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 우리가 늘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가장 흔하게 오해하는 잠언의 일종이다. 잠언이 진리를 비유적으로, 엄밀하지 않게 진술한 책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잠언 16:3은 누구든지 자신의 계획(경영한 것)을 하나님께 철저히 맡기면 그 계획(경영한 것)은 반드시 성공한다는 것을 약속하는 구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을 실망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아주 이기적이거나 어리석은 계획 – 성급한 결혼, 조급한 사업 결정, 바른 사고에 기초하지 않은 소명 결정 등 –을 하나님께 완전히 맡길 수 있다. 그리고는 만일 그것이 이루어지면 – 심지어 약간만이라도 – 하나님께서 복 주신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 맡길 수는 있겠지만 결국 비참하게 끝날 수도 있다. 혹은 어떤 계획을 하나님께 맡겼는데 결국은 실패한 다음에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하여, 자신이 영감하신 말씀을 스스로 무효화시킨 것을 의아해 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둘 중 어느 경우든, 그들은 이 말씀이 항상 적용 가능한 절대적이고 엄격한 약속이 아니라 좀더 일반적인 진리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이 말씀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정의하신 성공을 따라 성공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성공에 대한 세상적 정의 따르면 그 결과는 정반대일 수도 있다. 욥의 이야기가 우리들에게 이 사실을 웅변적으로 상기시켜준다.
잠언을 잠언의 방식대로 다루고, 그것이 진리를 암시적인 방법으로 제시하는 특별한 범주에 속한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잠언은 삶의 중요하고 유익한 보조수단이 된다. 이제 잠언의 지혜를 이해하기 위한 몇 가지 지침을 간략한 형태로 제시하겠다.
첫째, 잠언은 하나님께서 주신 법적 보증서가 아니다
잠언은 어떤 선별된 실천적 목표에 접근하기 위한 지혜로운 방법을 서술한다. 하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성공 보장과 같은 것으로 취급할 수는 없다. 잠언에 언급된 특정한 복, 상급, 기회들은 사람이 잠언의 시적, 비유적인 언어로 약술된 지혜로운 행동 여정을 선택할 경우에 따로 올 수도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잠언 어느 곳에서도 자동적인 성공을 가르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선한 일이나 악한 일들 가운데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전도서와 욥기를 성경에 포함시키신 것이다.
너는 사람과 더불어 손을 잡지 말며
남의 빚에 보증을 서지 말라
만일 갚을 것이 네게 없으면
네 누운 침상도 빼앗길 것이라(잠 22:26-27)
관원이 거짓말을 들으면
그의 하인들은 다 악하게 되느니라(잠 29:12)
여호와는 교만한 자의 집을 허시며
과부의 지계를 정하시느니라(잠 15:25)
이 예들 가운데 첫 번째 것(잠 22:26-27)을 하나님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명령으로 간주하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한다면, 당신은 융자(일종의 빚임)를 얻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결코 집을 살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또는 이 구절을 이 신용카드 대금 갚는 것을 태만히 하다가는 결국 침대를 포함한 당신의 모든 소유를 잃고 말 것이라고 하나님께서는 으름장을 놓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사람들은 이처럼 문자적이고 극단적으로 해석하여 잠언의 요지를 놓치고 만다. 이 말씀(22:26-27)은 (기한이 지나) 저당 잡힌 것을 되찾을 권한이 상실되면 대단히 고통스러울 것이기에, 빚을 얻어 쓸 때는 신중하라는 말을 시적으로, 비유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 말씀은 이러한 진리를 특정한 그리고 협의의 용어(계약 체결의 의미로 ‘손을 잡다’, ‘침상도 빼앗긴다’ 등)로 표현함으로써, 어떤 것을 전문적으로 표현하기 보다는 광범위한 원리를 지적하려고 하고 있다. 잠언이 기록될 당시에 의로운 사람들은 이 말씀의 진정한 의도를 이해하였기 때문에, 이 잠언에 저촉되지 않고도 빚을 지며 살았다.
위의 두 번째 예(29:12) 역시 문자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될 말씀이다. 예컨대 본문은 관청의 직원일 경우, 상관(시장이든, 사장이든, 혹은 다른 누구든 간에)이 자신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는 사람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다면, 여러분은 악한 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말씀이 아니다.
