 이들에게는 믿음이 "있었다. 어떠한 믿음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유추해보건데, 예수님은 분명히 병을 고쳐주실 수 있다는 믿음이었을 것이다.
 5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16. 예수님께서 중풍병자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 말씀에 중풍병자들이 기대하는 바가 아니었다.
 5절 "작은 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17. 병이 나았다는 예수님의 음성이 아니라, '죄 사함을 받았'다는 음성이었다.

18. 이 때 중풍병자와 친구들은 침묵하였다. 그런데, 6절에서 "어떤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민감한 반응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8-10절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ㅇ르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는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는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잇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19. 예수님은 이 땅이 인간들을 위해 오신 이유가 있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환자들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다. 죄인들을 위해 오셨다.

20. 참고하면, 막 1장 17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랴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21. 예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는 병고침을 받는 것이 일차적인 이유가 아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받는 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이유이다.

22. 설령, 죄사함을 받은 후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23. 우리는 서기관들처럼 반응해서는 안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진짜 이유는 죄인들을 부르러 오신 것이다. 서기관들은 병고침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인정하지 않는 어리석은 자들이어다.

24. 우리도 병고침에만 관심이 있고, 죄사함에 대한 예수님의 선포에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는다면, 서기관들의 반응한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자기 임의적으로 생각하는 잘못은 똑같이 저지르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25. 예수님은 분명히 아셨다. 병에 원인에는 질병적인 원인도 있지만, 죄와도 관련이 있었다. 그래서 죄의 문제를 먼저 해결 해 주셨고, 그 이후에 병고침의 문제도 해결해 주셨다.
 11절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26. 예수님은 때론 병고침을 통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 복음은 죄의 해결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엇다.

27. 예수님은 병고침을 통한 복음의 전파는 병고침이라는 매개체를 이용하셨을 뿐이지 이 또한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이다.

28.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직접 이 문제를 언급하신다. 예수님께서 병고치는 것과 죄사하는 권세를 사용하신 것은 모두 예수님은 하실 수 있으시다.

29. 예수님은 이 땅에 죄인들을 위해 오셨다.

30. 하나님이 영광 받으심은 세상에서 죄사함을 받는 권능이 일어날 때이다. 하나님의 영고아은 병고침에 대한 권능이 아니다.

31. 12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누가복음 5장 26절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

32.이 부분을 마태복음 9장 6-8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여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고아을 돌리니라"

33. 부디 우리가 무리들속에 함께 있다면, 병고치는 권능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죄를 사하는 권능으로 인해 예수님께 나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34. 당신과 나에게 예수님이 왜 필요하십니까?

35.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10절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하시는 말씀처럼, 예수님은 우리에게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알려주시기 위해 오셨다.

36. 그리고 친히 십자가에 달려 죽음심으로 그 사실을 우리에게 증명해주셨습니다.

37. 예수님이 친히 몸으로 사신 삶을 바르게 이해하고 믿을 뿐 아니라, 그 삶이 우리에게 예수님이 필요한 전부임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한 날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8. 할렐루야!

내 마음의 밥상 - 민14:5, 16:4절 <자신에게 원망하며 공격하는 백성들을 향 한 모세의 문제해결 방법과 리더십>

내 마음의 밥상 - 민14:5, 16:4절 <자신에게 원망하며 공격하는 백성들을 향한 모세의 문제해결 방법과 리더십>

1. 중간 관리자는 힘들고 어려운 길이다.

2. 지난 토요일에 있었던 무한도전 "무한상사 8주년"을 보았다. 직장인들의 애환을 뮤지컬로 담은 내용이었다.

3. 유재석 부장의 역할이 참으로 고독하며 고뇌의 자리이며 결코 쉽지 않는 자리임을 보았다.

4. 위로는 사장으로, 아래로는 직원들로부터 우겨쌈을 당하는 힘들고 어려운 자리였다. 늘 어떤 실적을 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사장의 눈치를 보면서, 직원들을 사기를 꺽기 않고 격려해야 했다. 때론 사장이나 직원들로부터 오해나 원망을 수시로 들어야 했다.

5. 결국 사장으로 통보로 한 명의 직원을 정리해고 해야 하는 상황에 이를 때에 그의 고뇌는 절정에 이르렀다.

6. 모세의 상황도 이와 유사하다. 하나님의 언약과 축복의 말씀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하면서 그들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해야 할 사명을 받은 자였다.

7.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역사하심을 늘 기억하지 못하면서 자꾸 현실의 문제앞에 하나님을 잊어버릴 때, 하나님과 백성들을 이끌어가야하는 그 사이에서 모세는 그야말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8. 이러한 고난과 고뇌의 시간에서 모세는 하나님과 백성 모두에게 가장 선한 것들의 영향을 받을 수 있도록 중재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9. 문제앞에 문제 해결을 방법과 리더로서의 리더십을 발휘하는 모습들이 민수기에서 그려지고 있다.

이는 예수님의 사역에서 볼 수 있다. 제자들에게 지상명령을 두시기까지 훈련하는 그들을 위해 섬김의 무릎을 꿇으셨다(세속식)

또한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십자가 사역을 완수하시기 위해 대제사장들의 칼에 무릎을 꿇의셨다. 그는 충분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마26:53) 사용하실 수 있었다.

10. 요즘 민수기를 읽으면서 오늘 민수기 14장, 16장에서 반복되는 모세의 특이한 행동에 마음이 가게 되었다.

11. 민수기 14장 5절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린지라"
     민수기 16장 4절 "모세가 듣고 엎드렸다가"

12. 문제해결을 위한 모세의 해결 방법은 양쪽 모두에 "엎드림"이었다.

13. 우리는 흔히 하나님 앞에 엎드림을 잘 하지만, 리더가 어떻게 팔로우들에게 엎드릴 수 있지?라고 생각하게 된다.

14. 사장에게는 엎드릴 수 있지만, '어떻게 아랫 직원들에게 엎드릴 필요가 있어'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15. 흔히 리더는 직원들에게 군림을 하고자 한다. 그런데 모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군림이 아니라 엎드림"을 통해서 문제 해결을 하고 있다.

16. 이는 모세가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 엎드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앞에 엎드림 뿐 아니라 따르는 백성들에게도 엎드림을 통해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해 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17. 모세가 하나님앞에, 그리고 백성들앞에 엎드림은 탁월한 선택이면서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 오게 된다.

18. 첫째는 하나님께 전적인 신뢰를 맹세하는 것이다. 이 문제의 해결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문제의 주인이 되어주시고, 해결의 인도자가 되어주셔야만 합니다. 다른 어떤 지혜로도 이 일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직 문제 해결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19. 둘째는 백성들에게 전시적인 효과를 내는데 우리는 문제 앞에 하나님께 엎드림을 통해 해결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또한 하나님께 무언의 압박을 주는 것이다. "하나님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게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십시오"라는 강력한 요구의 간구이다.

20. 섯째는 백성들에게 주는 메시지이다. 나는 너희들이 나의 생명을 요구한다고 할지라도 나는 너희들에게 군림이 아닌 섬기는 자로 세워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군림이 아닌 섬김의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21. 모세는 어떠한 어려움을 만날 때, 하나님앞에, 그리고 그 문제를 야기시킨 백성들앞에서까지 엎드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2. 이러한 엎드림은 굴복이 아닙니다.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엎드림을 패배로 생각하곤 하는데 모세의 엎드림은 승리을 위해 꼭 필요한 방법이었습니다.

23. 우리도 리더로서, 또는 세상에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이끌어가야하는 사명을 받은자로서, 가정에 아직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과 더불어 요단 강을 함께 건너야 하는 리더로서 부름을 받은 자들입니다.

베드로전서 3:1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24. 그 때 어떠한 리더십을 보여주실 것입니까? 그들과 함께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가는 길에 만나는 수많은 문제들 앞에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는 모세의 엎드림입니다.

25. 하나님 앞에 엎드림과 내가 이끌고가야 할 사람들앞에 엎드림입니다. 이 두 엎드림은 전혀 다른 엎드림이 아닌, 똑같은 마음과 심정과 사랑과 섬김과 간구함을 가진 엎드림입니다.

26. 혹 오늘 내가 하나님께만 잘 엎드리고, 백성들앞에 잘 엎드리지 못해 아직 여러 문제들을 해결받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27. 이는 우리가 하나님께만 잘 엎드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세를 통해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 뿐 아니라 백성들에게 엎드려야 된다.

28. 오늘 모세처럼 엎드립시다. 하나님께 잘 엎드릴 뿐 아니라, 내가 이끌어야 할 사람들에게도 잘 엎드립시다.

29. 엎드림은 패배가 아닌 승리입니다.

30. 오늘 하루도 엎드림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문제가운데 충만하게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31. 할렐루야!

Thursday, April 25, 2013

성경적 자녀교육 - 국제제자훈련원


목적이 이끄는 삶을 위한 매일의 묵상에서.....



