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October 10, 2013

[매거진S] 다저스를 바꾼 9가지 사건들 - 김형준 칼럼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mlb&ctg=news&mod=read&office_id=224&article_id=0000003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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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저 블루(Dodger Blue). 오직 다저스 만의 이 색(상표권 등록도 되어 있다)은, 토미 라소다의 혈관 속을 흐르고 있는 색이며, 다저스 팬들이 반 세기 동안 'I~~t's time for Dodger baseball'로 시작해 'Good night, everybody'를 듣고 잠자리에 들도록 한 색이다. 그리고 한국 팬들을 또 다시 뜨겁게 만든 색이 됐다.
가장 많은 우승을 차지한 팀은 뉴욕 양키스다. 내셔널리그 최고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다. 하지만 단지 트로피 숫자 만으로는 매겨질 수 없는 찬란한 전통이, 다저스의 역사 속을 흐르고 있다. 다저스가 최고의 인기 구단이자 명문 구단이 된 비결은 무엇일까. 그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김형준]
1. 두 친구
1935년 5월25일 신시내티 레즈의 홈구장 크로슬리필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버튼을 누르자 632개의 전구에 일제히 불이 들어왔다. 야간 경기가 메이저리그 최초로 열린 것. 신시내티 단장 래리 맥페일의 아이디어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야구는 당연히 낮에 하는 것이었는데, 일요일마다 조명 시설을 가지고 빈 메이저리그 구장을 찾아 다녔던 니그로리그 팀들이 하루 두 경기를 하기 위해(니그로리그는 일요일에만 유료 입장 경기를 열었다), 그리고 맥페일이 운영했던 마이너리그 팀 만이, 이 '모양 빠지는' 야간 경기를 하고 있었다(어니 뱅크스의 명언 "Let's play two"도 니그로리그 시절의 경험에서 나온 말이다). 야간 경기의 효과는 놀라웠다. 퇴근 후 야구장을 찾은 팬들로 인해 입장 수입이 크게 늘어난 것. 팬들이 저녁 식사를 야구장에서 해결하기 시작한 것도 그 때부터였다. 1938년 6월16일. 브루클린 다저스도 에베츠필드에서 첫 번째 야간 경기를 가졌다. 다저스로 자리를 옮긴 맥페일에 의해서였다. 난생 첫 야간 경기에서, 다저스 타자들은 어둠을 뚫고 날아온 신시내티 자니 반더 미어의 강속구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두 경기 연속 노히터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1939년 맥페일은 두 번째 '혁신'을 시도했다. 최초로 정규시즌 홈경기를 라디오로 중계한 것. 당시 구단들은 라디오 방송을 하면 방문객이 줄까봐 주저하고 있었는데, 라디오 방송은 오히려 팬을 폭발적으로 늘리는 촉매제가 됐다. 라디오 중계를 통해, 다저스는 양키스와 자이언츠를 제치고 뉴욕 최고의 인기 팀이 됐다. 입장 수입과 중계권 수입이라는 현대 프로 구단의 두 기초는, 바로 맥페일이 스타트를 끊은 것들이었다. 한편 레드 바버라는 최고의 인기 캐스터를 배출한 다저스의 전속 캐스터 자리는, 1950년 브롱스 출신의 한 22살짜리 자이언츠 팬에게 넘어갔다. 그 청년은, 내년으로 65년째 시즌을 맞이한다.
