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June 19, 2013

내 마음의 밥상 - 시편 120편 2절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

내 마음의 밥상 - 시편 120편 2절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 

2절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주소서"

속이거나 이용하거나 교묘하게 말을 바뀌거나 
한두마디 확실치 않는 것을 
더 붙이는 사람들이 있다.

진실만을 말할 수 있는 담대함이 있으면 좋겠다

거짓은 아니나 자신에게 불리한 말은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말이 제 3자를 힘들게 만든다.

1. 항상 정직과 진실함을 갖는 담대함을 갖게 하소서
2. 나를 힘들게 어렵게 하는 거짓 입술과 속이는 혀로 부터 나를 지켜주소서
3. 거짓 입술과 속이는 혀로 인해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자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시옵소서
4. 이 땅에 하나님의 정의만이 세워지는 은혜 있게 하옵소서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77045

'통계조작' 이명박정부, 어떻게 국민을 속였나?

지니계수·물가·인구추계 통계 조작 의혹... 국민들만 불쌍
6월 18일자 <한겨레> 1면과 4, 5면에서 전한 이명박정부의 통계 조작 행위는 국정원 선거 개입에 이어 정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정부가 정권 유지를 위해 통계까지 조작하고 발표시점까지 바꾸는 것은 국민을 속였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국기문란행위'라고 할 수 있다. 하는 일의 특성상 나는 각종 통계를 매우 많이 들여다보는데 그동안 분배지표를 들여다보면서 가졌던 '통계조작' 의구심이 그냥 심증만이 아니었음을 확인했다.

소득 분배의 불평등도를 나타내는 지표인 지니계수가 노무현정부 때까지 계속 높아졌는데 경제위기가 시작된 이명박정부 들어 오히려 더 낮아지는 것으로 통계를 조작했다. 그런데도 이런 통계조작을 통해 이명박정부는 '노무현정부 때 악화된 소득격차를 개선했다'고 홍보한 것이다. 현실을 바꾼 게 아니라 통계를 조작해 사람들 인식을 조작하려 한 것이다. 이는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범죄행위다.

더구나 <한겨레> 보도를 보면 상대적으로 조금 더 현실에 가깝게 작성된 지니계수 지표가 포함된 가계금융복지조사 결과를 의도적으로 대선 직후에 공표한 것으로 드러났다. 정말 이것이야말로 국민들을 우롱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통계는 정확한 현실 진단과 대책을 내놓기 위해 꼭 필요한 국가 운영의 필수 인프라다. 통계가 왜곡되거나 부실하면 국가 운영에 큰 문제가 생기고 결국 국민 다수에게 피해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이명박정부가 '고성장 기조'를 합리화하기 위해 했던 것처럼 보험료나 금반지 같은 것들을 물가개편 작업 때 넣지 않으면 물가 상승률이 실제보다 낮아진다. 실제로 2011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연간 4.0%로, 한은의 물가통제 목표 상한선을 찍은 수치였다.

만약 이전 물가 체계를 그대로 가져갔더라면 그 수치는 4.4%로, 많은 언론과 국민들의 더 많은 분노를 샀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물가통계를 실제보다 낮게 나오도록 '마사지'하면 한은이 저금리 정책을 지속할 수 있는 배경으로 작용한다. 그 경우 실제 소비자물가 상승세는 계속 지속돼 대다수 일반가계에는 더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물가통계 '마사지', 저금리 정책 배경으로

기사 관련 사진
▲  이명박 전 대통령
ⓒ 유성호
사실 이밖에도 통계조작 의혹이 드는 건 많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 가운데 하나가 향후 인구추계 통계라고 할 수 있다. 통계청은 2011년 새로운 인구추계 결과를 내놓으면서 갑자기 인구감소 추정 시기를 2018년에서 2030년으로 변경했다. 갑자기 무슨 사회경제적 큰 변화 발생한 것도 아닌데 12년이나 인구감소 추정 시기를 늦춘 것이다.

인구감소 추정 시기를 늦춰잡은 가정 몇 가지를 보니, 2007년 이후 출산력이 가장 높은 30대 전반 여성의 일시적 인구 증가가 향후 수십 년 동안 지속된다거나 이명박정부의 적극적 이민정책으로 인한 국제인구순유입이 지속된다는 식으로 매우 낙관적으로 가정했다.

이미 올 초부터 30대 전반 여성의 인구가 다시 감소세로 돌아서 출산율도 떨어지는 등 그 같은 낙관적 가정이 현실성이 없다는 게 드러났다. 그런데도 이렇게 낙관적 가정이 너무나 당연한 듯이 통계청 추계로 발표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각종 연구와 정책들이 이뤄지니 문제가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인구감소 시기가 늦춰지면 건설업계가 주택 공급을 더 지속해야 하는 명분이 되기도 해 결국 가뜩이나 공급 과잉인 주택시장이 더욱 과포화상태가 되게 만든다. 또한 부동산업계에서는 이를 근거로 인구감소 시기가 늦춰져서 2030년까지는 대세 하락이 안 일어난다는 궤변을 늘어놓기도 했다(억측이길 바라지만 나는 실제로 정부가 통계를 통해 부동산시장을 부양하기 위해 인구감소 시기를 늦추도록 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갖기도 했다).

또한 인구추계가 좀 더 낙관적으로 달라지면 이를 바탕으로 한 국민연금재정추계도 실제보다 낙관적인 결과가 도출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통계 왜곡이 일으키는 문제는 심각하다.

기초통계 왜곡해 보도자료 내놓기도

또한 정부가 기초통계를 입맛대로 왜곡해 보도자료로 내놓는 사례들도 적지 않다. 자신들의 정책을 합리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통계까지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게 기획재정부가 실효 법인세율 부담 관련 통계를 왜곡한 경우다. 

2012년 들어 <한겨레> 등 상당수 언론이 삼성전자 등 재벌대기업들의 실효 법인세율이 매우 낮다는 보도를 잇따라 내놓자 기획재정부는 2012년 7월 19일 이를 반박하는 보도참고자료를 냈다. 당시 기획재정부는 보도참고자료를 통해 국세통계연보를 이용한 실효법인세율을 거론하면서 중소기업의 실효법인세율이 13.1%로 낮은 반면 대기업의 실효법인세율이 17.7%로 높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 보도참고자료에서 기획재정부는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분류 기준을 명확히 밝히지 않았으나, '그림1'을 보면 과세표준 구간별 실효법인세율 변화 추이를 숨긴 채 자의적으로 나눈 중소기업과 대기업 분류를 통해 상황을 호도했다. 기획재정부가 중소기업으로 분류한 대상기업은 상대적으로 실효세율이 낮은 50억 원 이하 기업 23만2837개 기업이었다. 명목세율 10% 적용대상인 과세표준 2억 원 이하가 79.5%를 차지해 실효세율이 낮을 수밖에 없는 대상을 중소기업으로 잡은 것이다.