자녀에게 생명의 삶을 준비시켜라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눅 2:52)
성경은 자녀 양육의 목표 중 하나가 자녀에게 생명의 삶을 준비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가족이 생명의 삶을 위한 배움터가 되도록 뜻하셨다. 가족 안에서 우리는 다른 곳에서는 배울 수 없는 것들을 배운다. 나는 우리 막내가 트림과 재채기를 동시에 하는 법을 가르쳐준 때를 잊을 수 없다. 진짜 굉장하지 않은가? 내가 그것을 언제 어디서 쓰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멋진 영적 경험이다.
우리는 걷기, 말하기, 먹기, TV 리모컨 사용하기 등, 인생의 기본적인 기술을 가족 안에서 배운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가 자녀에게 생명의 삶을 준비시켜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누가복음 2:52은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네 가지 면에서 성장하셨음을 알려주는데, 부모로서 당신은 당신의 자녀도 이 네 가지 면에서 성장하도록 도와야 한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예수님은 지혜가 자랐다 - 이는 정신적 또는 지적 성장을 뜻한다.
  • 예수님은 키가 자랐다 - 이는 신체적 성장을 뜻한다.
  • 예수님은 하나님께 사랑스러워가셨다 - 이는 영적 성장을 뜻한다.
  • 예수님은 사람에게 사랑스러워가셨다 - 이는 사회적 성장을 뜻한다.
이것들은 당신이 각 자녀를 향해 가져야 할 목표이다.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영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균형 있게 성장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성경은 자녀를 양육하는 것과 자녀에게 생명의 삶을 준비시키는 것의 주된 책임이 부모에게 있음을 분명하게 밝힌다.
자녀를 품는 순간, 당신에겐 자녀를 잘 양육하는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는 직무가 생긴 것이다. 자녀가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영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성장하도록 도우라.
다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라.
  • 신명기 6:7은 부모로서의 직무 중 일부를 이렇게 기록한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 당신은 자녀에게 하나님의 계명을 어떻게 가르치는가? 당신은 어떤 새로운 것을 시도할 수 있겠는가?
  • 신명기 6:7 말씀은 자녀를 하루 온종일 교육하라는 뜻을 내포한다. 당신은 어떤 방식으로 매일의 일과에 자녀 교육을 포함시킬 수 있겠는가?


자녀와 함께 즐거워하라!

“자식은 주님께서 주신 선물이요” (시 127:3a, 새번역)
하나님은 가정이 행복과 즐거움을 누리는 안식처가 되기 바라신다. 놀고, 편히 쉬고, 휴식을 취하고, 좋은 시간을 보내는 곳 말이다.
함께 기도하는 가정이 결속력이 강한 것은 사실이다. 또한 함께 ‘노는’ 가정도 결속력이 강하다.
자녀는 주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함께 즐거워할 대상이지 신경전을 벌일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와 즐거워하지 못하고, 자녀와 신경전을 벌이기만 한다. 신명기 16장은 “온 가족과 함께 즐거워하라”고 말한다. 실컷 즐거워하라! 좋은 시간을 보내라. 모든 문제가 사라진 다음에야 인생을 즐기려고 기다린다면, 우리는 결코 인생을 즐기지 못할 것이다.
내 자녀가 어렸을 때, 아이들은 일반적으로 어른들이 감명 받는 것에 감명 받은 적이 전혀 없었다. 우리 애들이 알고 싶어했던 것은 그저 “아빠는 재미있는 분인가?”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부분에 대해 의도적으로 열심을 냈다. 나는 종종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있던 아이들을 중간에 ‘납치’해서 재미있는 것을 하러 가곤 했다. 내 설교는 다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아이들은 아빠가 재미있었는지 그렇지 않은지 분명히 기억할 것이다.
아이들이 성장하는 동안 가정이 즐겁지 않다면, 아이들이 다 자랐을 때 집에 자주 들어오지 않는다 해도 놀라지 마라. 집에 왜 들어오고 싶겠는가?
다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자.
  • 당신은 얼마나 자주 집에서 즐겁게 노는 시간을 갖는가?
  • 당신은 자녀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가 아니면 자녀와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편인가?
  • 당신은 재미있는 시간을 계획하는가 아니면 너무 바빠서 즐길 시간을 내지 못하는가?


자녀의 시선이 하나님을 향하게 하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잠 9:10a)
우리가 자녀에게 가르칠 가장 중요한 교훈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해답을 알지 못한다. 당신이 아직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면, 언젠가 깨닫게 될 것이다. 당신은 자녀가 묻는 것에 다 답을 해주지 못한다. 이는 “하늘은 왜 파래요?”나 “개들은 왜 짖어요?”와 같이, 잠시 동안 자녀를 만족시켜줄 수 있는 답을 꾸며낼 수 있는 질문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장하면서, 아이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은 왜 날 이런 모습으로 만드셨어요?” 또는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고 모든 것을 통치하신다면, 왜 할머니가 돌아가시도록 내버려 두셨나요?” 그러한 질문은 대답하기 매우 곤란하고, 내 해답의 저장소는 매우 협소하다. 그러나 부모로서 내가 할 일은 자녀로 하여금 모든 해답을 갖고 계신 하나님께 시선을 돌리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자녀를 앉혀놓고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것은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 그러나 훨씬 더 효과적이 되고 싶다면, 당신이 직접 롤모델이 되어야 한다. 자녀를 가르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녀가 이해하길 바라는 진리를 몸소 보여주는 것이다.
때때로 부모들은 자신이 고군분투하고 있는 문제들을 자녀에게 숨기는 실수를 범한다. 자녀를 보호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는, 삶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자녀와 나눌 때, 그러한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방법을 몸소 보여줄 수 있다. 재정적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자녀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가르치는 것과 끊임없이 자녀에게 “맞아, 지금 우린 힘들지만, 우리에겐 신실하신 하나님이 계시잖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공급해주실 거야.”라고 표현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효과적이겠는가? 부모가 삶 속에서 하나님과 그분의 구원하심을 믿는 것을 자녀가 보지 못한다면, 왜 자녀가 하나님을 의지하려 하겠는가?
잠언 9:10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는 것이 인생의 근간이다. 크리스천이 아닌 많은 부모들조차 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것으론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매일 하나님과 그분의 독생자에 대해 우리가 진리라고 아는 것을 자녀에게 몸소 보여줌으로써 자녀가 그들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해야 한다.
다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자.
  • 자녀가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부분에서 당신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
  • 당신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께 100퍼센트 헌신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자녀에게 어떻게 보여주고 있는가?
  • 당신이 보여주는 본에 의해, 당신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자녀에게 알려주고 있는가? 직장인가? 또는 돈, 취미, 오락? 아니면 예수님과의 관계?


자녀의 고유함을 인정하라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고전 12:6b)
한 가족 안에서도 자녀들은 각각 다르고 고유하다. 쌍둥이조차도 똑같지 않다. 부모로서 우리는 각 자녀의 개성을 인지하고 가치 있게 여겨야 한다.
고린도전서 12:6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서로 다르게 지으신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세상이 극도로 지루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완수되지 않는 일도 많았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똑같은 것을 좋아했다면 아무도 하고 싶어하지 않는 일이 많았을 것이고, 그런 일들은 완수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자녀의 고유함을 인정한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간단하다. 자녀가 당신처럼 되어야 한다는 고집을 버릴 때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 형상대로 만드셨는데, 이제 우리는 부모가 되어 자녀를 우리 형상대로 만들고 싶어한다. 따라서 공공연히 또는 넌지시, “넌 나처럼 되어야 해. 나처럼 생각해야 해.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해야 해. 내가 학교에서 잘한 것을 너도 잘 해야 해.”
그럼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크고 분명하게 자녀에게 울린다. “넌 있는 모습 그대로 될 수 없어. 네가 사랑과 인정과 승인을 받는 유일한 방법은 엄마와 아빠처럼 되는 것뿐이야.”
자녀는 틀에 넣어 찍어낼 물건이 아니라, 펼쳐야 할 ‘사람’이다. 인생의 목표가 자녀를 자신의 형상대로 찍어내는 것이 되어선 안 된다. 인생의 목표는 자녀가 하나님이 자신을 어떤 사람이 되도록 지으셨는지 발견하도록 돕는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그 주권에 따라, 당신의 자녀를 그 모습으로 만들기로 택하셨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당신과 아무 상관 없는 방식으로 지으셨다. 당신의 눈에 자녀가 너무 이질적인 행동을 보여 “넌 도대체 어느 별에서 왔니?”라고 외치고 싶을 때도, 당신은 하나님의 지혜를 신뢰하고 하나님께서 자녀의 필요와 당신의 필요를 정확히 아시며, 하나님의 고유한 목적을 위해 당신과 자녀를 한 가족으로 묶으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다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자.
  • 자녀가 자신의 고유함을 깨닫도록 돕는 것은 부모로서 어려운 임무다. 세상에는 순응하라는 압력과 비교하라는 압력, 이 두 가지 상충되는 압력이 있기 때문이다. 친구들과 함께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 얘기해보라. 
  • 이러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어떤 방법으로 자녀가 자신의 고유함을 이해하도록 돕고 있는가? 
  • 당신은 자신의 고유함을 기꺼이 받아들였는가? 다름은 좋은 것이고, 하나님은 결코 실수하지 않으시며, 우리가 그러한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음에 대해 당신은 자녀에게 어떻게 본을 보이고 있는가?


