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July 5, 2012

죽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죄(4) 분노(忿怒, Anger)


죽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죄(4)
분노(忿怒, Anger)
분노, 그 일상성
1999년 4월의 어느 날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시의 교외에서 총기 사건이 있었다.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두 학생이 총을 난사하여 12명의 학생과 교사 1명이 죽고 26명의 학생이 다친 것이다. 이 두 학생은 평소 흑인들을 싫어한데다가 으스대던 운동부 친구들에 대한 분노를 참지 못해 마구잡이로 총을 난사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많은 무고한 생명을 앗아갔다. 분노의 처참한 잔해인 셈이다. 솔로문 쉽멜은 ‘분노는 폭력, 아동학대, 살인, 강간, 그리고 인종간 국가간 폭력과 갈등에 있어 핵심 역할을 한다’고 했다. 분노가 이처럼 끔직한 죄의 주원인이 되기 때문에 기독교회는 이것을 일곱 대죄의 하나로 취급해 왔다.
분노는 끔찍한 결과를 낳지만 일곱 대죄 가운데 가장 일상적인 죄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어디서나 분노를 접하며 살고 분을 내면서 산다. 거리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신문과 방송에서 늘 분노의 함성과 불끈 쥔 주먹을 듣고 본다. 분노를 통제하지 못하고 밖으로 분출하면, 그 결과는 심각하다. 거의 대부분 이것은 파괴적이고 처참한 결과로 귀결된다. 반대로 분노가 생길 때 이것을 제대로 해소하지 못한 채 너무 억압하면 오히려 다른 병의 원인으로 작용하여 건강을 해치게 된다. 한국인의 독특한 병인 ‘화병’은 분노가 해소되지 못하고 내면에 쌓이므로 생기는 것이다. 최근 현대인에게 마음 다스리는 방법으로 참선이 각광을 받고 있다. 그 궁극적인 목표는 내면에 자리 잡은 독의 뿌리인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정관하고 제거함으로 자기 자신을 바꾸는 것이다. 성경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권고한다.(엡 4:26) 미움과 싸움의 쓴 뿌리인 분노를 이해하고 성격과 결과를 살피는 것이 독소를 제거하기 위해 필요하다. 

감정인가 죄인가?
분노가 화병이나 인간관계 파괴와 같이 파괴적 속성이 크지만, 분노 그 자체는 악이라 할 수 없다. 분노는 자신의 의지나 감정을 거스르고 상하게 하는 것들에 대응하여 일어나는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분노는 감정에 그치지 않고 미움으로 나아간다. 그 원인을 제공한 자에게 해를 입히는 것으로 발전한다.
철학자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에는 동물적 부분과 이성적 부분이 있는데, 분노는 동물적 부문에 속하는 것으로 육체적 욕구에 지배되기에 철저히 이성의 컨트롤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노는 기본적으로 심판하려는 정서와 관련된 것으로 얼마든지 이성과 맞춰갈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분노를 ‘고통을 야기하는 상황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런 반응’으로 보면서 이것은 육체와 이성의 부분에 동시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분노는 중용을 지키면 일종의 덕이 된다 했다. 그래서 덕스러운 사람이란 어떤 상황에서는 마땅히 분노의 감정을 품을 수 있는 자라고 주장했다. 물론 그 대상과 동기는 올바른 것이라야 한다.1) 이러한 생각은 아퀴나스에게로 연결되어져서 신학사상으로 발전된다. 
현대 사회에서 심리학자들은 분노를 지극히 자연스런 인간적 정서로 이해한다. 그러면서 점점 이성과의 관계에서 그것을 이해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들은 분노가 주로 자아가 손상되었을 때 일어나는 것으로 보고, 때로는 통제되고 때로는 치유되어야 할 대상으로 분노를 취급한다. 그러면 기독교회는 어떠한가?
기독교회는 분노를 주로 죄로 이해해 왔지만, 분노 그 자체를 악한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 어거스틴(354-430)은 분노를 ‘잘못된 것에 형벌을 가하려는 심판(judgement)’과 관련시켜 이해했다. 아퀴나스도 분노를 ‘정당한 보복을 통해 대상을 벌하려는 욕구’라고 정의했다. 이처럼 심판이라는 개념에는 정의와 아울러 징계, 보응, 앙갚음 같은 가치들이 깔려있다. 그런데 이성적 활동에 따른 합리적이고 정당한 보복의 차원에서 심판이 이루어지는 것은 사회의 질서와 정의를 세우기 위해 불가피한 것이나, 개인적인 차원에서 사사로이 남을 재판하고 복수하는 것은 늘 위험한 것이다. 
사막 교부 에바그리우스(345-399)는 분노를 ‘영혼을 어둡게 만드는 가장 극렬한 감정’으로 보면서, 분노는 특히 사탄이 촉발하는 악한 사상으로 보았다. 그는 특별히 분노에 대해 ‘기도를 방해하기 위해 사탄이 촉발하는 가장 강력한 적’이라고도 했다.2) 그는 “분노는 우리의 영혼의 눈을 어둡게 하고 기도하는 상태를 망가뜨린다”고 했다. 한편 카시안(360-435)도 ‘수도사들은 감정을 잘 통제함을 익혀야 하는데 그중 마음의 요동을 일으키는 으뜸 되는 분노는 철저히 제거해 버려야 할 것’이라고 가르쳤다.3) 카시안은 그러나 ‘수도사는 스스로의 악한 욕망에 대해서는 분노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기도 했다. 
그레고리 대종(540-604)은 성경을 누구보다 깊이 있게 강해했던 수도사답게, 사람이 분노하면 성령이 떠나고, 의가 사라진다고 설명하면서 결국 ‘화를 내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게 된다’고 보았다. 분노란 그 성격상 분쟁(strifes), 과장(swelling of mind), 비난(insults), 야유(clamour), 분개(indignation), 모독(blasphemy)과 같은 악을 주렁주렁 열매로 낳기에, 하나님의 의와는 거리가 먼 감정이라고 했다.4) 그러나 그레고리도 ‘신자가 불의와 악에 대해 분노하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악’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점에서 그는 분노 그 자체를 결코 죄로 본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 역시, ‘때로는 분노가 불의에 대해 일어나는 강력한 정서’라고 말하며, ‘분노에 의해 불의를 바로잡고자 하는 욕구가 일어난다’고 했다. 분노가 이성의 통제만 따른다면 정의를 세우는데 필요한 정서라는 것이다.
분노는 그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잘못된 대상을 향하거나, 혹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과하게 퍼부어질 때 악이 되는 것이라고 본 많은 신학자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5) 교회는 분노를 아주 무거운 죄악으로 취급해 왔다. 쉽게 노하는 자를 “어리석은 자(잠 14:17, 29, 29:11, 전 7:9)”로, 또 분노를 싸움과 다툼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묘사한다.(잠 15:18; 30:33) 무엇보다도 분노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는 것(약 1:19-21)으로 성경은 가르친다. 그래서 어느 사막 교부는 “분노하는 사람은 그가 비록 죽은 자를 살려 낸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고까지 말했다. 그만큼 분노는 철저히 없애야 할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보복하고자 의지
분노는 감정으로 그치지 않고 곧장 미움의 표출과 보복, 구체적으로 해를 가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발전된다. 즉 이 과정에서 인간의 의지가 개입하게 된다. 인간은 화를 낼 때 상대방에게 고통을 주고 해를 가하려는 의도를 갖는다. 어거스틴은 그래서 분노란 ‘보복하고자 하는 욕구’로, 아퀴나스는 ‘대상이 벌을 받기를 원하는 욕구’로 정의한 것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분노에는 대상에 대한 징벌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게 나타나 있다.
아퀴나스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것이 불의한 대상과 제도와 사회를 향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분노는 결코 악이라 할 수 없다. 어거스틴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산상수훈의 “형제에 대해 노하는 자마다” 라는 구절을 해석하면서, 예수님의 그 말씀은 내용적으로 “정당한 이유 없이”(without couse)라는 말이 빠져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즉 이 구절은 형제가 죄가 없는데도 형제에게 분노하는 것을 정죄하는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바는 사람의 죄에 대해서 무조건 화를 내는 것이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이러한 해석에 토마스 아퀴나스도 동일한 입장을 취하였다. 그는 ‘죄와 불의한 제도에 대하여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해서 벌하고자 하는 의지로서의 분노는 결코 죄가 아니라’고 보았다. 반면에, ‘인간을 향해 분노하고, 그 인간에게 고통을 가하려는 의지로서의 분노는 죄가 된다’고 보았다. 

