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August 12, 2011

‘모델 - 예수님 닮기 -존 스토트 목사님의 마지막 공중 설교


존 스토트 목사님의 마지막 공중 설교

‘모델 - 예수님 닮기’



<사진출처: 국민일보>
2007년 7월 17일 영국 케즈윅 컨벤션(Keswick Convention)에서 설교

저는 오래 전 제가 젊은 그리스도인이었을 때 이해하기 힘들었던 한 질문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위해 어떤 목적을 갖고 계신가?” 우리가 회심한 사람들이라고 해봅시다. 구원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삶을 받았다고 해봅시다. 그 다음은 무엇일까요?

물론 우리는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라는 그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알고 있습니다. 이는 잘 아는 바이고, 믿는 바이지요. 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와 같은 5단어로 된 더 간단히 표현된 교리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 어떤 교리도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삶의 여정이 다해가는 지금 제 생각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말은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예수 닮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 닮음은 하나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만약 이것이 진리라면, 제가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이 요약됩니다.

첫째, 예수를 닮아가도록 부름 받은 사실에 관한 성경적 기본을 소개해야 한다.
둘째, 예수를 닮는 삶에 대해 신약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셋째, 이를 통해 실제적 결론을 이끌어 내는 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두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1. 첫 번째부터 같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예수를 닮아가도록 부름 받은 사실에 관한 성경적 기본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이에 관한 성경적 기본은 한 문장으로 요약 가능한 간단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적 기본은 한 문장에 담아낼 수 있는 것 이상의 본질적인 것에 관한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생각과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로마서 8:29, 고린도후서 3:18, 요한일서 3:2의 세 구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세 구절을 하나씩 보겠습니다.
1-1 로마서 8:29은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합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타락했을 당시, 자신이 지닌 하나님 형상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많은 부분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이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그리스도 안에 회복시켰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변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닮아간다는 뜻입니다. 예수 닮음이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의 영원불변한 목적입니다.

1-2 두 번째 성경구절은 고린도후서 3:18입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는 말씀입니다. 즉, 우리가 영원에서 영원으로 변화하는 것은 우리 안의 성령이 하시는 일이다. 이는 놀라운 사실이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이 두 번째 단계에서 관점이 과거에서 현재로, 하나님이 예비한 영원한 운명에서 성령에 의한 현재의 변화로 바뀌었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입니다. 관점의 변화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닮게 만드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에서 예수님의 형상으로 우리를 변화시키는 역사적인 성령의 역사로 달라졌습니다.

1-3 이는 요한일서 3:2의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라는 말씀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마지막 날에 우리가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자세히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닮아 있으리라는 것은 압니다. 영원히 그리스도와 함께할 것이고, 그리스도를 닮을 것이라는 영광스러운 진리에 만족합니다.

이제 과거, 현재, 미래, 세 가지 관점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 모두는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 있고, 우리는 운명 지어진 존재라는 것, 하나님의 역사적인 목적이 있고, 우리는 성령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 하나님의 마지막, 종말의 목적이 있고 우리는 하나님 존재 그대로를 보게 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닮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 세 가지 관점은 영원하고 역사적이며 종말론적입니다. 세 가지 모두는 우리가 왜 예수를 닮아야 하는지에 관한 같은 목적을 가리킵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이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이것이 예수를 닮아가기 위한 성경의 기본이자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인 것입니다.

이 진리는 신약의 많은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일단 요한일서 2:6에서 사도 요한이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라고 말했던 것처럼 말씀을 일반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우리가 나는 그리스도인이야, 라고 말하려면, 우리의 행동이 반드시 그리스도를 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에 나타난 첫 번째 예입니다 우리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와 같아야만 합니다.

여러분 중 어떤 분은 아마도 제 말씀의 두려움에 바로 몸을 움츠리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성육신은 완전히 독특한 사건이었고 어떤 방법으로든 흉내 낼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이에 대해 저는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고 답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사렛 예수로 우리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점에서 절대 다시 일어나지 않을 일회적인 독특한 사건입니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육신이 독특한 사건이 아니라는 다른 면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는 우리 모두가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 성육신은 독특한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 보편성을 띱니다. 우리는 하늘에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보인 겸손을 따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서 2:-5-8에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라고 적었습니다. 성육신 이면의 스스로를 낮추는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우리 또한 그리스도의 성육신 안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합니다.

2. 둘째, 그리스도의 섬김에서 그리스도를 닮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성육신한 예수님에 대해 살펴봤는데, 이제 탄생에서 삶까지, 시작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섬김의 삶을 살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 기록돼 있는 이야기를 봅시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마지막 밤을 보낸 곳으로 가봅시다. “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특히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에 주목하십시오.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이 명령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매달 한번씩이나 목요일에 최후의 만찬 행사를 하면서 세족식을 갖습니다. 문자 그대로 기념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대다수는 예수님의 명령을 문화적 맥락에서 받아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은 예수님 당대의 문화에서는 노예가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행동은 우리 문화에서 아주 하찮은 일이나 다른 사람을 위해 하는 일 중 굴욕감을 느낄 수 있는 일에 대입해야 합니다. 지금 현재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하찮은 일이 무엇입니까?