책임감을 갖고 자녀를 신뢰하라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눅 16:10, 12)
주변에 자신을 믿어주고 책임을 맡기는 사람이 있는 것만큼 사람으로 하여금 최선을 다하도록 만드는 것은 없다. 예수님도 이 점을 지적하셨다. 사람은 책임을 감당하면서 성장한다고 하신 것이다. 누가복음 16장은 이렇게 말한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10, 12절)
현명한 지도자와 부모는 이러한 원리를 이해한다. 사람들은 책임에 반응한다. 아이들도 책임에 반응한다. 우리 모두는 신뢰받고, 성장하고 발전하고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보일 수 있는 곳을 필요로 한다. 책임감이라는 인생의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줄 기회를 얻는 것이다.
자녀에게서 최선을 이끌어내는 것에는 실패를 허락하는 것도 포함된다. 우리는 자녀를 실패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아이들이 실수하지 않도록 보호하고 싶어한다. 자녀가 기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자녀가 실패하면, 우리는 그들을 재빨리 구해주어 상처 받지 않도록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녀가 소중한 교훈을 얻는 것을 막는 행위이다. 실패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모든 것을 잘하는 사람은 아무데도 없다. 핵심은 삶에서 실패하지 않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것은 실패로부터 다시 일어서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자녀에게 실패할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은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넌 능력이 없으니까 믿을 수 없어. 넌 이것을 처리할 수 없으니 내가 대신 해줄게.” 그러한 접근법은 자녀가 부모에게 계속 의존적이 되도록 만든다.
성경은 이에 대해 갈라디아서 6:5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일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쉬운성경) 자녀가 실패할 때, 어느 누구 탓도 돌리지 않게 하라. 왜 그런가? 우리 모두는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지는 법을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 절실히 필요한 진리이다. 우리는 피해자가 만연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피해자이다! 모두가 다른 사람의 잘못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저마다 자기 일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다. 자녀를 지나치게 신뢰하지 않는 것보다는 자녀를 너무 많이 신뢰하는 편이 훨씬 낫다.
다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자.
  • 당신은 자녀 대신 너무 많은 것을 해주고 있는가? 누군가를 대신해서 책임을 지는 것이 어떻게 그 사람으로부터 책임을 빼앗는 것이 될 수 있겠는가?
  • 삶에서 경험했던 실패에 대해 이야기해보라. 그러한 것들은 당신이 한 사람으로서 성장하는 데,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떤 도움이 되었는가?
  • 자녀가 비슷한 삶의 교훈을 배우기 위해 실패를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이것을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가?


책망하지 않으면서 자녀 고치기

“아직 희망이 있을 때에 자식을 징계하여라. 그가 망할 때까지 내버려 두지 마라.” (잠 19:18, 쉬운성경)
사람은 누구나 때때로 고침을 받아야 한다. 완벽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부모가 자녀를 징계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음을 뜻한다.
부모가 자녀의 파멸에 기꺼이 동참하는 것이다. 잠언 19:18은 이렇게 말한다. “아직 희망이 있을 때에 자식을 징계하여라. 그가 망할 때까지 내버려 두지 마라.” (쉬운성경) 부모가 시간을 내어 자녀의 잘못을 고치고 새로운 습관과 올바른 행동 및 사고 방식을 가르쳐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실상 자녀가 실패하고 파멸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심지어 시간을 들여 자녀를 징계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우리 마음에 사랑이 없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단지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뿐이다. 때때로 우리는 너무 피곤해서 전쟁을 더 벌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우리의 필요를 자녀의 필요보다 우선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녀를 징계하는 데 시간을 들여야 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자녀를 책망하지 않으면서 잘못을 고칠 수 있을까?
분노한 상태에서 고치려 하지 마라. 엡세소서 6:4는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는 자녀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화를 돋우지 말고, 주님의 훈계와 가르침으로 잘 키우십시오.” (쉬운성경) 자녀에게 짜증과 화가 나 있을 때, 그 짜증과 화를 분출하면 기분이 나아진 것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분출은 순간적인 해결법이다. 그러나 이것은 장기적인 문제에는 아무런 효과가 없으며, 자녀와 부모의 관계를 긴장시킨다. 화가 난 상태에서 훈계하는 것보다는 잠시 물러서서 열을 식히고 평정심을 회복한 다음 다시 그 문제를 다뤄야 한다.
말을 함부로 하지 마라. 에베소서 4:29은 이렇게 말한다.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고 기회 있는 대로 남에게 도움이 되는 유익한 말을 하십시오.” (현대인의성경) 해로운 말은 상처가 되는 기억을 만든다. 화가 난 상태에서 하는, 그리고 우리의 결점과 흠과 단점을 경시하는 이러한 말은 마음에 꽂히는 비수가 된다. 가족의 기억에 해로운 말을 남기지 않도록 하라. 그 대신 단어를 주의 깊게 선택하고 사랑 안에서 말하라.
부모의 기도 
오늘, 그리고 매일 다음과 같이 기도하라. “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 (시 101:2, 현대인의성경)

Tuesday, April 23, 2013

한 날 묵상 - 막 1:40-45 <예수님의 병고침, 율법과 예수, 그리고 병고침 이후의 삶>

한 날 묵상 - 막 1:40-45 <예수님의 병고침, 율법과 예수, 그리고 병고침 이후의 삶>

1.  신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2.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하나님에 대해 잘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3. 하나님에 대해서 알려하면서도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4. 하나님을 알되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한다.

5. 야고보의 형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6. 예수님도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지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7. 예수님은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롬1:3) 나신 분이시다.

8. 예수님은 이처럼 율법의 약속의 말씀따라 이 땅에 오신 분이시다.

9. 이렇게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율법에 계시는 예수님을 율법에 정한데로 하지 않는다고 예수를 고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10. 예수님은 결코 예수님은 율법 파괴자가 아니시다

11.예수님을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

12. 예수님은 율법의 말씀을 지킬 뿐 아니라 율법의 완전한 완성, 즉 의미를 온전히 세우기 위해 오셨다.  마태복음 5장 17-20절

17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13.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병든 나병환자를 고치시고(40절), 말씀하십니다.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44절)

14. 예수님은 율법에 순종하였다. 나아가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에 대해 온전한 해석자로 오셨습니다.

15. 율법을 주신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의 삶을 옭아매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있는 죄를 발견하는 도구로 율법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16. 율법을 통해 죄를 발견한 우리는 율법을 통해서 사랑을 받게 됩ㄴ디ㅏ.

17. 그래서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로마서 13장

8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18. 예수님은 율법에 억매여 있는 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하는 자들에게 대한 예수님은 질타합니다. 마가복음 7장 6-13절

6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7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8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9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10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였거늘
11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12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 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13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19. 율법은 외식함이 아니라 사랑함입니다.

20. 예수님을 율법의 말씀을 지키시면서 사랑을 위해 율법이 주어졌음을 말씀하십니다.

21. 예수님의 가르침을 본받아 율법아래 자유함으로 통해 사랑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율법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십시오.

22. 나아가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자로서 그 사랑의 노래를 선포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23.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45절)

24. 오늘 우리가 불러야 할 노래는 내가 받은 사랑의 노래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내게 오신 사랑을 노래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5. 할렐루야!

===
40절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41절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42절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고 깨끗하여 진지라

44절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라

45절

Tuesday, April 16, 2013

한 날 묵상 - 막 1:35-39 <새벽 한 적한 곳에서 기도 후 전도여행,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한 날 묵상 - 막 1:35-39 <새벽 한 적한 곳에서 기도 후 전도여행,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1. 하루를 시작하기 앞서, '너 거기서 무엇을 하였는가'라는 물음에 어떻게 답할 것인가?

2.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신다. "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35절)

3. 삶으로 가르시시는 예수님의 교육이시다.

4. 우리가 할 수만 있으면, 아니 항상 최우선에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기억해야 하며, 또한 실천해야 할 것이다.

5. 오늘도 기도하러 가시는 잔잔한 예수님의 모습으로 내 자신을, 그리고 이른 아침 시간을 비추어 본다.

6. 예수님께서 능력을 덧입을 수 있었던 힘은 기도로부터 시작되었다. 늘 기도하였기에 사역에 능력과 힘이 있었다.

7. 오늘도 바쁘 움직이셔야 했던 예수님께 수 많은 무리들이 찾아온다.(36절)

8. 그러나 왠지 예수님은 이들을 만나주시지 않고, 가셔야 했던 길을 찾아 나선다.(38절)

9. 시몬과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를 따라 나서며 말한다.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36-37절).

10. 예수님께서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 않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38절)

11. 예수님은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왜 찾아온 이들을 만나주시지 않았을까?

12. 여기에는 두 가지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13. 첫번째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있었으며, 그 오신 이유에 합당한 일들을 바삐하셔야 했기 때문이다.

14. "거기서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38절)

15. 예수님은 복음을 위해 오셨다. 복된 소식을 선포하기 위해 오셨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오셨다. 이 일을 위해서 기도하셔야 했고, 깨어 있어야 하셨다.

16. 그렇기에 찾아온 이들을 만나 줄 수 없었다. 그들과 이야기하며 대답할 시간이 없었다. 그 만큼 긴박하고 시간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17. 그렇지만 여기서 하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18. 왜 찾아온 이들에게는 전도하지 않으셨을까? 복음을 전하지 않으셨을까? 그들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지 않으셨을까?

19. 여기서 우리는 앞서 찾아 온 이들을 만나지 않으신 두 번째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20. 찾아온 이들의 관심은 무엇이었나?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무엇을 얻고한 것이 있는것 아니었을까? 복음을 그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어떤 마음에 곽찬 욕심이나 생각들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21. 찾아온 이들을 향한 이런 저런 생각이 내 머리를 두드린다. 나도 그들중에 있는 것은 아닌가?

