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June 30, 2012

2012 여름수련회 조별발표회




조별발표회 1등팀 "허세와 신실"

3시간 남짓 연습으로 이루어낸 멋진 작품입니다.
친구들 대단합니다.
조별발표회 MVP 찾아보세요!!!

Monday, June 25, 2012

묵상 - 요나 1장 3절

욘 1장 3절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심리학자들은 두려움 앞에서 가장 흔한 대치법은 회피라고 말한다. 두려운 사람이나 장소에 아예 가까이 가지 않는 것이다. 구약에서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을 찾아가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지만 두려운 나머지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다.

 - Not a fan. p248. Chater 12. 예수님이 지시하면 어디든지 따라나선다.

한 날 묵상 - 겔32장 1-16 <슬픈 노래의 주인공이 되지 맙시다. 애굽은 한 때 여러 나라들이 사자로, 악어로 생각했지만, 그들의 교만으로 인해 슬픈 노래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한 날 묵상  - 겔32장 1-16 <슬픈 노래의 주인공이 되지 맙시다. 애굽은 한 때 여러 나라들이 사자로, 악어로 생각했지만, 그들의 교만으로 인해 슬픈 노래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1. 에스겔서를 읽으면서 몇 군데 전환의 포인트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전환점의 핵심이 됩니다.

2.  이해를 돕기 위해 에스겔에 나타나는 전환 포인트를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3. 1장부터 3장까지는 에스겔의 소명에 대한 부분입니다. 왜 에스겔를 부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어떻게 너를 사용하겠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과 주변 나라들에 대해서 예언을 하는 부분입니다.

4. 두번째는 이스라엘의 멸망입니다. 4장부터 24장까지 이어집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의 중심에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철저히 백성들의 죄악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심판의 도구로 이웃 나라들의 힘을 잠시 빌리겠다고 하십니다.

5. 오늘 본문이 해당되면, 세번째로의 전환점의 끝부분이 되는 내용은 하나님이 잠시 힘을 빌린 이웃 나라들의 멸망에 관한 것입니다. 25장부터 32장까지입니다. 그런데 이들 나라들의 공통점은 교만입니다. 자신들의 힘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임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같이 교만으로 인해 서로가 서로를 물고 물어지게 됩니다.

6. 그리고 마지막으로 33장부터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회복입니다. 새성전에 관한 예언입니다. 남은 자들과 포로로 끌려간 자들에 대한 소망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회복이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땅에 오심에 대한 예표가 됩니다.

7.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오늘 본문 애굽에 관한 이야기는 세번째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8. 애굽은 강한 나라였습니다(2절). 여러 나라에서 그들을 사자로, 악어로 생각했습니다. 사자나 악어 모두 아주 강한 동물입니다. 에스겔의 시대의 역사에서도 애굽은 강대국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9.  그러나 그들은 교만했습니다. 하나님의 슬픈 노래가 그들에게 임합니다. 악어를 잡기 위해서 그물을 치겠다 말씀하십니다.

10. 더 이상 애굽은 악어가 되지 못합니다. 슬픈 노래의 주인공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일시적으로 사용되는 도구가지 맙시다. 하나님과 늘 함께 하는 동반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11. 하나님을 우리를 부하게도 하실 수 있으며, 가난에 처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부하게 될 때 교만하지 맙시다. 가난에 처할 때 하나님을 원망하지 맙시다.'

12. 오직 어느 때에든지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하나님과 함께 합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시다.

13. 악어를 잡기 위해 그물을 쳤던 그 강이 이제 흐려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곳을 그대로 두지 않으십니다. 참으로 은혜입니다. 13절에 보면, "그 때에 내가 그 물을 맑게 하여 그 강이 기름같이 흐르게 하리로다"고 말씀하십니다.

14. 하나님이 그렇게 하십니다. 진흙탕 같았던 강을 아주 맑게 하시는 분이시빈다. 하나님의 능력이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이십니다.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속성이십니다.

