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December 6, 2013

한 날 묵상 - 막 8장 11-13절 “이 시대는 표적을 구하나 … 진정한 표적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땅에 성육신 하셔서 친히 우리에게 보이신 것이 곧 이 시대의 유일한 표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대에 표적을 보이지 않이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성육신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이 유일한 표적이다”

한 날 묵상 - 막 8장 11-13절 “이 시대는 표적을 구하나 … 진정한 표적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땅에 성육신 하셔서 친히 우리에게 보이신 것이 곧 이 시대의 유일한 표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대에 표적을 보이지 않이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성육신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이 유일한 표적이다”

참고) 막 8장 1-10절의 요약 말씀
“하나님은 창조를 통해서 우리는 살아갈 힘은 하늘로부터 온다는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으로 교만하며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살아가면서 공존이 아닌 자신의 배만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때에 창조의 회복을 위해 타락으로부터 구속의 은혜를 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친히 이 땅에 오셔습니다. 그리고 친히 배고픔을 타락으로 인해 다같이 가질 수 없는 자들을 위해 조금이라도 가진 자들의 나눔과 섬김에 축복하시고 축사하시어 다같이 배불릴 먹고도 남을 수 있는 재창조를 예수님을 친히 배풀어 주십니다. 그러나 타락한 시대에서 볼 수 있는 많이 모이게 하고, 높아지려는 유혹을 피하기 위해 허기진 배를 채운 이들을 흩으시고 친히 그 자리르 떠남을 통해 섬김과 나눔이 온전하게 되기위해 마지막 모습도 아름다워야함을 보여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1.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분과 함께라면 부족함이 없으며 항상 기쁨이 차고 넘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조건이 하나있었습니다. 

2. 그 조건은 바로 날마나 때를 따라 기적과 이적을 사람들에게 베풀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3. 이적과 기적을 베푸시는 예수님이면 인생은 언제나 만족함 그 뿐이었습니다. 

4. 우리는 지금 어떠하나요? 예수님을 좋으시나요? 예수님의 이적이 좋으시나요? 예수님 그 이름만으로도 기쁨과 감사가 넘치나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모든 것들이 이루어줘야 신앙의 기쁨을 맛보시나요?

5. 저와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6. 저도 날마다 기도합니다. 계속해서 기도합니다. 그런데요, 그 기도제목이 다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때론 낙망하고 실망하기도 하지만, 기도하다보면 이내 예수님이 함께 하시고 언제나 나와 동행하심을 느낄 때 그것으로 감사와 평안을 누리게 됨을 경험하곤 합니다. 

7.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들을 봅시다. 
11절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8.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기 위해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합니다. 그런데 12절에서 나타나는 예수님의 반응은 바리새인들만을 위한 말씀이 아님을 보게 됩니다. 
12절 “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9. 바리새인들 뿐만 아니라 이 세대 사람들 모두가 표적을 구한다며 하시면서 깊은 탄식하심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이 표적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몇 가지 표적이 사람들의 실제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것을 보면서 이 세대 사람들의 반응은 계속해서 예수님께 어떠한 표적을 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10.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의 말에 묵언적으로 사람들 또한 동의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참으로 재미있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11. 앞에서 우리는 사천명을 먹이시는 사건이 예수님이 친히 베풀어주신 하늘로부터 오는 양식임을 살펴보았습니다. 

12. 그런데 지금 바리새인들의 힐난하는 마음에 이런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진정 네가 하나님이며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표적을 보여줘바’라는 마음입니다. 

13.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참고로 요한복음 14장 1-14절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9절) 

14. 그렇지만 예수님의 하나님의 되심은, 즉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표적은 앞에서 베푸신 4천명을 먹이신 하늘양식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15.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진정한 표적은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함으로 에덴동산의 창조는 회복될 것이며 하나님이 사람들을 창조하시면서 주신 문화명령이 회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표적입니다

16. 그러나 사람들은 사천명, 오천명을 먹이신 떡과 같은 기적을 그들은 원하고 있습니다. 

17. 그런데 이러한 표적을 구하는 것에도 잘못된 그들의 시간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원하는 표적에서 나타난 그들의 잘못된 시각이란?

18. 1) 일하지 않고 먹으려 한다. 일하지 않는지 먹지도 말라. 

19. 2)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이 곧 이적임을 깨닫지 못한다.