22. 찾아온 이들은 항상 많았다(막1장 33절을 보라). 그러나 그들은 고침을 받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고침을 받고 난 이후에는 그 어떠한 것도 없었다.

23. 예수님을 그렇게 찾아 온 이들을 떠나셔야 했다. 누가복음 4장 42절에 보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라고 말씀하고 있다.

24. 찾는 이들은 왜 예수님을 붙잡으려 했을까? 동네 이장을 시키려고 했을까? 자기들과 함께 한 평생 살기를 바라고 붙잡지 않았을까?

25. 예수님을 찾아온 이들에게는 가득한 것은 자기 욕심이었다. 예수님의 능력이었다. 그들이 복음만이면 족했다면 예수님을 떠나 보내야 한다.

26. 예수님은 떠나셨어도 복음은 여전히 내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육신과 함께 함에 기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주신 복음이 함께 함에 기쁨과 평안이 있는 것이다.

27. 이게 바로 예수님이 주신복음이 주는 유익이다.

28. 나는 지금 예수님의 현존만을 붙잡기 원하는가? 예수님은 눈에 보이시지 않지만, 예수님이 주신 복음만으로 만족하고 있는가?

29. 눈으로 보는 예수님만을 원한다면, 우리 또한 지금 예수님을 찾아온 무리들과 다르지 않다.

30. 우리도 자기 자신만을 위해 예수님 계속 붙잡아 두기 원하는 그들과 차이가 없다.

31. 예수님은 이 땅에 영원토록 죽지 않고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복음을 주기 위해 오셨다.

32. 그렇기에 지금도 우리는 복음만이면 족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때론 예수님께서 다른 마음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가신다면 기꺼이 보내드려야 한다.

33.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눅5:43)기 때문이시다.

34. 예수님이 나만을 위해 머물러 있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어서는 안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복음만을 남겨두시고 떠나셔야만 합니다. 그래야 또 다른 동네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5. 그리고 예수님 떠나셨다고 슬퍼하거나 낙담하지 마십시오. 지금 나에게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바꿔 주신 복음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36. 복음만이면 족하십시니까? 아니면 복음만으로는 부족하여 예수님을 늘  내눈앞에 있기를 원하십니까?

37.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분명히 기억하기 원합니다.

38. 예수님의 능력만을 원하는 자들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면 마음에 위로가 되니가 예수님을 절대 다른 사람에게 내어줄 수 없다고 말하는 자들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다.

39. 예수님을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40. 이 일을 위해 이른 새벽에 동이 트기도 전에 한 적한 곳에서 가셔서 기도하셔야 하셨고,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주시고 다른 동네로 떠나셔야만 하셨습니다.

41. 우리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따라 그 길을 믿음으로 걸어가기를 원합니다. 그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 행하셨던 일들을 따라 순종하기 원합니다.

42. 새벽 한 적한 곳에서 기도하신 후 다른 가까운 마을로 예수님이 나에게 주신 복음을 전하러 가는 오늘 한 날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43. 이 일을 위해 우리 또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44. 아멘!

===
35절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 => 예수님의 한 날 사역의 시작은 기도이시다. 아직 날이 밝기도 전에, 일어나시고, 한적한 곳으로 가시사, 거기서 하신 것은 기도셨다.
= => 이렇게 하는 것이 기도다. 말씀만 들어도 참으로 기도에 여유가 묻어나 있다. 기도하러 가시는 예수님의 잔잔한 모습이 그려진다.

36-37절 "시몬과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 => 주를 찾아 온 자들에게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 왜 예수님은 찾아오는 이들에게 가시지 않았을까? 그들을 왜 만나주지 않았을까? 예수님을 찾아온 이들의 관심은 무엇이었을까?

 복음이었을까?
 자기에게 좋은 것들이었을까? 예를 들어보면, 놀라운 기적? 병고침? 자기 배만 채우려는 욕심?

38절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 => 왜, 예수님을 찾는 자들에게 가지 않고, 다른 가까운 마을로 가셨을까?

36-38절을 고래해보면,
 예수님은 그 어떠한 것보다 "전도", 즉 복음을 전파하며 진짜 Good News를 전하는 일에 우선이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해 왔노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복음이 되시기 위해 오셨다.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오는 이유는 복음을 위해서이다.
 나는 지금 예수님을 왜 찾는가? 무엇이 나를 예수님께서 나아가게 하는가?
 복음인가? 자기 채움인가?

참고) 요한복음 18장 37절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 =>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이 땅에 오시고,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는 삶아 사신 예수님. 내가 진리에 속해 있다면, 이 진리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진리에 대해여 증언하는 음성이 들리는가?

39절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 => 온 갈릴리로 다니시면서 하신 일은 전도하시며 귀신들을 내 쫓는 일이셨다. 왜 찾아오는 이들에게 가서 전도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지 않으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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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의 워십 뮤직 호주 힐송 처치의Brian Houston(브라이언 휴스톤)

For This I was Born
“내가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삶, 교회, 목적과 이유, 헌신에 관한브라이언 휴스톤 목사의 탁월한 도전”

- 목 차 -
제 1부 : 내가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 1. 그리스도의 이유를 위해서 태어나다
- 2. 그리스도의 이유와 지역교회

제 2부 : 이유와 비전
- 3. 당신의 비전과 그리스도의 이유
- 4. 이유가 중심이 된 연합
- 5. 영원한 비전

제 3부 : 이유와 소명
- 6. 구원과 부르심
- 7. 당신의 손에 있는 것을 사용하라
- 8. 힘든 수고가 주는 축복

제 4부 : 이유와 목적
- 9. 목적이 있는 삶
- 10.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 11. 번영과 목적

제 5부 : 이유와 대가
- 12. 내려놓는 삶
- 13. 확신안에 거하라
- 14. 헌신된 삶을 살아가기
- 15. 축복의 근원
저자소개
그의 아내 바비(Bobbie)와 함께 호주에서 가장 큰 교회 힐송 처치의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21,000명이 넘는 성도들이 매주 출석하고 있으며 두 곳의 캠퍼스로 나누어 예배를 드린다. 힐송뮤직, 힐송 컨퍼런스, 힐송 인터내셔널 리더십 컬리지와 함께, 글로벌 사역을 펼쳐나가고 있 으며, 힐송 TV는 한국을 포함, 현재 180여 개국에서 방영되고 있다.

휫셔(Fisher)뮤직은 호주 힐송(Hillsong)뮤직의 공식 디스트리뷰터로서 1998년부터 힐송처치의 워십을 10년 넘게 국내에 소개해왔다. 처음 힐송의 음반들을 가져와 알릴 때의 감사와 흥분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래서 이번 휫셔북스를 통해 힐송 브라이언 휴스톤 목사의 저서 “내가 이를 위하여…”를 소개하는 일이 우리에게는 큰 의미가 아닐 수 없다.
많은 이들이 힐송하면 우선 워십을 떠올리지만 브라이언 목사의 말처럼 오늘날 힐송뮤직이 오랫동안 사랑 받는 그 은혜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는 훨씬 더 깊은 곳에 있다. 이 책은 세계 최고의 워십뮤직 이면의 믿음, 말씀과 영성의 깊이를 보여준다. 또 그의 목회 철학, 성장의 힘, 그리스도의 이유와 목적에 사로잡힌 헌신에 도전 받게 될 것이다. 목회자, 음악사역자, 워십리더는 물론 그리스도의 이유를 위해서 사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책이다.
- 유지연_ 휫셔뮤직그룹 대표
인생을 값있고 기쁘게 살 수 있는 비결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에게 ‘Why?’와 ‘For what?’을 질문하고 응답을 받는 것이라 배웠다. 그래서 나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이 두 가지 질문을 통하여 그분의 뜻을 발견하라고 훈련 받았다. 성경을 볼 때도 설교를 준비할 때도 나는 끊임 없이 이 두 질문을 한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지셔야 할 때 당혹스럽고 괴로우셨기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민하고 기도하시며 거기서 위의 두가지 질문을 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아셨다. 그래서 그 모진 고문과 협박의 불의한 재판가운데서도 “내가 이를 위하여(For this cause) 세상에 왔나니”라고 말씀 하실 수 있었다. 브라이언 휴스톤 목사는 그 이야기를 탁월하게 서술해 놓았다. 이책 과 함께 당신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질문하여 예수님처럼 담대하게 “내가 이를 위하여…”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 문희곤_ 높은뜻 푸른교회 담임목사
이 혼돈의 세상속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번영과 성취가 필요하다면, 브라이언 휴스톤 목사와 함께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박기범_ 어노인팅 대표
목적이 함께하는 삶은 늘 내 마음에 붙어 다니는 주제다. 브라이언 휴스톤 목사는 이 책에서 그리스도의 이유가 당신의 세계에 스며들 때 삶이 어떻게 변할 수 있는지 자세히,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 조이스 마이어_ 베스트셀러 저자, 성경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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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참고할 것.