15.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를 원합니다. 말씀앞에 바로 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앞에 무릎을 꿇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깊은 신뢰를 갖기를 원합니다.

16. 오늘 하루도 눈을 열어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은 결코 멀리 있지 않습니다. 아주 가까에 계시빈다.

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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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열두째 해 열두째 달 초하루에"
2절 "너는 애굽의 바로 왕에 대하여 슬픈 노래를 불러 그에게 이르라 너를 여러 나라에서 사자로 생각하였더니 실상은 바다 가운데 큰 악어라"
3절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는니라 ... 그물을 네 위에 치고 그 그물로 너를 끌어오리로다"
4-10절 -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집트의 교만을 흩어버리실 것이다.
11절 "바벨론 왕의 칼이 네게 오리로다"
12절 "나는 네 무리가 용사 곧 모든 나라의 무서운 자들의 칼에 엎드러지게 할 것임이여 그들이 애굽의 교만을 폐하며 그 모든 무리를 멸하리로다"
 => 하나님의 주권, 교만의 심판,
13절 "내가 또 그 모든 짐승을 큰 물가에서 멸하리니 사람의 발이나 짐승의 굽이 다시는 그 물을 흐리지 못할 것임이여"
14절 "그 때에 내가 그 물을 맑게 하여 그 강이 기름같이 흐르게 하리로다"
15절 "내가 애굽 땅이 황폐하여 사막이 되게 하여 거기에 풍성한 것이 없게 할 것임이여"
16절 "이는 슬피 부를 노래이니 ... 애굽과 그 모든 무리를 위하여 이것을 슬퍼 부르리로다"


리더십 네트워크 - 618호 - 하나님께 사로잡힌 리더


여러분들은 리더란 어떤 사람을 말한다 생각하십니까?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리더, 혹은 영웅은 대부분 외형적인 기준에 있어서 뛰어나거나 준수함을 갖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시대를 이끌었던 리더들을 비교해 보면 신기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외모가 뛰어나거나 성품이나 도덕성에서도 뛰어남을 보였던 리더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얼마나 흥미로운 사실입니까? 사람들이 바라는 리더와 정작 역사 속에서 커다란 획을 그었던 사람들은 의외로 그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람들이 바라는 리더가 아닌 한 시대를 풍미했던 거대한 리더들을 살펴보면서 그들의 배경이나 환경이 그리도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공통적으로 큰 리더들이 될 수 있었던 공통점을 고민해보아야 합니다. 그들이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은 자신들만의 비전과 꿈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들이 시대를 앞서간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자신들의 꿈을 현실 속에서 일궈내기 위해 그 꿈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을 그들의 자서전에서 종종 발견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발견을 앞에 두고도 우리는 분명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바람이 시대적 영웅들을 만들어 내지 못했던 것처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꿈과 비전은 다 위대함으로 뛰어 넘을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리더라면 진정한 비전과 꿈을 찾기 위해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를 가장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R.C. 스프룰 목사는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하찮은 모습에서 깨달음을 얻고 도전 받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 섰을 때 비로서 자신과 상반되는 모습을 발견하고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이같은 스프룰 목사의 조언을 따라 하나님 앞에 섰던 프랜시스 챈 목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 자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분이신데, 그 하나님이 우리를 가까이 부르지 않으신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분을 사랑의 하나님이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가까이 머무는 것이 인간에게는 최고의 선물이기에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하나님 이십니다. 더 이상은 없습니다.”
이 같은 챈 목사의 고백은 그가 결국 하나님 앞에서 섰을 때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함은 물론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분이라는 것을 발견했음을 보여줍니다. 달리 말하자면 목회자가 진정한 리더로서 거듭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괴수 됨을 발견함과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발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비전과 꿈으로 비로서 진정한 리더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비전과 꿈에, 아니 하나님께 사로잡힌 리더들을 챈 목사는 <크레이지 러브>에서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라 이야기 합니다.
  • 하나님께 사로잡힌 리더들은 나눠 줄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 푹 빠진 사람은 자신을 미워하는 이들마저 사랑하며 그 사랑이 감사로 되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 하나님께 사로잡힌 리더들은 자신의 안전과 안락함만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위험과 고통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보다 다시 오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더욱 집중합니다.
  • 하나님께 사로잡힌 리더들은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전심으로 주를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재물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자주 이야기 한 이유가 그만큼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께 사로잡힌 리더들은 상황이나 사람들의 요구를 채워주기 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에 더욱 우선순위를 둡니다. 이 세상의 재물과 명예, 성광과는 상관 없는 일일지라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 하나님께 사로잡힌 리더들은 교만의 죄가 항상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아무리 마음을 낮추어도 스스로 “완벽한 겸손”을 이룰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사로잡힌 리더들은 이 세상의 기대와 예상과는 전혀 맞지 않는 리더들일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눈을 고정시킨 이들이야 말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진정한 리더들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오늘 우리도 하나님 앞으로 달려 나아가서 그 분의 아름다우심과 위대하심을 찬미하며 그 분께 온전히 사로잡힌 리더가 되길 소망해 봅니다.