본문은 이와는 상이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즉 진리 대신에 거짓말 듣기를 좋아하는 관원의 주위에는 그 관원이 듣기 좋아하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 결과 그 관청은 부패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설사 고통스럽더라도 진리에 귀를 기울이려는 상관은 관청을 정직하게 유지하도록 도움을 준다. 이 잠언 말씀은 문자적이고 전문적인 용어가 아닌 비유적인 방법으로 이 원리를 지적하고 있다.
세 번째 예(15:25)는 문자적인 의미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 것의 가장 명백한 예일 것이다. 우리는 경험과 성경의 증거를 통해서, 참으로 교만한 사람의 집이라도 든든히 서 있고 과부들은 탐욕스러운 채권자들이나 사기꾼들에게 기만당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참조. 막 12:40; 막 12:40: 욥 24:2-3).
그러면 이제 이 잠언이 여호와께서 실제로 교만한 자의 집을 헐거나 과부의 지계를 보호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뜻인가?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곤고한 자들- ‘과부’, ‘고아’, ‘나그네’ 등은 전반적으로 남의 신세를 지고 있는 사람들을 모두 지칭하는 용어들이다-의 편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참조. 신 14:29; 16:11; 26:12, 13 등).
잠언 23:10-11과 누가복음 1:52-53과 비교해 보면, 이 말씀의 의미가 훨씬 더 분명해질 것이다. 이것은 ‘집’과 ‘과부’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교만한 자들을 멸시하시고 의를 위해 고난을 당하고 있는 자들에게 보상하심으로써(참조. 마5:3, 4), 이 세상의 악한 것들을 바로 잡으실 것이라는 일반적인 원리를 지적하려고 성령에 의하여 기획된 간략한 비유다.
둘째, 잠언은 모음집으로 읽어야 한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잠언 하나 하나는 다른 것들과 균형을 유지해야 하며, 성경의 나머지 부분과 비교하며 이해해야 한다. 위의 세 번째 예(15:25)에서 예시된 바와 같이, 하나의 잠언을 다른 것과 떼어 읽으면 읽을수록 해석이 더욱 모호해진다. 개별 잠언을 오해할 경우 독자는 잠언을 전체로 읽을 때 오해했을 때보다도 훨씬 더 온당치 않은 태도와 행동으로 나아가게 된다.
더욱이 잠언의 물질적인 것들이나 이 세상에 너무 과도하게 실제적인 관심을 둠으로써 세속주의와 물질주의를 경고하는 성경에 있는 다른 균형 잡힌 가치들을 망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욥의 친구들처럼 세상적 성공과 하나님께서 의라고 생각하시는 것을 동일시하는 지혜를 좇지 않도록 하라. 이것은 선별된 잠언들을 균형 있게 읽지 않는 태도다.
잠언에서, 이기적인 삶을 살거나 성경의 다른 곳에서 가르치는 것과 모순이 되는 생활을 정당화시키는 구실을 찾으려고 하지 마라. 그리고 잠언은 종종 다양한 방법으로 단락이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한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건너 뛰면서 잠언을 읽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라. 이 모든 숙고들은 우리가 잘못된 해석을 피하기 위해서는 주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의 두 잠언을 상고해 보자:
지혜로운 자는 용사의 성에 올라가서
그 성이 의지하는 방벽을 허느니라(잠 21:22)
음녀의 입은 깊은 함정이라
여호와의 노를 당한 자는 거기 빠지리라(잠 22:14)
당신이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잘 방비된 성을 공격해서 하나님을 위해 선한 일을 하겠는가? 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였다면, 늘 (대단히 큰) 음녀의 입 속에서 질식해서 죽을 위험이 있다는 말인가?
사람들은 대부분 이러한 질문에 ‘아니’ (No)라고 대답을 할 것이고, 거기에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이든 이런 의미는 결코 아니다!”라고 덧붙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잠언 22:26이 글자 그대로 그리스도인들끼리는 돈을 꾸거나 빌려 주는 일을 금지하는 말씀이며, 잠언 6:20은 자식이 부모가 아무리 연로하고 그분들의 충고가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항상 순종해야 한다는 의미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 잠언들 상호 간에 또한 성경의 다른 부분들(우선 상식적으로만 보더라도)과 균형을 유지하지 못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나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 대단히 공평치 못한 일을 행할 수도 있다.