[진중권의 미학 에세이]
[진중권의 아이콘] 개시(開示)로서의 진리


아방가르드의 성공 혹은 실패에 대하여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요한복음 18:33-38)


신약성서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빌라도가 예수와 대면하는 장면이리라. 심문의 마지막에 빌라도가 던진 질문은 사뭇 냉소적이다. “진리가 무엇이냐?” (Quid est veritas?) 예수는 이 물음에 답하지 않았지만, 어느 호사가가 철자의 순서를 바꾸는 파자(anagram)를 이용해 물음 속에서 답변을 끌어냈다. “앞에 서 있는 바로 그 사람이다.”(Est vir qui adest). 예수, 그 사람이 바로 진리다.


‘진리’에 대한 두 관념의 충돌



예수와 빌라도의 만남에서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의 충돌을 볼 수 있다. 가령 빌라도는 로마법의 절차에 따라 먼저 피고의 혐의를 나열한 뒤 예수의 변론을 기다린다. “빌라도가 이르되,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예수가 로마인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조목조목 따져가며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빌라도의 게임에 들어가지 않는다.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 하시는지라.” 예수는 자신을 변호하지 않고, 그 모든 것을 신이 정하신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이에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빌라도는 적당히 매질이나 해서 풀어주려 한 모양이다. 예수를 채찍질한 뒤 그를 대중 앞으로 이끌어 매질로 만신창이가 된 그의 몸을 보여주며 외친다. “보라, 이 사람이로다.”(Ecce homo) 하지만 성난 군중은 매질로 만족할 수 없었다.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라고 외치며 심지어 빌라도를 협박하기까지 한다.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두려움을 느낀 빌라도는 예수의 운명을 대중의 뜻에 맡기며 자신은 대야의 물에 손을 씻는다.


여기에서 보는 것은 ‘진리’에 관한 상이한 두 관념의 충돌이다. 헬레니즘의 진리와 헤브라이즘의 진리. 흔히 ‘진리’라고 하면, 우리는 명제 혹은 진술의 속성이라고 생각한다. 빌라도가 자신의 법정에서 밝히려 했던 것도 그런 종류의 진리였으리라. ‘유대인들이 예수에게 내건 혐의들이 과연 사태에 부합하는가?’ 하지만 예수 앞에서 빌라도가 구하는 진리는 사소한 것이었다. 예수의 진리는 오늘날 전세계에 퍼져 있는 기독교회의 존재를 통해서 입증된다. 수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전해 내려오는 새로운 삶의 원리. 그것이 빌라도의 것을 압도한 예수의 진리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진리는 ‘명제진리’와 ‘사태진리’로 구별된다. ‘명제진리’는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인식론적 진리, 즉 참인 명제가 갖는 속성으로서 진리다. ‘사태진리’는 그와는 차원이 달라서 가령 예수의 진리처럼 논증이나 증명 없이 선포된다. 선포(kerigma)로서 진리는 존재론적 진리다. 근원적인 것은 이 사태진리이고, 명제진리는 거기에서 파생된 것에 불과하다. 수학을 예로 들어보자. 어떤 수학적 명제의 올바름은 정리를 이용해 증명된다. 정리의 올바름은 공리를 이용해 증명된다. 그렇다면 공리의 올바름은 어떤가? 그것은 증명없이 옳은 것으로 선포되지 않는가.


사태로서 진리가 일어나는 데에는 세 가지 방식이 있다. 예술, 사유, 그리고 국가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 세 가지가 과학에서 말하는 진리보다 근원적인 것이다. 시인과 철학자가 세계를 열어서 보여주면, 과학자들은 그렇게 열린 세계 속으로 들어와 개념적 정리를 할 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국가를 세우는 것이 곧 진리라는 생각이다. 하이데거가 강의실에서 이런 얘기를 하던 30년대 초반, 강의실 밖에서는 나치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하이데거는 한때 나치운동이 바로 그런 진리를, 새로운 민족적 삶의 세계를 세우는 일이라 믿었다.


급진주의자라면 국가 대신에 혁명을 들 것이다. 조례의 올바름은 법률로 판단하고, 법률의 올바름은 헌법으로 판단한다. 그럼 헌법의 올바름은 무엇으로 판단하는가? 기존 헌법의 올바름을 판단하는 것은 법률적 과제가 아니다.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혁명’이다. 혁명으로 새 세상이 열리면, 사후에 법률가들이 들어와 새 헌법의 정신에 맞추어 법률과 조례를 만들 것이다. 진리론의 좌익적 버전에서는 혁명의 전위(‘당’)가 곧 진리가 된다. ‘당의 무오류’라는 스탈린주의 원칙은 어떤 면에서는 필연적인 것이다. 공리를 향해서 자신의 올바름을 증명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잖은가.


견자(見者)의 편지



사건으로서 진리는 ‘종교’나 ‘정치’만이 아니라 예술에도 존재한다. 랭보는 견자(‘voyant’)에 관해 이야기한다. “내가 말하노니, (…) 시인은 모든 감각의 기나긴 거대한 이성적 일탈을 통해 자신을 견자(見者)로 만들어야 한다. 모든 형태의 사랑, 고통, 광기. 그는 자신을 탐색한다. 그는 자기 안의 모든 독약을 소진하여 그 속에서 오직 핵심만을 건져낸다. 모든 신념과 모든 초인적 힘을 요하는 말할 수 없는 고문. 그것을 통해 그는 인간들 중에 인내심이 있는 자, 위대한 범죄자, 저주받은 자-그리고 위대한 학자가 된다. 그는 미지의 세계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랭보의 ‘견자’는 유대인들이 ‘선지자’라 부른 것의 예술적 버전이라 할 수 있다. 견자, 즉 보는 자는 아무도 보지 못하는 미래를 보며, 나아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그 미래를 비로소 존재하게 만든다. 시인은 “진보의 배가자”로서,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용감하게 몸을 던진다. 당연히 거기에는 커다란 위험이 따른다. “그가 방황하다가 결국 제 비전의 지성을 잃고 말지라도, 그는 이미 그 비전들을 보았다. 그로 하여금 들어보지도 이름할 수도 없는 것들 속으로 뛰어들다가 죽게 놔두라. 다른 무서운 일꾼들이 나타나, 다른 이가 쓰러진 그 지평에서 다시 시작할 것이다.”


랭보의 ‘견자의 편지’(1871)는 훗날 ‘아방가르드’라 불릴 운동의 전주곡이 된다. “새로운 세대는 제 조상을 저주할 자유가 있다.” 여기에서 숨막힐 듯이 답답한 낡은 질서를 무너뜨리며 강림할 새로운 예술, 새로운 사회에 대한 기대를 읽을 수 있다. “시는 더이상 행동에 리듬을 맞추지 않을 것이다. 시는 앞서 나갈 것이다.” 이 말은 시야말로 그 어떤 행동에도 앞서 세계를 열어주는 진리라는 시인의 자의식을 보여준다. 20세기의 아방가르드 예술을 추동한 것은 바로 이 자의식이었다. 그것은 죽어가는 사회 속에 새로운 진리를 일으키려는 운동이었다.


아방가르드는 제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와 손을 잡았으나,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진리의 원천이 둘일 수는 없지 않은가. 결국 아방가르드 운동은 앞서 나가지 못하고, (나치당이나 전위당의) 행동에 리듬을 맞춰주는 신세로 전락한다. 역사적 아방가르드는 정치적으로 실패했다. 하지만 미학적으로는 성공했는지도 모른다. 20세기 초에 그들이 가졌던 예술적 비전은 오늘날 생활세계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해주고, 없었던 것을 있게 해주는 개시(開示)로서의 진리는 여전히 필요하다. ‘견자의 편지’는 아직도 수신자를 찾는다.


누가 내 영혼 깊은 곳에 있는 상처를 멀리하지 않고 품어 줄 수 있는가? 시편 38편


시38:5-8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내가 우매한 까닭이로소이다"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픔 중에 다니나이다"
"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나이다"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


내 상처가 깊을 때 누가 내 곁에 있는가?

내가 사랑하는 자? 
내 친구들?
내 친척들?

이들은 내게 큰 힘이 되는 사람들이다. 내 마음에 위로를 주며, 나의 문제와 짐을 해결하며 나눠지는 분들이다. 아마도 끝까지 함께 할 이들이다.

그러나 내 영이 약하며 내 마음이 심히 무너질 때
내 영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들의 손길마져 부담스럽다. 진실하지 못하다. 일관성이 없다."
결국 그들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그곳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 때 그 순간에, 그 깊은 곳까지, 내 영혼 깊은 곳까지 
나를 품어주고 헤아려 주고 만져줄 자 누구인가?
내 내면 끝까지 내 상처를 품어주고 싸매어줄 자는 오직 한 분 뿐이다. 

그 분앞에
그 분앞에 나아가 내 모든 것을 맡기자.