3. 셋째, 우리는 예수의 사랑 안에서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특히 지금 에베소서 5:2가 생각납니다.“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이 구절이 두 부분으로 나눠져 있다는 것을 눈 여겨 보시기 바랍니다. 앞부분은 사랑 가운데서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이 사랑의 표현이어야 한다는 명령입니다. 그러나 구절의 뒷부분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자신을 버리셨다는 내용으로, 이는 지속적인 사건은 아니지만 과거 시제로 분명히 십자가를 뜻합니다.  바울은 갈보리에서 자기를 내주는 사랑을 보이며 죽음에 있었던 그리스도와 같이 되라고 우리에게 촉구합니다. 여기에서 바울의 변화를 유의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성육신의 예수, 세족식의 예수, 십자가의 예수를 닮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생애에 이 세 가지 사건은 분명히 예수님을 닮아간다는 것은 실제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4. 넷째, 우리는 오래 참는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다음에 말씀 드릴 예는 바울에 관한 것이 아니라 베드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베드로전서의 모든 장은 그리스도가 겪은 고난을 우리도 겪을 것임을 암시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가 쓰여진 배경이 박해가 시작할 무렵이었기 때문이지요. 특히 베드로전서 2장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인 노예들에게 부당하게 처벌을 받더라도 참고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또한 베드로는, 그렇게 행동해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가 고통을 통해 우리에게 본을 보이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한번 본을 보이셨다는 표현을 쓰지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부당하게 고통을 당할 때 예수를 닮아야 한다는 부름은 세계 여러 곳에서 박해가 증가하는 오늘날, 보다 현실적으로 다가옵니다.

신약에 나타난 다섯째이자 마지막 예는 사명에 있어 예수를 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베드로의 가르침을 보면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에 이르게 됩니다. 요한복음 20:21의 기도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너희는 우리를 일컫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17장에서 제자들에게 사역을 위임할 때도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명한 지상대명령이 요한복음에 언급된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제자들의 사명은 그리스도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라는 지침이라는 의미입니다. 어떤 점에서 그럴까요? 이 구절에서 키워드는 “세상에 보내었고” 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들의 세상에 보냄 받았습니다. 몇 년 전 마이클 램지 주교가 이에 대해 잘 설명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세상에서 의심하는 자들의 의심 가운데서, 의문을 제기하는 자들의 의문 속에서, 갈 길을 잃고 헤매는 이들의 외로움 가운데서, 사랑의 공감을 표현하기만 한다면, 그것이 우리의 믿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다른 문화의 세상에 보냄 받았다는 것은 성육신의 복음전도가 의미하는 바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모든 진정한 사명은 성육신 사명입니다. 우리는 사명을 수행하는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언급한 성육신, 섬김, 사랑, 인내, 사명은 예수님을 닮을 수 있는 5가지 방법입니다.

예수님을 닮으면 어떤 실제적 결과를 가져오는지 세 가지를 아주 간단히 소개하고 싶습니다.

*-1 먼저, 예수 닮음과 고통의 미스터리입니다. 고통은 그 자체로 큰 문제고 그리스도인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고통을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한 가지 눈에 띄는 방법은 고통이 우리를 예수님과 같이 만들기 위해 하나님이 이끄는 과정의 일부라는 것입니다. 실망, 좌절, 또 다른 고통스런 비극, 문제가 무엇이던 간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거 하신 로마서 28:29에 비추어 봐야 합니다. 로마서 8:28에 따르면, 하나님은 언제나 믿는 자들의 선을 위해 일하시고, 8:29에는 이 선한 목적이 우리를 예수님 닮게 만듭니다.

*-2 둘째, 예수 닮음과 복음 전도의 도전입니다. 제가 그랬듯 여러분도 많은 경우 왜 전도하려는 노력이 대개 실패로 끝나는지 물어봤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이 자리에서 지나치게 단순화 시키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전하는 예수님과 우리의 삶이 너무나 동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존 폴톤은 <오늘날의 복음서>라는 통찰력 넘치는 책의 저자입니다. 이 책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장 효과적인 선포는 자신이 말한 바를 삶으로 구현해 내는 사람들의 선포다. 그들은 곧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모습이 되어야 한다. 소통하는 것은 사람들의 삶이지 단순히 말이나 개념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소통은 진실한 인격으로 가능하다.”

이것이 예수 닮음입니다. 다른 예를 하나 더 드리지요. 인도의 간디는 스탠리 존슨에게, “만약 당신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처럼 산다면, 인도는 내일 당신들의 발 아래 있을 것이요”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처럼 산다면, 제 생각에 인도는 오늘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발 아래 있을 것입니다. 이슬람교가 우세한 지역 출신의 이스칸더 자디드 목사는 과거 아랍 무슬림이었습니다. 그는 “만약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 같다면, 오늘날 이슬람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3 이로써 마지막 세 번째 결과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셋째는 예수 닮음과 성령 안에서 거함입니다. 오늘 저녁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과연 달성 가능한 목표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힘으로는 분명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거하는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의 안 사람부터 변화하도록 하셨습니다. 1940년대에 활동한 윌리엄 템플 주교는 셰익스피어를 이용해 이를 설명했습니다.
“내게 햄릿이나 리어왕과 같은 연극을 주면서 그런 작품을 쓰라고 말해도 소용없다. 셰익스피어는 할 수 있었지만, 나는 못 한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삶을 보여주면서 그런 삶을 살라고 말해도 소용없다. 예수님은 할 수 있었지만, 나는 못 한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의 영이 내 안에 온다면 훌륭한 연극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령이 내 안에 온다면, 예수와 같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가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말씀을 간단히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를 예수님과 같이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를 예수님과 같이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를 그의 영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즉, 그 방법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님, 성령의 삼위일체의 은혜라고 결론 짓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본 설교는 존 스토트 목사님이 대중들 앞에서 수행한 마지막 Public Sermon 입니다. Wichi 에서 번역을 제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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