1942년 9월24일. 52살의 맥페일은 다저스 단장직을 사임했다. 2차 세계 대전에 장교(대령)로 참전하기 위함이었다. 맥페일은 자신의 자리를 가장 친한 친구에게 넘겼다. 당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구단주와 갈등을 빚고 있었던 그 친구는, 다저스에 온 후 두 가지 선물 보따리를 풀었다. 세인트루이스에서 처음 시도해 큰 성공을 거둔 팜 시스템, 그리고 흑인 선수를 반드시 등용하겠다는 강한 의지였다. 1940년까지 자이언츠와 양키스의 우승 퍼레이드를 부러운 눈으로 지켜봐야 했던 다저스는, 바로 맥페일과 브랜치 리키의 혁신을 통해 일어섰다. 그리고 '프런티어 정신'은 팀의 전통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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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저스 입단 계약서에 서명하는 로빈슨과 리키 단장(가운데) ⓒ gettyimages/멀티비츠
2. 서부 이전
25%의 지분을 매입하고 구단 전속 변호사가 된 월터 오말리는, 1950년 길었던 파워 게임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에 역시 25%의 지분을 가지고 있던 다른 세 명을 몰아내고 다저스 왕국의 일인자가 됐다(밀려난 세 명 중 한 명이었던 리키는 피츠버그 파이어리츠로 갔고, 다저스의 팜에서 로베르토 클레멘테를 빼왔다). 브롱스의 양키스, 맨하탄의 자이언츠와 함께 뉴욕을 삼분하고 있었던 다저스는 당시 큰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오말리는 한 도시를 셋이서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었다. 1957년 오말리는 자이언츠의 구단주인 호레이스 스톤햄에게 같이 뉴욕을 떠나자고 설득했다. 당시 자이언츠는 '낮에 야구를 보고 밤에 술을 마시는' 구단주의 하루 일과 때문에 대부분 낮에 경기를 했고 인기도 가장 떨어져 있었다. 스톤햄은 서부로 가서 둘이 오붓하게 지내자는 오말리의 계획이 솔깃하게 들렸다. 결국 1958년. 뉴욕의 야구 팬 세 명 중 둘은 큰 좌절감을 맛봐야 했다. 철저한 계획 속에 움직인 오말리는 로스앤젤리스시로부터 샤베스라빈이라는 지역의 땅을 거의 공짜로 얻었다. 반면 샌프란시스코로 간 스톤햄은 캔들스틱 지역의 땅을 샀는데, 그러나 스톤햄이 낮에 방문한 그 장소는 밤만 되면 강풍이 몰아치는 곳이었다(부동산 사기였다). 다저스가 LA에서 5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 동안 '서부의 2인자'가 되야 했던 자이언츠는, 2000년 따뜻한 매코비만에 아름다운 구장을 지었다. 그리고 2010년, 마침내 서부 이동 후 첫 우승을 차지했다. 두 팀은 미 프로 스포츠를 대표하는 라이벌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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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저스가 처음 LA로 와 사용한 메모리얼스타디움 ⓒ gettyimages/멀티비츠
3. 서부 여행
브루클린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농구 장학금을 받고 신시내티 대학에 입학한 꺾다리 유태계 청년이 있었다. 청년의 소원은 서부를 여행해 보는 것이었다. 어느날 청년은 야구 팀이 서부 원정을 떠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동행을 부탁했다. 청년은 선수가 아니면 같이 갈 수 없다는 코치를 겨우 설득하고 버스에 올랐다. 야구 팀이 원정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청년은 샌디 코팩스라는 좌완 투수가 되어 있었다. 1955년 코팩스는 고향 팀 다저스에 입단했다. 그리고 1958년에는 팀과 함께 서부로 아주 긴 여행을 떠났다. 1965년은 다저스와 코팩스에게 잊지 못할 해였다. 당시 16경기를 남겨 놓고 1위 샌프란시스코에 4경기반이 뒤진 리그 3위였던 다저스는, 마지막 16경기에서 기적 같은 15승1패를 기록함으로써 샌프란시스코를 2위로 끌어내리고 극적인 우승을 차지했다. 같은 기간 6경기에 나서 4승 1세이브 1.38을 기록했던 코팩스는, 월드시리즈 1차전 등판을 거부했다. 유대교 명절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다저스는 돈 드라이스데일이 나선 1차전을 패했고, 코팩스도 2차전에서 패전투수가 됐다. 하지만 코팩스는 5차전과 이틀 휴식 후 나선 7차전에서 두 번의 10K 완봉승을 따냄으로써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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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의 왼팔 ⓒ gettyimages/멀티비츠