반면 대기업은 현행 최고세율 22% 적용 대상인 과세표준 200억원 초과 기업으로 잡았다. 언론은 삼성전자 등 극소수 재벌대기업의 실효법인세율 부담이 중견기업보다 오히려 낮다는 점을 지적했는데, 대기업의 범위를 넓게 잡아 사실상 '물타기'를 한 것이다.

기사 관련 사진
▲ <그림1> 이명박정부의 실효법인세율 왜곡 주) 2011년 국세통계연보 및 기획재정부 보도참고료를 바탕으로 선대인경제연구소 작성
ⓒ 선대인

'그림1'에서 볼 수 있듯이 실효법인세율이 '200억 원 이상~500억 원 초과' 구간을 지나면서 기업 규모가 커질수록 실효 법인세율이 오히려 낮아지고 있는 추세를 기획재정부가 감추려고 의도적으로 왜곡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런 식으로 중소기업과 대기업을 자의적으로 구분해 실효법인세율을 제시하다 보니 '50억 원 초과~100억 원 이하', '100억 원 초과~200억 원 이하' 과표 구간 기업들이 기재부 분류에서는 통째로 빠져버렸다.

엉터리 통계에 코미디 속출... 국민들만 '불쌍'

꼭 통계 조작이나 마사지, 통계 왜곡이 아니더라도 실업률, 물가, 부동산 가격, 미분양 물량, 심지어는 GDP통계까지 현실과 동떨어지거나 부실한 통계들이 국내에는 수두룩하다. 그런 부실 통계들을 바탕으로 국가운영을 하니 어떤 정권이 들어서도 제대로 대책을 내놓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통계가 엉터리니 코미디 같은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실제로 모두가 체감하듯이 고용난이 매우 심각한데도 일시적으로 베이비부머 은퇴자들의 자영업 일자리가 많아지니 박재완 전 고용노동부 장관은 '고용대박'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또 국민은행 주택가격은 3% 밖에 안 떨어졌는데도 4·1종합부동산대책 같은 대대적 부양책을 내놓는 앞뒤가 맞지 않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결국 국민들이 불쌍할 뿐이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몇 년 전 "일반 국민들이 부동산 호가에 속지 않도록 국토해양부 실거래가를 왜 국민들이 보기 편하게 만들지 않느냐"고 LH공사에 문의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담당자가 "위에서 그렇게 하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라고 답했다. 이것이 과연 국민을 위해 일하는 정부요, 공공기관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익히 알다시피 한국은 정보의 생산과 유통, 소비 과정이 기득권에 유리하게 왜곡돼 있다. 정부 정책이나 경제현상을 설명하는 증권사나 정부 산하 연구소, 재벌계 연구소 등은 이해관계나 '상부의 압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광고에 목을 맨 상당수 언론들은 기득권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정보들을 주로 보도한다. 그런데 이 같은 정보 왜곡을 바로잡고 공익에 봉사해야 할 정부부터가 오히려 기초통계를 조작 또는 왜곡하고 있으니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앞서 말했듯이 통계는 국가운영의 기초 인프라다. 이 인프라를 정권의 입맛에 따라, 또는 일부 정부 부처의 관료적 이해관계에 따라 조작하거나 왜곡하는 것은 중대 범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박근혜정부는 정권의 입맛에 맞춰 통계 조작이나 왜곡이 재발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한 가뜩이나 부실한 통계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현실을 제대로 반영할 수 있는 통계 시스템 구축체계를 갖춰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선대인 기자는 선대인경제연구소 소장입니다. 선대인경제연구소는 99%가 1%에 속지 않는 정직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연구소의 연간 구독회원이 되시면 경제를 보는 안목을 키우는 한편 연구소의 정직한 목소리를 후원하실 수 있습니다.

분노 - 국제제자훈련원 목적이 이끄는 매일의 묵상


분노를 다스리기로 결단하라

“[사랑은] … 성내지 아니하며” (고전 13:5)
성경은 “사랑은 성내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이는 “사랑은 결코 화를 내지 않는다.”라는 말이 아니다. 사실 때때로 사랑의 행위에는 화가 나는 것도 포함된다. 예수님도 아버지의 집인 성전이 시장처럼 된 것을 보시고 화를 내셨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그 사람에게 화가 날 수 있다. 그 분노는 의롭게 보일 때도 있고 이기적으로 보일 때도 있지만, 보통은 우리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가장 화 나게 만드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물학적 구성에 화를 내는 능력을 넣으셨다. 화가 나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것이 파괴적인 행위로 자신을 몰고 가도록 허락하는 것이 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감정 그 자체는 죄가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도 분노하신다고 말한다.
화가 나는 것은 피할 수 없지만, 그것을 조절하는 법은 배울 수 있다. 분노를 다스리기로 결단하면 그것은 ‘의무’라기보다는 ‘자산’이 될 것이다. 즉 “그게 바로 나야. 화가 나는데 어떡해? 난 화를 참을 수 없어.”라고 하는 것처럼 분노에 대해 변명하고 정당화하는 것을 그치게 된다.
분노는 통제될 수 있다. 당신은 누군가와 말다툼이 시작되어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는데, 바로 그 때 전화벨이 울렸던 경험이 있는가? 자신이 화를 얼마나 빨리 다스릴 수 있는지 보라! 당신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분노를 훨씬 잘 통제할 수 있다. 화를 다스리기로 결단하라. 그리고 이렇게 고백하라. “저는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화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다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자.
  • 예수님은 아버지의 집인 성전이 시장처럼 된 것을 보시고 화를 내셨지만, 예수님을 ‘화 내는 분’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는 “그게 바로 나야. 화가 나는데 어떡해? 난 화를 참을 수 없어.”라는 주장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 당신이 마지막으로 버럭 화를 낸 때는 언제인가? 오늘의 교훈을 참고로 앞으로는 그 화를 다르게 해결할 수 있겠는가?
분노의 댓가를 기억하라

