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September 7, 2013

한 날 묵상 - 막 4:35-41 <어찌 믿음이 없느냐>

누가복음 8장 22-25절 설교로 이 본문을 살펴봅니다.

설교제목 : 폭풍우 치는 날에도 잠을 자는 사나이
 
서론
오늘 본문의 말씀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 모두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가 아주 잘 알고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공관복음 모두가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은 이 사건이 제자들에게 강한 임팩트를 끼친 사건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저도 익히 알고 있는 본문임에도 불구하고, 몇 일전 누가복음 쭉 읽어가던 중, 오늘 본문의 말씀이 저에게 아주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은 광풍중에 고이 잠을 잘 수 있을까? 그런데 왜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큰 혼란에 빠져있을까?
예수님은 폭풍우 치는 날에도 편히 잠자는 사나이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창조자이자 우주의 운행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말씀으로 혼돈에서 질서와 조화를 창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에 즉시 바람은 멈추었고, 풍랑은 잔잔해졌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이 사건을 통해서 어떤 강한 영향을 받은 것일까요?
나아가 요람에서 무덤까지 아무런 문제없이 살아가기를 바라며, 그 일들이 최소화되길 바라는 우리들을 향해 오늘 이 사건은 어떠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는 것일까요?

저는 이 질문을 가지고 말씀의 은혜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본문을 묵상하면서 한 편의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 미치 앨봄의 8년의 동행중에서 나오는 글입니다.
폭풍우 치는 날에도 편히 잠자는 사나이입니다.
한 사내가 농장에서 일자리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는 농장에 찾아가 새로운 주인에게 추천장을 건네는데, 거기에는 이렇게만 쓰여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폭풍우가 치는 날에도 잠을 잡니다."
농장 주인은 일손 구하는 일이 급했기 때문에 사내를 그 자리에서 고용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갑자기 사나운 폭풍우가 마을에 몰아쳤습니다. 거센 비바람 소리에 깜짝 놀란 농장 주인은 침대에서 일어나 밖으로 뛰어나갔습니다.
그는 사내를 불렀지만, 사내는 깊이 잠들어 있었고, 주인은 급히 외양간으로 달려갔습니다. 놀랍게도 가축들은 넉넉한 여물 옆에서 안전하게 자고 있었습니다.
그는 밀밭으로 뛰어나갔습니다. 밀 짚단들은 단단히 묶인 채 방수 천에 덮여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곡물 창고로 달려갔습니다.
문들에는 빗장이 걸려 있었고, 곡물들은 비 한 방울 맞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제야 주인은 "이 사람은 폭풍우가 치는 날에도 잠을 잡니다."라는 말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
이 사나이는, 지금 푹풍우 치는 날에도, 진짜 편히 잠을 잘 수 있구나! 하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이 폭풍치는 날에도 편히 잠을 잘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바다 건너편으로 가는 여행을 친히 준비하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광풍이 호수에 내리 치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본문 23절을 보면 행선할 때에라고 간단히 기록하고 있지만, 마가복음 436절을 보면, 이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그런데, 갑자기 풍랑이 일어나게 됩니다. 23절 계속해서 보면, “마침이라는 단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침은 공관복음에서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null) 저는 성경에서 나오는 마침이라는 단어가 궁금해서, 성경에서 얼마나 많이 마침이라는 단어가 나올까 한 번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마침이라는 단어가 아주 많이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null)
 
선실에서는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그 때 마침
선상에서는 광품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선실에서는 광풍이 배에 내리쳐도 예수님은 아주 평안하셨습니다. 그런데 마침
선상에서는 광풍이 내리치매 제자들은 두려움과 공포에 떨면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 빠져 버렸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고 있지만, 그리고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려움을 만났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에서 문제없는 삶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문제란 언제나 우리의 삶의 한 부분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언제 폭풍우를 만날지 모르고요.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상황이 언제 닥칠지 모릅니다.

설상가상으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폭풍우를 연속해서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꼭 그렇게 하신 것처럼, 어떤 작가가 꼭 그렇게 시나리오를 짜고 연출을 하는 것처럼, 힘들고 어려운 순간이 마침그 때에 절묘하게 찾아올 때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인생에서 어려움과 폭풍우 같은 인생을 만나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에서 어려움과 푹풍우를 만나거든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도는 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폭풍우를 만나면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머릿속은 백지상태가 되어, 아무것도 할 수는 상황에 빠질 수밖에 없는게, 믿음 없는 제자들의 현실이었습니다. 우리라고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풍랑을 만난 이 때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러한 인생의 풍랑앞에서, 우리가 취할 믿음의 행동은, 예수님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을 예수님께 고정하고 있을 때, 우리의 인생에 찾아오는 어려움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처럼 믿음으로 반응하는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첫 번째는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도 빠지지 않고 마음 깊이 새기고 있는 사람이 예수님처럼 반응하는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말씀하십니다. 25절입니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이 말씀은 큰 꾸지람입니다. 예수님이 많이 화가 나셔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어떤 모습에 화가 나셨을까요?
먼저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 깊이 새기지 않고 그냥 흘려보내는 것에, 화가 나셨습니다.
그리고 수일동안 함께 다니며 가르침을 주었어도 그들의 믿음 없어 열매 맺지 못함에 아주 화가 나셨습니다. 또한 제자들의 마음에 말씀이 뿌리 내려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제자들의 모습에 아주 화가 나신 것입니다. 또한 말씀이 마음에 뿌리 내리는 일에는 인내하지 않고, 기적만을 바라는 제자들의 모습에 화가 나신 것입니다.