4. 어깨동무

1947년 5월14일. 신시내티 크로슬리필드를 가득 메운 백인 관중들은 1회말이 시작되자 '검둥이!' '검둥이!'를 연호했다(얼마전 '쿠에토!' '쿠에토!'가 울려퍼졌던 PNC파크를 떠올려 보라). 대열에 동참한 것은 덕아웃의 신시내티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경기장은 당장이라도 폭동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바로 그 때. 다저스의 남부 출신 스타 유격수인 '땅꼬마'(Pee Wee) 리즈는 자리를 이탈해 1루로 갔다. 그 곳에는 얼어붙은 표정의 재키 로빈슨이 있었다. 리즈는 로빈슨의 어깨에 팔을 둘렀고, 별 일 아니라는 듯 웃으며 대화를 나눈 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리즈의 돌발적인 행동에 깜짝 놀란 관중들은 야유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도 리즈는, 늘 로빈슨 대신 나서 로빈슨을 지켰다. 시즌 후 돌아간 고향에서 사람들의 항의를 받기도 했던 리즈는, "여러가지 이유로 사람을 미워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피부색일 수는 없다"며 인종 차별의 부당성을 역설했다. [재키 로빈슨 레전드 스토리 中] 열매는 달콤했다. 인종의 벽을 가장 먼저 허문 덕분에, 다저스는 당시 니그로리그의 어린 선수들을 독점할 수 있었다(돈 뉴컴, 로이 캄파넬라, 짐 길리엄, 조 블랙, 존 로센보로 등). 1921년부터 1946년부터 26년 간 리그 우승이 한 번 뿐이었던 다저스가, 로빈슨이 데뷔한 1947년부터 1966년까지 19년 동안 10번의 우승을 차지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리고 1955년. 마침내 다저스는 양키스와의 6번째 월드시리즈 대결 끝에 처음으로 승리했다. 최고의 재능들을 찾아 나선 다저스의 항해는 이후 전세계를 누비기 시작했다. 이에 가장 먼저 도미니카공화국 시장을 개척했고, 1979년에는 멕시코 선수 페르난도 발렌수엘라를, 1994년에는 한국 선수 박찬호를, 1995년에는 일본 선수 노모 히데오를 입단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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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슨과 피 위 리즈. 영화 '42'의 한 장면
5. 놓쳐버린 보물
1988년 우승으로 스티브 색스가 떠난 후, 늘 2루수 자리가 고민이었던 다저스는 1994년 몬트리올에서 전도유망한 2루수를 데려왔다. 1990년 21살의 나이로 데뷔, 4년 평균 47도루를 기록했으며 1993년에는 출루율을 .389까지 끌어올린 델라이노 드실즈(.295 .389 .372)는, 훌륭한 1번타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다저스가 내준 투수는 21살짜리 불펜투수 페드로 마르티네스였다. 1993년에 데뷔한 마르티네스는 불펜투수로 나서 10승5패 2.61을 기록했는데, 당시 프레드 클레어 단장, 토미 라소다 감독, 프랭크 조브 주치의는 가녀린 몸에서 강속구를 쥐어 짜내는 마르티네스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 마르티네스의 형 라몬이 에이스로 활약하고 있었던 다저스는, 마르티네스 정도의 투수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상황은 다저스의 예상과 정반대로 흘러갔다. 마르티네스가 트레이드 4년 만에 우완투수로는 1912년 월터 존슨 이후 첫 '1점대+300K'를 기록하며 리그 최고의 에이스가 된 반면, 드실즈는 실망스런 3년(.241 .326 .327) 후 FA가 되어 떠났다. 다저스는 1991년에도 형을 따라 다저스 유니폼을 꿈꿨던 한 도미니카 소년에게 퇴짜를 놨다. 윌슨 게레로의 동생, 블라디미르 게레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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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보다 13cm가 작았던 페드로 마르티네스 ⓒ gettyimages/멀티비츠