앞의 첫 번째 잠언(21:22)의 요지는 지혜는 군사적인 힘보다도 강할 수 있다는 것이다.이것은 과장법을 사용한 진술이다. 문체상 이 구절은 “문은 무보다 강하다”는 현대의 격언과 다를 게 없다. 이것은 명령이 아니다. 지혜의 힘에 대한 상징적, 비유적인 묘사다.이 잠언의 말씀을 지혜의 유용성과 효과를 찬양하는 다른 많은 잠언들과 연관시킬 때에만(예컨대 1:1~6; 2-3장; 8장; 22:17-29 등) 메시지의 본뜻을 파악할 수 있다. 해석에 있어서 전체 문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앞에 인용된 두 번째 잠언(22:14) 역시 전체 문맥과 비교할 필요가 있다. 대단히 많은 잠언의 말씀이 사려 깊은 생각과 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예컨대 15:1, 16:10, 21, 23-24, 27-28; 18:4 등). 다시 말해 대개 들을 때보다 말할 때 훨씬 더 많이 죄를 짓는다(참조. 마 15:11, 15-20). 듣는 것은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말하는 것은 거의 늘 통제할 수가 있다.
이 비유를 다음과 같이 풀어 쓸 수 있을 것이다. “음녀가 행하고 말하는 것들은 깊은 웅덩이에 빠진 것만큼이나 위험하다.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 싶거든 이 같은 일들을 피하라.” 개별 잠언들의 문맥을 충분히 파악한다면 그것들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셋째, 잠언은 논리적으로 정확한 말이 아니라 기억하기 쉬운 말이다
진리를 완벽하게 서술한 잠언은 없다. 또한 어느 시대 어떤 상화에서든지 적용해야 한다는 비합리적인 명령도 버텨낼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하게 기술된 잠언도 없다. 어떤 원리를 간략하게 비유적으로 서술할수록, 그것을 해석하는 데는 상식과 바른 판단이 더욱 필요하다. 하지만 간략하고 비유적인 서술이 효과가 크고 기억하기도 쉽다(예컨대 앞에서 인용한 “Look before you leap").
잠언의 목적은 비평가를 감동시키는 철학이 아니라 우리가 간직할 만한 지식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잠언은 마음속에 있는 이미지를 자극하는 말이나(마음은 추상적인 자료보다 이미지들을 더 잘 기억한다), 또는 귀를 즐겁게 하는 소리들[예컨대 반복법,유운(唯韻), 이합체(離合體) 등]을 담고 있다. 이미지를 사용한 예로 잠언 15;19을 살펴보자.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 울타리 같으나
정직한 자의 길은 대로니라
우리는 여기서 어떤 게으른 사람이 즐겨 다니는 길에서 발견되는 식물의 종류를 지적하는 글이 아니라, 부지런함이 게으름보다 더 낫다는 원리를 지적하고 있는 글을 읽고 있는 것이다.
잠언 31:10-31에 묘사된 현숙한 아내의 지극한 헌신에 대한 묘사는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에 따라 나열되고 있다. 매 구절은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에 따라 시작하여 기억하기 쉽고 귀를 즐겁게 하고 있지만, 무감각한 비평가나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읽는 독자들에게는 이것이 지상의 어떤 여성도 본받을 수 없는 생활양식을 묘사한 것으로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독자가 만일 잠언 31:22와 같은 묘사는 현숙한 아내가 자기 가정에 가져다주는 기쁨을 과장법을 써서 강조하려는데 목적이 있다는 요지를 파악하게 된다면, 잠언의 지혜는 그 목적을 아주 잘 수행한 것이다. 본문의 단어들(그리고 여러 이미지들)은 독자들의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아, 필요할 때마다 그들에게 유용한 지침들을 제공해 준다. 하나님께서 잠언을 통하여 하시려고 의도하신 것이 바로 이것이다.