자기 중심성, 가상적 피해의식 그리고 교만 
분노의 원인에는 외부에서 가해진 고통으로 자신이 상처를 받았다는 피해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존중받지 못하며 무시당하면서 자라난 아이는 자아가 손상을 입게 되고, 커가면서도 그 피해의식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자신이 무시당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피해의식이 내재화되면, 곪은 상처가 되어 분노로 나타나는 것이다. 즉 분노는 자아 손상감이 그 원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피해의식은 때로는 사실이 아닌, 가상적 생각이나 잘못된 판단에서 말미암기도 하다. 정작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았는데도 본인은 그렇게 간주하고, 자기의 권리가 묵살되고 억압되었다고 생각해버리는 것이다. 화를 낼만한 일도 아닌 것에 화를 내는 사람들이 이런 경우이다. 혁명을 부르짖는 소위 해방 운동, 사회 운동 그룹의 사람들에게서 이런 식의 분노를 간혹 볼 수 있다고 한다.6) 이런 의식에 사로잡히면, 상대방의 말과 행동을 지레 짐작하여 엉뚱하게 화를 내게 된다. 이렇게 되면 상호 관계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큰 상처를 주게 된다. 성경에 나오는 가인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가인은 그가 믿음으로 드리지 않아서(히 11:4) 하나님이 그의 제사를 열납하지 않으셨음에도, 아벨의 제사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아벨에게 분노했다. 이처럼 자기 자아가 손상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한편으로는 교만과도 연관될 수 있다.
일찍이 사막 수도사들은 분노하기 잘하는 자들에게는 교만이 자리 잡고 있음을 지적했다. 헨리 나우웬은 분노에는 교만과 자기 의라는 것이 깔려있다고 보았다. 겸손한 자는 자아를 낮추어 생각하기 때문에 자아가 크게 손상되었다고 생각하지도 그래서 쉽게 상처받지도 않는다. 상처받기 잘하고 쉽게 분노하는 것은 그만큼 자기를 높이는 교만과 헛된 영광의 자리에 자아가 앉아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런 자들은 상처를 더 부풀려 생각한다. 자신의 권위, 품위, 견해가 어떻게든 존중되어야 마땅한 것으로 생각하기에, 이것이 방해 받고, 손상 되었을 때 더욱 예민하게 반응하고 싫어하고 그래서 보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생각, 말, 그리고 행동
분노를 느끼게 되면 몸이 벌써 다르게 반응한다. 어거스틴은 분노는 세 단계로 나아간다고 했다. 첫째, 마음에 품는 것, 둘째, 말로 표현하는 것, 그리고 셋째, 가혹한 비판과 비난을 퍼붓는 것이라 했다. 아퀴나스도 분노는 마음에서, 말로, 그리고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고 했다.7) 
아퀴나스는 분노는 그 첫 단계로 ‘욕구’로 나타난다고 했다. 사람들은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하면 그 상처를 더 확대하여 마음에 담아놓고 앙갚음을 하려는 생각을 갖기 마련이다.8) 그런데 이 단계에서 그 욕구를 이성으로 잘 통제하고 합리적으로 다스리면 그것은 감정으로 끝날 뿐 죄로 연결되지는 않는다.9) 그런데 이것이 실패하게 되면, 말이나 행동으로 표출하게 된다. 두 번째 단계인 ‘말’은 행동에 비하면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 생각할 수 있으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때로는 말이 행동보다 더 큰 피해와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화가 나면 목소리 톤, 피치, 그리고 빠르기가 달라진다. 상대방은 달라진 말에서 분노를 느끼기 마련이다. 화가 난 상태를 전하는 용어나 때로는 노골적으로 공격하는 단어를 사용하여 상대방에게 분노를 표출하기도 한다. 몸 외부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아물어 가지만 내면에 패인 상처는 시간이 가도 잘 아물지 못한다. 화가 나서 부주의하게 내 뱉은 쓴 말 한마디가 상대방에게는 비수처럼 마음에 박혀 일생동안 따라 다닐 수 있다.
한 수녀가 다음의 일화를 소개했다. 1990년대 초반, 경찰의 감시와 추적을 따돌리고 오랫동안 탈옥수로서 그 이름을 떨쳤던 신창원을 면회 갔을 때, 그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너무 가난해서 육성회비를 제대로 내기 힘들었던 신창원은 초등학교 5학년 어느 날 선생님이 회비를 내지 못한 자신에게 “너 같은 놈은 학교 다닐 필요 없어!” 라는 꾸중을 들었다. 선생님의 이 부주의하게 내뱉은 멸시의 말이 어린아이에게는 세상에 대한 분노의 씨앗이 되어 심겨졌다. 신창원은 “그때 선생님이 단 한 번이라도 칭찬과 격려의 말을 해 주었더라면, 오늘 나 같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화가 나서 한 말은 이미 악의가 담겨있게 마련이라 듣는 이들은 그 예리함에 베이게 된다. 미련한 자는 쉽게 분노하고 그 분노는 미련한 자를 죽이지만(욥 5:2) 그러나 미련한 자가 화가 나서 부주의하게 뱉은 분노는 다른 사람을 죽일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예수님은 형제에게 “라가”라고 욕하는 것은 그 사람을 살인하는 것과 같다고 가르치셨다.
분노의 세 번째 단계는 ‘행동’으로 나타난다.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그에 빠지게 되면, 분노는 종종 그 사람을 불로 삼키고 연기로 질식시킨다. 그는 판단력을 잃고 눈에 보이는 것이 없게 되어, 전후를 따지지 않고 공격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단테의 신곡에서는 지상에서 분노의 죄를 지은 자들이 연옥에서 받고 있는 형벌을 묘사하는데, 그들은 모두 검뿌연 연기가 자욱한 곳에서 살고 있다. 분노의 화염에 휩싸여 제대로 보지 못하고 판단력이 흐려진 채, 이웃에게 분노하여 상처를 준 죄를 범한 자들이 짙은 연기 속에서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숨쉬기도 힘든 상태에서 살아가는 고통을 받는 것이다.