"내가 사랑한는 자와 내 친구들이 내 상처를 멀리하고 내 친척들도 멀리섰나이다"시38:11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시 38:15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시 38:21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 시38:22




Thursday, April 11, 2013

너는 특별하단다 You are special by Max Lucado



http://www.youtube.com/watch?v=eve24nxY7i8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 국제제자훈련원

http://www.purposedriven.co.kr/mailService/list.asp?m_Type=QT&LMCode=6&MMCode=2

하나님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사람들을 사용하신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딤후 2:21)
하나님은 모든 종류의 그릇을 사용하신다.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장식이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매우 값진 것이든 평범한 것이든 다 사용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용하시지 않는 그릇이 한 가지 있는데, 바로 더러운 그릇이다. 따라서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면 정화를 해야 한다.
여호수아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수 3:5) 사실 하나님은 당신의 미래에도 위대한 일을 행하기 원하신다. 그러나 먼저는 과거를 청산해야 한다. 어제의 일을 깨끗이 씻어내야 한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바로 고백을 통해서이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다. “악한 일에 대한 고백은 선한 일의 시작이다.” 이는 과거를 더듬어봄으로써 시작할 수 있다. 성경은 말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1:9)
나는 처음으로 ‘죄 목록’을 만들었던 때를 결코 잊지 못한다. 당시 나는 하나님께서 너무나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졌다. 그분의 권능도 그분의 은혜도 느낄 수 없었다. 내 기도가 천장에 부딪쳐 돌아오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어느 날 밤 나는 종이를 꺼내 들고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 저와 하나님 사이에 있는 죄를 모조리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그것을 구체적으로 적겠습니다. 저는 구체적인 죄를 저질렀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고백하겠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지금 당장 그것을 처리하여 없애겠습니다.”
나는 쓰기 시작했다. 쓰고 또 썼다. 마치 ‘목적이 이끄는 죄인’이라는 한 권의 책을 쓰기라도 할 기세로 말이다! 마침내 죄의 목록은 9페이지쯤에서 끝났다. 새벽 두 시였다. 나는 모든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각각의 죄 위에 요한일서 1장 9절 말씀을 적었다.
나는 그날 밤 이후로도 여러 번 ‘죄 목록’을 만들어야 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죄가 비집고 들어오기란 매우 쉽기 때문이다.
깨끗한 그릇이 되어 하나님께 드려져 사용되려면 정기적으로 죄의 목록을 만들어야 한다. 집안의 쓰레기를 한 달에 한 번만 버리면 온 집안에 퀴퀴한 냄새가 나기 시작할 것이다.
다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자.
  • 당신이 마지막으로 ‘특정한’ 죄를 하나님께 고백한 것은 언제였는가?
  • 죄의 목록을 만들 때, 당신이 기억나는 것, 또는 기억나는 것의 수에 있어 어떤 점에 놀라게 되는가?

하나님은 ‘건강 증진의 원칙’을 실천하는 사람을 사용하신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6:19-20)
‘봉헌(sanctify)’은 무언가를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대로 사용하시도록 바치는 것을 뜻한다. 집을 들어 “하나님, 이 집을 당신께 드립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고, 차를 들어 “하나님, 이 차를 당신께 드립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무엇이든 그것을 들어서 하나님께서 그분 뜻대로 사용하시도록 바치는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6:19-20)
하나님은 모든 종류의 그릇을 사용하시지만, 우리의 그릇이 순수하고 깨끗하고 건강하길 바라신다.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면 좋은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당신의 몸(즉, 그릇)이 하나님이 사용하시도록 봉헌될 때, 그것은 하나님이 부르신 뜻을 행하기에 가장 좋은 상태에 있어야 한다. 성경은 말한다. “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세우셨사오니 내가 깨달아 주의 계명들을 배우게 하소서” (시 119:73)
하나님은 건강 증진의 원칙을 세우셨다. 즉 식사와 운동, 그리고 수면의 균형을 맞추라고 하신다. 좋은 건강을 유지하려면 이 세 가지가 다 필요하다.
하나님은 당신을 통해 위대한 일을 행할 수 있도록, 당신이 영적으로 건강한 것처럼 육체적으로도 건강하기 바라신다.
다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자.
  • 당신의 수면 습관은 어떠한가? 때때로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영적인 일은 잠자리에 드는 것이다.
  • 당신은 살기 위해 먹는가 아니면 먹기 위해 사는가? 당신의 식사 습관은 영적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가?
하나님은 단순화된 삶을 사는 이들을 사용하신다
“…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히 12:1b)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사용되고자 할 때, 우리는 삶을 집중시켜야 한다. 성경은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하는데, 이는 우리가 삶을 단순화해야 함을 뜻한다.
성경은 말한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히 12:1b)
이는 우리를 방해하고 저지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삶에서 제거해야 한다는 뜻이다. 사탄은 우리를 무너뜨리지 못한다면 우리를 바쁘게 만들 것이다. 심지어 ‘선한 일을 하느라’ 너무 바쁜 나머지 ‘최선의 일’을 할 시간을 못 내게 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삶을 단순화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삶에서 불필요한 짐을 버려야 한다. 모든 것을 다 하려고 애쓰지 마라. 가장 중요한 것을 하라. 충실한 주자는 경주에 집중한다.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지만, 시간이 없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시간이 없는 이유는 삶을 단순화하려는 데 시간을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자.
삶을 단순화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들은 수없이 많다. 다음 중 당신의 주의를 분산시키고 삶을 단순화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은 무엇인가?
  1.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대로 되려고 하는 대신 다른 사람들과 같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
  2.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
  3. 다른 사람들이 제멋대로 정한 기대에 부응하려고 애쓰는 것
  4. 너무 많은 취미 또는 한 취미에 너무 많은 시간을 쏟는 것
  5. SNS, 블로그 등의 소셜미디어, 인터넷, 영화, 또는 TV
  6. 잘못된 종류의 관계
  7. 과거의 실수
하나님은 믿음을 견고히 하는 사람들을 사용하신다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벧전 4:2)
당신은 믿음을 견고히 하기 위해 어떻게 하는가? 믿음을 강화하는 데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성경을 연구하라.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삶의 일부로 만들 필요가 있다. 하나님 말씀은 계시된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을 다 할 수 있도록 우리를 온전히 준비시킬 것이다.
경건의 시간(QT)을 지속하라. 요즘 당신의 경건의 시간은 어떠한가? 어떤 사람들은 이 질문에 죄책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것은 아마도 누군가가 오래 전에 가르쳐준 대로 경건의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그 방법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신 방식과 맞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당신이 매일 하나님 말씀 안에서 일정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신앙 서적을 읽으라. 다른 신자들로부터, 가능한 한 모든 것을 배우라. 다른 신자들이 한 이야기들을 계속해서 영혼에 공급하라. 혼자서만 성경을 연구하고 다른 신자들이 그에 대해 하는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면, 다른 신자들의 지혜와 경험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을 얻지 못한다.
간증거리를 새롭게 하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삶에 무엇을 행하고 계신가? 당신이 가장 마지막으로 간증거리를 쓴 때는 언제인가? 간증거리를 쓰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주실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간증거리를 나눌 때, 우리의 믿음은 강화된다.
신자들의 소그룹 모임에 성실하게 참여하라. 성경은 우리가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힘써야 한다고 말한다. (살전 5:11a) 우리는 믿음의 마라톤을 경주하고 있으며, 함께 뛰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신자들의 지지와 격려가 필요하다.
다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자.
  • 정기적인 성경 연구를 위한 당신의 계획은 무엇인가?
  • 소그룹과 이야기를 나눠보고, 훌륭한 신앙 서적의 목록을 만들어보라.
  • 이번 주에 시간을 들여 당신의 간증문을 써보라. 길게 쓰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몇몇 크리스천 친구들에게 그것을 보여주라. 그들은 당신이 진정 말하고자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출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 소그룹 내에서 서로를 격려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라.