* 이 글은 미션월드에서 출간된 프랜시스 챈의 책 <크레이지 러브>의 일부를 각색한 글입니다.

Thursday, June 14, 2012

한 날 묵상 - <에스겔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왜 에스겔서를 읽는가?

 - 에스겔의 이해를 돕기 위한 글들 - NIV 적용주석 "에스겔" 이안 두굿 Iain M. Duguid 지음.
 에스겔성의 난해성은 환상들뿐만 아니라 에스겔서가 무질서와 혼동의 수많은 세월을 거치면서 기록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다.

1. 에스겔은 한 가지 위기 상황을 세 가지 다른 국면, 즉 끔직한 외세의 정치권력에 의해 침략당하려고 했을 때, 침략을 당해 타국으로 쫓겨 갔을 때, 그리고 상실한 조국의 회복을 기대할 때로 나누어 이야기했다. 에스겔 선지자는 각 국면마다 분명한 메시지를 드러냈다.

2. 에스겔의 중심 주제
 에스겔에게 주어진 임무는 포로가 되어 멀리 바빌론으로 끌려간 유다 백성들에게 예언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절망에 가운데 있는 청중이었으며 왜 그러한 재앙이 그들에게 닥쳤는지, 그들이 개인적으로 겪은 대학살 가운데 하나님은 어디에 게셨는지 질문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겔37:11)
 자신의 땅을 지킬 수도 없고 또 지키려고 하지도 않는 하나님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예루살렘에 있는 자신의 성전을 더럽히도록 놔둔 하나님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자신의 백성을 그 선조들에게 약속의 땅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타국으로 끌려가게 하는 하나님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비록 그 하나님이 이제 그의 땅을 위해 개입한다 치더라도 포로로 끌려가 멀리 타국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겠는가?

 1) 에스겔 전체를 뒤덮고 있는 주제는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이다.
 2) 인간의 철저한 죄성이다.
 3) 처음 두 주제에서 발전하는 것으로 피할 수 없는 심판의 도래이다.
  에스겔의 전체의 전환점은 예루살렘 멸망의 소식이 전해지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에스겔 24장의 끝에 예기되었던 사건이며, 실제로 33:21-22에서 일어난다.
 4) 왕이신 하나님이 돌아오시고 백성들은 땅과 축복을 되찾게 되는 것이다. 새로워진 성전에 대한 에스겔의 환상에서 그 중심은 하나님의 영광이 지극히 높은 곳으로 돌아오는 것이다(겔 43:1-5).
 그렇다면, 우리가 에스겔에서 발견하는 주제는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 인간의 죄성, 심판의 확실성, 미래에 대한 자비와 소망의 약속이다.
 소망에 대한 더 큰 게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다. 에스겔은 우리를 그에게 인도한다. 에스겔이 보았던 성전으로 내려오는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의 인성 안에 도래하였고, 그에 대해 요한은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요1:14)라고 증언하였다.