분노,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지 못한다.
광야생활이 38년이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헤매다가 다시 가데스바네아 지역에 머물게 되었다. 그들이 물을 구할 수 없게 되자,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그들과 다투었다.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께 간구하였고 하나님은 물을 반석에서 쏟아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모세는 온 백성을 그 반석 앞에 모아놓고, 끊임없이 불평하고 반역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참고 있던 노를 폭발시켰다. 반석에게 명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반석을 지팡이로 두 번 내리쳤다. 물은 솟았고 백성들은 마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모세의 행동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지 않고(민 20:12) 하나님을 거역한 것(민 20:24)으로 간주했다. 모세는 자기 노를 드러내기 바빠서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지 못했다.
인간의 분노를 통해 때때로 역사는 진전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과 인도하심보다 앞서면 안 되었던 것이다. 자신의 분노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 더 중요한 지도자의 덕목이다.(잠 29:22) “네가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고로” 이 총회를 이끌지 못하리라고 했다.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자보다 뛰어난 자라고 했던 그 모세는 중요한 순간에 자기의 분을 참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거룩을 나타내지 못한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였고, 단 한 번의 실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일을 후계자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하나님의 사람들, 특히 중직을 맡은 자들은, 분을 품더라도 죄를 범해서는 안 된다. 특히 하나님의 일을 섬길 때 더욱 조심해야 할 노릇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분노가 마음 속 내면의 감정으로 억제되도록 해야 한다. 미움의 말과 행동으로 발전되지 않도록 철저히 분노의 감정을 조절해야 한다. 분노의 불이 활활 일어날 때, 그것을 제 때 끌 줄 알아야 한다. 구약성경에서 분노를 의미하는 단어 “하라”는 ‘불’에서 온 말이다. 예수님은 분노하여 형제에게 “라가”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도 “게헨나” 즉 불과 화염 구덩이인 지옥에 떨어지는 것으로 묘사했다.(마 5:22) 야고보도 분노에 차 형제를 저주하는 혀도 불로 묘사하면서 이러한 자도 지옥불에 떨어질 것이라 했다.(약 3:6, 9) 불이 모든 것을 태워 삼켜버리고 그 연기로 질식시켜 버리듯이, 분노도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그를 질식시켜 앞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에바그리우스는 수도사들이 분노에서 비록 자유로울 수는 없더라도, 그것이 자신 안에 계속해서 머무르게 할 것인지 아닌지는 스스로에게 달렸다고 했다. 분노의 발생을 원천적으로 막을 수는 없으나 그것에 사로잡혀 악을 행하지 않도록 싸워야 한다고 했다. 사탄이 분노의 생각을 통해 죄를 짓도록 유혹할 때, 수도사들은 오히려 사탄에게 분노하고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씨름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카시안도 분노는 마음의 요동을 일으키는 으뜸 되는 감정이기에, 이것을 제거하기 위한 씨름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수 갚음은 하나님 몫
그러면 어떻게 이런 분노와 씨름하며 그것을 해소해 나갈 수 있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원수 갚음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다. 억울하고 무고하게 고통을 당하여, 분해서 견딜 수 없는 상태라 하더라도, 고통을 안겨준 자에게 직접 복수하는 일은 내가 해야 할 일이 아니다. 로마서 12장 19절에서 바울은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음을 역설했다. 하나님이 왜 직접 원수를 갚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일까? 그레고리 대종(Gregory the Great)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자’라는 교리에서 그 답을 찾았다.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에게 사람이 직접 응징을 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하나님을 공격하는 것과 방불한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직접 다른 사람에게 복수해 버린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을 인간이 채어 버리는 월권행위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주무시지도 않으며 다스리고 계시는데, 마치 자기가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온 땅에 불의가 활개 칠 것으로 생각하여 직접 해치우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다윗은 그런 점에서 결코 자신을 앞세우지 않았다. 그는 사울에게 원수를 갚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지만 스스로 보복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께 맡겼다.10) 원수를 직접 갚게 되면 당장에는 개운할지 모르나 그것이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창세기에 나오는 라멕은 그의 노래에서 보복의 두려움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찐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창 4:23b-24) 복수는 복수를 부르고 그에 따른 두려움만 더 가중시킬 뿐, 결코 분노의 원인을 해소하지는 못한다. 
다윗과 시편기자들은 한결 같이 하나님께 자신의 원수를 처리하여 주실 것을 구하고, 맡기며 살아갔다. “주께 피하는 자를 그 일어나 치는 자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인자를 나타내소서”(시 17:7), “여호와여 일어나 저를 대항하여 넘어뜨리시고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시 17:13) 하나님은 원수를 능히 갚아주시는 분이시다. 그것을 믿는 것이 성경적이다. 그러한 믿음을 재확인하는 것이, 분노와 싸우는 첫걸음이다. 