6. 친구 아들

마이크 피아자의 아버지인 빈스 피아자는 중고차 사업과 부동산 사업을 통해 1억 달러 이상을 모은 거부였다. 빈스는 메이저리거를 꿈꾸는 아들을 위해 과외 선생으로 조 디마지오와 테드 윌리엄스를 모실 정도로 적극적인 지원을 했다. 피아자는 윌리엄스가 직접 사인을 해 준 <타격의 과학>을 파고 또 팠지만 실력은 좀처럼 늘지 않았다. 고교 팀에서의 형편없는 성적에 프로 팀의 지명은 물론 대학 팀의 장학금 제안도 받지 못했다. 피아자는 마이애미에 있는 한 커뮤니티칼리지에 겨우 진학했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빈스는 아들을 지명해 줄 메이저리그 팀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메이저리그 구단을 직접 사려고 했다. 피아자는 그런 아버지를 말렸다. 결국 빈스는 같은 이탈리아계이자 절친한 친구인 토미 라소다에게 아들의 미래를 부탁했고, 라소다는 1루수로서 포수 경험이 전혀 없었던 피아자를 포수로 둔갑시켜 구단에 추천했다. 1988년 피아자는 1395명 중 1390번째로 지명을 받았다. 그리고 곧바로 도미니카 윈터리그로 날아가 포수로서 담금질을 했다. 당시 윈터리그 팀의 유일한 백인이자 유일하게 스페인어를 모르는 선수였던 피아자는, 곧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장타력을 가진 포수가 됐다. 1998년 피아자는 최초의 1억 달러 계약을 요구하며 구단과 얼굴을 붉혔고, 결국 개리 셰필드 등과 바뀌어 플로리다로 보내졌다(플로리다에서 5경기를 뛴 피아자는 일주일 후 메츠로 재트레이드됐다). 당시 피아자의 요구를 절대로 들어줘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던 사람은 라소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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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자의 앞에는 1389명이 있었다 ⓒ gettyimages/멀티비츠
 7. 두 번째 DD
1993년 드래프트에서 단연 화제를 모은 선수는, 드래프트 역사상 최고의 재능으로 평가받은 플로리다 출신의 고교 유격수 알렉스 로드리게스였다. 당시 나머지 27팀들은(당시는 애리조나와 플로리다가 생기기 전이었다) 전체 1순위 지명권을 가진 시애틀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애틀의 감독인 루 피넬라의 생각은 달랐다. 피넬라는 타선에는 켄 그리피 주니어, 유격수에는 수비의 달인인 오마 비스켈이 있는 만큼, 랜디 존슨과 짝을 이룰 수 있는 즉시 전력감의 대학 투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에 투수 최대어로 꼽히는 위치타 대학의 우완 투수를 뽑아달라고 구단에 요청했다. 바로 대런 드라이포트였다. 하지만 우디 우다드 단장은 피넬라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고, 결국 드라이포트는 2순위 다저스가 데려갔다. 드라이포트는 입단 동기인 박찬호와 함께 메이저리그에 직행했고, 그 해 박찬호보다 더 오래 메이저리그에 머물렀다. 다저스 팬들도 드라이포트에게 돈 드라이스데일의 애칭인 'DD'를 붙여주며 애정을 쏟았다. 그러나 에이로드가 최고의 스타가 되는 동안, 드라이포트의 선수 인생은 부상으로 점철됐다. 2004년 32살의 나이로 은퇴를 선언한 드라이포트는, 은퇴 선언 일주일 후 통산 22번째 수술을 받아야 했다. 만약 우다드가 피넬라의 설득에 넘어갔다면 다저스의 미래는 어떻게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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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튀가 되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 gettyimages/멀티비츠
8. 코팩스의 환생
