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June 14, 2012

한 날 묵상 - <에스겔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왜 에스겔서를 읽는가?

 - 에스겔의 이해를 돕기 위한 글들 - NIV 적용주석 "에스겔" 이안 두굿 Iain M. Duguid 지음.
 에스겔성의 난해성은 환상들뿐만 아니라 에스겔서가 무질서와 혼동의 수많은 세월을 거치면서 기록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다.

1. 에스겔은 한 가지 위기 상황을 세 가지 다른 국면, 즉 끔직한 외세의 정치권력에 의해 침략당하려고 했을 때, 침략을 당해 타국으로 쫓겨 갔을 때, 그리고 상실한 조국의 회복을 기대할 때로 나누어 이야기했다. 에스겔 선지자는 각 국면마다 분명한 메시지를 드러냈다.

2. 에스겔의 중심 주제
 에스겔에게 주어진 임무는 포로가 되어 멀리 바빌론으로 끌려간 유다 백성들에게 예언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절망에 가운데 있는 청중이었으며 왜 그러한 재앙이 그들에게 닥쳤는지, 그들이 개인적으로 겪은 대학살 가운데 하나님은 어디에 게셨는지 질문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겔37:11)
 자신의 땅을 지킬 수도 없고 또 지키려고 하지도 않는 하나님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예루살렘에 있는 자신의 성전을 더럽히도록 놔둔 하나님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자신의 백성을 그 선조들에게 약속의 땅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타국으로 끌려가게 하는 하나님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비록 그 하나님이 이제 그의 땅을 위해 개입한다 치더라도 포로로 끌려가 멀리 타국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겠는가?

 1) 에스겔 전체를 뒤덮고 있는 주제는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이다.
 2) 인간의 철저한 죄성이다.
 3) 처음 두 주제에서 발전하는 것으로 피할 수 없는 심판의 도래이다.
  에스겔의 전체의 전환점은 예루살렘 멸망의 소식이 전해지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에스겔 24장의 끝에 예기되었던 사건이며, 실제로 33:21-22에서 일어난다.
 4) 왕이신 하나님이 돌아오시고 백성들은 땅과 축복을 되찾게 되는 것이다. 새로워진 성전에 대한 에스겔의 환상에서 그 중심은 하나님의 영광이 지극히 높은 곳으로 돌아오는 것이다(겔 43:1-5).
 그렇다면, 우리가 에스겔에서 발견하는 주제는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 인간의 죄성, 심판의 확실성, 미래에 대한 자비와 소망의 약속이다.
 소망에 대한 더 큰 게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다. 에스겔은 우리를 그에게 인도한다. 에스겔이 보았던 성전으로 내려오는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의 인성 안에 도래하였고, 그에 대해 요한은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요1:14)라고 증언하였다.

3. 개관
 1) 에스겔의 소명과 임무(1:1-3;27)
 2) 멸망의 신탁(4:1-24:27)
 3) 열방에 대한 신탁(25:1-32:32)
 4) 복음의 신탁(33:1-48:35)