하나님은 그분을 향한 열정이 있는 사람들을 사용하신다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 하시니라.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심이니이다.” (렘 3:22)
가장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느꼈던 때가 언제였는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너무나 간절히 원해서 모든 것을 버려두고 하나님을 좇을 정도로, 하나님을 너무나 갈망해서 메마르고 거친 광야에서도 줄곧 그분을 따를 정도로 갈망했던 때 말이다. (렘 2:2)
당신도 나와 같다면 당신은 아마도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나님, 그런 사랑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당신 생각이 맞다. 우리는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셔야만 하나님 사랑의 초자연적인 신비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 하나님은 당신 안의 욕구를 변화시키실 수 있다. 즉, 하나님은 당신 안에 깊고 헌신적인 사랑의 불꽃을 다시 살리실 수 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잃어버렸다면, 그것을 되찾는 방법은 어떻게든 그 사랑의 수준에 도달할 때까지 더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열정을 되찾는 방법은 당신을 깊은 헌신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이다. (렘 2:2)
하나님은 우리의 방탕한 본성을 용서해주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무딘 믿음을 고쳐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
이때 우리의 반응은 다음과 같아야 한다.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심이니이다.” (렘 3:22)
다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자.
  • 당신은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열정을 어떻게 묘사할 수 있겠는가?
  • 하나님께서 우리의 무딘 믿음을 고쳐주실 거라면, 하나님을 향한 깊은 열정으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우리를 막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거룩한 열정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사용하신다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 언제든지 좋으니라” (갈 4:18)
하나님은 열정적인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열정적으로 어떤 것을 사랑하시고 열정적으로 다른 것을 미워하신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수록, 하나님은 당신이 세상에서 그분의 대변인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이 깊이 마음 쓰시는 것에 대한 열정을 당신에게 부어주실 것이다.
그것은 문제에 대한 열정일 수도 있고, 목적, 원칙, 또는 사람들에 대한 열정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당신은 그것에 대해 소리 내어 말하고, 변화를 일으키고자 하는 열망에 휩싸일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장 관심을 갖는 것에 대해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 예수님은 “마음에 가득 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마 12:34, 새번역)
이에 대한 좋은 예가 두 가지 있다.
  • “주님의 집에 쏟은 내 열정이 내 안에서 불처럼 타고 있습니다.”라고 말한 다윗. (시 69:9, 새번역)
  • “주님의 말씀이 나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에까지 타들어 가니, 나는 견디다 못해 그만 항복하고 맙니다.”라고 말한 예레미야. (렘 20:9, 새번역)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대의를 위해 싸우고자 하는 거룩한 열정을 주신다. 그것은 종종 학대, 중독, 불임, 우울증, 질병, 또는 다른 역경처럼, 자신이 개인적으로 경험한 문제가 된다.
때때로 하나님은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소리를 낼 수 있는 열정을 주시기도 한다. 태아, 박해 받는 사람, 가난한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 학대 받는 사람, 불우한 사람, 공평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사람 등.
성경은 방어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보호하라는 명령으로 가득 차 있다.
하나님은 열정적인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그분의 왕국을 발전시키신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새 교회를 시작하거나, 가정을 견고히 하거나, 성경 번역 사역에 자금을 공급하거나, 크리스천 리더를 훈련시키고자 하는 거룩한 열정을 주실 수도 있다. 또는 사업가, 십대 청소년, 외국인 교환학생, 젊은 엄마, 또는 특정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처럼 특정 부류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들고 나아가고자 하는 거룩한 열정을 주실 수도 있다.
또, 하나님께 여쭤본다면, 하나님은 강한 크리스천 증인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구체적인 나라 또는 민족을 향한 마음의 짐을 지워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이루시고자 하는 모든 것이 이뤄지도록 우리에게 서로 다른 열정을 주신다. 우리는 남들도 자기의 열정에 대해 똑같이 열정적이 되기를 기대해선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서로의 삶의 메시지를 귀 기울여 듣고 소중히 여겨야 한다. 모든 것을 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절대 다른 누군가의 거룩한 열정을 경시해선 안 된다.
성경은 말한다.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 언제든지 좋으니라” (갈 4:18)
다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자.
  • 하나님은 당신에게 어떤 열정을 주셨는가?
  • 현재 당신은 그 열정을 추구하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이 그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무언가를 더 많이 또는 다르게 하기를 바라신다고 믿는가?
  • 당신은 친구와 가족의 거룩한 열정을 어떻게 도울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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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선택의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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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오래 전에 선택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에 여러분을 선택하셨고, 그분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기로 계획해 놓으셨습니다.” (벧전 1:2, 쉬운성경)
좌절은 찾아온다. 좌절은 늘 우리를 찾아온다. 어쩌면 당신은 관계의 어려움이나 경력의 정체, 또는 질병 같은 것 때문에 좌절감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좌절이 찾아오면, 다음 한 가지를 확신하며 안도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그분의 가족으로 삼기 위해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당신이 하나님을 선택하기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당신을 선택하셨다!
베드로전서 1:2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에 여러분을 선택하셨고, 그분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기로 계획해 놓으셨습니다.” (쉬운성경)
하나님은 당신이 뭔가를 했기 때문에 당신을 선택하신 게 아니다. 당신을 선택하신 것은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기 때문이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만큼 선하지도, 똑똑하지도, 경건하지도 않았다. 하나님이 당신을 구원하신 것은 그분이 당신을 사랑하시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 진정 복된 소식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당신의 전 생애의 토대가 되어야 할 복음이다.
하나님의 가족이 되기 위해 한 것이 아무 것도 없기에, 당신은 그것을 잃을 방도가 없다. 베드로전서 1:3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셨습니다. … 우리는 새 생명을 받은 것입니다.” (쉬운성경)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은 당신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의한 것이다. 우선 당신은 하나님의 가족이 될 자격이 없었다. 또한 지금도 그럴 자격이 없다. 오직 우주의 창조주께서 “네가 내 가족이 되길 바란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다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자.
  • 자신이 틀림없는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사실을 알 때, 삶에 대한 당신의 태도와 관점은 어떻게 바뀌겠는가?
  • 오늘 당신이 하나님의 견고한 사랑과 안아주심 속에서 안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용하실 수 있도록, 의심을 버리라
“…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약 1:6-7)
삶 속에서 자기회의에 빠지게 하는 것에는 다음 두 가지가 있다.
1. 남과 능력을 비교하면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게 된다. 이는 하나님은 바라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다른 이들에게 더 많은 재능, 능력, 학력, 또는 경험이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는 순간, 우리는 자기 회의에 가득 차게 된다.
성경은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는 것이 어리석다고 말한다. (고후 10:12) 하나님은 당신이 다른 누구와도 비교하길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은 당신이 고유한 존재로 있길 원하신다. 당신이 당신답길 바라신다.
2. 과거의 실패를 떠올리면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게 된다. 과거의 실패를 떠올리는 것은 마치 그간의 모든 실수에 관한 영화를 머릿속에 집어넣고 그것을 되풀이하여 재생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자신에게 엄청난 고문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과거에 초점을 맞추길 원치 않으신다. 과거의 실수에 계속 얽매어있으면, 현재를 제대로 살아갈 수 없으며, 하나님은 그러한 당신을 미래에 사용하실 수 없다. 하나님은 과거를 잊으라 말씀하신다.
과거의 의심이나 죄 때문에 하나님께 쓰임 받을 기회를 놓치지 마라. 하나님은 “네 과거가 어떻든, 난 상관 없다. 난 널 사용하고 싶다!”라고 말씀하신다.
다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자.
  • 당신은 하루에 몇 번이나 자신이 가진 것, 성취했거나 성취하지 못했던 것, 또는 보여지는 모습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가?
  • 당신은 하나님께서 그 허비했던 시간 대신 무엇을 이루시길 바라는가?

Tuesday, April 9, 2013

한 날 묵상 - 막 1:21-34 <예수님의 권위 - 가르치심과 고치시는 사역을 통해서 드러나다>

한 날 묵상 - 막 1:21-34 <예수님의 권위 - 가르치심과 고치시는 사역을 통해서 드러나다>

1. 예수님이 이 땅에 분명한 사명을 가지고 오셨다. 그 사명은 "복음"이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며 선포하는 사명을 위해 제자들을 부르셨다.

2. 예수님은 복음 사역을 위한 사역을 위해 제자들을 부르신 것 뿐 아니라, 제자들에게 친히 이 땅에서 복음을 위한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다.

3. 예수님의 복음의 사역을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가르치심, 둘째는 치유하심, 셋째는 전파하시는 사역이다.

4. 예수님의 복음을 위한 전파하심의 사역은 두 가지로 형태로 나타난다.

5. 첫째는 가르치시는 사역을 통해서, 둘째는 고치시는 사역이 복음을 전파하는 통로가 되었다.

6. 오늘 본문도 가르치심과 고치심의 사역을 계속하셨다.

7. 예수님의 일차적으로 하신 일 "가르치시매"(21절)이다.

8.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위해 나아가실 때 "고치심"의 사역도 병행하신 것이다. 

9. 결국 예수님의 주변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23절) 있는 것을 보게 된다.

10. 예수님 주변에 이처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참으로 많았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치시는 사역의 핑계로 이들을 외면하지 않으셨다. 찾아오는 이들에게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셨다.

11. 그런데 이러한 사역을 행할 때 사람들에게 나타난 어떠한 특징 있는 반응을 보게 되는데, 바로 "예수님의 권위'이다.

12. 12절에서 가르침을 받은 그들이 예수님의 교훈을 듣고 난 후 반응을 보니, 예수님의 가리침은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12절)

13. 예수님의 가르침의 권위는 세상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다. 세상 세기관들은 지식이나 율법에 지식이 가득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들의 가르침을 뛰어 넘었다.

14. 바로 이게 복음의 능력이다. 복음에는 성령의 역사하는 힘이 있다. 세상의 지식과 학문을  뛰어넘는 능력이 있다. 복음에 그런 힘이 있는 것이다.

15. 이는 우리가 복음을 제대로 가르칠 때 드러나게 되어 있다. 복음을 전도를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더라도 결국은 복음의 역사하는 성령의 능력이 없이는 전도 대상자들에게 권위있는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16. 반대로 우리에게 어떠한 특별한 전도 방법이 없다하더라고 복음만을 제대로 전하면 우리의 방법이나, 노력이 아닌 복음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전도 대상자들이 권위있는 교훈을 들을 수 있다.

17. 물론 권위있는 말씀을 듣는다고 해서 그들이 전부 그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서기관들도 "권위 있는 자"로 예수님을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8. 그렇지만, 우리는 복음에 능력이 있음을 믿어야 할 뿐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과 복음을  정확히 제대로 전파할 때 놀라운 능력이 그 안에 역사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19. 나아가 예수님의 권위는 고치는 사역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20.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27절)

21. 이는 예수님이 품으신 사랑의 마음과 그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이 병고침 받은 사역이 일어날 때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2. 27절 말씀에서도 사람들은 서로 물어 예수님의 사랑에 감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3. 그런데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교훈"은, 앞서 2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교훈"과는 다른 뜻이다. 그러나 의미는 같다.

24. 21절에서 "교훈"은 가르침의 내용속에서 드러나는 교훈이며, 27절에서 "교훈" 사랑과 섬김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교훈"이다.

25. 이 둘은 차이가 있지만, 궁극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같다. 가르침과 사랑 모두가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26. 우리는 복음을 전파하며, 예수님의 권위를 드러난 삶을 살아가야 한다.