20. 예수님은 이러한 마음때문에 그들을 보며 깊이 탄식하신 것입니다. 
12절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21. 그러면서 말씀하십니다. 12절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22. 예수님의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가?

23. 진정한 표적은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신 성육신, 친히 육신이 되어 오셨다” 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24.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마시는 자 더 이상 목마르지 않고, 예수님을 먹는 자 더 이상 배고프지 않는다.
요한복음 7장 37-38절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상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25. 요한계시록 3장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26. 이처럼 예수님 자체가 가장 큰 표적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 바로 회복된 창조입니다. 창조의 은혜를 다시금 누릴 수 있는 축복을 우리에게 예수님을 통해서 주셨습니다. 

27.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주기도문중에서) 아메.  

28.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에게 이러한 가르침을 선포한 후에 그들을 떠나셨다는 사실입니다. 

29. 예수님은 이 땅에 무리들을 모이기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목마르지 않는 생수, 배고프지 않을 양식을 얻는 비결을 제시하기 위해서 오셨고, 친히 이러한 사역을 십자가를 통해서 완성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30. 이것이 바로 그들을 떠나 다시 갈 수 밖에 없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13절 “그들을 떠나 다시 … 가시니라”

31. 그리고 또 하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을 분명하게 하실 때가 아직 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32. 오직 때가 되어 모든 것이 이루어진 후 “ 다 이루었다”의 말씀이 선포된 후에야 비로서 제자들을 포함해서 무리들은 이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다. 

33.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내 자신을 살펴봅니다. 오늘 나에게 예수님은 누구신가?
 오늘 우리는 어떠한가?
 여전히 표적을 구하는가?
 아직 예수님 자체가 이적과 표적이심을 믿지도 알지도 못하는가?

34. 혹 아직 예수님의 십자와 부활을 믿지 못하기 때문은 또한 아닌가?

35. 믿음이 있다면,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표적만을 바라고 따라가는 삶이 아니라, 예수님이 진정 내 마음속에 늘 거하실 수 있도록 자신의 마음을 더욱 거룩하게 하는 일에 더 열심으로 말씀과 기도생활에 집중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을 기원합니다. 


36. 할렐루야! 아멘!

Wednesday, December 4, 2013

한 날 묵상 - 막 8장 1-10절 <재창조의 은혜를 통해 하늘 양식을 굶주리고 배고픈 사천명의 사람들에게 배불리 먹이시고 남은 사랑을 베푸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이 시대의 희망을 본다>

한 날 묵상 - 마가복음 8장 1-10절 <하늘 양식을 공급받는 역사, 사천명을 먹이신 예수님>

1. 인간은 날마다 무엇을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먹지 않고 살 수 없습니다. 아무리 다이어트를 한다 하더라도 먹어야 합니다. 

2.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창조의 말씀에서 보듯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명령은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1장 26절),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장 27절),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창1장 28절).

3. 이처럼 우리가 먹는 모든 것은 전부 다 하나님의 창조안에서 있으며, 지금도 여전히 다스리시는 주권 아래 있습니다. 이른비와 늦은비를 주시지 않고, 햇빛을 주시지 않으면 봄에 뿌린 씨앗을 가을에 거둘 수 없기 때문입니다

4. 그런데, 이와 같은 하나님의 창조 섭리가 타락한 인간으로 인하여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고 교만하며 살아가는 시대에 우리는 지금 살아가고 있습니다. 

5. 이러한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이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친히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육신이 되어 이땅에 오셨습니다. 

6. 이제 친히 예수님은 세상에 선포합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힘은 하늘로부터 공급되는 자원을 공급받을 때 친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선포합니다.

7. 오늘 본문을 보면, 하늘 자원을 공급받는 놀라운 사건이 오늘 본문에서 기록되고 있습니다. 