“어리석은 자는 성급하게 굴고 신중한 사람은 오래 참는다.” (잠 14:17, 공동번역)
성경은 통제되지 않은 분노에는 늘 가격표가 붙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을 다음 구절과 연관 지어 확인해보라.
  •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 (잠 15:18)
  •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성내는 자는 범죄함이 많으니라” (잠 29:22)
  • “어리석은 자는 성급하게 굴고 신중한 사람은 오래 참는다.” (잠 14:17, 공동번역)
성경은 말한다. “자기 가족을 괴롭히는 사람은 얻는 것이 없으며 미련한 자는 지혜로운 사람의 종이 될 것이다.” (잠 11:29, 현대인의 성경)
화를 참지 못할 때마다 우리는 지는 것이다. 번번히 분통을 터뜨리면 될 일도 안 된다. 영어에서 위험(danger)은 분노(anger) 앞에 d만 더 붙인 것이다. 분노는 위험하다. 분노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 명성, 배우자, 직장, 건강까지.
몇 년 전에 읽은 인간 심장에 대한 의학 연구에 따르면, 삶 속에서 적의나 반감을 줄이면 수명이 연장된다고 한다. 부모들이여, 기억하라. 우리는 분노를 통해 아이들에게 자극을 줌으로써 단기적인 이득(자녀가 두려움 때문에 순종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나,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우리가 지게 될 것이다. 분노는 늘 스스로 소외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분노는 사람들을 끌어들이기보다는 쫓아내기 마련이다. 또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대신, 분노는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의 필요에 대해 냉담하고 당신에 대해 화가 나게 만든다.
분노를 다스리는 법 중 하나는 그것 때문에 당신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되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다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자.
  • 과거에 분노는 당신의 의사 결정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 과거에 당신은 분노 때문에 인간 관계에서 어떤 대가를 치렀는가? 현재의 인간 관계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것을 억제하느니라” (잠 29:11)
화가 났을 때, 충동적으로 반응하지 마라. ‘참음’은 화를 통제하는 데 훌륭한 도구이다. 이는 무한정 참으라거나 심지어 하루를 넘기라는 말이 아니다. 성경도 화가 난 상태로 잠자리에 들지 말라고 말한다. 내가 말하는 ‘참음’은 5분이다.
화가 나기 시작하면, 몇 분 동안 ‘타임 아웃’ 시간을 가지라. 잠시 상황에 대해 곰곰이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갖는 것이다. 잠시 멈춰 생각하지 않으면 잘못된 행동을 하기 쉽다. 반응하기 전에 심사 숙고해야 한다.
화가 나면 뒤로 물러서서 잠시 시간을 가지며 하나님의 관점에서 상황을 바라보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성경에서 지혜로운 사람이 분노를 억제한다고 한 말에 주목하라. (잠 29:11) 이것을 현대적인 표현으로 바꾸면 “지혜로운 사람은 잠시 멈춰서 열을 식힌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독립선언문을 쓴 토머스 제퍼슨은 이렇게 말했다. “화가 났다면, 입을 열기 전에 열을 세라. 화가 많이 났다면 일부터 백까지 세라.”
다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자.
화가 나는 이유를 이해하면 더 잘 인내할 수 있고, 심지어는 허물까지도 덮어줄 수 있게 된다. (잠 19:11) 다음과 같이 자신이 화가 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질문 세 가지를 던져보라.
  • 나는 왜 화가 나는가?
  •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 그것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엡 4:26a)
화를 푸는 데는 유익한 방법도 있고 해로운 방법도 있다. 예를 들어 때때로 우리는 자신의 분노를 인정하기보다 화가 난 상태에 머물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화가 났는데도 인정하지 않는 것은 거짓말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죄이다.
분노가 꼭 잘못된 것은 아님을 명심하라. 분노는 그것을 부적절하거나 파괴적인 방식으로 표출했을 때만 잘못된 것이다. 목사로서 내 경험에 의하면, 우리 중 대부분은 두세 살 때 분노를 표현하는 법을 배웠으며, 어른이 돼서도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분노를 표현한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지금은 이것이 통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얻고자 했던 목표가 화를 내기 전보다 더 멀어지게 되는 방식으로 분노를 표현한다. 부적절하게 표현된 분노는 의도한 것과 정반대인 결과를 낳는다. 사람들을 향해 분노를 터뜨리면 변화를 지속시킬 수 없다. 더 많은 분노와 소외만 초래할 뿐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그렇게 한다.
분노는 결코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분노는 다음 세 가지 중 하나의 증상이다. 상처, 두려움, 또는 좌절. 이 세 가지 때문에 우리는 화가 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잠시 멈춰 마음을 가라앉혀야 한다.
다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자.
분노의 근원을 이해하면 적절한 방식으로 반응하고, 결과적으로 분노로 인해 “죄를 짓지” 않게 된다. (엡 4:26) 잠시 멈춰 마음을 가라앉힐 때, 스스로에게 다음의 질문을 던져보라.
  • 내가 상처를 받았는가?
  • 내가 두려워하고 있는가?
  • 내가 위협을 느끼고 있는가? 아니면 뭔가 귀중한 것을 잃고 있는 것 같은가?
  • 내가 좌절했는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 (롬 12:2a)
행동하는 방식은 느끼는 방식에 의해 결정된다. 느끼는 방식은 생각하는 방식에 의해 결정된다. 행동 방식을 바꾸고 싶으면 사고 방식을 먼저 바꿔야 한다. 분노의 부적절한 관리가 습관화되어(툴툴대기, 울분 터뜨리기, 비난하기 등) 이를 바꾸고 싶다면, 먼저 정신을 개조할 필요가 있다.
가족상담가인 개리 스몰리는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라고 제안한다. “나는 화를 내는 것을 즐기는가?” “화를 내면 내가 의도했던 결과가 나타나는가?” “동일한 결과를 좀더 효과적인 방법으로 얻을 순 없을까?” “나는 어떻게 달라질까?”
스몰리는 자신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 답을 적고 6개월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총 26번이 될 것이다) 큰 소리로 자신에게 읽어주라고 말한다. 또한 다른 사람 앞에서도 읽어보라고 말한다. 이렇게 하는 게 일이 많아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당신은 이 습관을 바꾸는 것에 대해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가? 분노를 통제하는 것에 대해 얼마나 심각하게 여기는가?
나는 자신에게 쓰는 편지에 성경 말씀을 인용하기를 제안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의 생각을 채우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게 될 것이다.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사실 분노하는 이들은 불안정한 사람들이다. 불안정할수록 더 많은 것들에 화가 나기 마련이다. 불안정할수록 더 예민해지고 더 짜증이 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이 얼마나 안전하고, 당신이 하나님께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해할 때, 당신은 화가 덜 나게 될 것이다.
다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자.
  • 에베소서 1장과 로마서 8장을 읽어보라.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우리가 그분 안에서 얼마나 안전한지 가르쳐줌으로써 분노를 방지하는 성경 말씀들이다.

Tuesday, June 18, 2013

한 날 묵상 - 막 4;21-25절 <등경위에 등불이 있어야 하며, 그 등불은 절대 꺼지지 말아야 합니다>

한 날 묵상 - 막 4;21-25절 <등경위에 등불이 있어야 하며, 그 등불은 절대 꺼지지 말아야 합니다>

1. 믿음의 사람들은 이 말을 기억해야 한다. "철저하게 동일시하고, 철저하게 구별되라"

2. 이 말의 의미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다. 세상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과는 말씀안에 완벽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3.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인의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4. 21절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 등불을 켜기 위해서는 등불을 등경위에 두어야 합니다.

5. 이는 다른 말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6. 결코 세상과 구별되어 살 수 없습니다. 그들만의 리그는 바르지 못합니다. 그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합니다.

7. 우리는 등불입니다. 역할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곳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한 역할이 있지만, 세상 속에서 감당해야 할 역할이 있습니다. 세상속에서 감당해야 할 역할을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곳에서는 결코 감당할 수 없습니다.

8. 따라서 세상에 속해 그들과 철저하게 동일시되어 살아가는 삶이 필요합니다.

9. 그러나 그들과 동일시한다고 해서 그들의 문화나 가치관을 공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피조물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10. 타락의 시대를 살아가지만,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을자로 살아갑니다. 타락한 모습으로 태어났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해진 상태로 살아가야 합니다.