4. 역사적 배경
 에스겔서에 나오는 환상들의 시발점은(1:2-3)은 유다 왕 여호야긴의 포로생활 5년차에 바빌론 그발 강가이다. 우리는 에스겔서를 이해하기 위해 이 장소의 신학적 의미를 검토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해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덯게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장소에 이르게 되었는가?
 그 답변의 일부는 당시 "세속사"의 흐름 가운데서 찾을 수 있다. 주전 신 아시리아인들은 수도를 니느웨로 정하면서 근동지역을 장악했다. 그 제국의 경계는 후퇴와 전진을 거듭하면서 이집트의 지경까지 이르렀다.
 주전 841년에 예후와 북 왕국 이스라엘은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 그리고 한 세기가 지난 후에 티그랏-빌에셀 3세와 그의 아들 살만에셀 5세의 지배 아래 아시리아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영토를 침입하였고, 마침내 722년에 합병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시리아 제국의 도처로 추방되었고, 다른 민족들이 그들을 대치하였다(왕하17장)
 20년 사이에 아시리아는 산헤립의 통치 아래 예루살렘의 성문들을 다 휩쓸어 버렸으며, 반역의 소지가 있는 히스기야 왕을 "새장 속의 새처럼" 옥죄어 왔다. 그런 중에 히스기야가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주의 사자가 직접 개입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주의 사자가 185,000명의 아시리아 군대를 쳐 죽였던 것이다(왕하 19:35).
 동시에 강력한 바빌론의 통치자 므로닥발라단은 봍노의 더욱 인접한 지역에서 산헤립에게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므로닥발라단은 히스기야의 배반을 선동하고자 사신을 보냈고, 히스기야는 그들을 대접하면서 왕실의 보호와 무기고를 보여주었다(왕하 20:13). 히스기야는 이전에 아시라아가 쳐들어 왔을 대 그를 구한 것이 재력이나 무기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금방 잊어버렸던 것이다.
 그 때 선지자 이사야를 하나님은 그의 사신으로 예루살렘에 보냈다. 이사야의 임무는 히스기야의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왕하 20:14-18). 바빌론에게 우호적이었던 히스기야는 머지않은 미래에 바로 그 바빌론인들이 다시 돌아와 궁궐의 보화들을 다 갈취해 갈 거라는 사실을 알아야 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그 신탁을 선한 소식으로 생각하였다. 아마도 그 신탁이 히스기야가 사는 날만큼은 적어도 태평할 것라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왕하 20:19).
 사실상 이 시기는 고대 근동의 작은 국가들에게 어려운 때였다. 산헤립이 바빌론 왕조를 주전 689년에 무너뜨리고, 바빌론의 수호신인 마르둑을 떨어뜨린 바빌론의 신성한 도시를 붕괴시켰으나, 아시리아의 세력은 이미 기울고 있었다.
 주전 625년경에 이르러 바빌론은 나보폴라살의 지휘 아래 아시리아의 멍에에서 벗어나싿. 그리고 10년이 지난 주전 616년에 나보폴라살은 아시리아의 영토로 행군하여 성읍을 하나 둘씩 점령하기 시작했다. 주전 612년에 니느웨가 함락되었다. 그리고 주전 605년 카르케미시 전투를 기점으로 아시라아-이집트 동맹국은 멸망했다.
 유다가 이 사건들에 직접 개인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유다는 이미 사면초가에 놓여 있었다. 공예배 개혁을 주도하던 유다의 마지막 선왕 요시야는 주전 609년에 아시리아를 지원하러 가는 이집트의 군사 원정을 차단하려고 했다. 그의 의도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요시아는 이집트와의 므깃도 전투에서 비극적으로 전사했다.
 요시아의 죽음으로 짧았던 유다의 종교개혁은 갑작스런 종국을 맞는다.
 그의 왕위는 아들 여호아하스가 계승했다. 3개월 통치기간에 여호아하스는 불행히도 부친의 의로운 길을 따르지 않고 조부인 아몬의 사악한 길을 따랐다. 그 후 이집트의 침입이 있었고 여호아하스는 포로가 되어 이집트로 끌려갔다.
 그리고 그 형 엘리아김이 권자에 앉게 되었다(왕하23:34(. 바로 느고는 언약적 종주권을 명시하는 행위로 엘리아김의 이름을 여호아김("주께서 일으키신다")으로 바뀌어싿. 공교롭게도 그 이름은 사악한 왕을 일컫는 정통적인 이름이 되었다. 특히 외세의 세력을 업고 권좌를 차지했던 왕을 일컫게 되었다.
 대력 주전 605년 경에 바빌론의 침략이 시작되었다. 이집트는 팔레스타인에서 쫓겨났다.
 여호야김은 약삭빠르게 편을 바꾸어 바빌론에 충성을 맹세했다. 바빌론은 귀족 가운데 인질을 취해 바빌론으로 데려갔다. 그 중에 다니엘과 그의 세친구가 포함되었다. 그러나 여호아김은 바빌론과 맺은 조약들을 지키지 않았다. 그 가운데 아마도 엄청난 부담의 조공이 포함되었던 것 같다. 여호아김은 주전 598년 "대표 없는 곳에 과세할 수 없다" 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고 외치며 바빌론을 배반하였다.
 이 저항은 위대하고 영웅적이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그의 행동은 사악한 것이었다. 바빌론은 다시 돌아와 그의 반란을 재압했다. 이 과정에서 여호야김은 죽었다.
 유다 백성은 그 자리에 그의 아들 여호아긴을 앉혔다. 여호야긴은 하나님이나 느브갓네살이 보기에도 그의 부친보다 나은 것이 없었다. 여호야긴은 예레미야의 조언을 따라 바빌론에 복종하기는는커녕 이집트 원조를 청했다(이것은 구약에서 하나님께 불신할 때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대안이다). 그리고 3개월이 채 못 되어 여호야긴은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다.
 여호야긴의 유수후에 느브갓네살은 여호야긴의 삼촌 맛디니아를 권좌에 앉히고, 그의 이름을 시드기야로 바꾸었다(왕하 24:17).
 시드기야는 왕위에 앉아 있었지만, 신하들이 하는 일에 무지하거나 통제권을 갖지 못하는 빈약한 왕처럼 보인다. 그런 시드기야는 주전 589년에 반란에 동의하였다. 느부삿네살은 만반의 전쟁태세를 갖추고 내려왔다. 그리고 마침내 성벽이 무너졌다. 시드기야가 지켜보는 가운데 느브갓네살은 그의 아들들을 처형했다. 그런 다음 시드기야의 눈을 뽑아 바빌론으로 압송했다.
 예루살렘성은 무너지고 불에 탔다. 그리고 그 땅에 남아 있던 거주자들 대부분은 포로로 끌려갔다. 단지 극빈자 중의 극빈자들만이 그곳에 남았다.