8. 그 복된 비밀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양식이야말로 진정 목마르지 않고 배고프지 않는 놀라운 신비적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9. 1절 “그 무렵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 무리들에게 먹을 것이 없다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은 과연 누구를 부르셨는가? 가장 가까이 따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로 제자들입니다.
 이는 오늘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지금 세상에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들이 많다면, 예수님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누구를 부르실까요? 바로 예수님을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입니다. 과연 내가 예수님의 제자인가? 그렇다면 이 부르심을 외면할 수 없으면 순종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10.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 2절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3절 “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히라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
=> 구제하고 먹을 것을 주며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곧 예수님의 마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 똑같은 마음을 품고 섬기며 사랑하며 나누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11. 4절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 제자들의 여전한 반응. 이전과 똑같은 반응. 변한 것이 없는 모습들.
      아직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누구신지를 모를 뿐 아니라, 삶의 모든 문제의 해결의 근원이 누구신지를 알지못하고 있다. 그래서 오천명을 먹이신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서도 그 때와 다르지 않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12. 예수님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5절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 이 질문은 다른 말로 너희들이 먹을 것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에서 남에게 먹을 나누어줄 수 있는 인생을 살아간다면 진정 이것이야말로 사천명을 먹이시는 예수님의 기적을 똑같이 재현하며 사는 인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13.  5절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 너희가 여기 있는 사람들의 전부의 먹을 것을 책임지라는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너희에게 몇 개나 있느냐” 이는 “그것이면 족하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는 것입니다. 
14. 특별히 7절에 보면, 생선을 내어 드리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게 되는데, 생선의 크기가 어떠했는지 정확하게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작은”(7절). 그렇습니다. 우리가 드린 것은 작은 것들입니다. 결코 큰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전부입니다. 우리 마음의 전부이며, 가진 것의 전부입니다. 

15. 우리가 해야 할은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16. 왜요? 그 나머지는 예수님의 하실 일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먼저,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눌 마음을 갖는 것이며, 또한 우리가 가진 것을 진정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17. 그 이후의 일은 주님이 하십니다. 

18. 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내어 놓은 “일곱”(5절)의 것을 가지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또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는지라 이에 축복하시고”(7절)

19. 여기서 우리는 이 땅에서 섬김을 할 때의 자세가 어떠해야 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섬기며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것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주신 것으로 하며, 하나님이 주신 은총으로 하며, 하나님의 힘을 의지해야 할 수 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기에 절대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눌 수 있는 마음을 주시지 않으면 결코 내 것을 나눌 수 없다. 

20. 하나님의 주신 마음으로 할 수 있습니다. 삭개오의 마음을 찾아기신 예수님. 삭개오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힘은 예수님의 그 마음을 찾아가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삭개오를 만나주셨기 때문입니다. 

21. 기도하면 할 수록, 하나님의 마음을 품으면 품을 수록 돕고 나누고 구제하고 싶은 마음이 차고 넘칩니다. 필요와 도움이 간절한 사람들을 보게 되고 그들을 볼 때 또 외면할 수 없게 됩니다. 

22. 이처럼 우리의 나눔과 예수님의 축복하심, 그리고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통해 ‘작은’것이 변하여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8절)게 되었습니다. 

23. 8절 “배불리 먹고 남은 조작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으며”

24. 9절 “사람은 약 사천 명이었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흩어 보내시고”
10절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시니라”

25. => 예수님은 계속해서 먹이시고 채우시고 공급하여 주시고, 그들을 흩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자리를 떠나십니다. 
예수님은 결코 무리의 수장이 되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많은 무리들의 리더가 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따라오기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26. 이는 우리의 섬김이 때론 전도의 목적으로만 제한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교회에 많은 사람들 모이게 하기 위해서 구제하며, 장학사업이나 다른 섬김을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는 때가 되면 하나님이 추수할 때가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27. 우리의 섬김은 그져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 보이신 것처럼, 불쌍히 여기는 마음, 긍휼이 여기는 마음으로 행하고, 섬김 후에 아무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사람들을 흩어버리고 그 자리를 떠나는 구제와 섬김을 해야 합니다. 

28. 때론 구제와 섬김을 통해 어떠한 열매를 바라다가 그 구제가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교회의 해를 입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29.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하면서 그들에게 제자의 삶을 가리치며 자신의 감당해야 할 십자가의 사명에 집중했습니다.  
30. 많은 사람들을 모이게 하고, 많은 사람이 자신을 따라오게 하는 일에 관심과 신경을 쓰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이 또한 반드시 기억하고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 실천해야 합니다. 