용서하기 그리고 잊어버리기 
분노를 극복하는 더 강력한 무기는 ‘용서’이다. 이것은 하나님께 원수 갚는 일을 맡기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든 일이다. 용서를 한다는 것은 분노의 뿌리를 흔들어 빼버리는 근본적이고 혁명적인 일이다. 자고로 사람들은 이웃을 사랑하고 자기 원수들은 미워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3-46)고 가르치셨다. 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라고 기도하라 명하셨다. 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바울은 신자들에게 이렇게 권고한 바 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1-32)
분을 품고 미워하면 증오에 얽매인다. 그러나 용서를 하면, 그것으로부터 자유하게 된다. 용서를 의미하는 헬라어 “아페시스”(aphesis)는 체포상태에서 풀어주는 것(release from captivity)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용서는 그 원 의미처럼 가해자를 자신의 미움에서 풀어줄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미움과 분노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그렇게 되면 모두 다 새 세상과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성경의 인물 요셉의 사건은 대표적인 예이다. 요셉은 쌀을 구하러 애굽에 와서 자신 앞에 머리를 숙이고 있는, 자신을 죽이려 했던 바로 그 형들을 보고 마침내 그들을 용서하면서 그 앞에서 오열했다. 형들에 대한 분노와 원한이 용서의 눈물로 터져 나왔을 때 요셉은 과거의 고통과 분노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형들과 화해하며 미래를 열 수가 있었다. 루이스 스미즈(L. Smedes)는 용서하는 것이 비록 과거에 있었던 사실을 없애주거나 변화시켜주지는 못하지만, 미래는 더 공평하게 바꿔준다고 말했다.11)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성공회 주교이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데스몬드 투투(Desmond Tutu)는 흑인 정권이 들어서고 흑백 차별정책이 폐지된 이후, “용서 없이는 결코 남아공화국의 미래가 없다”고 역설하면서 압박받은 흑인들이 이제는 자기들을 지배하고 때로는 착취해온 백인들을 용서하고, 함께 앞으로 나아갈 것을 주문했다.12) 그가 이것을 주문했을 때, 반대자들도 물론 있었다. 가해자인 백인들이 진정으로 용서를 구하지 않으면 결코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피해자는 기다리지 말고 용서에 적극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가르치는 것이라고 했다. 물론 그 용서의 빛이 상호 모두에게 가득하게 하기 위해서는 가해자가 자기의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으로 화답해야 한다.
용서가 더욱 깊은 곳으로 나아가기 위해, 그가 잊어버려야 할 것을 칼빈은 주문했다. 진정한 용서는 “마음에서 분노와 증오와 복수하고픈 생각을 기꺼이 지워버리며, 우리에게 행해진 악행에 대한 기억조차도 기꺼이 생각 속에 사라지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13) 투투도 이에 화답하면서, ‘용서를 위해서는 역사적 사실을 잊는 것이 아니라, 기억에 박혀 우리에게 해를 가할 위험한 독침들을 빼어 버리는 작업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연 그 정도로 용서가 쉬울까? 어렵지만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십자가의 용서’를 깊이 체험하고 그 용서의 사랑에 깊이 젖어들고 묵상한다면, 이러한 용서에의 길로 자연스레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그 길을 걸어야 할 자이다. 

실천적 조언: 한발 비켜나기, 그리고 이유찾기 
이제 마지막으로 분노를 극복하기 위한 실제적 방안을 몇 가지 생각해 보고 매듭짓겠다. 틱낫한은 그의 스테디셀러 책 『화』에서, 분노가 솟구쳐 오를 때 분노의 머리를 응시하면서 분노를 다독거리라고 제시한다. 다소 추상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그렇게 황당한 것은 아니다. 이 말의 핵심은 ‘의지적으로 분노에 맞서라’는 말이다. 아무리 분노가 정당하다 하더라도 분노는 분노이기 때문에, 그것이 통제되지 않은 상태로 밖에 표출되면 당사자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피해의 파편이 튈 수 있다. 어리석은 자는 분을 급히 드러낸다.(잠 29:11)는 가르침을 새기면서, 어리석은 자리에 앉지 않도록 분노의 순간에서 한발자국 물러나도록 연습해가야 한다. 
둘째로, 분노의 원인을 한번 찬찬히 살펴보는 일이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자주 또 쉽게 화를 낸다. 이런 사람은 자기가 화를 낸 뒤, 분노한 이유가 무엇인지 기록해 놓고 분석하는 작업을 해 나가는 게 좋다. 분석해 보면 비교적 그 이유가 정확하게 정리될 터이니, 원인이 밝혀지면 처방은 바로 내려질 수 있다. 때론 자기중심적인 태도, 잘못된 판단, 또는 과거의 상처 때문에 화를 내기도 한 경험 등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분석된다면 이후에는 화내는 일이 더 줄어들 수 있다. 이것은 화병을 치료하는 의사들이 치료과정에서 환자에게 반드시 요구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끝으로, 화가 났을 경우 이것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대화’를 하면서 상호 노력해야 한다. 분노는 억눌러 놓으면 결국은 곪아 터지게 마련이다. 터지기 전에 기회를 마련하여 그 이유를 소통함으로 답답함을 해소하고 합의점을 찾아 가는 것이다. 그 작업이 편하거나 쉽지는 않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 누구와도 화평을 도모하며 지내야 할 자들이라는 생각을 할 때, 이 작업은 충분히 대가를 치를 가치가 있는 일이라 하겠다.

신원하 l 교수는 연세대 사회학과와 고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칼빈신학교에서 기독교윤리학으로 석사(Th. M.)와 보스톤 대학에서 사회윤리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Ph. D.) 저서로는 『전쟁과 정치』, 『교회가 꼭 대답해야 할 윤리 문제들』, 『가난과 부요의 저편』, 『시대의 분별과 윤리적 선택』 등이 있으며, 지금은 천안에 있는 고신대 신대원 교수이면서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신학위원으로 봉사하고 있다.
글쓴이 / 신원하

죽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죄(3) 시기(Envy, 猜忌): 친구가 울 때 웃고, 웃을 때 우는 죄


죽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죄(3)
시기(Envy, 猜忌): 친구가 울 때 웃고, 웃을 때 우는 죄
교단 월간지를 펼치자 신학교 때 아주 친하게 지냈던 친구 스미스 목사에 관한 기사가 큼지막하게 실려 있다. 도시교회 부목사로 몇 년 일하다가 중소도시에서 100명 정도 모이는 교회의 담임 목사로 부임하여 사역했는데, 몇 해 되지 않아서 그 교회가 급속도로 또한 모범적으로 부흥하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5년 만에 500여 명이 회집하고, 2부 예배를 드리고, 각종 주중모임이 활발하고, 근래 예배당도 증축하면서 교회가 점점 더 흥왕 한다는 내용이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친구의 사진과 아름다운 신축 교회당 건물 사진을 보는 순간 머리가 멍해지더니 기사를 읽어 내려가는 내내 가슴이 조여 오면서 숨을 쉴 수 없게 되었다. 책을 덮고 한동안 묘한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가슴이 싸늘해지고 쓰라렸다. 내가 이렇게 시기에 사로잡힐 줄 나도 몰랐다.

미국 목사들이 많이 읽는 어느 잡지에 실린 ‘비컨’목사의 고백이다. 그는 친구에 대한 기사를 접했을 때, 10년 동안 열심히 목회했지만 아직도 100명을 넘어서지 못하는 자신의 목회와 처지가 그렇게 초라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고 실토했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인간은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을 보면 본능적으로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쓰라리게 떠 올린다”고 했는데 이 경우 딱 해당하는 말이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했던가. 가까운 사람이 잘되는 것을 보는 일은 결코 유쾌하거나 축하할 일이 못 되며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이것이 시기이다. 

가장 추하고 악한 죄 
토마스 아퀴나스는 시기에 대해 정의하기를 다른 사람의 불행에 기뻐하고, 행운에 애통하는 것이라 했다.1) 시기를 “가장 더러운 죄”, 혹은 “가장 악한 죄”라고 일컫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 다른 사람을 넘어뜨리고 불행하게 하기 때문이다. 시기는 이웃의 추락을 도모하고 이웃의 행복을 무너뜨리려는 것으로 결국 나아간다. 그래서 도로디 세이어는 “시기란 자기 사랑이 왜곡된 형태로 나타나는 악”이라 했다. 자기를 만족시키고 사랑하는 길이라면 그것이 다른 사람의 불행이 되더라도 개의치 않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은밀하게 친구의 추락을 도모하기까지 한다. 이런 성격을 지닌 시기는 비록 ‘대죄’의 목록에서 교만 다음에 위치하지만, 그 악함에 있어서는 교만에 뒤쳐지지 않는다. 교만과 달리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지 않는다는 그 점 때문에 교만 다음에 배치되었을 뿐이다. 남의 불행에 기뻐하고 그래서 그것을 은밀히 도모하는 시기는, 그래서 죄질이 가장 추하고 악하다. 이 시기가 작동하게 되면 어떤 집단도 살아남기 힘들다. 사회든 교회든, 그곳에 미움과 불화와 싸움이 생기고, 종국에는 분열로 귀착하게 되어있다.