만약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지금 말씀하신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라는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하는 믿음이 있었다면, 제자들은 폭풍우를 만나더라도 두려움에 떨며 소란스럽게 예수님을 꺠우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 무사히 호수 건너편으로 간다는 보장을 제자들에게 주셨기 때문에 굳이 예수님을 깨울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제자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에 막혀, 열매를 맺기는커녕 두려움에 떨고 예수님을 깨우는 소란만 피우고 있었습니다.
 
24절은 이 상황을 이렇게 묫하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광풍에 호들갑 떠는 제자들을 보신 예수님이 반응은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하는 책망입니다.
내가 출항하기 전 너희에게 준 약속의 말씀을 믿는 믿음을 좀 보여줘 봐! 너희들에게 지금 그 믿음이 있는거야! 없는거야!’
 
폭풍우를 만난, 제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말씀의 열매를 맺어가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 앞에 살려주기를 바라는, 어떤 기적을 베풀어줄 대상이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면서 말하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 죽겠나이다. 살려주세요. 제발 제가 죽을 것 같습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익숙한 말이 아닙니까? 아니면 어딘가 모르게 내가 자주 했던 말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우리의 믿음이 이런 것이었다면, 믿음의 방향 설정을 다시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대상이지 어떤 나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해결사가 아니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하기만 하면, 우리의 인생에서 만나는 광풍은 더 이상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분명히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는 말씀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계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기 계신 한 분 한 분을 향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인생에서 만나는 풍랑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해, 호수 저편으로 반드시 건너갈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 약속의 말씀을 믿는 믿음만 붙잡고,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께 나의 시선을 고정시킨다면, 우리는 우리 인생앞에 만나는 광풍에 무서워 떨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시선을 문제 앞에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께 고정시킬 때 우리는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들 어떠하리 저러한 들 어떠하리. 창조주 되시며 구세주 되시는 예수님이, 내 옆에 계시면 되지, 이러한 들 어떠하리 저러한 들 어떠하리, 우리 배는 호수 저편으로, 광풍이 호수를 내리치더라도, 그리하여 물이 배에 가득하게 될지라도, 예수님이 타신 우리는 배는, 호수 저편으로 안전하게 건너가기에, 푹풍이 내리친들 어떠하리 어떠하리 물이 배에 가득한 들 어떠하리

(null)
조이스 마어스가 쓴 "왜 하나님, 도대체 그렇게 하셨습니까?"라는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43절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 기억하십시오. 믿음은 안식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
믿음 있는 태도는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에(벧전5:7) 우리의 모든 관심사를 하나님 앞에 맡겨두라고 말합니다. ...
믿음 있는 태도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안달복달하지도 않습니다. 내일에 대한 걱정을 달고 살지도 않습니다. 믿음은 내일 일을 전혀 모르더라도 예수님이 이미 내일에 가 계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디든지 갈 수 있습니다. ...
나는 이렇게 말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주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자, 시작과 끝입니다. 나아가 그분은 시작과 끝, 그 사이에 있는 모든 것입니다." (p.2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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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다.” 언제나 어느 때에든지 너희들은 안식에 들어간다. 그 뿐 아니라, 이 말씀을 주신 시작부터, 이 말씀이 온전히 이루어질 끝 사이를 살아가는 우리를 향해, 이 시작과 끝 사이의 모든 것의 주인 또한, 바로 나 예수님이시기에, 늘 안식하라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일에 대한 아무런 걱정 없이, 예수님이, 이미 내일에 가 계신 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무런 걱정 없이, 어디든 갈수 있게 됩니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너희 눈이 지금 어디를 바라보느냐?” 이러한 예수님의 책망이 있기 전에, 창조이신 하나님께, 나의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께, 나의 도움이시며 피할 바위가 되시며 나의 힘이 되시는 성령님꼐, 이 삼위 일체 하나님께, 나의 시선을 고정시키는 믿음을 소유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폭풍우 치는 날 누가 편히 잠을 잘 수 있을까요? 바로 믿음이 큰 자가입니다.
마태복음 826절에서는 오늘 본문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믿음은 있는데, 믿음이 작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있는데, 믿음이 폭풍우를 만나 두려움이 찾아오니, 정상적으로 그 믿음이 작동하지 않고 세상의 어려움들 앞에 제자들은 넘어져 버렸습니다. 우리도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믿음이 큰 자일까요? 아주 쉬운 문제 하나 드리겠습니다. 다음 두 사람 중 누가 믿음이 큰 자일까요? 한 번 맞추어보세요.
첫 번째 사람은, 풍랑을 만날 때, 어떤 어려움을 만나게 될 때, 내가 해결 할 수 없는 일들을 만나게 될 때, 기적을 바라며 예수님을 찾고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며 문제 해결을 위해 아주 크게 기도하며 부르짖는 일에 자신의 목숨을 거는 사람과
두 번째 사람은, 일상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 말씀을 생활화하는 일에 목숨을 거는 사람으로서. 아주 평온하는 일상에서도 자신의 전부를 투자하며 기도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 두 사람 중 어떤 사람이 큰 믿음의 사람입니까? 첫 번째 사람입니까? 두 번째 사람입니까?
그런데 지금 나는 과연 첫 번째의 사람입니까? 두 번째의 사람입니까?