11. 이를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 있습니다. 등경위에서 어두움을 비치는 삶입니다.

12. 등경위에 등불은 절대 꺼지면 안됩니다. 티가 있어서도 안됩니다. 티가 있는 그 부분은 빛이 제대로 비추지 안기 때문입니다.

13. 이 일을 적극적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22절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14. 스스로 숨지 않아야 하고, 스스로 감출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빛이 되어 비추는 섬김에 바로 적극성이 필요합니다. 스스로 이 사역을 잘 감당하도록 찾고 나서야 합니다. 수동적인 아닌 적극적인 비춤이 필요합니다.

15. 그렇게 하기 위해서 세상에 화려함에 눈을 두어서는 안됩니다. 어느 누구도 가지 않는 곳을 비추어야 합니다. 또한 어느 누구도 함부러 건드릴 수 없는 영역으로 고난을 각오하고 들어가야 합니다. 세상 권력이 집중된 곳이 바로 우리가 꼭 비추어야 할 곳입니다.

16. 세상 사람들이 철저히 가지 않으려고 하는 곳으로, 또한 세상 사람들이 철저히 가려고 하는 곳에 가야 합니다.

17. 한 갈래는 철저한 자기 포기, 자기 버림, 자기를 내어 놓어야 가능하며, 한 갈래는 어떤 고난과 역경에도 굴복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가 필요합니다.

18. 두 갈래 모두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온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19. 이를 잘 감당하기 위해 늘 말씀으로 자신을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온전히 비추도록 해야 합니다.

20. 그래서 조심해야 합니다. 24절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21. 왜냐하면, 빛으로 비는 인생은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의 전부를 노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빛누는 자들의 아주 작은 실수도 그들에게는 먹이감입니다.

22. 왜냐하면, 악한 영, 어두움의 영은 빛을 싫어하기 때문에 언제든지 빛에 속한 자녀들을 넘어뜨리려 하거나, 영향력을 절대적으로 줄이려 하기 때문입니다.

23. 따라서 빛추는 섬김을 잘하기 위해서, 세상을 향한 모든 판단은 오직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판단을 나의 영역이 아닙니다.

24. 왜 저 사람은 내가 계속 비추어도 항상 어두움에 있는거야? 저 사람을 절대로 비출 수 없는 사람이야? 이런 저런 판단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25. 사람들을 향한 세상의 기준은 비교판단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의 기준 오직 하나 사랑, 온전한 사랑, 죽도록 사랑, 전적인 헌신뿐입니다.

26. 우리의 귀를 날마나 말씀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말씀에 집중하지 않으면,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듣게 되어 세상의 기준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27. 결국은 우리의 생이 끝나는 마지막에 모든 것을 온전히 알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는 우리의 이 땅에서의 어리석음이 결코 어리석음이 아님을 마지막 날, 내 생이 마치는 그 날 우리는 기뻐 알 수 있습니다.

28. 그 때까지는 등불이 됩니다. 등경위에 등불이 됩시다.

29. 오직 나에게만 집중하십니다. 내가 깨끗한 등불이 되어 조그이라도 더 잘 비출 수 있는 일에 집중합시다. 이 땅에서의 삶은 그것이만 족합니다.

30. 오늘 한 날도 세상속에 세상 사람들과 철절히 동일시되어 살아가지만, 철저히 말씀으로 구별되어 어둔 세상에 한 줄기 빛이 되는 어두움을 비추는 인생을 살아가는 한 날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을 축복합니다.

31. 할렐루야! 아멘!


베드로를 통해 조명한 지도자의 넘어짐 - 리더십네트워크

리더십네트워크 -  639호 - 베드로를 통해 조명한 지도자의 넘어짐

우리는 베드로를 가리켜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합니다. 많은 신앙인이 베드로의 열정과 추진력을 좋아합니다. 또한, 그가 초대 기독교 역사에 미친 큰 영향력을 존경해 마지않습니다.
그러나 한편 우리는 누가복음 22장 31절에서 62절에 나타난 베드로의 넘어짐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습니다. 끝까지 주를 따라가겠다고 호언장담한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며 넘어집니다. 이런 베드로의 모습을 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지도자들이 어떨 때 넘어지게 되는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넘어진 것은...

1. 지나치게 확신에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단의 영향력을 경고하셨으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해 옥에도 가고 기꺼이 죽을 수 있다고 장담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방어한 것으로 자신의 말을 증명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몇 시간 되지 않아 그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베드로는 지나치게 확신한 나머지 그러한 일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지나친 확신의 위험성입니다.

2. 피곤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깨어 기도했어야 했지만 모두 잠들었습니다. 피로와 피곤이 쌓이게 되면 큰 타격을 받게 됩니다. 피로가 심해질수록 사단의 공격에 쉽게 넘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도자들이 지나치게 업무에 시달리고 쉬지 못해 육체적 정서적 피로가 쌓이면 방심하게 되고 결국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3. 기도하는 것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기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기도하지 않고 잠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기도하지 않을 때 넘어지기 쉽습니다. 사실 기도하지 않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자신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먼저 일을 저지르고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마치 베드로가 칼을 휘두르며 예수님을 방어한 것처럼 말입니다.

4. 예수님과의 거리가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체포되시자 거리를 두고 따라갔습니다. 지리적인 거리만 멀어진 것이 아니라 마음의 거리까지 멀어졌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는 주님을 위해 죽기까지 하겠다고 장담했지만, 주님과 멀어지고 도전을 받게 되자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우리 역시 말씀과 기도를 통해 주님과의 거리를 유지하지 못한다면 쉽게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베드로의 넘어짐 속도는 매우 빨랐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도자는 서서히 넘어집니다. 심지어 재난이 닥치기 전까지 인식을 못 하기도 합니다. 좋은 지도자는 자신의 상태가 베드로와 같지는 않은지 돌아보며 자신의 마음을 지킵니다. 오직 주님만을 온전히 붙잡고 항상 자신을 점검하며 나아가는 좋은 지도자가 되시길 소망합니다.

이 글은 탐 레이너(Thom S. Rainer, the president and CEO of LIfeWay Christian Resources)의 “7 Signs a Leader Is About to Fall”을 번역 및 요약 각색한 것입니다.

Thursday, June 13, 2013

한 날 묵상 - 막 4:10-20 <씨뿌리는 비유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의미를 깨닫다>

한 날 묵상 - 막 4:10-20 <씨뿌리는 비유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의미를 깨닫다>

1. 하나님의 나라는 말씀과 깊이 관련이 있다.

2. 말씀을 떠나서는 하나님 나라를 말할 없다.

3.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 들어야 할지 난감하다.

4. 미국 바나그룹의 설문조사에 의하면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의 18% 종교가 없는 사람의 9%가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바나그룹은 놀라운 사실이라고 코멘트를 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기독교인의 아에 성경을 안 읽는다는 사실일게다.