녹색 눈의 괴물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궁정 작곡가 겸 지휘자인 살리에리가 궁정 홀에 들어서던 순간 하프시코드로 천재적인 음률을 연주하던 모차르트를 보던 그의 표정과 그 눈을 기억하는가? 놀라움과 쓰라린 감정과 부러움이 한데 버무려진 우울한 눈이었다. 그 눈에서는 요리를 앞둔 식탐가의 눈에서 볼 수 있는 광채나, 교만한 자의 눈에서 볼 수 있는 자신감 넘친 기운은 발견할 수 없다. 오로지 우울함과 쓰라림이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시기(Envy)의 어원은 라틴어 ‘인비디아(invidia)’로서 ‘자세히 본다’는 의미이다. 시기는 보는 것, 즉 눈에서부터 시작한다. 사람들의 환호를 받는 친구, 상사의 칭찬을 듣고 활짝 웃는 동료, 예쁜 부인과 함께 고급 레스토랑에서 나오는 친구를 ‘보는 것’으로부터 시기는 시작된다.
시기는 종종 녹색 눈으로 묘사된다. 셰익스피어가 시기를 이렇게 묘사한 후 이 표현은 시기의 대명사처럼 쓰이고 있다. 녹색 눈으로 시기를 나타내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설명된다. 첫째, 초록은 덜 익은 것, 즉 먹으면 속을 쓰리게 하는 과일의 색이다. 덜 익은 과일처럼 시기는 속을 쓰리게 하기에 녹색으로 등치된 것이다. 둘째, 고양이가 쥐를 앞에 두고 골려가면서 잡아먹으려 할 때, 그 눈빛이 녹색으로 변한다고 한다. 시기는 대상을 결국 파멸시키는 것이기에 고양이의 눈 색깔인 초록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시기는 “녹색 눈을 가진 괴물(green-eyed monster)”로 불리기도 한다. 
성경도 시기를 눈과 관련시키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블레셋과의 전쟁에 대승하며 개선장군으로 입성하는 다윗, 그리고 그를 환영하는 백성들의 연호, 그리고 춤추는 여인들의 노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 18:7) 이 모습을 보는 사울은 걷잡을 수 없는 시기에 사로잡힌다. 자기에게 와야 할 백성들의 관심과 칭찬이 다윗에게로 쏠린 것이다. 사울은 “그날 후로 다윗을 주목하였다(삼상 18:9)”고 한다. 주목에 해당하는 단어인 ‘아인’은 눈을 의미한다. 그런데 새국제번역(NIV) 영어성경은 그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시기하는 눈”(jealous eye)으로 바라보기를 시작했다고 번역하고 있다.2)
예수님도 시기를 눈과 관련해서 말씀했다.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악한 것들인데 그 중 하나가 “나쁜 눈(aphthalmos paneres)”이다. 그런데 번역본들은 이것을 대부분 “질투(개역개정)”, “시기(NIV, NASV, NRSV)”로 번역했다. 이처럼 구약과 신약 모두 시기를 눈과 연관된 단어를 써서 표현했다는 것은, 시기는 바로 눈으로부터 말미암는다는 생각을 낳게 해주는 중요한 근거이다.
증세 교회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단테도 시기를 ‘눈으로 짓는 죄’로 묘사했다. 그의 책 신곡에서 시기 죄를 범한 자들은 연옥에서 눈꺼풀이 굵은 철사로 챙챙 꿰매진 채 살고 있다.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상태에 처해져 있는 것이 그들의 형벌이었다.3) 그들은 눈으로 죄를 지은 자들이었기 때문에 그에 합당한 눈의 형벌을 받고 있는 것이다. 


질투와는 어떻게 다른가 
시기는 ‘질투’와 비슷한 뜻으로 이해되고, 종종 혼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의미가 다르다. 시기(Envy)의 어원은 라틴어 인비디아(invidia)에서 왔고, 질투(jealousy)는 헬라어 젤로스(zelos)에서 왔다. 고대 헬라 사회는 시기를 ‘프토노스(phthonos)’라는 용어로 질투와 구분한다. 이 두 개념에 대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아주 분명하게 구별하고 있다. 질투란 내가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소유하고 싶어 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느끼는 비애라고 한다면, 시기는 그저 다른 사람이 뭔가를 갖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느끼는 비애이다.4)
질투의 무게 중심은 본인에게 있다. 질투는 라이벌의 잘됨, 성공, 탁월한 업적 때문에 촉발되기는 하지만, 그 사람이 내가 갖고 있지 않는 것을 갖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발생하는 비애의 정서다. 질투와 같은 어원에서 ‘열정’을 의미하는 단어가 파생된다. 어원이 함유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이다. 그래서 질투는 자기도 그것을 갖고자 하는 마음으로 발전되면서,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는 방향으로 작용하곤 한다. 다시 말해서 이 감정은 일종의 경쟁심(emulation)과 같은 것이다. “왜 저 사람은 지니고 있는데 나는 갖지 못했을까?” 이런 생각이 “나도 가져야지! 어떻게 하면 그것을 손에 쥘 수 있을까?” 라는 방향으로 발전한다면 이런 경우의 질투는 악이 아니라 미덕(virtue)이 될 수도 있다. 사실 경쟁(emulation)은 모방(immitation)과 동전의 양면과 같다. 경쟁은 탁월한 사람을 닮아가려고 하는 단계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시기인 프토노스(phthonos)는 무게 중심이 다른 사람에게 있다. 단순히 다른 사람과 집단이 무슨 큰일을 성취하거나 뭔가 소유한 것을 보는 것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왜 저 사람이 저렇게 잘 되었지?”, “그렇게 탁월한 사람도 아닌데…” 이로 말미암아 속이 쓰리고 아픈 것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 악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좋은 것을 갖고 있음을 두고 볼 수 없는, 용납할 수 없는 감정이다. 이점에서 질투와는 분명히 다르다. 질투는 자기에 관련한 것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나 시기는 늘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것에 중심이 옮겨져 있다. 상대의 탁월한 것 때문에 비애를 느끼고, 상태가 몰락하는 것 때문에 행복해 하는 것이다. 단테의 신곡에서는 시기의 죗값을 치르고 있는 사람이 순례자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나는 지상에 있을 때 늘 내가 지닌 행운을 즐기기보다는 다른 사람이 비통해 하는 것을 더 즐겼지요.”5) 헬라 사상가들의 글에서도 시기인 프토노스는 항상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점에서 심리학자 슈크(Helmut Schoeck)의 설명은 매우 정확하다고 할 것이다. “시기하는 사람은 탐나는 물건을 갖고 싶어 하지도, 그것을 즐겨하지도 않고 다만 다른 누군가 그것을 갖는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한다.”