2005년 드래프트에서 다저스는 낭패를 봤다. 가장 빠른 전체 40순위 지명권으로 선택한 테네시 대학의 우완 루크 호체이버가 에이전트를 여러 번 바꾸더니, 결국 스캇 보라스와 손을 잡고 입단을 거부해 버린 것. 하지만 이것은 다저스가 '신의 두 번째 왼팔'을 얻게 된 시작점이었다. 이듬해 드래프트의 최대어는 '제2의 랜디 존슨'으로 불린 201cm의 좌완 앤드류 밀러였다. 그러나 1순위 캔자스시티가 밀러 대신 호체이버를 선택하면서 1라운드는 대혼란에 빠져들었다. 6순위 디트로이트는 졸업반 시즌에 구속이 크게 증가한 클레이튼 커쇼를 뽑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1~5순위 팀들이 밀러를 그냥 지나치자 계획을 바꿔 밀러를 뽑았다. 7순위 다저스는 에반 롱고리아, 브래드 링컨, 커쇼 중 한 명을 뽑고 싶었지만 비관적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한 명이 살아남았다. 바로 커쇼였다(롱고리아는 3순위 탬파베이, 링컨은 4순위 피츠버그 지명). 팀 린스컴이 2008-2009년 사이영상 2연패에 성공하자, 다저스의 드래프트 책임자인 로건 화이트는 일부 지역 언론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뽑을 수 있었던 팀 린스컴(샌프란시스코 10순위)을 왜 뽑지 않았냐는 것. 하지만 이제는 아무도 그를 비난하지 않는다. 디비전시리즈 4차전에서, 매캔은 땅바닥으로 떨어진 커쇼의 커브가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자 강하게 항의했다. 모두가 '에이 심했다'라고 생각한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방송사가 제공한 피치 트렉스의 스트라이크 존 맨 밑줄에 공 하나가 떡하니 찍혀 있던 것. 그렇게 코팩스는 다시 다저스 유니폼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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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운 호체이버. 고마운 캔자스시티 ⓒ gettyimages/멀티비츠
9. 주차장 임대업자
보스턴에서 주차장 임대업을 해 큰 돈을 번 프랭크 매코트는 2001년 보스턴 레드삭스 매입에 나섰다. 하지만 7억 달러를 지불한 존 헨리에게 패했다. 2003년 매코트는 이번에는 애너하임 에인절스 인수를 시도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승자는 1억8400만달러를 제시한 아르투로 모레노였다. 할아버지가 보스턴 브레이브스의 공동 구단주 중 한 명이었던 매코트는, 2004년 다저스를 손에 넣으면서 메이저리그 구단주라는 평생의 소원을 마침내 이뤘다. 처음 매코트는 나쁘지 않은 구단주였다. 루퍼트 머독 시대(1998-2003) 한 번도 포스트시즌에 나가지 못했던 다저스는, 매코트가 온 후 첫 6년 간 네 차례 진출했다. 하지만 좋은 날은 오래 가지 않았다. 매코트는 구단 매입에 쓴 4억 달러의 대금 대부분을 대출금으로 충당했는데, 여기에 이혼 소송까지 겹치자 심각한 자금난에 시달렸다(그 사이 네드 콜레티는 클리프 리를 영입할 수 있었던 기회를 두 번이나 놓쳤다). 한계에 몰린 2012년 5월, 결국 매코트는 다저스를 포기했다. 매코트가 몰락해 준 덕분에, 다저스에는 엄청난 자금력을 가진 새로운 주인들(스탠 카스텐 & 마크 월터)이 들어왔다. 이들은 천문학적인 21억 달러를 들여 다저스를 산 다음 다시 1년 반 만에 6억5000만달러를 투자했다. 그리고 이러한 '선행 투자'는 중계권 대박으로 이어졌다. 타임워너와 연간 3억2000만 달러에 이르는 25년짜리 계약을 맺은 것. 사무국에 수익 배분금으로 내는 1억 달러를 제하고도 2억 달러가 남는 이 계약은, 중계권료에 대한 인기가 절정에 올랐을 때 맺어진 것으로, 앞으로도 경신이 어려울 전망이다. 다저스는 이 계약을 통해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많은 돈을 쓸 수 있는 구단이 됐다. 그리고 보스 시절의 양키스와 마찬가지로, 앞으로 영원한 우승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됐다.

※ 참고 문헌
Baseball (조시 벡시)
History of Major League Baseball (레너드 코페트)
야구란 무엇인가 (레너드 코페트)
Baseball America Draft Almanac
Big Book of Baseball Lineups (롭 네이어)
LA 타임스 기사
고 이종남 기자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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