31. 하나님은 창조를 통해서 우리는 살아갈 힘은 하늘로부터 온다는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으로 교만하며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살아가면서 공존이 아닌 자신의 배만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때에 창조의 회복을 위해 타락으로부터 구속의 은혜를 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친히 이 땅에 오셔습니다. 그리고 친히 배고픔을 타락으로 인해 다같이 가질 수 없는 자들을 위해 조금이라도 가진 자들의 나눔과 섬김에 축복하시고 축사하시어 다같이 배불릴 먹고도 남을 수 있는 재창조를 예수님을 친히 배풀어 주십니다. 그러나 타락한 시대에서 볼 수 있는 많이 모이게 하고, 높아지려는 유혹을 피하기 위해 허기진 배를 채운 이들을 흩으시고 친히 그 자리르 떠남을 통해 섬김과 나눔이 온전하게 되기위해 마지막 모습도 아름다워야함을 보여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32. 우리도 이러한 예수님 닮은 제자도의 삶을 살아가는 한 날이되며 이러한 은혜안에 거하는 한 날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33. 할렐루야! 아멘!

Saturday, November 30, 2013

한 날 묵상 - 막 7:31-37절 <하늘을 여시어 은혜를 주시는 예수님>

한 날 묵상 - 막 7:31-37절 <하늘을 여시어 은혜를 주시는 예수님>

1. 하늘을 여시어 은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2. 우리의 모든 자원이 하늘로부터 내려옴을 믿고 감사드립니다.

3. 오늘 날에게 필요한 양식이 있다면 그 모든 것은 전부 다 하늘의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온 양식임을 고백합니다. 

4. 그러니 부디 하나님 아버지에 오늘 날에게 필요한 모든 일용한 자원을 내려주시어 은혜의 한 날 되는 축복을 허락하옵소서. 아멘.

5. 예수님의 치유 사역은 계속됩니다. 복음을 위한 사역과 함께 계속되고 있습니다. 

6. 오늘 본문 또한 예수님의 치유사역입니다. 그런데 좀 다른 점이 있습니다. 

7. 예수님은 치유받기를 원하는 사람과 소통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33절 “예수께서 …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 수로보니게 여인과의 차이는? 예수님께서 직접 손을 대시었다.

34절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 예수님의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과의 소통 방법은?
앞서 24-30절 수로보니게 여인과의 소통하는 방법이 전혀 다르다.
여기서는 직접 행동으로 소통하고 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자이기에 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33-34절에서 예수님은 직접 액션과 motion을 통해서 그 사람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상상해봅시다.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보시는 모습.
“탄식"하는 모습.
“에바다"하고 외치는 모습.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귀먹고 말 더듬는 자는 진실되이 느낄 수 있었다. 바로 예수님의 소통법이다.

8. 볼 수 있는 사람에게 직접 터치하십니다. 앞에서 예수님은 수로보니게 여인에게는 말로서만 소통하셨습니다. 대화를 통해 믿음을 보십니다.

9. 그런데 여기에서는 친히 몸을 터치하시면서 상처를 치유하십니다.

10. 철저히 예수님의 입장이 아닌 상대방의 입장에서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예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는 분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입장에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11. 나는 지금 믿음의 없는 사람들과 어떻게 소통하고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소통하고 있습니까? 내 중심입니까? 상대방의 입장에서 소통하고 계십니까?

12. 예수님의 치유방법의 또 다른 점은 하늘을 우러러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으로부터 이러한 능력을 받았음을 보여주십니다.

13.  우리가 살아갈 힘 -> 하늘을 여기어 하늘 자원을 공급받는다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귀 먹고 말 못하는 우리의 인생가운데 친히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소통 방법이시다. 하늘로 눈을 들어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라.

14. 그렇다면, 예수님의 탄식과 기도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이 땅에 성육신하신 이유와 관련이 있다.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신 이유입니다.
cf. 눅4장 18절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참고? 마태복음 11장 1-7절, 누가복음 7장 18-23절.

15. 그들을 보니 탄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실수 밖에 없으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16. 이는 이어지는 다음의 말씀에서 더욱 잘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

17. ‘열리다' 무엇이 열리기 원하셨을까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18. 예수님의 이와 같은 일련의 말의 과정 분명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권위 있는 말씀을 통해 기적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WBC주석 34상 마가복음 주석 p625-626을 보면, “예수께서는 그 사람의 마비된 기관을 만지시고 침을 뱉고 하늘을 우러러보시면서 깊은 탄식을 하셨다. 사실 이 행동들은 모두 치유의 수단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의 치유는 예수의 권위있는 말씀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거듭된 치유의 행동들은 치유 과정의 일부다"
 
19. 예수님의 일련의 말씀 선포를 통해 치유의 기적은 일어나게 됩니다.
35절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 “곧"은 “즉시"의 다른 표현이다. 즉시 바로 치유되어 상실했던 기능을 회복하게 되었다.