넷째, 올바른 이해를 위해 ‘풀어 쓸’ 필요가 있는 잠언들이 있다
대단히 많은 잠언들이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일반적인 것들이었으나, 지금은 더 이상 존속하지 않는 관습들과 제도들에 맞춰 진리를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만일 독자가 이 잠언들과 상응하는 현대적인 관점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즉 이들은 오늘날 존재하는 관습과 제도들로 조심스럽게 ‘풀어 쓰기’ 하지 않는다면, 그 의미가 우리와 전혀 상관없어 보이거나 그 뜻을 놓칠 수 있을 것이다(참조. 제4장을 참조하라). 다음의 두 잠언들을 살펴보자.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잠 22:11)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잠 25:24)
우리는 임금님이 다스리는 사회에 살고 있지 않다. 게다가 우리는 성경 시대처럼 지붕이 평평한 집에 살지도 않는다. 그 시대에는 지붕 위에서 잠자는 일이 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흔한 일이었다(참조, 수 2:6). 그렇다면 이러한 잠언의 말씀들을 읽는 것이 시간 낭비인가? 만일 독자가 당대의 특수한 문화적 용어로 표현된 초문화적 문제들을 파악할 수 있다면, 전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첫 번째 인용한 잠언의 본질적인 메시지는(22:11)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는 표현이 우리 시대엔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준다”는 말과 상응한다는 것을 알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어쨌든 이 잠언은 늘 그런 의미였다. ‘왕’은 모든 지도자들을 지칭하는 제유(提諭)적 표현이다. 이 잠언이 사용한 특정한 비유적인 언어는 그 언어 자체의 의미 이상을 나타낸다. 즉 지도자들과 책임 맡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정직하고 사려 깊은 말에 감명을 받는다는 진리를 지적하기 위한 것이다.
앞에 언급한 두 번째 잠언의 의미 역시 우리가 그 당대의 문화를 오늘날의 것으로 적절히‘풀어 쓰기’만 한다면 파악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이것을 다음과 같이 풀어 쓸 수 있을 것이다. “결혼하지 않았어야 했던 여인과 넓은 집에서 사는 것보다는 차고에서 사는 것이 더 낫다.”
대개 잠언들의 충고는 인생을 막 시작하고 있는 젊은 사람들에게 주는 것임을 기억하라.이 잠언은, 남편이 그의 아내가 말다툼을 잘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문자적으로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배우자를 선택할 때 신중해야 한다고 충고하는 말이다.
배우자 선택은 초문화적 선택 사항이기 때문에 이 잠언을 올바르게 이해하기만 하면, 배우자 선택에 있어서 건전하고 경건한 충고가 된다(참조. 마 19:3-11; 고전 7:1-14, 25-40). 주로 육체적인 매력에 이끌려 성급히 결혼하면 불행한 결혼으로 끝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독자들의 편의를 위하여, 아래에 독자들의 적절한 잠언 사용과 잠언을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법칙들을 몇 가지 요약하여 열거하였다.
1. 잠언은 종종 비유적이다. 즉 비유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용어의 본래 뜻을 넘어서는 어떤 진리를 가리킨다.
2. 잠언은 실천적이지, 논리적이거나 신학적이지 않다.
3. 잠언은 기억하기 쉬운 말로 되어 있으며, 기술적으로 정확성을 기한 말은 아니다.
4. 잠언은 이기적인 행동을 지지하기 위한 글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5. 잠언은 고대 문화를 강하게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의미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 쓰기’를 할 필요가 있다.
6. 잠언은 하나님께서 주신 보장이 아니라 선한 행동에 대한 시적 지침들이다.
7. 잠언은 요지를 표현하기 위해 매우 특수한 언어, 과장법 또는 그 밖의 다양한 문화적 기교를 사용할 수도 있다.
8. 잠언은 생의 몇몇 측면들에 지혜롭게 접근할 수 있도록 훌륭하게 충고해 주지만, 생의 전반에 걸친 몬든 사례를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9. 잠언을 잘못 사용할 경우엔 미련하고 물질적인 삶의 양식을 정당화시킬 위험이 있다.그러나 올바르게 사용할 경우에는 매일의 생활에 대해 실천적으로 충고해 준다.
욥기의 지혜, “하나님의 뜻과 선택은 늘 우리의 뜻보다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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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학적 보화 가운데 하나다. 욥기는 욥과 그의 의도는 좋지만 전혀 도움이 안 된 “안위자들”-빌닷, 소말, 엘리바스, 엘리후-간의 잘 짜여진 대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만약 누가 어떤 시점에서 발언하는지에 주의하지 않으면 독자는 온갖 그릇된 충고와 적절하지 못한 결론을 만날 것이다.
특별히 욥의 ‘안위자들’의 입에서 나온 말들일 경우 더욱 그렇다. 이 담화에는 매우 중요한 목적이 있다. 그것은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항상 하나님께서 원하시기 때문이나 그 일이 공정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은 아님을 독자들에게 확신시켜 주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욥기의 목적은 전도서와 거의 정반대다. 전도서의 교사는 일상사에 관여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묘사하려고 하지만, 반대로 욥의 안위자들은, 하나님을 단순히 개입은 안 하시지만 금생의 사건들을 통하여 계속 심판을 하고 계신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전도서는, 결국 모든 것을 평등하게 만드는 것은 죽음이기 때문에 어떻게 살든지 문제되지 않는다고 제안한다. 욥의 친구들은 욥에게, 지금 욥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그것이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은 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는지 그렇지 않았는지에 대한 직접적인 결과라고 말한다.