3. 개관
 1) 에스겔의 소명과 임무(1:1-3;27)
 2) 멸망의 신탁(4:1-24:27)
 3) 열방에 대한 신탁(25:1-32:32)
 4) 복음의 신탁(33:1-48:35)

4. 역사적 배경
 에스겔서에 나오는 환상들의 시발점은(1:2-3)은 유다 왕 여호야긴의 포로생활 5년차에 바빌론 그발 강가이다. 우리는 에스겔서를 이해하기 위해 이 장소의 신학적 의미를 검토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해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덯게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장소에 이르게 되었는가?
 그 답변의 일부는 당시 "세속사"의 흐름 가운데서 찾을 수 있다. 주전 신 아시리아인들은 수도를 니느웨로 정하면서 근동지역을 장악했다. 그 제국의 경계는 후퇴와 전진을 거듭하면서 이집트의 지경까지 이르렀다.
 주전 841년에 예후와 북 왕국 이스라엘은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 그리고 한 세기가 지난 후에 티그랏-빌에셀 3세와 그의 아들 살만에셀 5세의 지배 아래 아시리아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영토를 침입하였고, 마침내 722년에 합병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시리아 제국의 도처로 추방되었고, 다른 민족들이 그들을 대치하였다(왕하17장)
 20년 사이에 아시리아는 산헤립의 통치 아래 예루살렘의 성문들을 다 휩쓸어 버렸으며, 반역의 소지가 있는 히스기야 왕을 "새장 속의 새처럼" 옥죄어 왔다. 그런 중에 히스기야가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주의 사자가 직접 개입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주의 사자가 185,000명의 아시리아 군대를 쳐 죽였던 것이다(왕하 19:35).
 동시에 강력한 바빌론의 통치자 므로닥발라단은 봍노의 더욱 인접한 지역에서 산헤립에게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므로닥발라단은 히스기야의 배반을 선동하고자 사신을 보냈고, 히스기야는 그들을 대접하면서 왕실의 보호와 무기고를 보여주었다(왕하 20:13). 히스기야는 이전에 아시라아가 쳐들어 왔을 대 그를 구한 것이 재력이나 무기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금방 잊어버렸던 것이다.
 그 때 선지자 이사야를 하나님은 그의 사신으로 예루살렘에 보냈다. 이사야의 임무는 히스기야의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왕하 20:14-18). 바빌론에게 우호적이었던 히스기야는 머지않은 미래에 바로 그 바빌론인들이 다시 돌아와 궁궐의 보화들을 다 갈취해 갈 거라는 사실을 알아야 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그 신탁을 선한 소식으로 생각하였다. 아마도 그 신탁이 히스기야가 사는 날만큼은 적어도 태평할 것라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왕하 20:19).
 사실상 이 시기는 고대 근동의 작은 국가들에게 어려운 때였다. 산헤립이 바빌론 왕조를 주전 689년에 무너뜨리고, 바빌론의 수호신인 마르둑을 떨어뜨린 바빌론의 신성한 도시를 붕괴시켰으나, 아시리아의 세력은 이미 기울고 있었다.