20. 이렇게 귀가 열리고 혀 맺힌 것이 풀려 말이 분명해졌다. 그 이후 그가 한 행동은?
36절입니다 “그들이 더욱 널리 전파하니"

21. 더욱 크게 널리 전파하였다. 우리가 은혜를 누리고 있다면, 하늘의 보화를 받고 사모함이 있다면, 그리하여 입에 분명한 것이 가득하다면, 이러한 된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려 하려 하심이다"

22. 이사야의 선포한 말씀의 일부인 “이방인들"의 그들의 “귀”와 “혀”가 구원의 시대에 복음을 듣게 되고 말할 수 있게 되었음을 선포하고 있다.
  cf. 눅 4장 19절“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3. 이는 예수님의 경고도 무시하고 더욱 크게 전파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36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아이러니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게 그렇게 되지 않는가 봅니다.

25. 이것이 바로 하늘의 자원을 공급받는 인생들의 삶입니다.

26. 하나님의 놀라운 신비를 맛본 사람들은 그것을 내 안에만 간직할 수 없는 것이다. 누구든 만나서 이 영적인 은혜를 나누고 싶어한다. 만나서 이 놀라운 은혜를 전하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 은혜를 맛 본자만이 알 수 있도다.

27.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되는데, 예수님이 경계하며 할수록 더욱 더 강하게 그 예수님의 명령을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참고) 막 1:44절 나병환자를 고치실 때와 5:43절에서 회당장의 딸을 고치실 때.
예수님이 경계하면 할수록 더욱 “그들이 더욱 널리 전파하니"인데, 여기서 시제는 미완료시제입니다. 이는 활동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28. 왜 그럴까요? 받은 은혜가 크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만약 황금보화를 발견했다면, 다른 사람들도 당연히 황금보화를 가질 수 있도록 전하지 않을까요?

29.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결국 당연히 망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혼자만의 욕심은 곧 교만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30. 이러한 외침에 대한 사람들은 당연히 반응을 하게 됩니다. 
37절 “사람들이 심히 놀라 이르되”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31.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어떠한 반응이냐는 것입니다. 그들의 반응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찬양하고 있으며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32. 그리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37절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33. 이게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입니다. 그리고 지금 많은 사람들이 입에서 이러한 고백이 실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34. 다시한번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37절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나라"

35. 예수님이 진정하신 일은 육신의 나음을 넘어서는 영적으로 못듣는 사람을 듣게 하셨고 영적인 말 못하는 사람들에게 영적인 말을 하게 하신 것이다.

36. 복음을 받은 우리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지금 우리는, 나는 지금 영적인 말을 듣고 있는가? 세상적인 말을 듣고 있는가? 나는 지금 영적인 말을 하고 있는가? 세상적인 말을 하고 있는가?

37. 지금 내 입술의 말이, 내가 지금 무엇을 듣고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가 나의 믿음의 현주소입니다. 

38. 내 입술의 열매를 통해 내가 지금 하늘로부터 공급된 자원을 공급받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39. 오늘 한 날도 우리 모두 하늘 자원을 공급받아 살아가는 은혜와 고백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31절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32절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33절 “예수께서 …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 수로보니게 여인과의 차이는? 예수님께서 직접 손을 대시었다.


34절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 예수님의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과의 소통 방법은?
앞서 24-30절 수로보니게 여인과의 소통하는 방법이 전혀 다르다.
여기서는 직접 행동으로 소통하고 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자이기에 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33-34절에서 예수님은 직접 액션과 motion을 통해서 그 사람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상상해봅시다.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보시는 모습.
“탄식"하는 모습.
“에바다"하고 외치는 모습.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귀먹고 말 더듬는 자는 진실되이 느낄 수 있었다. 바로 예수님의 소통법이다.


 우리가 살아갈 힘-> 하늘을 여기어 하늘 자원을 공급받는다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귀 먹고 말 못하는 우리의 인생가운데 친히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소통 방법이시다. 하늘로 눈을 들어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라.


=> 예수님의 탄식과 기도에 담긴 의미는?
예수님이 이 땅에 성육신하신 이유와 관련이 있다.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신 이유…
cf. 눅4장 18절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참고? 마태복음 11장 1-7절, 누가복음 7장 18-23절.