27. 그리고 예수님의 보여주신 두 가지 방법을 통해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28. 진정한 복음을 전하든지, 또한 진정한 사랑과 섬김을 행하던지

29. 우리가 이 둘을 예수님의 보여주신 본을 따라 행할 때, 예수님의 권위가 이 땅 가운데 세워질 뿐 아니라, 가르침을 듣는 자들이나 사랑과 섬김을 받는 자들이 복음을 깨닫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이다.

30. 예수님을 계속해서 가르침의 사역과 더불어 병고치는 사역을 하셨다.
  29-31절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심.
  32-34절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들을 예수님께 데려옴. 온 동네가 그 앞에 모였더라.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31. 우리 주변에도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제대로 가르치던지, 아니면 도움이 필요한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 예수님의 사랑과 섬김으로 그들을 도와주던지, 어느 것이든지 좋다.

31. 그들이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도록,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우리의 삶을 단순화 시킬 필요가 있다.

32. 우리는 여기서 아주 조심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전도한다는 핑계로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외면하는 것이다.

33. 우리는 복음을 가르치는 것 뿐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 사랑의 손길을 통해 진정 예수님의 권위, 복음을 그들이 알 수 있도록 해야 하는 일에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34. 오늘도 나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구석구석이 굳모닝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35. 좋은 아침입니다. 즐거운 한날입니다. 오늘 이러한 복음이 이 땅 가득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한 날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을 축복합니다.

36.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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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은 권위는 어디서 오는가?
1) 가르치는 사역 - 귀신들은 순종. 성령 충만한 자들을 알라.
 참고 행 19:8-20 ; 행 19:5


직장 벤다이어그램



소명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1. 옳은 일인가?
2. 잘 할 수 있는 일인가?
3. 기쁘게 하는 일인가?

어떻게 기회를 찾을 것인가?
작은 일부터 잘하라. 

회사에서 교회 일 하지 말라. 이는 도적절이다. 회사에서 교회 일 한큼 열심히 하지 말라. 
월급 주는 일을 잘하라. 
회사는 일은 세상일이고, 교회 일은 하나님일이라는 생각이 있는데, 이는 잘못되는 것이다. 
세상이 일이 하나님의 일이다. 
돈 주는 일을 잘하라. 돈 주는 일이 소명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면, 상사에 양해를 구하라. 양해를 구했음에도 불구하고 한다면 꼭 그 시간만큼 보충하라. 

소명을 찾아 직업을 일하라. 소명으로 하는 직업이 성직이다. 



2012 올림픽 이탈리아 양궁 금메달 "기도하는 감독" - 포스트가이드


[특별간증]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석동은ㅣ이태리 양궁 대표팀 감독

3년 전 2009년 가을, 영국에서 5년간의 지도자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떠나올 때였다. 나는 아프리카 선교를 생각하고 있었다. 인생의 십일조를 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마침 이태리에서 연락이 왔다. 다시 이태리 대표팀 감독 일을 맡아 주었으면 했다. 이태리 양궁협회는 2012년 런던올림픽 남녀 단체전 참가를 위해 올림픽 티켓을 따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알프스 산자락에 있는 양궁 전용 훈련장은 훈련 장소로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나는 나태해진 코칭스태프와 이에 길들여진 선수들의 정신력을 새롭게 하고 기록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설정했다. 그런데 시작부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보조 코치들이 문제를 일으켰다. 선수들을 선동해 내 말을 잘 듣지 않게 했던 것이다. 그때 직감적으로 알았다. 이런 상황에서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그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이런 저항 속에서도 나는 묵묵히 내 할 일을 했다. 무엇보다 선수들에게 새롭게 동기부여를 해 주기 시작했다. 먼저 양궁을 그만두려던 프란질리부터 설득했다. 그간 세계 대회에서 여러 차례 우승했으니 올림픽까지 우승하면 이제 세계 양궁사에 길이 남을 인물이 될 수 있다고 했다. 한편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 개인전 금메달을 딴 바 있는 갈리아쪼는 교만이 문제였다. 훈련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그를 이렇게 자극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두 번 받은 남자 선수로는 미국의 대럴 페이스와 저스틴 후이시, 그 둘 밖에 없으니 런던올림픽에서 우승하면 남자로서는 최다 금메달 획득 선수가 될 수 있다고 말이다. 또 네스폴리에게는 꿈을 높이 가지라고 북돋워 주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체력 담당 코치까지 사사건건 브레이크를 걸어왔다. 마음이 무겁고 힘들 때가 많았다. 그럴라치면 나는 훈련장 뒷산을 바라보며 시편 121편을 묵상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나를 이곳에 보내 주신 이도, 도움을 주시는 이도 하나님뿐이었다. 그저 주님만 의지하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들에게 직접 대응할 필요가 없었다.
* 더 많은 내용은 가이드포스트 11월호에 있습니다 *

류현진 필살기는 ‘4색 빛깔’

http://www.hani.co.kr/arti/sports/baseball/582022.html


빠른 직구에 커브 바탕으로
주무기 체인지업 미국서 통해
피츠버그전선 슬라이더 위력

“삼진 잡을 때 결정구는 무엇이었나?”(기자)
“여러 가지 다 썼다. 왼손 타자에게는 슬라이더, 커브, 직구였고 오른손 타자는 직구와 체인지업이었다.”(류현진)
엘에이 다저스 류현진(26)의 필살기는 하나가 아니다. 대체로 4가지의 구질을 장착해 필요할 때 최적의 병기를 꺼내 쓴다. 8일(한국시각) 안방 다저스타디움에서 열린 피츠버그전 승리 뒤에는 “오늘은 슬라이더가 잘 먹혔다”고 했다.
야구는 수 싸움이다.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감독인 버키 해리스는 “타석에 올라가 공을 보고 쳐라. 공을 보지 못하면 그냥 내려와라”고 가르쳤다. 두산의 김현수 등은 공을 끝까지 보고 치는 대표적인 선수다.
하지만 시속 150㎞를 넘나드는 공을 끝까지 보고 치기란 쉽지 않다. 내로라하는 강타자들도 투수의 공을 미리미리 예측하는 감을 익히지 않으면 장타를 날리기 어렵다. 투수와의 머리싸움에서 이겨야 게임에서도 이긴다.
느긋한 배짱과 여유를 갖춘 류현진은 힘만으로 던지지 않는다. 두뇌 플레이로 상대 타자보다 한 수를 더 읽거나 속여야 한다. 그래야 아웃카운트를 잡을 수 있다.
류현진이 가장 잘 던지는 공은 체인지업이다. 특히 엄지와 검지를 ‘O’자형으로 만들어 던지는 서클 체인지업은 국내 최고였다. 변화구인 체인지업의 강점은 눈속임. 직구를 던질 때와 똑같은 투구 폼을 잡으면서도 글러브 속의 공을 달리잡아 속도를 12~20㎞ 떨어뜨린다. 타자는 빠르게 날아오는 직구를 예상했다가 천천히 날아오다가 떨어지는 체인지업에 헛방망이를 돌리는 경우가 많다. 류현진은 8일 피츠버그전에서 전체 101개의 공 가운데 27개를 체인지업으로 던졌다. 체인지업 평균 구속은 131㎞. 이날 류현진이 던진 패스트볼(직구)의 평균 구속 147㎞보다 정확히 16㎞가 빠졌다. 스트라이크 비율은 63%였다.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결정구는 달라질 수 있다. 류현진은 3일 샌프란시스코전에서는 슬라이더를 하나도 던지지 않았지만, 8일 피츠버그전에서는 16개를 던져 스트라이크를 11개를 잡아냈다. 류현진이 “연습할 때 잘됐고, 포수도 요구했다”고 말한 슬라이더도 역시 변화구의 일종. 직구처럼 빠르게 날아오다가 홈플레이트 근처에서 옆으로 꺾인다. 왼손 투수가 던지면 오른손 타자의 몸쪽으로 꺾여 들어가면서 떨어진다. 왼손 타자의 경우 바깥쪽으로 빠지는데, 밀어치는 데 서투른 왼손 타자를 요리하는 데 효과적이다. 6⅓이닝 동안 삼진 6개를 기록했는데 패스트볼(직구) 2개, 체인지업 1개에 비해 슬라이더로 잡은 삼진이 3개나 됐다.
직구나 커브의 쓰임새도 크다. 빠르게 들어가는 직구가 없으면 느리게 들어가는 체인지업 효과를 볼 수 없다. 류현진은 3일 샌프란시스코전에서는 총 80개의 공 가운데 직구가 58%로 절반 이상이었다. 당시 10안타를 허용했고, 8일 경기에서도 47개로 비교적 많이 직구를 던졌다. 1회 2점홈런을 맞을 때도 구질은 직구였다. 야구공의 실밥을 많이 잡는 포심패스트볼(four seam fast ball)이 그다지 빠르지 않은 89마일(143.2㎞)에 머물면서 장타를 맞았다. 물론 직구 최고 구속은 3일 샌프란시스코전의 92마일(148㎞)보다 1마일이 빠른 93마일까지 나왔다. 류현진은 “직구의 구속이 94마일(151㎞)까지는 나와야 한다. 끌어올리겠다”고 했다. 커브의 경우 8개로 많이 던지지는 않았다.
이충신 기자 cs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