 주전 625년경에 이르러 바빌론은 나보폴라살의 지휘 아래 아시리아의 멍에에서 벗어나싿. 그리고 10년이 지난 주전 616년에 나보폴라살은 아시리아의 영토로 행군하여 성읍을 하나 둘씩 점령하기 시작했다. 주전 612년에 니느웨가 함락되었다. 그리고 주전 605년 카르케미시 전투를 기점으로 아시라아-이집트 동맹국은 멸망했다.
 유다가 이 사건들에 직접 개인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유다는 이미 사면초가에 놓여 있었다. 공예배 개혁을 주도하던 유다의 마지막 선왕 요시야는 주전 609년에 아시리아를 지원하러 가는 이집트의 군사 원정을 차단하려고 했다. 그의 의도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요시아는 이집트와의 므깃도 전투에서 비극적으로 전사했다.
 요시아의 죽음으로 짧았던 유다의 종교개혁은 갑작스런 종국을 맞는다.
 그의 왕위는 아들 여호아하스가 계승했다. 3개월 통치기간에 여호아하스는 불행히도 부친의 의로운 길을 따르지 않고 조부인 아몬의 사악한 길을 따랐다. 그 후 이집트의 침입이 있었고 여호아하스는 포로가 되어 이집트로 끌려갔다.
 그리고 그 형 엘리아김이 권자에 앉게 되었다(왕하23:34(. 바로 느고는 언약적 종주권을 명시하는 행위로 엘리아김의 이름을 여호아김("주께서 일으키신다")으로 바뀌어싿. 공교롭게도 그 이름은 사악한 왕을 일컫는 정통적인 이름이 되었다. 특히 외세의 세력을 업고 권좌를 차지했던 왕을 일컫게 되었다.
 대력 주전 605년 경에 바빌론의 침략이 시작되었다. 이집트는 팔레스타인에서 쫓겨났다.
 여호야김은 약삭빠르게 편을 바꾸어 바빌론에 충성을 맹세했다. 바빌론은 귀족 가운데 인질을 취해 바빌론으로 데려갔다. 그 중에 다니엘과 그의 세친구가 포함되었다. 그러나 여호아김은 바빌론과 맺은 조약들을 지키지 않았다. 그 가운데 아마도 엄청난 부담의 조공이 포함되었던 것 같다. 여호아김은 주전 598년 "대표 없는 곳에 과세할 수 없다" 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고 외치며 바빌론을 배반하였다.
 이 저항은 위대하고 영웅적이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그의 행동은 사악한 것이었다. 바빌론은 다시 돌아와 그의 반란을 재압했다. 이 과정에서 여호야김은 죽었다.
 유다 백성은 그 자리에 그의 아들 여호아긴을 앉혔다. 여호야긴은 하나님이나 느브갓네살이 보기에도 그의 부친보다 나은 것이 없었다. 여호야긴은 예레미야의 조언을 따라 바빌론에 복종하기는는커녕 이집트 원조를 청했다(이것은 구약에서 하나님께 불신할 때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대안이다). 그리고 3개월이 채 못 되어 여호야긴은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다.
 여호야긴의 유수후에 느브갓네살은 여호야긴의 삼촌 맛디니아를 권좌에 앉히고, 그의 이름을 시드기야로 바꾸었다(왕하 24:17).
 시드기야는 왕위에 앉아 있었지만, 신하들이 하는 일에 무지하거나 통제권을 갖지 못하는 빈약한 왕처럼 보인다. 그런 시드기야는 주전 589년에 반란에 동의하였다. 느부삿네살은 만반의 전쟁태세를 갖추고 내려왔다. 그리고 마침내 성벽이 무너졌다. 시드기야가 지켜보는 가운데 느브갓네살은 그의 아들들을 처형했다. 그런 다음 시드기야의 눈을 뽑아 바빌론으로 압송했다.
 예루살렘성은 무너지고 불에 탔다. 그리고 그 땅에 남아 있던 거주자들 대부분은 포로로 끌려갔다. 단지 극빈자 중의 극빈자들만이 그곳에 남았다.