5. 하나님의 나라안에 살아가기 원한다면, 반드시 말씀을 사랑해야 합니다. 말씀을 사랑하는 것은 말씀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을 포함합니다.

6. 하나님의 나라는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안에 살아 있습니다.

7. 하나님 나라에서 열매맺는 삶은 말씀에 마음에 잘 뿌리내리기면 하면 됩니다.

8. 우리가 가장 쉽게 접할 수도 있고, 마음만 먹으면 말씀을 들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씀의 열매를 맺기가 쉽지 않습니다.

9. 왜냐하면, 이는 익숙한 나의 생활패턴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육체적 만족을 결코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10. 말씀이 우리 안에 열매맺으려 할 때 방해하는 것들은 세상의 것들입니다. 내 안에 익숙한 것들입니다. 그것들이 문제입니다.

11. 나와 지금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게 문제입니다.

12. 그런데 나와 지금 가까이 있는 것이 말씀이라면, 그는 반드시 열매를 맺을 수 밖에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때에 열매는 맺는 과실처럼 삶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13. 지금 내 가까이 무엇이 있는가? 스마트폰? 가족? 건강? 부? 명예? ...

14. 이러한 것들은 말씀이 뿌리내리고 열매를 맺어가는 절대 방해물들입니다.

15. 14절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위해 말씀이 우리 가운데 뿌려졌습니다. 말씀을 듣을 수 있고, 성경이 주어졌습니다. 그 뿐아니라 스마트폰안에 성경 어플도 널려 있습니다. 이런 의미로 볼 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참으로 축복받는 세대입니다.

16. 말씀을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15절 "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 말씀을 마음으로 듣지 않고 귀로만 듣는다.

17. 외적인 것들이 말씀이 잘 뿌리는데 방해가 됩니다. 말씀이 뿌리 내리는데 외적인 것들이 방해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교회를 못가게 하시는 부모님, 가족들이 있습니다. 말씀을 들을 수 없도록 기독교를 인정하지 않는 국가도 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로 인하여 말씀을 읽을 수 없을 만큼, 예배를 참석하지 못할 만큼 분주한 것들이 나의 인생을 이끌어 갑니다.
16-17절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 외적인 요인으로 인해서 말씀을 빼앗겨 버리다.

18. 말씀이 마음에 울릴 때, 열매맺지 못하게 하는 방해들은 내 안에 내적인 것들입니다. 내면의 욕심입니다. 성령의 법과 사망의 법이 싸우는데, 성령의 법이 이기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18-19절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 내적인 요인이 문제다. 마음이 문제다. 말씀이 마음에 들어왔지만, 이전 것들과 새 것이 싸울 때에 이전 것들로 인해 새 것이 잘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19.  열매 맺기 위해서는 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20절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20.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열매 맺는 것을 삶의 최우선에 둡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열매 맺는 것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들로부터 능히 이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21. 오늘 한 날도 하나님의 나라의 열매를 맺는 좋은 마음의 밭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2. 할렐루야! 아멘!

===
11절 "하나님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12절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씨 뿌리는 비유
14절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15절 "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 말씀을 마음으로 듣지 않고 귀로만 듣는다.

16-17절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 외적인 요인으로 인해서 말씀을 빼앗겨 버리다.

18-19절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 내적인 요인이 문제다. 마음이 문제다. 말씀이 마음에 들어왔지만, 이전 것들과 새 것이 싸울 때에 이전 것들로 인해 새 것이 잘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20절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Tuesday, June 11, 2013

"예수가 선택한 열두 제자 이야기"(한기채) 중에서

퍼온글

http://archive.ozmailer.com/archive/sns_article.php?sid=2202739


"예수가 선택한 열두 제자 이야기"(한기채) 중에서


예수님은 끝까지 그(가룟 유다)를 사랑하사 여러 차례 경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유다의 발을 씻기실 때도, 유월절 식사를 하시는 자리에서도, 몸소 떡을 한조각 집어 유다에게 건네실 때도 예수님은 사랑의 손길로, 가슴으로, 눈길로 말씀하셨지만 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무릎을 꿇기보다 더욱 완악해져서 사탄의 하수인이 되었습니다.

저는 하나의 인간으로서 예수님의 이 사랑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배신자의 발까지 씻겨주셨을까요? 왜 그까짓 배신자와 마지막 식탁을 함께하셨을까요? 그리고 뭐가 예뻐서 그자에게 떡 한쪽을 손수 떼어주셨을까요? 더구나 그자가 체포조와 함께 와서 미소를 머금으며 키스할 때 "이 천하에 몹쓸 녀석" 하지 않으시고 "친구여"(마26:50)하셨을까요?

앞에서 인용했던 레이 앤더슨의 책은 "유다야, 집으로 돌아오라. 다 용서하마!"라는 프롤로그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배신자를 끝까지 사랑으로 대하셨습니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걸 아시고 말씀하시면서도 그가 나중에 회개하고 돌아올 것을 기대하셨던 것처럼 유다의 모든 것을 아심에도 불구하고 그 또한 나중에라도 회개하기를 기다리셨던 건 아니었을까요?

똑같은 경고를 받았던 베드로가 닭 우는 소리에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통곡하며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온 것처럼 유다도 배반한 후에라도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왔다면 제2의 베드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p.45-46)

한 날 묵상 - 막 4:1-9 <귀 있는 자가 들어 열매를 맺을찌어다>

한 날 묵상 - 막 4:1-9 <귀 있는 자가 들어 열매를 맺을찌어다>

1. 말씀은 들어 열매를 맺기까지 나아가야 한다.

2. "은혜 받았다"라는 말을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3. "은혜 받았다"라는 말에 말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충분히 알아야 한다.

4. 은혜는 하나님의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결코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이러한 은혜를 주시는 것일까? 자녀들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은혜를 주시는 것일까?

5.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는 목적이 있다. 바로 거룩과 정결한 삶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분명한 목표가 있으시다.

6.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 편에서 "은혜를 받았다"하는 말은 말을 듣고 그 말에 공감했다는 그 이상이다. 또한 말씀을 듣고 깊이 찔림이 있어 회개했다는 그 이상이다. 또한 말씀을 들을 때 내 귀에 쏙쏙 들리며 이해가 되었다는 그 이상이어야 한다.

7. 흔히 우리가 은혜를 받았다는 말을 할 때 난 과연 어느 수준까지 도달한 상태를 가리켜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지에 대해서 오늘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8. 가장 먼저 생각해 볼 것은 9절에서 나오는 "귀 있는 자는 들으라"이다.

9. '듣는다' 말씀을 들을 때 귀로 듣지만, 진정한 들음은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 마음에 울림이 있어야 한다. 마음에 울림이 없는 들음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보내는 것이다.

10. 따라서 말씀을 귀로 듣고, 눈으로 읽을 때에도 말씀을 마음으로 들을 수 있게 된다. 듣는 것을 넘어 말씀을 읽기를 원한다. 일주일에 한 번의 말씀 듣기로는 마음의 울림을 한 주간 지속할 수 없다.