=> 가장 중요한 예수님의 말씀.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
‘열리다' 무엇이 열리기 원하셨을까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권위 있는 말씀을 통해 기적을 이루시다. WBC주석 34상 마가복음 주석 p625-626을 보면, “예수께서는 그 사람의 마비된 기관을 만지시고 침을 뱉고 하늘을 우러러보시면서 깊은 탄식을 하셨다. 사실 이 행동들은 모두 치유의 수단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의 치유는 예수의 권위있는 말씀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거듭된 치유의 행동들은 치유 과정의 일부다"
 
35절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 “곧"은 “즉시"의 다른 표현이다. 즉시 바로 치유되어 상실했던 기능을 회복하게 되었다.
=> 귀가 열리고 혀 맺힌 것이 풀려 말이 분명해졌다. 그 이후 그가 한 행동은?



36절 “그들이 더욱 널리 전파하니"
=> 예수님의 경고도 무시하고 더욱 크게 널리 전파하였다. 우리가 은혜를 누리고 있다면, 하늘의 보화를 받고 사모함이 있다면, 그리하여 입에 분명한 것이 가득하다면, 이러한 된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주의 은헤의 해를 전파하려 하려 하심이다.  
=> 이사야의 선포한 말씀의 일부인 “이방인들"의 그들의 “귀”와 “혀”가 구원의 시대에 복음을 듣게 되고 말할 수 있게 되었음을 선포하고 있다.


cf. 눅 4장 19절“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36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아이러니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게 그렇게 되지 않는가 봅니다.
   하늘의 자원을 공급받는 인생들의 삶이란 -> 하나님의 놀라운 신비를 맛본 사람들은 그것을 내 안에만 간직할 수 없는 것이다. 누구든 만나서 이 영적인 은혜를 나누고 싶어한다. 만나서 이 놀라운 은혜를 전하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 은혜를 맛 본자만이 알 수 있도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되는데, 예수님이 경계하며 할수록 더욱 더 강하게 그 예수님의 명령을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참고) 막 1:44절 나병환자를 고치실 때와 5:43절에서 회당장의 딸을 고치실 때.
예수님이 경계하면 할수록 더욱 “그들이 더욱 널리 전파하니"인데, 여기서 시제는 미완료시제입니다. 이는 활동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37절 “사람들이 심히 놀라 이르되”
=>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반응입니다. 그들의 반응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찬양하고 있으며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37절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다시한번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37절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나라"
 예수님이 진정하신 일은 육신의 나음을 넘어서는 영적으로 못듣는 사람을 듣게 하셨고 영적인 말 못하는 사람들에게 영적인 말을 하게 하신 것이다.
난 지금 영적인 말을 듣고 있는가? 세상적인 말을 듣고 있는가? 나는 지금 영적인 말을 하고 있는가? 세상적인 말을 하고 있는가?
내가 지금 무엇을 듣고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가 내가 지금 하늘로부터 공급된 자원을 공급받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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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 (하늘의 문을 여소서)


하늘의 문을 여소서 이곳을 주목하소서
주를 향한 노래가 꺼지지 않으니
하늘을 열고 보소서


Open the doors of Heaven Keep your eyes on this place
My songs for you My Lord Will never fade away
Open wide the doors of Heaven


이곳에 임재하소서 주님을 기다립니다
기도의 향기가 하늘에 닿으니
주여 임재하여 주소서


Come with your Holy Spirit I'm waiting for you my Lord
Fragrance of my prayers Will reach you in Heaven
Holy Spirit come meet in this place


이곳에 오셔서 이곳에 앉으소서
이곳에서 드리는 예배를 받으소서
주님의 이름이 주님의 이름만이
오직 주의이름만 이곳에 있습니다.


Come in this place My Lord Come and sit among us, Lord
Come and receive my Worship All my heart and all my Soul
The Name of you my Lord Only the name of you Lord
Jesus your sovereign name is the only name that reigns here.

한 날 묵상 - 막 7장 24-30절 <수로보니게 여자의 믿음 - ‘예수님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좋습니라’는 믿음을 갖기까지>

한 날 묵상 - 막 7장 24-30절 <수로보니게 여자의 믿음 - ‘예수님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좋습니라’는 믿음을 갖기까지>

1. 정말 예수님이 좋은가? 무엇으로 어떻게 예수님이 좋다는 것을 보일 수 있을까/

2. 세상에 좋은 것은 많다. 마음 빼앗길 것들이 많다.