 이런 격변의 세월이 에스겔서에 있는 예언들의 배경을 형성한다. 에스겔서의 시간적 배경은 예루살렘 멸망 전후로 하여 20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있다.
 근본적으로 에스겔서 기자는 예루살렘 명망 소식을 듣게 되는 사건의 관점에서, 더 정확하히 말하자면 포로들이 예루살렘 멸망 소식을 듣게 되는 사건을 중심으로 배열하였다(겔24:27에서 예견되었고, 33:21-22에서 실현되었다). 그것은 포로로 있는 선지자와 하나님의 백성 모두에게 전환점이 되었다. 하나님을 배반하는 백성이 걷는 길의 끝은 명료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예언(겔1-24장)은 그 길의 끝이 이야기의 끝이 아님을 보여줌으로써 종결된다(겔34-48장). 궁극적으로 하나님 백성의 죄악성과 반역조차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압도할 수 없다.

5. 바빌론과 아시리아의 포로정책이 미치는 영향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비빌론과 아시리아는 포로정책에 관한한 매우 다른 정책을 취했다. 아시리아는 분리와 정복 정책을 채택하였다. 아시리아는 제국의 한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을 데려다가 작은 무리로 나누어 제국의 여러 지역에 다시 정착시켰다. 아시리아는 기존의 연대감과 동맹관계를 무너뜨림으로써 피정복민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조직을 파괴하고 그들의 정체성을 혼란시켰다.
 반면에 바빌론은 온갖 샐러드를 버무려 놓은 것처럼 다소 약화된 동화정책론 모델을 따랐다. 그들은 피정복국가에서 지도자와 기술자들을 데려다가 제국의 주변에서 중심으로, 곧 바빌론 제국으로 끌어들였다. 그곳에서 그들은 합리적인 대우를 받았고 그들의 종족집단을 따라 정착하였으며 바빌론 체제 안에서 진급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바빌론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정책의 목적은 피정복민들의 종족적 정체성을 남겨둔 채 그들의 다양한 재능과 능력을 중심권으로 가져옴으로써 다양한 집단들을 병합시켜 제국에 봉사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 결과들은 포로기의 남 왕국과 북 왕국에 각기 다른 운명을 초래하였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분산되고 실제로 붕괴 되었다. 단지 신앙을 가진 개개인들이 미래에 열두 지파가 다시 연합할 것을 꿈꾸면서 디아스포라로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북 왕국은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그 땅은 다른 종족 집단들과 혈통이 섞이고,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산앙은 그 땅의 신에 대한 미신적 관점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에 유다는 주전 586년에 멸망한 후에 수많은 사람들이 추방되었지만 신앙을 지킨 사람들에게는 귀환의 가능성만 남아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빌론의 그발 강가에 정착한 포로들이다. 그 그룹에는 신실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에스겔에게 주어진 임무는 그들에게 예언하는 것이었다.



6. 에스겔의 일기
1장 1절 "서른째 해 넷째 달 초닷새 ... 여호야긴 왕이 사로잡힌 지 오 년 그 달 초닷새라"

           3장 16절 "칠 일 후에"

8장 1절 "여섯째 해 여섯째 달 초닷새에"

20장 1절 "일곱재 해 다섯째 달 열쨰 날에"

24장 1절 "아홉째 해 열째 달 열째 날에"

26장 1절 "열한째 해 어느 달 초하루에"

29장 1절 "열째 해 열째 달 열두째 날에"

31장 1절 "열한째 해 섯째 달 초하루에"

32장 1절 "열두째 해 열두째 달 초하루에"

32장 17절 "열두째 해 어느 달 열다섯째 날에"

40장 1절 "우리가 사로잡힌 지 스물다섯째 해, 성이 함락 된 후 열넷째 해 첫째 달 열째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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