11. 한 번의 예배에 들은 귀한 말씀을 한 주간 내내 되새김질을 통해 마음의 울림을 지속하던지, 아니면 하나님이 우리 시대에 주신 가장 귀한 축복인 성경 말씀을 매일 읽고, 묵상하는 등 성경 말씀을 가까이함으로 마음의 울림을 주든지 항상 마음에 울림이 있는 들음이 우리 안에 날마다, 순간 순간 차고 넘쳐야 한다.

12. 그게 바로 은혜받는 시작이며 첫 걸음이다. 이를 매 순간 하지 않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우리의 은혜와 나의 거리는 자꾸 더 멀어질 수 밖에 없다.

13. 결국 말씀을 들음으로 은혜의 자리로 갈 수 있다.

14. 그러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울림이 있는 상태가 있다고 해서 "은혜를 받았다"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그 이상이기 때문입니다.

15. 은헤를 받았다면 그 말씀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16. 8절 말씀에 보니,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

17. 그렇습니다. 말씀의 씨앗이 마음에 뿌려졌다면, 이처럼 30배, 60배, 또는 100배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열매를 맺기까지 나아가는 것이야 말로 은혜 받은 증거입니다.

18. 매 주일 예배참석하여 말씀듣거나, 또는 매일 성경을 읽었다고 해서 '은혜 받았다',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셨다'라고 말하지 맙시다. 그 말씀이 열매를 맺기 까지 인내하며 수고의 땀을 흘려야 합니다.

19. 왜냐하면 그 말씀이 열매를 맺을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며, 그리고 그 시간속에 열매맺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20. 농부가 봄에 씨앗을 뿌리면 바로 열매가 결코 맺지 않습니다. 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적당한 시간의 기간동안 씨앗이 열매로 맺을 때까지 농부는 그 씨앗이 잘 자라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가꾸고 돌봐야 합니다. 그래야 가을의 추수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21. 3절에서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씨를 뿌렸습니다.

22. 그런데, 4절 "뿌릴 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 들이 와서 그것을 먹어 버렸습니다.

23. 또한 어떤 씨앗은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졌습니다. 그랬더니 5절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절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라 버렸습니다.

24. 또 어떤 씨앗은 가시 떨기에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7절 "가시가 기운을 막으로" 농부가 추수하지 못했습니다.

25. 이러한 씨앗들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농부가 씨를 뿌리긴 했지만, 열매를 수확하지 못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26. 그럼 진정 누가 열매를 맺을 수 있나요?

27. 8절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28. 그렇습니다. 좋은 땅에 떨어져 자라서 무성하여질 때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29. 그럼 좋은 땅이 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30. 바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씀속에 그 비결을 찾을 수 있습니다.

31.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이 말씀을 들을 수 있다면, 즉 마음으로 들을 수 있다면, 그 땅은 좋은 땅으로 가는 출발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32. 앞서 말씀 드림 "은혜 받았다", 그리고 "좋은 땅"을 연결하여 생각해 보면, 은혜를 받아 첫 열매, 하나의 열매일지라도 맺을 때, 그 땅은 더욱 좋은 땅이 되며, 시간이 지나는 동안, 잘 가꾸어 자라게 될 때, 이전보다 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됩니다.

33. 삶에서 하나 하나 열매를 맺어가는 자들이 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열매는 맺어본 사람이 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땅이 더 좋은 땅이 될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34. 오늘도 "귀 있는 자"가 되어 드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마음의 울림이 있는 말씀 생활을 합시다. 그리할 때 그 마음 밭은 더욱 좋은 땅이 되어 하나 하나 열매를 맺어가게 될 것입니다.

35. 추수할 일꾼이 찾아올 그 때에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어 칭찬받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36. 지금 출발합시다.

37. 할렐루야! 아멘!

Thursday, June 6, 2013

한 날 묵상 - 막 3:20-34절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한 이 땅에 누가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인가?>

한 날 묵상 - 막 3:20-34절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한 이 땅에 누가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인가?>

1. 집에서도 편히 쉴 수 없다면, 그는 진정 일중독자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일을 만드는 경우가 아니라, 찾아오는 이들로 인하여 쉼을 얻을 수 없다면, 그는 진정 사랑의 사람입니다.

2. 예수님은 집에서도 편히 쉬실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식사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20절) 예수님은 결코 그들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3. 그런데, 예수님의 이러한 사랑의 섬김에 반대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앞에서 살펴보았고, 또한 본문에서 어김없이 등장하는 서기관들입니다.

4.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바로 "예수의 친족"(21절)입니다.

5. 예수의 친족들이 예수님의 하시는 사역의 일을 듣고 찾아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가 미쳤다"(21절).
 예수의 친족들은 지금 오해하고 있습니다. 진질을 알지 못하고 살던 지역에 떠 돌아다니던 헛소문을 잘못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들도 피해자 입니다. 진실을 알지 못하고 헛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22절에서 보듯이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이 하는 말들이 여러 지역에서 들렸기 때문입니다.
 
6.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눈에 보일 때 미치셨습니다. 바로 사랑에 미치신 것입니다. 사랑의 미치지 않고야 어떻게 쉬고 식사 좀 하려고 찾아온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찾아온 무리들을 받아줄 수 있겠습니까.

7. 예수님의 진정 사랑으로 완전 무장된 사람입니다. 사랑으로 사랑하고 사랑하며 사랑하였습니다. 오직 사랑이었습니다.

8. 그 사랑의 힘이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진실함에서 옵니다. 사랑에 진실함이 있었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할 수 있었고, 어느 누구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9. 예수님의 사랑의 힘의 결과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반응은 앞서 언급한 사람들처럼 예수를 미쳤다 하거나 귀신에 홀렸다 말합니다(21-22절).

10.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도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좇아낸다" 말합니다.

11. 이들의 말에는 예수님을 모욕하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12. “바알세불”은 누구입니까? 왕하1:3 말씀에 의하면, “바알세불”(또는 “바알세붑”)은 블레셋의 다섯 중요한 성읍 중에 하나였던 에그론(Ekron) 사람들이 섬기던 우상이었습니다. 
  그 이름의 원어적인 표현은 히브리어로“바알 즈브브(Ba’al Z’bub)” 즉,“파리떼의 주인(왕)”라는 뜻이 있는데, 이것은 당시 블레셋 지방에서 전염병을 옮기던 파리떼를 지칭했던 말입니다. 결국, 이러한 전염병(역병)을 옮길만큼 힘이 있는 파리떼의 능력이 신의 능력이라고 해서 이들 에그론 사람들은 “바알세불”을 자신들의 신으로 섬겼던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또 다른 경멸하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즉, “바알세불”은 “파리떼의 왕”이라는 뜻 외에, “배설물의 주인(똥의 주인)”이라는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가리켜 “바알세불”이라고 했다면, 이는 매우 경멸하며 모독하는 뜻이 함께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13. 이런 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반응은 사랑과 섬김으로 예수님이 하시고 싶으신 말씀을 단호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14.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주장에 가만히 묵과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그리고 용서받기 어려운 것임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비난했던 적대자들의 생각이 자기 모순적인 것임을 지적하십니다. 한 마디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무너지고, 분쟁하는 집마다 망한다는 말씀입니다. 