3. 형식으로 예수님이 좋다는 것을 보이기는 쉽다. 정말 쉬운 것 같다. 신앙생활만을 보고 그 사람의 신앙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4. 이러한 마음의 진실함이 없는 신앙은 전통이 되기 쉽다. 변화를 하려 하지 않게 된다. 신앙이 돌처럼 굳어져 버려 생명력이 없어 버리게 된다.

5. 예수님은 전통에 매여 살던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버린 후 쉼을 위해 거기를 떠나 한적한 곳에 가기 원하셨다.
24절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6. 예수님은 좀 숨기 원하셨다. 쉼이 있어야 했다. 적절한 쉼은 다음 사역의 큰 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7. 그런데 쉴 수 없으셨다. 24절 “쉼길 수 없더라”

8. 쉬어야 하지만, 그렇다면 찾아오는 사람까지 멀리 할 수 없다. 적절한 예를 누가복음 11장 5-13절까지의 말씀이다.
8절 말씀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9절 “내가 또 너흐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9. 바로 이 간청함에 해당되는 여인이 오늘 본문의 수로보니게 여인입니다.

10. 수로보니게 여인에게는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이 있었습니다. 이 딸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11. 그리고 그녀는 예수님을 찾아 나서게 되고, 예수님은 자신을 찾아온 그 여인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12. 예수님의 상에서 부스러기라도 얻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정이 가득해야 합니다. 그 마음이 간절해야 합니다.

13. 예수님을 찾고자 수소문한 여인은 예수님을 찾게 되고 예수님 앞에 나아가게 됩니다.

14. 이어지는 여인의 행동을 보겠습니다.
15. 25절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26절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기를 간구하거늘"

26절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참고> 마태복음 15장 22절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 다윗의 자손 예수는 누구신가? 막1장 1절. 마 1장1장. 제대로 알고 었었다. 구세주.
->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께 간구한다는 의미는 나를 불쌍히, 긍휼히 여겨달라고는 고백이다. 기도는 기도제목의 응답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긍휼이 여김 받기 원하는 것이 기도이다.  

=> 자기의 병이 아니라. 딸의 병 낫기를 구함. 예수님은 뒤에서 보듯 이 여인의 간구를 들어주심.
이는 마가복음 2장 1-12절에 본 네 사람이 중풍병자를 메고 예수님께 나아오는 믿음과 같다.
=> 누구의 간구이든 귀 기울이시는 예수님. 나를 위한 기도 뿐 아니라 이웃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16. 여인이 들었던 소문이 많습니다. 아이들 살리고자하는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연인이 들었던 소문이 보겠습니다.

17. 마가복음 6장 53-56절 게네사렛에서 병자와 똑같은 행동입니다.
 “알고 … 듣는 대로 … 나아오니 .. 간구하니”
 자기가 해야 할 행동지침이 되는 예수님의 소문을 기막히게 들었습니다.
18. 또한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그녀에게 그것은 큰 축복이었습니다. 얼마나 잘 알고 있었는지 이어지는 예수님의 대화를 보면, 앞서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 오천명을 먹이시는 기적과 막 7장 1-23절의 장로들의 전통의 문제, 즉 마음에 관한 대화까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에 대하여 전해 듣기 시작했습니다. 병자를 고치신 능력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오천명이 먹이시고 남은 부스러기가 12 광주리가 남았다는 기적도 듣게 되었습니다.)

20 .이렇게 잘 알고 있었던 여인은 어린 딸의 문제 해결은 오직 이 분께만 있다는 믿음과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21. 지금 무슨 소문을 듣고 계십니까? 지금 무슨 소리를 듣고 계십니까? 마음을 온전히 주님께 드리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 들어야 할 것을 듣고 있어야 합니다.

22. 그런데 예수님의 표면적인 대답은 상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여인의 자존심을 건들기까지 하는 모습입니다.

23. 2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4. 여인은 지금 예수님께 개취급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심해야 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본 것을 우리도 봐야 합니다. 그녀가 본 것은 무엇이었나요?

25. 2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입니다. ‘먼저'라는 말에 주목했습니다.

26.  “먼저”라는 말은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만의 것이 아님을 나타내고 있다. 로마서 1장 16절의 말씀을 보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27. 먼저 집중했기에 자신에게도 먹을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신에게도 구원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인 “개"에 집중했던 앞에 나와 있는 그 귀한 말씀을 놓치고 예수님을 떠나 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분명히 집중해야 할 것에 집중할 줄 알았습니다.