형제의 불행과 자기 행복, 제로섬 게임
시기의 독특성은 주로 그 ‘대상’이 자기와 관계가 없는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라 아주 친숙하고 가까운 자, 즉 같은 직업에 종사하거나 유사한 학력과 나이에 있는 사람이란 점이다. 같은 공간이나 분야에서 일하거나, 익숙하게 알면서 지내는 자들이 시기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윌리암 메이(William May)라는 학자는 시기를 “형제에 대해 짓는 죄”라 했다.6)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가인과 사울 왕의 경우를 보면, 바로 곁에 있던 동생 아벨이, 곁에서 연주하며 함께 일하던 다윗이, 각각 시기의 대상이었다. 다른 지역의 선교사가 아니라 같은 지역에서 선교하는 선교사들끼리 분쟁하고 미워하는 일이 잦은 것도 시기의 이런 성격과 무관하지 않다.
동료의 불행을 은근히 즐기는 것은 심리학의 개념인 ‘샤던프로이데(Shadenfreude)’와 아주 유사한 성격이다. 이것은 악의적 기쁨(malicious joy)을 의미하는 것인데, 용어 그대로 친구의 어려움과 역경(Shaden)에 기쁨(Freud)을 느끼는 것이다.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인간의 이런 정서를 간파하고 다룬 바 있다. 그는 ‘사람은 이웃에 대한 감정에서 이웃이 부당하게 행운을 얻게 된 것에 대해 편치 않는 감정을 갖게 마련’이고, 이 감정을 ‘네메시스(nemesis)’, 즉 ‘의분’이라고 하면서, 이것에 있어서 중용을 지키는 것을 미덕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이것이 지나치거나 모자랄 때 악덕이 되는데, 전자는 이웃의 잘됨을 시샘하는 프토노스 즉 시기이고, 후자는 친구의 불행에 대해 아파하지 않거나 혹은 즐기는 ‘에피카이레카키아(epichairekakia)’, 즉 고소해하는 것이다. 에피카이레카키아는 ‘불행‘(kakon)과 ‘즐기는 것’(chaira)으로 구성된 복합어로, 이를 독일어로 직역해서 옮기면 샤덴프로이데(shadenfreude) 그대로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처럼 인간이 갖는 이웃의 대한 감정 중에서 고소해 함이 있음을 간파했고 악으로 경계했던 것이다. 시기와 고소해 함의 특징은 친구가 웃는 것만큼 자신은 우울해지고 이웃이 우는 것만큼 자신은 웃는 것이다. 이처럼 시기의 죄에서는 이웃의 행복과 나의 불행, 친구의 불행과 나의 행복이 철저히 제로섬(zero sum) 게임이 되는 것이다. 

잘못된 평등주의
이처럼 시기는 뛰어난 재능, 출중한 성품, 그리고 그로 말미암는 결과적 선 등을 용인하지 않으려는 태도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잘못된 평등주의 의식’이 일조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다는 의식을 내세운 나머지 특출한 사람들이 재물과 재화를 많이 누리고 소유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또 생명권과 기본권에 있어서 차이가 없다는 의미이지, 지적 능력과 예술적 재능 등 각 사람이 지닌 능력과 질이 다 동등하다는 뜻이 아니다. 사람들은 능력, 성품, 정서, 지혜 등 다양한 측면에서 차이가 날 수 밖에 없고, 그로 말미암는 결과와 생산성에서 차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서로 다른 지적 능력과 인품은 물론 자기 노력의 결과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준 은사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분량대로 주신 선물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나 바울 사도는 이것을 ‘토기장이의 비유’로 설명한다. 토기장이가 다양한 토기를 만드는 것처럼, 하나님이 인간들을 그의 기쁘신 뜻 가운데 각기 다르게 만드시고 각 사람에게 나름의 은사를 주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기는 이것을 불평한다. 접시가 국이 담긴 그릇을 보고 난 뒤, 왜 자기는 국을 담을 수 없느냐고 불평하면서 그것을 만든 주인에게 원망하는 격이다. 이것은 창조자의 주권을 받아들이지 않는 악이다.7) 이것은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주신 고유한 재능과 은사를 공평하지 못한 처사라고 부정하는 교만인 셈이다.

선 총량 불변의 법칙 
시기하는 자는 정작 자신이 뭔가 부족하거나 궁핍하기 때문이 아니라, 친구가 번성하고 풍요롭게 지내는 것 때문에 심사가 불편해진다. 자신의 ‘없음’이 아니라 형제의 ‘있음’이 그를 더 힘들게 하는 요소인 셈이다. 내가 박수 받지 못하는 것 때문이 아니라 친구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는 것을 싫어하는 이런 감정에는, 친구가 받는 박수만큼 내게로 올 수 있는 박수가 줄어들거나 사라진다고 생각하는 정서가 깔려있다. 특정 사회와 분야에서 존재하는 명예, 칭찬, 존경에는 그 총량이 이미 정해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 때문에 시기하는 자는 어떻게든 친구가 누리는 것을 빼앗아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8) 그들은 마치 ‘선 총량 불변의 법칙’을 굳게 믿고 암기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것은 그들을 그만큼 다급하고 절박한 심정으로 만들기 일쑤다. 이런 근시안적 견해 즉 선은 결코 나누어 가질 수 없다는 생각에서부터 시기가 나오는 것이다. 그렇나 그렇지 않다. 어거스틴은 이와 대조되는 사실을 주장한다. 물질적인 것은 나누면 감소하지만 영적인 것은 나누면 더 증가한다. 특별히 영적인 선은 더 그러하다. 그것의 핵심은 사랑이다.9) 이와 대조되는 근시안적 견해를 갖고 있는 시기는 극단에 달하게 되면 피학적(마조키스틱한) 형태로까지 나아갈 수 있다.

피학적 시기 
사람은 극한 경우에는 자기가 해를 당하더라도 상대의 잘됨을 막거나 행운을 빼앗으려는 ‘피학적인 시기(masochistic envy)’로까지 나아가기도 한다. 유대 전통에 전해오는 설화는 이런 종류의 시기심을 잘 담고 있다. 두 친구가 길을 가다가 왕을 만나게 된다. 이 둘 중 한 사람은 욕심이 많고 다른 친구는 시기심이 많았다. 왕은 두 사람에게 선물로 “만약 너희 중에 한 명이 나에게 요청하면 나는 요청한 대로 그대로 들어 주겠다. 단 조건은, 다른 친구에게는 그 요청한 것의 두 배를 주겠다.” 이렇게 제안했다. 시기심이 많은 친구는 자기가 먼저 요구하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친구가 두 배로 받게 될 것을 시기했기 때문이었다. 욕심 많은 친구도 먼저 요구하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차지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결국 눈치를 보다가 욕심 많은 친구가 시기심 많은 자를 보고 먼저 요구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그러자 이 시기심 많은 친구는 왕에게 이렇게 요청했습니다. “임금님, 나의 왼쪽 눈을 빼 주소서!” 자기 눈이 뽑히는 한이 있더라도 친구가 더욱 불행해지는 길을 택한 것이다. 유대계 미국인 심리학자 솔로몬 쉽멜(Solomon Shimmel)이 소개하는 이 유대 민담10)은 극단적인 시기가 취할 수 있는 피학적인 형태의 심각성이 어느 정도인지를 시사해 준다. 이것은 오늘 우리 사회, 심지어 교회에서도 볼 수 있다. 라이벌이 존경받는 자리에 오르지 못하게 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자신의 출혈을 감수하면서 이런 일을 자행한다.