 이런 격변의 세월이 에스겔서에 있는 예언들의 배경을 형성한다. 에스겔서의 시간적 배경은 예루살렘 멸망 전후로 하여 20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있다.
 근본적으로 에스겔서 기자는 예루살렘 명망 소식을 듣게 되는 사건의 관점에서, 더 정확하히 말하자면 포로들이 예루살렘 멸망 소식을 듣게 되는 사건을 중심으로 배열하였다(겔24:27에서 예견되었고, 33:21-22에서 실현되었다). 그것은 포로로 있는 선지자와 하나님의 백성 모두에게 전환점이 되었다. 하나님을 배반하는 백성이 걷는 길의 끝은 명료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예언(겔1-24장)은 그 길의 끝이 이야기의 끝이 아님을 보여줌으로써 종결된다(겔34-48장). 궁극적으로 하나님 백성의 죄악성과 반역조차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압도할 수 없다.

5. 바빌론과 아시리아의 포로정책이 미치는 영향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비빌론과 아시리아는 포로정책에 관한한 매우 다른 정책을 취했다. 아시리아는 분리와 정복 정책을 채택하였다. 아시리아는 제국의 한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을 데려다가 작은 무리로 나누어 제국의 여러 지역에 다시 정착시켰다. 아시리아는 기존의 연대감과 동맹관계를 무너뜨림으로써 피정복민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조직을 파괴하고 그들의 정체성을 혼란시켰다.
 반면에 바빌론은 온갖 샐러드를 버무려 놓은 것처럼 다소 약화된 동화정책론 모델을 따랐다. 그들은 피정복국가에서 지도자와 기술자들을 데려다가 제국의 주변에서 중심으로, 곧 바빌론 제국으로 끌어들였다. 그곳에서 그들은 합리적인 대우를 받았고 그들의 종족집단을 따라 정착하였으며 바빌론 체제 안에서 진급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바빌론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정책의 목적은 피정복민들의 종족적 정체성을 남겨둔 채 그들의 다양한 재능과 능력을 중심권으로 가져옴으로써 다양한 집단들을 병합시켜 제국에 봉사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 결과들은 포로기의 남 왕국과 북 왕국에 각기 다른 운명을 초래하였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분산되고 실제로 붕괴 되었다. 단지 신앙을 가진 개개인들이 미래에 열두 지파가 다시 연합할 것을 꿈꾸면서 디아스포라로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북 왕국은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그 땅은 다른 종족 집단들과 혈통이 섞이고,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산앙은 그 땅의 신에 대한 미신적 관점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에 유다는 주전 586년에 멸망한 후에 수많은 사람들이 추방되었지만 신앙을 지킨 사람들에게는 귀환의 가능성만 남아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빌론의 그발 강가에 정착한 포로들이다. 그 그룹에는 신실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에스겔에게 주어진 임무는 그들에게 예언하는 것이었다.



6. 에스겔의 일기
1장 1절 "서른째 해 넷째 달 초닷새 ... 여호야긴 왕이 사로잡힌 지 오 년 그 달 초닷새라"

           3장 16절 "칠 일 후에"

8장 1절 "여섯째 해 여섯째 달 초닷새에"

20장 1절 "일곱재 해 다섯째 달 열쨰 날에"

24장 1절 "아홉째 해 열째 달 열째 날에"

26장 1절 "열한째 해 어느 달 초하루에"

29장 1절 "열째 해 열째 달 열두째 날에"

31장 1절 "열한째 해 섯째 달 초하루에"

32장 1절 "열두째 해 열두째 달 초하루에"

32장 17절 "열두째 해 어느 달 열다섯째 날에"

40장 1절 "우리가 사로잡힌 지 스물다섯째 해, 성이 함락 된 후 열넷째 해 첫째 달 열째날에"



Monday, June 11, 2012

12학년 졸업영상





지난 3년간 함께 했던 12학년 졸업자들의 사진을 모아보았습니다.

교회학교 졸업에 즈음하여 형제, 자매들의 발걸음위에 하나님의 큰신 은총이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Wednesday, June 6, 2012