15. 나아가 성령을 모독하는 자들에게 임하는 심판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16.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17.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눅11:20 말씀을 보면, “내가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눅11:20)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18.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 임하였느니라"는 말씀입니다. 

19. 예수님의 관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20. 서기관들이 "바알세불"이나 "귀신"의 힘을 의지해서 예수님이 일하시는 문제제기를 결코 사탄은 사탄을 쫓아낼 수 없기에, 예수님의 손을 의지하여 이러한 일들을 하기 때문에,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셨음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21.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랑의 사역을 하심으로 이미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고, 예수님의 사역에 참여하는 자들에도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22.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는 혈족이나 친족, 이해관계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임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23. 누가 예수님의 어머니이며 동생들이 될 수 있는가?

24. :예수의 친족"(21절)이라고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35절)가 되십니다.

25. 예수님이 하시는 사역에 반대자들은 언제나 존재합니다. 친족이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따라서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의 오심과 사역의 이유를 분명히 이해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만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며, 몸된 예수 그리스도안에 한 형제요, 자매가 됩니다.

26. 믿음안에 있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형제, 자매입니다. 몸 된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된 지체입니다.
  친족일지라도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의 헛소문에 빠져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거나, 하나님의 권능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제하는 사랑의 사역을 믿지 않는다면, 결코 예수님의 형제, 자매가 될 수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 나라안에서 한 형제와 자매일 수 없습니다.

27. 오늘 더욱 나의 가족과 친척을 위해 기도합니다. 영적으로 믿음안에서 한 형제 자매이기를 간구합니다.

28. 아울러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로 하나님 나라의 임재의 은혜를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9. 이러한 은혜가 가득한 한 날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30.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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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절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21절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22절 서기관들은 그가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좇아낸다 하니

23-29절 예수께서 ...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31절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33절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34절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35절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미니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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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번트 리더의 특징 - 리더십 네트워크

21세기 초에 들어 우리는 전통적이고 독재적이며 위계적인 리더십의 양식 보다 새로운 리더십 모델을 추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서번트 리더십입니다. 서번트와 리더는 상반된 단어입니다. 상반된 두 단어가 창의적이고 의미 있는 방식으로 결합하면 역설이 발생하게 됩니다. 서번트와 리더도 그렇게 결합하여 서번트 리더십이라는 역설적인 개념을 낳았습니다. 아래 내용들을 통해 서번트 리더로 발전하는 데 더 없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특징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듣기

리더를 평가하는 전통적인 기준은 의사소통 및 의사결정 능력이었습니다. 서번트 리더는 한 집단의 의지를 확인하고 명료화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말을 하나하나 귀담아 듣는데 집중함으로써 이 중요한 능력을 강화해야 합니다.

2. 공감

서번트 리더는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공감하려고 애씁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고유한 재능과 정신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서번트 리더는 동료들의 선의를 믿으며, 그들을 인간적으로 거부하지 않습니다.

3. 치유

어려운 상황을 치유하는 데 도움을 주는 능력은 변형하고 완성하는 강력한 힘입니다. 서번트 리더는 사람들과 기관들이 온전해지도록 도울 기회가 자신에게 주어져 있음을 인정합니다.

4. 설득

서번트 리더의 또 다른 특징은 조직 내에서 결정을 내릴 때 직권이 아니라 설득에 의지한다는 점입니다. 서번트 리더는 동의를 강제하기보다 다른 사람들을 납득시키려고 노력합니다. 서번트 리더는 여러 집단들 사이에서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유능합니다.

5. 인식

전체적인 인식, 특히 자기인식은 서번트 리더를 강하게 만듭니다. 인식은 윤리와 가치가 결부된 사안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며, 상황을 보다 통합적이고 전체적인 관점에서 바라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6. 선견

어떤 상황에서 비롯될 만한 결과를 선견하는 능력을 통해, 서번트 리더는 과거의 교훈과 오늘날의 현실, 그리고 의사결정이 미래에 가져올 결과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선견은 직관적인 정신에서 비롯됩니다.

7. 개념화 

서번트 리더는 원대한 꿈을 꾸는 능력을 키우려고 노력합니다. 이는 곧 일상의 경영 현실을 넘어서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8. 사람들의 성장을 위한 헌신

서번트 리더는 사람들이 노동자로서 기여하는 바를 넘어 본질적인 가치를 지닌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조직에 소속된 모든 개인들의 인간적, 직업적, 정신적 성장을 위해 헌신합니다.

9. 공동체 형성

서번트 리더는 조직에 소속된 사람들 사이에서 공동체의식을 형성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린리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공동체를 재건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유효한 삶의 형태가 되도록 만드는 데는, 충분한 수의 서번트 리더들이 대중운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각자 공동체와 관련된 어떤 특정 집단에 대해 무한책임을 보여줌으로써 그 길을 제시하는 것으로 족하다.”

이상의 것들로 서번트 리더십의 특징을 총망라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들은 서번트 리더십 개념의 초대와 도전에 응하는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힘과 약속을 잘 보여 줍니다. 영향력 있는 리더가 되기 위해 먼저 서번트 리더가 되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기억하는 한 주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 이 글은 스티븐 R. 코비외 32인이 쓴「오늘을 이끄는 힘 ‘리더십’」의 일부를 발췌 각색한 글입니다.

퍼온글

Tuesday, June 4, 2013

한 날 묵상 - 막 3:7-19 <많은 무리들이 나아오지만, 따로 제자들을 세우시다>

한 날 묵상 - 막 3:7-19 <많은 무리들이 나아오지만, 따로 제자들을 세우시다>

1.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 가운데 하신 세 개의 사역의 틀은 이렇습니다.

2. Teaching 가르치시고, Healing 치유하시고, Educating Evangelizing 전파하시THE사역입니다.

3. 인간 관계에서 이 세가지 사역은 꼭 필요하다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가정에서 자녀들과 부모의 관계속에서 이러한 사역의 틀은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4.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세상의 지혜를 가르칩니다. 그리고 상처받은 마음을 감싸줄 뿐 아니라, 후에 장성하여 어른이 될 때 자녀들도 자신과 같은 부모가 되기를 바랍니다.

5. 그래서 교회 교회학교나 교회에서 가르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 아비된 마음으로 학생들을 양육할 것을 강조합니다.

6. 제자가 또 다른 제자를 세워가는 가장 강력한 힘은 바로 부모와 자녀의 관계속에서 THE사역이 이루어질 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7.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동안 아비된 마음으로 양육할 자녀들이 필요했습니다. 친히 함께 숙식하시면서 그들에게 THE사역의 진수를 보여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8. 그래서 예수님은 적당하 때에, 자신의 타이밍에 맞추어 특별히 구별된 12명의 제자들을 부르시게 됩니다.

9. 제자들을 부르시는 모습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10.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원칙이 있으셨습니다.