다른 대죄와의 연관성- 헛된 영광, 분노, 그리고 나태 
시기는 교만과 헛된 영광(vainglory)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교만한 자는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좋은 차를 타고 삶을 즐기며 호사하는 것을 볼 때, 허영(vainglory)에 차 있는 사람은 평소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박수를 받는 것을 볼 때 속이 더 쓰리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시기는 곧장 미움으로 발전한다’고 말한바 있다. 분노도 대상을 미워하는 마음을 낳지만 그것은 시간을 두고 발전한다. 그러나 시기는 즉각 미움으로 발전한다.11) 시기에 사로잡히면 금방 불편해지고, 얼굴이 일그러지고, 마음이 쓰리고, 미워하는 마음으로 진전된다. 이 점에서 시기는 분노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따라서 시기는 공동체의 하나됨과 화평을 깨트리는 주적이다. 신약에서도 다툼(고전 3:3; 고후 12:20), 분쟁(롬 13:13), 중상, 한담, 수군거림, 미움(딛 3:3; 벧전 2:1), 쓴 마음(bitterness), malice(적의) 등을 시기가 낳는 열매로 묘사한다. 일곱 대죄론에서 가장 중요한 신학자였던 그레고리 대종은 ‘시기는 바로 미움(hatred)으로 이어지고 이것은 또 은밀하게 수군거리는 것(whispering)으로 발전되고 나아가 노골적으로 험담과 중상(detraction)을 하는 악을 낳는다’고 보았다. 
시기가 많은 사람이 보이는 또 다른 특징은 기쁨이 없다는 것인데, 실제로 늘 만족하지 못하니 감사가 없고 쉽게 슬퍼하게 된다. 시기는 늘 “왜 나는 저 사람보다 주목을 받지 못하는가?” 등의 불만에 빠져서 기쁨이 사라진다. 그래서 우울해지기 십상이다. 이 우울함은 때로는 낙심으로, 그리고 의욕상실로 이어질 수 있다. 
시기가 낳는 낙담과 실의, 그리고 이것으로 말미암는 나태는 불타는 질투와 복수심보다 더 파괴적일 수 있다. 심리학자 캡스(Donald Capps)는 탕자의 비유에 등장하는 첫째 아들이 이에 해당하는 유형이라고 말한다. 탕자의 형은 돌아온 동생이 받은 터무니없는 환대를 보고 아버지와 집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싶은 의욕이 사라지게 되었다.12) 이런 면에서 시기로 말미암는 또 하나의 부산물은 자포자기, 의욕상실 그리고 나태한 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받은 복과 은사 세어 보기 
그러면 이렇게 생활을 무너뜨리는 무서운 악인 시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일까? 시기하는 사람은 늘 다른 사람을 쳐다본다. 그래서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된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에게만 있는 덕목과 달란트를 갖고 있다. 공평하신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눈을 자기에게로 돌려야 한다. 그리고 자기 안에 파묻혀 있는 보석과 같은 하나님이 주신 복과 은사를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찾아내고 갈고 닦아야 한다.13)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합당하고 족한 은혜와 은사를 주셨다. 물질과 지식과 명예가 모두 다 같을 수가 없다. 그러나 비록 그것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다른 것에서 오는 잔잔한 보람과 행복과 만족을 누리고 사는 자들이 있다. 누구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은 그저 크게 보일 뿐이지, 실상은 행복을 주는 보물이 아닐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사울은 누구보다 준수한 용모를 가졌고, 겸손한 성품을 가졌었다. 그런 그가 다윗만을 주목하고 의식하게 되면서부터, 자신이 지닌 것에 대한 감사가 사라지고 삶이 우울해졌다. 자신이 받은 것도 누구 못지않게 귀하고 컸는데도 말이다. 
1970년대의 흑인 민권 운동가였던 말콤 엑스는, 흑인의 진정한 해방과 인권신장을 원한다면 흑인 스스로가 ‘흰 것은 원수이고 추악하다’라는 의식에서 벗어나 ‘검은 것이 아름답다’라고 말할 수 있도록 시각과 의식이 전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인이 누리는 것을 보고 불공평하다고 불평하거나, 백인을 미워하고 시기하는 것에만 머무르는 한, 결코 흑인은 진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자기들이 가진 것의 고유한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에 자부심을 갖고 발전시키는 것이 시기를 극복하고 관계를 발전시키는 첫 단계이다.
이보다도 더 높은 수준은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보면서도 감사하는 태도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모습을 부족한 그대로 용납하고 사랑하고 계신다는 믿음에서 말미암는다. 이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감사할 수 없을 만한 상황 가운데서도 감사할 수 있게 한다. 애통하는 것은 불행일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은 애통하는 자가 복되다고 말한다. 고통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찾게 된 자들은 결국 그것을 통해 주의 위로를 받게 된다. 이 땅에서의 고통과 애통함을 통해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무게를 느끼게 될 수 있다.14)
원수가 아닌 동역자로 보기-인정하고 칭찬하기 
친구를 경쟁 상대가 아니라 동역자로 보는 시각 전환은 시기를 극복하는 또 하나의 주요한 방편이다. 자신이 받은 복과 은사를 발견하게 되면 친구를 바라보는 눈도 부드러워질 수 있겠지만,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여전히 친구를 경쟁상대로, 정해진 파이의 조각을 차지해가는 자로 보는 한, 그 친구의 잘됨과 성공은 나에게 손해이고 쓰라림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친구를 함께 공동체를 일구며 함께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 나갈 파트너로 생각하게 되면, 친구의 능력과 자질은 오히려 공동체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주요한 자산이 된다. 그가 발휘하는 탁월한 능력이 곧 내가 속한 집단과 공동체를 윤택하게 하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진보를 앞당기는 힘이 된다.
이런 시각을 갖게 되면 동료의 재능, 탁월함이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존중과 칭찬과 감사의 대상으로 보이게 된다. 끊임없는 경쟁의식과 비교의식에 사로잡혀 있으면 삶이 피곤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동역자’로 보게 되면 인생은 한없이 자유로워진다. 서로가 서로를 칭찬과 격려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되면 본인과 그가 속한 공동체는 말할 수 없이 평화롭게 된다. 
고린도교회의 분쟁 사례도 이에 대해 시사점을 준다. 당시 고린도교회 안에서는 ‘바울파’와 ‘게바파’, 그리고 ‘아볼로파’로 나뉘어 자주 분쟁이 일어났다. 서로를 경쟁의 상대로, 시기의 대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질책한다. 서로에 대한 왜곡된 인식부터 바로잡아 준다. 바울은 ‘자신과 아볼로는 복음의 씨를 심고 물을 주고 신자들을 믿게 한 자들이고, 자라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말했다. 이 말은 바울과 아볼로가 서로 경쟁의 대상이 아닌, 주의 나라를 위해 함께 일할 ‘동역자(9절)’임을 강조한 것이다.
다윗에 대한 사울의 태도에 있어서도 이것이 아쉽게 느껴진다. 전쟁에 승리하여 개선 행진하는 다윗을 보고 환호하는 국민들에게, “백성들이여 오늘 이 유망한 젊은 장수를 보십시오. 이 장수가 있는 한 우리나라는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안심하고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나는 이런 장수를 갖고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또한 감사합니다.”라고 외쳤다면, 사울은 더욱 백성의 존경을 받고 계속해서 왕직을 잘 수행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궁극적 대안은 사랑
그러나 시기를 극복할 수 있는 가장 궁극적인 방안은 사랑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리고 그것으로 친구를 사랑하는 것이다. 시기의 대안이자 치유책은 단순히 자족과 감사를 넘어서는 것, 곧 사랑이다. 예수님은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고 가르쳤다. 보이는 형제조차 사랑하지 못하고 시기하는 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결코 사랑할 수 없다고 요한은 말한다.(요일 4:20) 바울은 시기와 그로 생기는 분쟁을 치유하는 근본적인 처방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서신 뒷부분인 13장, 소위 ‘사랑장’에 잘 나타난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는 것(고전 13:4)”이다. 동료의 흠을 보기보다는 좋은 점을 보고, 동료의 탁월한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즐거워하고 감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이처럼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을 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어렵고, 이 사랑은 아무나 할 수 없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사랑을 주셔야 한다.(요일 4:7-8) 하나님의 사랑은 성육신 사건과 십자가를 통해 가장 잘 드러났다.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인간이 되신 것이고, 십자가는 우리가 당할 고통을 당신이 당하고 죽으신 것이다.15) 그래서 예수를 더 깊이 묵상하면 이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씩 더 체득해 갈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형제에 대한 시각이나 태도도 변화될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을 현 모습 그대도 용납한 것처럼 그 친구에게도 마찬가지로 사랑하시고 용납하신다. 그리고 우리도 이웃에게 동일하게 대하기를 원하신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젖어들면 우리도 사랑 안에서 그가 될 수 있고 그도 내가 될 수 있게 될 것이다. 근사치적이라도 말이다.
사랑하게 되면, 즐거워하는 형제의 즐거움에 함께 즐거워하게 되고 우는 자와 함께 울 수 있게 된다.(롬 12:15) 성경에 나타나는 가장 아름다운 예는 바로 요나단과 다윗의 사랑의 관계이다. 요나단은 다윗의 탁월함 그리고 왕으로 기름부음 받음에 대해 시기하지 않고 오히려 인정하고 나아가 사랑하기까지 했다. 요나단의 사랑이 “여자의 사랑보다 승(勝)할” 정도였다.(삼하 1:26) 요나단은 사울의 암살계획을 다윗에게 알려주고 그를 위기에서 구해 주었다. 내 자리를 차지할 사람, 내가 받을 수 있는 존경과 명예를 누릴 사람 심지어 내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할 대상이다. 이것까지도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다. 