(null) 그야말로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을 만나는 가장 성스럽고 엄숙한 일을 할 때에 그렇게 몸을 던져 넣지 아니하고 정신을 투자하지 아니하며 천단한 껍데기 수작으로 소홀하게 지나가선 안되는 거 아닙니까?

실제로, 우리의 인생에서 폭풍우를 만나는 때는, 아주 적은 횟수이며, 아주 짧은 시간들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대부분의 일상은 아주 평온할 때입니다. 이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평온한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에, 과연 우리는, 어떤 믿음 생활을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큰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큰 믿음의 사람은 일상에서 아주 평온할 때, 말씀과 기도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남기지 말고 전부'의 심정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야 폭풍우를 만나는 시험과 환난속에서 예수님처럼, 능히 편히 잠을 잘 수 있는 은혜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반대로, 문제 앞에서만 큰소리로 기도하려고 하며, 환란을 만날 때에만 예수님을 찾으려 합니다. 그리고, 정작 일상에서는 예수님을 찾지 않고 성경을 깊이 연구하며 묵상하지도 않고, 생사를 결단하는 기도도 드리지 않는, 결코 큰 믿음을 가진 자로 서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이러한 믿음은 반성해야 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어떤 문제를 만났을 때, 역경을 만났을 때,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 편히 잠자는 예수님을 깨우는 것도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진짜 큰 믿음은 아주 평온한 일상에서 말씀과 기도의 생활에 한 치의 에누리 없이, 자신의 전부를 쏟아 부을 수 있는, 그들이 진짜 큰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십니다. 떨 때 우리가 잠을 자기 힘듭니까? 근심과 걱정이 쌓일 때 아닙니까? 그런데 그 때 편히 잠을 잘 수 있는 사람은 평소에, 일상에서, 이처럼 말씀과 기도로, 자신의 삶을 전부를 남기지 않고 쏟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폭풍우를 만나는 순간에도 말씀과 기도가 주는 편한 잠의 은혜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오늘 사건이 기록된 바로 앞부분의 마태, 마가, 누가복음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821절에서는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4장의 내용은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 비유"이다. 즉 말씀에 관한 내용이다.
마태복음 8장에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제사에 대해서 오직 예수만을 좇는 자들이 진정 제자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공관복음 전부다 말씀 듣고 지키어 인내함으로 인생에 찾아오는 풍랑앞에 말씀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인생에서 만나는 삶의 문제를, 내 힘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해결 할 수 있습니다. 인생에 찾아오는 폭풍우 순간 기적 같은 믿음만을 기대하며, 두려움에 사로잡혀, 허겁지겁 예수님을 찾는 사람이 되시겠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처럼 약속의 말씀에 나의 시선을 고정시키고, 그 말씀의 열매가 맺는 그 때까지 말씀과 기도생활을 나의 전부를 투신하면서 인내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겠습니까?
 
이제 우리의 선택이 남아 있습니다. 인생에서 만나는 어려움을 피할 수 없지만, 우리는 그 순간에 편한 잠을 잘 수는 있습니다. 예수님의 믿음이냐? 두려움이 가득한 제자들이냐?
 
사랑하는 삼성의 식구들 모두 폭풍의 치는 날에도 편히 잠을 잘 수 있는 믿음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인생의 문제를 만났을 때, 기적적인 믿음만을 바라나는 자들이 아니라, 일상에서 말씀과 기도 생활에 자신의 전부를 투신하여, 환란과 어려움을 만나는 그 때를, 능히 이길 믿음을 준비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인생의 어려움을 만나셨습니까,, 혹 지금 인생의 환란가운데 있는 성도님들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는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분 예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폭풍우 치는 인생의 어려움 속에서도, 편히 잠을 잘 수 있는 은혜 안에 거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찬양 359장 예수가 함께 계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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