욥이 자기에게 닥친 여러 비참한 일들-질병, 자녀들의 죽음, 곤궁, 무기력-을 당할 정도로 악한 일들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항변하자, 그들은 욥에게 반감을 느낀다. 그들의 충고의 요지는, 어떤 사람의 삶이 형통한 것은 그가 선한 삶을 살기로 선택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이고, 일이 잘못 되었다면 이것은 분명히 그가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께서 환난을 주신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바로 이러한 논리를 폈고(요 9:1-3),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들 역시 예외는 아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제하신다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그의 뜻과 역사를 따라서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가르치지 않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오히려 성경은 세상은 타락했고 죄로 인해 더럽혀졌으며 사탄의 통치하에 있기 때문에(요 12:31), 인생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바대로 일어나는 일들이 많다고 가르친다. 특별히 고난은 반드시 죄의 결과만은 아니다(참조, 롬 8:18-23).
경간한 사람 욥은 자기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만한 일을 전혀 행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자주 등장하는 담화에서(3, 6-7, 9-10, 12-14, 16-17; 19, 21, 23-24, 26-31장) 욥은 자신의 결백을 웅변적으로 주장하고, 또한 자신이 겪어야 했던 두려움과 절망을 표현하였다. 욥은 이러한 일들이 어째서 자기에게 닥쳤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말에 욥의 친구들은 치를 떨었다. 그들에게는 욥의 말이 신성모독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욥의 항변은 하나님께 대한 의심임을 욥에게 알리기 위해 애를 썼다. 친구들은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욥에게 그 죄가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자백할 것과, 하나님께서는 공평하고 정의롭게 이 세상을 경영하시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우리는 자신의 선택에 합당한 결과를 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거듭 강요하고 있다. 욥은 끝까지 고집을 굽히지 않았으며, 심지어 더욱 웅변적으로 인생은 불공평하며 현 세상은 마땅히 되어야 할 모습으로 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마지막 ‘안위자’인 엘리후가 등장하여 하나님의 탁월하신 지식과 하나님의 방법들을 변호한다. 이것이 욥에 대한 대답으로는 가장 근사한 것이다. 그 누구도 이 정도로 근사한 답을 제시한 적이 없었다. 욥은, 반은 만족스럽고 반은 화가 나는 엘리후의 대답을 받아들여야 할 것처럼 보인다. 이때 갑자기 하나님께서 친히 욥과 그의 친구들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38-41장).
하나님께서는 욥의 생각을 수정하시고, 상황을 올바르게 보게 해주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욥의 친구들의 ‘지혜’를 반박하며 욥을 변호하셨다(42:7-9). 인생의 모든 일이 공명정대한 것인지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는 욥이 친구들을 이겼다. 이 세상은 공평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욥이 “왜 내가?”라고 의아해 하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이기셨다. 즉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들의 방법을 훨씬 초월해 있으며, 그가 고난을 허락하신 것은 자신이 무엇을 행하시는지 알지 못하시는 것이라든지, 그가 그렇게 하실 권리가 있는지 의심받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늘 우리의 선택보다 뛰어나다.
이것이 지혜에 대해 가장 잘 다듬어진 묘사다. 욥기를 읽는 사람은 세상의 지혜-논리적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그릇된-가 무엇이고, 하나님의 지혜를 구성하는 것은 무엇이며,또한 하나님의 주권과 의를 확신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배우게 된다. 욥기는 대화와 이야기가 한데 어우러져 구약 성경의 사변적인 지혜에 대한 탁월한 모본을 형성하고 있다.
전도서의 지혜, “삶이 허무할지라도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며 살아야 한다”
전도서는 그리스도인들을 때때로 당혹케 하는 지혜 독백이다. 특히 주의 깊게 읽을 때 그렇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전도서는 전도서 안의 다른 구절들과 모순되는 구절들과 또 성경 전체의 계시와도 모순되는 구절들이 들어 있어서 이해하기 아주 어려운 책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전혀 상반되는 두 극단적인 해석들이 나왔으며, 부록에 추천한 두 권의 전도서 주석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우연찮게 두 주석의 저자들은 서로 아주 친한 친구 사이다). 롱맨(Longman) 교수는 전도서를 냉소적인 지혜의 표현으로 본다. 그에게 전도서는 피해야 할 삶의 전망을 역설적인 방법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책이다.