한담을 피하라 
시기는 눈에서 시작되지만 입으로 행동으로 연결되어 전 인격을 넘어뜨린다. 중세에는 시기를 종종 ‘Backbiting’ 즉, 뒤에서 씹는 것으로 표현했다, 그레고리 대종은 ‘시기는 수군거리는 딸이 있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의 명성과 업적을 심심풀이로 들고 나와서 화제를 잡고 한담(gossip)하는 것이다. 가볍게 여흥삼아 시작하는 한담이지만 미끄러지듯이 험담으로 빠지기 일쑤다. 그것이 한담이 지향하는 것이다. 다른 이에 대해 가볍게 이런 저런 말을 시작하지만, 그것은 곧 상처를 내는 말로 변한다. 한담은 이미 시작하는 순간부터 험담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16) 어쩌면 험담을 하기 위해서 한담을 시작한다는 말이 더 맞는 표현인지 모른다. 남의 이야기는 칭찬거리가 아니면 삼가야만 한다. “누가 그러던데….”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의 언어를 써서 위장한 것일 뿐 결국 자기 말을 옮기고 퍼뜨리려는 속셈이다. 한담 대신 진실된 언어, 긍정의 언어, 격려의 언어, 그리고 화평의 언어를 그리스도인들은 친구 삼아야 한다. 

나가면서
사람은 눈으로 보며 살아가는 한, 시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박수 받고 누리는 친구가 눈앞에 있는 한, 언제나 우리는 시기와 씨름하며 살게 된다. 친구가 넘어질 때 기뻐하고 그것을 은근히 즐기기를 좋아하는 것이 사람이다. 그러나 성경은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고,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잠 24:17)”고 가르친다. 또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고 명령한다. 
시기를 떨쳐버리겠다고 해서 눈을 감고 살 수는 없다. 한 눈으로는 대상을 보더라도 한 눈으로는 하나님을 보도록 노력해야 한다. 친구의 가진 것만 보는데서 돌이켜야 한다. 자기에게 있는 것,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것을 보면서 감사하며 살아가야 한다. 친구를 경쟁자가 아닌 공동체를 함께 만들어 갈 동역자로 하나님 나라를 함께 만들어가는 역군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대응 무기는 사랑이다.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 성육신한 사랑을 더 깊이 경험하면 그리고 그것을 나눌 수 있게 되면 시기는 그만큼 감소해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수군거림이 사라지고 칭찬과 격려와 사랑의 언어가 많아지는 관계와 공동체를 꿈꾸어야 한다. 오늘 교회가 이런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신자도 기쁨이 회복되고 사회도 밝아진다. 시기가 힘을 잃어가게 되면 싸움과 분열이 잦아들게 된다. 대신 참된 형제의 동거함에서 오는 즐거움과 평화가 찾아들게 될 것이다. 



신원하 l 교수는 연세대 사회학과와 고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칼빈신학교에서 기독교윤리학으로 석사(Th. M.)와 보스톤 대학에서 사회윤리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Ph. D.) 저서로는 『전쟁과 정치』, 『교회가 꼭 대답해야 할 윤리 문제들』, 『가난과 부요의 저편』, 『시대의 분별과 윤리적 선택』 등이 있으며, 지금은 천안에 있는 고신대 신대원 교수이면서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신학위원으로 봉사하고 있다.
글쓴이 / 신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