28.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중해야 할 것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시할 것은 무시해야 합니다. 내 자존심이 좀 깍아 내린다 할지라도 집중할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29. 여인은 28절에서 이어지는 놀라운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30. 28절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31. 수로보니게 여인이 집중한 것은 예수님 한 분뿐이셨습니다. 이 여인은 오직 예수님만 보았습니다.

32. 수로보니게 여인이 본 예수님은 누구신가? ‘다윗의 자손’(마 15:22)이며 ‘주’(28절)이셨습니다  그리고.  여자는 앞서 예수님의 말씀 중 “먼저”의 의미를 놓치지 않았다.

33. 자기의 자존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자존감이다. 자존감이 자존심보다 더 낫다.

34. 여인의 마음. 주님 만을 바라보다. 간절함이다.

35. 여인의 이러한 외침은 사람의 마음의 자세가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긍극적인 조건임을 말하고 있다. 앞서 막 7장 15-23절은 마음에 관한 예수님의 선포하심이었다. 마음에 무엇이 담겨있는가?

36. 시편 123편 2절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37. 우리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기 원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볼 때 오는 자존심 상함도 뛰어 넘기를 원합니다.

38. 수로보니게 여인의 누린 은혜를 보겠습니다.
  29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마 14:28절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30절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은 나갔더라”

39.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좋습니라’는 믿음을 갖기까지 과정을 보면, 인내함으로 꾸준하게 예수님을 바라보고 나아갔을 보게 됩니다.

40. 난 지금 어떠한가요?

41.

===


24절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 예수님은 아무도 모르게 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숨을 수 없으셨다. 이는 빛은 감출 수 없다는 사실은, 빛을 찾으려 한다면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수 있게 한다.
빛을 찾으려 한다면, 빛을 만나 어두움을 물리치기 원한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25절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 마가복음 6장 53-56절 게네사렛에서 병자와 똑같은 행동이다. “알고 … 듣는 대로 … 나아오니 .. 간구하니”
소문을 기막히게 들었습니다.
=>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그녀에게 그것은 큰 축복이었습니다. 얼마나 잘 알고 있었는지 이어지는 예수님의 대화를 보면, 앞서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 오천명을 먹이시는 기적과 막 7장 1-23절의 장로들의 전통의 문제, 즉 마음에 관한 대화까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에 대하여 전해 듣기 시작했습니다. 병자를 고치신 능력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오천명이 먹이시고 남은 부스러기가 12 광주리가 남았다는 기적도 듣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잘 알고 있었던 여인은 어린 딸의 문제 해결은 오직 이 분께만 있다는 믿음과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 지금 무슨 소문을 듣고 계십니까? 지금 무슨 소리를 듣고 계십니까? 마음을 온전히 주님께 드리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 들어야 할 것을 듣고 있어야 합니다.

26절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참고> 마태복음 15장 22절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 다윗의 자손 예수는 누구신가? 막1장 1절. 마 1장1장. 제대로 알고 었었다. 구세주.
->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께 간구한다는 의미는 나를 불쌍히, 긍휼히 여겨달라고는 고백이다. 기도는 기도제목의 응답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긍휼이 여김 받기 원하는 것이 기도이다.  

=> 자기의 병이 아니라. 딸의 병 낫기를 구함. 예수님은 뒤에서 보듯 이 여인의 간구를 들어주심.
이는 마가복음 2장 1-12절에 본 네 사람이 중풍병자를 메고 예수님께 나아오는 믿음과 같다.
=> 누구의 간구이든 귀 기울이시는 예수님. 나를 위한 기도 뿐 아니라 이웃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2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 “먼저”라는 말은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만의 것이 아님을 나타내고 있다. 로마서 1장 16절의 말씀을 보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28절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본 예수님은 누구신가? ‘다윗의 자손’(마 15:22)이며 ‘주’(28절”이셨다.
=> 여자는 앞서 예수님의 말씀 중 “먼저”의 의미를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 자기의 자존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자존감이다. 자존감이 자존심보다 더 낫다.
=> 여인의 마음. 주님 만을 바라보다. 간절함이다.
=> 여인의 이러한 외침은 사람의 마음의 자세가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긍극적인 조건임을 말하고 있다. 앞서 막 7장 15-23절은 마음에 관한 예수님의 선포하심이었다. 마음에 무엇이 담겨있는가?

=> 시편 123편 2절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29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 마 14:28절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30절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은 나갔더라”