11. 먼저는 많은 무리들을 중에서 택하지 않았습니다. 
7절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

12. 한편으로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자신을 잘 따르는 사람들 중에서 제자들을 부르시면 그들이 더욱 잘 할 것 같은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13. 그리고 예수님의 신분을 정확히 알 고 있는 사람들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11절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14. 귀신들려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히 귀신의 힘을 빌려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15. 그런데, 예수님의 선택은 그들도 아니었습니다.

16. 예수님께서 이렇게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시고 회복시키신 후 그들을 부르셨다면, 그들은 더욱 은혜에 감사하여 예수님을 잘 따를 수 있었을 것입니다.

17. 그런데 예수님은 따른 무리들, 귀신들어 있는 사람들을 고쳐서 제자로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18. 왜 그리하셨을까요? 제 생각에는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목적이 분명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만약 그 목적이 사라진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다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19. 꼭 이런 원리가 아닐까요?

20. 체스터톤, <정통(오소독시)>에서 보면,
  - 어떤 한 가지를 사랑할 때 그것이 주는 기쁨은 그것을 사랑하게 하는 이유이며 그것이 주는 슬픔은 그것을 더욱 사랑해야 할 이유이다(125페이지)
  - 자신이 사랑하는 장소를 폐허로 만들기에 가장 알맞은 사람은 그곳을 사랑하는 어떤 이유가 정확한 사람이다. 반면에 그곳을 개선시킬 사람은 어떤 이유도 없이 그곳을 사랑하는 사람이다(131페이지)

 참고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ctrans01&logNo=140180658524

21. 그래서 예수님은 12절에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드러남은 기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고난속에 피어나는 사랑에 있는 것이며, 그 사랑을 함께 짊어지는 자들을 통해서 활짝 피우기 때문입니다.

22.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원칙은 분명했습니다.
 13절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23.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원칙은 자신의 일에 열심과 최선과 충성을 다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24. 다윗이 목동으로서 자신의 일을 충성되어 했을 때 그의 성실함과 진실함을 보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25. 왜냐하면 자신의 작은 일에 충성할 줄 아는 사람이 예수님의 주신 사명을 큰 사명으로 알고 그 부르심에 잘 순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6. 지금 주어진 자신의 일에 충성할 줄 아는 사람이, 곧 큰 일을 행할 수 있습니다.

27. 아우구스티누스, "그리스도교 교양" (De doctrina christiana)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작은 것은 가장 작은 것일 뿐이지만, 가장 작은 것에 충성하는 것은 큰 것이다.”
(Quod ergo minimum est, minimum est,sed in minimo fidelem esse magnum est.)

28. 예수님을 원하시는 제자의 상은 예수님을 잘 따라다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명을 성실히 순종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29. 예수님의 사명을 잘 순종하는 사람들이 오늘 이 순간에도 제자도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30. 예수님은 성육신의 이유이자 이 땅에서 자신이 감당해야 할 십자가 사명을 감당하신 후에는 하늘로 올라가야 함을 아셨습니다.

31. 그리고 이제 이 세상에 남아 있어야 할 사람들의 정의를 이렇게 내리셨습니다. 목적을 위해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남겨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32. 그래서 제자들이 필요했고, 제자들이 될만한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진정한 사명을 주십니다. 물론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동안 함께 하면서 훈련을 잘 받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14절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15절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33. 예수님이 감당하셨던 THE사역을 동일하게 제자들도 감당해야 할 THE사역이었습니다.

34. 그래서 많은 무리들속에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말하는 자들에게 기적을 베풀어줌을 통해서 제자들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극히 작은 일이지라도 자신의 일을 충성되이 감당하는 자들중에서 따로 불러 12명의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35. 물론 많은 무리들중에서, 기적을 통해 은혜를 체험한 자들 중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일들에게 충성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 또한 제자로 부름받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어떠한 것이 일상의 성실함과 예수님의 사명을 충성되이 지키는 사모함보다 앞설 수 없음을 제자들의 부르심을 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36. 이제 열 둘의 이름이 나옵니다. 물론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을 포함해서.
16-19절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37. 나는, 당신은 지금 제자로 부름받기에 합당한 자들인가? 
    아니면, 많은 무리들이나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만 알고 신적인 능력이 내게 임하기를 기대하는 자들인가?

38. 오늘 하루 주어진 일과 감당해야 할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합시다. 그것이 가장 큰 것입니다. 당연히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을 수 있는 길입니다.

39. 예수님의 부르심에 아멘으로 결단하는 삶이 결코 세상의 가치로 큰 것이 아니며, 어리석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큰 것이기에 어떤 고난과 아픔이 있는 길일지라도 감사함으로 순종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그리고 그러한 한 날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40. 할렐루야! 아멘!

Saturday, June 1, 2013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려 하지 마라 - 목적이 이끄는 삶을 위한 매일의 묵상 1180호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려 하지 마라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잠 29:25)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해 염려할 때, 우리는 그들에게 휘둘리는 셈이다. 우리는 남들이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길 바라는지 알고자 하고 그와 같이 되려고 하는 데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한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대해 염려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럴수록 비판에 더 굴복하기 쉽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늘 옳은 일을 하는 것은 아님을 뜻한다. 오히려 다른 모든 이들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을 하는 것이다.
또한 이 경우 하나님의 최선을 놓칠 위험이 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바라는 것에 너무 신경 쓴 나머지 정작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 진실 1 -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하나님도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실 순 없다. 비가 오길 기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해가 나길 기도하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 응답하시겠는가? 하나님도 모두를 만족시키실 순 없다. 오직 어리석은 자만이 하나님도 하실 수 없는 것을 하려고 애쓴다.
  • 진실 2 - 반드시 모두를 만족시킬 필요는 없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모두에게 사랑 받고 인정받아야 한다’는 말은 신화이다. 이는 전혀 진실이 아니다. 인생에서 행복하기 위해 모두를 만족시킬 필요는 없다.
  • 진실 3 - 거절은 삶을 파괴하지 않는다. 물론 거절은 아프다. 즐거울 순 없다. 거절은 불편하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이 허락하지 않는 한 삶을 파괴하지 않는다.

모두를 만족시키려고 애쓰길 그치라! 당신이 허락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당신이 자신을 열등하게 느끼도록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사도 바울은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라고 말한다. 이는 다음처럼 생각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나를 좋아하시고 나도 나를 좋아한다. 누군가가 날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좋아하신다면, 내가 하는 것을 맘에 들어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게 무슨 상관이 있는가?”
기억하라. 당신이 하는 그 어떤 것도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줄어들게 할 수 없다. 당신이 무엇을 해도 그분의 사랑을 더 늘릴 순 없다. 하나님은 바로 지금 당신을 완전하게 사랑하신다.
다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자.
  • 당신은 누구에게 잘 보이거나, 인정을 받거나, 만족시키려고 가장 신경을 쓰는가?
  • “당신이 하는 그 어떤 것도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줄어들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은 당신에게 평안을 가져다 주어야 한다. 당신의 삶은 그러한 평안을 어떻게 반영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