반면에 프로반(Provan)교수는 전도서를 좀 더 긍정적으로 해석하여, 이 전도서를 어차피 모두 죽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아래서 인생을 만끽할 수 있는지에 대한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앞선 견해를 『책별로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192-200쪽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전도서를 해석할 때 전체적인 전략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그 전략이 무엇이든, 문맥과 상관없이 표현이나 구절들을 취하여 저자의 목적과 거리가 먼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
이런 문제는 결국 전도서에서 가장 많이 쓰이고 또 가장 중요한 단어인 habel("vanity", NRSV; "meaningless", NIV; "futility", NJB)에서 드러난다. 이 단어는 전도서에서 37번이나 나온다(구약성경엔 모두 73번 나온다). 그 단어 자체의 뜻은 ‘수증기’ 혹은 ‘숨/약간의 공기’(참조. 시 39:5; 잠 31:30; 사 57:13)다.
하지만 ‘전도자’(히브리어 Qohelet='assembler')에게 그것은 무슨 뜻인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덧없음/무상함을 보여 주려는 의도인가, 아니면 모든 것의 무의미/쓸모없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둘 다인가?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는 저자가 산만한 문체로 말하고 있는 다른 것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네 가지 실제들이 그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다.
(1) 하나님은 유일하게 한 분, 논쟁할 수 없는 실제이시자 창조주이시며, 모든 생명은 그분에게서 선물로 주어졌다.
(2) 하나님의 길을 늘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3) 인간 편에서는, 마땅한 되어야 할 방식대로 실제로 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해 아래서 된 일”은 전혀 이해되지(add up)않는다.
(4) 가장 위대한 평등주의자는 사망이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죽기 때문이다.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전도서 기자의 희망 결여가 이 모든 생각들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한 번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이것이 삶 그 자체를 habel(적어도 ‘무상환’이란 뜻일 수 있으며, ‘헛된’을 뜻할 수도 있다)로 만든다.
무덤의 확실성이 현재의 삶에서 유일하게 확실한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삶이 비록 허무할지라도 그것을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전도서 기자의 관심이다(예. 3:12-14).
인생을 만끽하는 기쁨은 궁극적으로 ‘얻는 것’(행한 일로 얻은 재화를 안전하게 간수하는 것)에서 비롯되지 않으며, 삶은 그 여정 자체로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그런 세상에서 기쁨과 만족은 있다가 사라지는 것에 불과한 것을 ‘획득하려고’ 하거나 통제하려고 하지 않고, 생의 리듬을 따라 살 때 얻을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전도서를 성경의 나머지 부분이 가르치는 것과 대조적인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 본다면(foil 이론), 전도서 12:13-14은 이를 바로 잡는 정통적인 경고를 통해 이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foil’ 이론에 따르면, 이 책의 중심 부분-책 전체, 하지만 특별히 위의 구절들-은 하나님께서 삶에 직접 개입하시지 않는다면 그리고 죽음 후 삶이 없다면, 사람들이 삶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해 탁월하게 그리고 솜씨 있게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죽음 후의 삶을 부정하는 이신론적 세상-하나님은 계시지만 사람들이 제 나름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며 자기 자신들의 의지에 따라 죽는 세상-이 제시하는 삶의 지침을 찾고 있다면, 전도서가 그 지침을 줄 것이다. 이렇게 이해할 때 전도서의 목적은 솔로몬이 정통에서 벗어나 타락을 경험한 후에야 내놓을 수 있는 ‘지혜’(왕상 11:1-13)를 보여 주는 데 있다.
여기서 보여 주는 인생관은 운명론적이고 비관적이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감동을 주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도리어 이 지혜로 인해 독자가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참다운 언약 관계를 그 대안으로 갈망하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물론 두 해석에 비추어 볼 때, 이 책에는 자신을 신뢰하는 이들을 향한 하나님 자신의 신실함에 대한 확신이라는 내용을 담은 성경의 위대한 주제들이 빠져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이론적인(speculative) 지혜에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태도다. 지혜는 독자들에게 힘겨운 질문을 상기시킬 뿐 많은 대답을 주려고 하지 않는다. 그 힘겨운 질문들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그 대답을 찾기 위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향하게 한다.
- 고든 D. 피, 더글라스 스튜어트,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성서유니온선교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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