351호 - 소그룹이 필요한 여섯 가지 이유 - 국제제자훈련원


이번 호는 릭워렌 목사가 새들백교회 가족들에게 왜 소그룹이 영적 성장에 중요한지 설명하는 글을 소개합니다. 여러분의 성도들에게 적용하고자 하신다면 대환영입니다.
1. 소그룹은 하나님의 가족이  어떻게  어울릴지를  배우는 교실입니다
소그룹은 이기심을 버리고 공감하는 사랑을 연습하는 실험실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고 다른 사람들의 삶의 경험을 나누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고전 12:26). 지속적인 정규모임을 통해서만 불완전한 신자들이 진정한 교제를 배우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그런 관계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엡 4:16, 롬 12:4-5, 골 2:19, 고전 12:25).
진정한 교제는 우리가 예수님께 헌신하는 것처럼 서로에게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희생적인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주길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신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시길 말입니다.
2. 소그룹은 영적 근육을 발달시켜 줍니다
여러분이 만약 예배에 참석하기만 하고 수동적인 방관자로 신앙생활을 한다면 절대 성숙할 수 없습니다. 영적 성장의 중요한 도구중의 하나는 여러분의 영적 근육을 규칙적으로 운동시키는 소그룹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6).

신약성경에 50번이 넘게 “서로”라는 말이 나옵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서로를 격려하며, 서로 권면하고, 서로 문안하고, 서로를 섬기며, 서로를 가르치고, 서로 용납하며, 서로 존귀히 여기며, 서로의 짐을 지고, 서로 용서하며, 서로 복종하고, 서로에게 헌신하고 다른 성숙한 일을 하라고 명령 받았습니다. 여러분께서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되길 원하시면 이같이 하여야 합니다.
여러분은 누구와 함께 하고 계십니까? 고립은 자기 기만을 만들어냅니다. 주변에 여러분을 어렵게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스스로 성숙한 사람이라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진정한 성숙은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성경과 함께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는 것들을 공유하면서 저는 배우고 성장합니다.
3. 소그룹은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확인시켜 줍니다
만약 소그룹 모임에서 헌신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3:35). 서로 다른 배경과 인종 그리고 사회적 위치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소그룹으로 모여 사랑으로 하나될 때 세상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27).
4. 소그룹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주신 나의 사명을 이룰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예수님께서도 소그룹을 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 땅에서 예수님의 몸입니다. 우리끼리 서로 사랑하는 것을 넘어서서 이 세상의 나머지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손과 발이요 눈이며 심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이 땅에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우리 각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그분께서 하시는 일, 곧 우리를 위해 마련해 놓으신 선한 일, 우리가 해야 할 그 일에 우리를 참여시키시려는 것입니다”(엡2:10, 메시지 성경).
5. 소그룹은 영적으로 후퇴하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유혹 앞에서 안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적절한 상황이 주어지면 여러분과 저 모두 다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연약함을 아시고, 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서로 권면하는 책임을 우리에게 부여하셨습니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내가 상관할 바 아니다”라는 말은 크리스천의 용어가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의 삶에 개입하도록 명령 받은 사람들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영적으로 흔들리며 연약한 상태라면, 그 사람을 데려와서 성도의 교제를 나누게 하는 것은 여러분의 책임입니다.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하나님의 진리에서 떠난 사람들을 알고 있거든, 그들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들을 찾아가십시오. 그들을 돌아서게 하십시오”(약 5:19, 메시지 성경).
소그룹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의 장점은 영적 지도자들의 영적인 보호를 받는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처럼 성도들의 영적인 부요함을 위해 돌아보고 지키는 책임을 갖는 영적 목자를 세우셨습니다(행 20:28-29; 벧전 5:1-4; 히 13:7,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히 13:17).
여러분이 만약 새들백이라는 몸에서 떨어져 나가있다면, 저는 여러분에 대한 책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가족들로부터 고립되어 분리된 상태라면, 사탄은 여러분이 사탄의 괴계에 방어할 힘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6. 예수그리스도의 몸이 나를 필요로 합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이 보고 배울 수 있는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모임에서 독특한 역할을 감당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사역”이라고 부르며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재능을 주셨습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
지금 속해 있는 소그룹은 여러분의 영적 은사와 재능을 발견하여 발전시키며 사용할 수 있도록 계획된 곳입니다.
릭 워렌 목사는 수년간의 그의 사역 경험과 성경 연구를 통해서 이렇게 소그룹 사역이 필요한 이유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섬기는 소그룹에서 이러한 필요들이 채워 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